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7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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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II불타는 연꽃

 

가운 바다 위

뒤집혀 가는 배

선장도 항해사도

제일 먼저 탈출했건만

가만히 있으라 방송하고선

제일 먼저 꽁무니 뺐건만

경찰들 멀거니 지켜보고

목숨보다 귀한 그 추한 것 챙기느라

다급히 달려온 무수한 이들마저

모두들 쫓아보냈건만

세상의 한다한 이들

그 속 알 수 없는 이들

지켜보는 가운데

300명 여린 목숨 스러져 갔건만

구명조끼조차 챙기지 않고

여린 목숨 구명에

목숨 건 이들 있었네

어서 내 손 잡아라

구명조끼 너부터 입으렴, 너부터 올라가렴

그들의 마음

얼마나 뜨겁게 불타 올랐을까

얼마나 뜨겁게

그대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찬 바다 위 연꽃으로 피어오르네

빙하보다 얼어붙은 한국호에

불타는 연꽃송이들 피어오르네

얼음을 뚫고

작고 여린 몽우리들 남김없이 이끌고

얼어붙은 가슴에

불타는 연꽃잎 날아내리네

이곳 저곳 남김없이

태우고 또 태워

온세상 불꽃바다

그대들 목숨으로 지핀 불꽃

이제 우리 지켜내야하리

이제 우리 스스로

불꽃이 되어야 하리

싯푸르게 일렁이는 죽음의 물결

목까지 차올라도

그 두려움조차 넘게 할

그대들 불타오르는 연꽃

우리 심장 속에 타오르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6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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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어둠 I

 

죄어 드는 두려움이 화면 가득 넘실거립니다. 크리스티안 롤프스가 그린 “포로”라는 그림입니다. 세상의 온갖 위기 중 아마 첫째 부류에 전쟁포로가 들어있을 것입니다. 어떤 취급을 당해도 호소할 곳 없는 불안한 처지, 죽음을 당한다 해도 저쪽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끝나 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이 너무도 리얼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저 큰 눈 속으로 두려움의 시커먼 터널이 수십 킬로미터, 끝모르게 달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바짝 말라 뼈만 남은 몸과 광대뼈 불거진 얼굴은 굶주림으로 시달렸을 고통의 순간들이 절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의 큰 눈 속 담긴 그리움은 그대로 넘쳐 흘러 홍수로 밀려올 듯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눈을 바라보는 이는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살고싶지 않은 처절함을 견뎌내게 해주는 유일한 보루인 듯 합니다. 응답없는 상황, 나의 미래가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 알 수 없는 그 두려움은 그 자체로 인간을 옥죄는 괴물입니다. 쇠창살을 꽉 그러쥔 그의 손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그 괴물에 대한 분노를 어디에도 터트릴 길 없는 절박함으로 떨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과 고문으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그런데 그림을 한참 보고 있자니 두 가지 점이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가지는 쇠창살의 틀이 굉장히 넓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몸과 쇠창살에 흰색이 빛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검은 배경과 짙은 고동색의 포로의 몸 색깔로 인해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옥죄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이 너무 강해 상당히 강렬한 테두리 흰색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 흰색은 화가가 검은 배경 속에 이 포로가 묻히지 않게 하고 싶어 택했던 수단일까요? 아니면 좀 더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요? 화가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지만, 작품은 보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재창조의 해석을 할 수는 있지요. 저에게 이 흰빛은 희망의 빛으로 보입니다. 캄캄한 어둠과 쇠창살 속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빛 오히려 어둠 속이기에 더욱 선명한 빛 그러나 이 빛은 아직 그의 두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지만 아직 그의 속은 캄캄함 뿐입니다. 심지어 쇠창살도 그가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크기입니다. 여기서 이 감옥은 포로의 감옥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감옥, 이 시대의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침몰한 우리나라, 그 자체가 감옥이 아닐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탄식해마지 않는 돈과 발전에 대한 맹신은 이제 우리를 꽁꽁 묶는 쇠창살이 되고있습니다. 인간이 유한하기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발전도 돈도 유한한 법. 그런데 마치 발전 위에 발전을 쌓으면 어디까지라도 발전할 수 있는 듯 믿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이 세월호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어들어 있습니다. 이 어둠의 검은 면 위를 감싸고 있는 이 빛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그림의 포로처럼 자신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쇠창살 속에서 망연자실 저 먼 곳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엄청난 희생을 헛되게 한다면 우리는 다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요? 악은 창조를 부르지 않고 파괴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슴 펼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이 사회를 만드는데 한몫을 했기에 누구나 책임감을 느끼고 함께 손잡고 나설 때만 이 사회의 어둠 위에 떠오른 참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빛이 떠오릅니다. 외면하지 말고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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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죽음의 공포

 

라 초상화입니다. 이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아마도 이해되지 않을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십년 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들만 전시된 방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방 가득 미라들만! 그런 방이 몇 개나 되었던지? 이어진 여러 개의 방들 속 그 수많은 미라들, 으스스 썰렁했던 것은 죽은 몸들로 꽉 차 있는 느낌도 물론 있었겠지만, 영원히 살겠노라 온갖 처리 다해서 뉘여 놓았건만 바다 건너 이국까지 끌려와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 노출될 줄 죽은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루브르만이 아니라 영국 국립박물관에는 여기 못지않게 더 많은 이들을 고이 모셔 놓았다(?)고 하네요. 이집트 박물관은 물론,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덴마크 국립박물관 그리고 스웨덴 국립 박물관에도 미라들이 있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미라들이 있을지? 아마 조사해보면 이보다 더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루브르에 누워있는 혹은 가끔 세워놓은 수많은 미라들은 거의 해골에 가까운 모습이라 키 외에는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좀 망측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것 저것 구별하기 어려운 바짝 마른 명태, 더도 덜도 아닌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미라 여인의 초상을 보았을 때(보통 미라와 함께 초상화도 넣었다고 한다.) 그 바짝 마른 모습과는 도무지 연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저 큰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꼭 다문 입 때문에 눈에서 말하는 것이 더 강하게 전달되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그녀를 그린 화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영원히 살기를 갈망하고 죽은 몸마저 보존했던 이들의 가슴에 타올랐던 불꽃,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은 세대를 불문하고 누구의 가슴에나 타오르는 불일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있는 불로초 찾는 임금, 진시황은 기원 전 259년경에 태어난 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묘하게도 이 그림 또한 기원 전2-3세기 경 그려졌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 이집트와 중국에서 함께 타올랐던 그 불은 지금 우리 각자 안에도 타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신도 별 것 아니라 큰소리치는 지금까지도 진시황의 불로초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미라와 불로초는 어쩌면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보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삶에 대한 집착만큼 영원한 생명과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방부제로 썩어 없어지는 것을 영원히 막고, 불로장생하게 해줄 약초를 구한다 한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축복일까요?
이 여인의 눈빛에는 표현하기 힘든 두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인의 눈빛일 수도, 화가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둘 모두의 것, 우리 모두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긴낫을 휘두르고, 검은 두건 속에 자신을 감추면서도 교묘히 자신을 슬쩍 보여주는 검은 죽음의 사신 앞에 오싹함으로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는 그것을 잃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이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대로 나만 복되게, 온갖 것 소유하며 길게길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의 생명,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임을 믿는 이의 행복, 배짱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4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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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힘, 생명 보이시나요?

 

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 석 창우 화백의 그림과의 첫 대면, 설명이 필요없이 그대로 마음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 생명이라는 말이 이렇게 찰떡같이 붙는 그림, 만나기 쉽지 않지요. 이 화백의 모든 그림은 의자에 앉은 사람을 묘사한 것마저도 날아오를 듯 합니다. 이 힘, 이 생명력! 저기 저쪽에 있어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힘참이 아니라, 내 안에까지 들어와 나에게 말을 거는 생명력입니다. 자신 안에 갇힌 자기만족의 힘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열린 힘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분이 두 팔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놀라움 그리고 잠시 후 “그래 그렇구나! 삶의 여정이 그대로 휘몰아쳐, 가야 할 마지막 지점 그곳, 그분, 사랑의 하느님을 만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22,000볼트 전기감염으로 12번 수술 후 두 팔을 잃게 되었을 때 이분의 아내는 “이렇게 되었으니 살림은 내게 맡기고 당신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4살 된 아들이 팔 없는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나요. 아빠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것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주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는 마음에 들어오는 화가가 있으면 우선 그분의 삶부터 살펴봅니다. 그러면 그림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내가 그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말을 걸어옵니다.
아내와 아들, 가족 서로간의 사랑을 통해 이분은 이전과는 다른 새생명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팔보다 더한 참생명, 부활의 생명, 사랑의 생명은 죽음도 상처도 장애도 결코 눌러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분의 삶 자체가 이 부활의 생명, 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림은 이 생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과 가족의 삶은 이 뛰어난 그림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 안에서 빛과 힘, 생명을 발하십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3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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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걷다 보면

 

15C

한스 히르츠의 그림입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습니다. 얽히고설키어 마치 맹목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가는 벌레들의 무리같이 느껴지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일까요? 분기탱천하여 “예수”라는 공공의 적을 한 마리 짐승처럼 끌고갑니다. 너도 나도 서로 끌고가겠다고 아귀다툼,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할 것 같습니다. 창과 칼, 쇠못 방망이까지 동원하고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나섰는데, 대체 무엇을 무찌르겠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 일을 이끌어 가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뒤에 숨은 것일까요?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일까요?
베드로의 모습 또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꿈틀거리는 무리 위에 허망하게 올라타고선 작은 칼로 한 병사의 귀를 자르고 있습니다. 손이나 급소도 아니고 겨우 귀정도 자르느라 저리 애쓰고 있네요. 잘 알다시피 예수는 베드로의 이 두려움을 무릅쓴 격분을 부추겨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잡혀갑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저항없이 끌려가는 모습의 예수를 그린 듯합니다. 폭력, 분개, 증오, 두려움 그리고 그림 밑에 숨은 야욕, 음모, 욕망, 거짓, 질투가 들끓고 이 모든 것들이 무겁게 짓누르며 밧줄에 묶인 몸 움직이기도 버겁지만 저항도 불평도 없이 그렇게 자신의 길, 남들이 끌고 가는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파리한 하늘 아래 나무 한 그루가 낙엽 한 장 없이 새파랗게 떨고 있습니다. 폭력, 분노, 증오, 음모, 살의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사람들, 과거 역사 안에서나 지금 현대에나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하소연, 울부짖음, 저항, 정당한 싸움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세상에는 테러, 내전, 살인, 원한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매일 같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해도 당해도 물러서는 법 없고, 폭력 앞에 폭력 한 번 써보지 않고 바보처럼 또 당하는 가난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힘없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밀양, 강정의 할머니들 이 추위에도 물러서는 법없이 참 용하고 장합니다. 그렇게 당해도 폭력 한 번 쓰지 않는 바보 같은 분들 정말 대단합니다. 누군들 베드로처럼 칼 휘두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칼은 더 큰 칼을 부릅니다.
실패해도 조롱을 받아도 불이익을 당해도 명예에 먹칠을 당해도 끝까지 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 같습니다. 걷다 걷다 보면 승리조차 잊고 그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처럼…. 저 무력한 예수를 따르고 싶습니까?

 

<     욕망의 열차     >

화정도 내는 것 뭐 어때?
세상 천지 화 안내는 사람 있어?
질투? 좀 치사하고 내 속도 끓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 없잖아?
그래서 사람한테 몰래 해코지도 해봤어
뭘 어쩌라구? 나만 그래?
내 안에도 욕망 들끓어, 질 순 없잖아?
욕망의 열차 타지 않고 세상 어찌 살겠어?
잡아당겨내리고 밀치고 밟고 누르고
당하기 전에 먼저 한 방 먹이고
옆에도 뒤에도 온통 법석이야
그래도 내 앞에만 서지마

꿈틀거리는 욕망의 열차
바다로 돌진하지 않는 건
그 밑에 눌려
미크론씩 걸음을 떼는 사람의 아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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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되어 행복하다네

 

자가를 대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신앙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십자고상을 옆에 두는 것도 꺼림칙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까이 하면 고난, 불행 같은 것이 자신에게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덮친답니다. 반면에 어떤 성인들은 단식과 고행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행으로 몸을 혹독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살펴봐야 할 것은 십자가를 고행과 고통, 불행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오직 고통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에 벌을 주는 무서운 하느님, 이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 앞에 인간은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보기에 세상 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몹시 부정적이고 편협해지기 쉽습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 아빠의 결코 끝이 있을 수 없는 사랑의 체험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이런 영성을 살아가는 수도자는 장중하고, 근엄하며 쉽게 독재자가 됩니다.

반면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 하느님 아빠와 예수님의 온전한 일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일을 피해야할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불운 속에서도 운명의 여신의 장난질에 성난 바다 위 쪽배같이 까불림 당하지 않습니다. 굳이 십자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생에 고난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고난의 시련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유가 아닐까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꼭꼭 못박혀 있으면서도 마치 날아갈 듯한 자세입니다. 못박힘 당한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고통, 아픔, 슬픔, 절망이 이런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정에는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슬픔과 아픔이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저 아픔을 보노라면 자유란 오직 사랑을 위한 것, 그래서 어쩌면 자유란 저렇게 매달리는 것, 악의 추함, 부패, 부정을 와장창 힘으로 부수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 사랑의 고통으로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란 오직 사랑하기 위한 것, 사랑은 어쩌면 무력함을 배우고 깨닫기 위한 것,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가 되나봅니다. 바보가 되어 행복한 것-이것이 사랑의 비밀 아니겠는지요.

 

<     새로 얻은 바다     >

바위 앞에서

멈칫거림 없는 파도

부딪쳐 포말로 산산이 흩어져

바다임을 상실하는

앞서가던 파도의 몰락

사랑의 눈짓마냥 강렬히 당기는

힘에 끌려

그대로 자신을 놓아버리네

포말의 자유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싱그러움

새로 얻은 바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월의 말씀

불꽃과 불꽃이 만나

 

갈의 그림입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샤갈 특유의 색깔이 분명하여,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샤갈의 그림은 알 수 없는 기호같은 표현들이 넘쳐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넘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이렇게 절절하게 그러면서도 상큼, 우아하게 표현한 그림은 앞으로도 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클림트의 “키스”를 보면 애절하리 만큼 열렬한 포옹임에도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게 만듭니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 위태한 절벽 끝에서 마치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듯 바늘 구멍 하나 없이 밀착해있지요. 그런데 이 그림의 두 남녀는 시원스럽게 적당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여인은 이제 곧 바닥에서 떠오를 듯한 자세이고, 남자는 이미 무중력 상태인 듯 자신을 잊고 오롯이 여인과의 입맞춤의 황홀경에 빠져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이 두 사람의 자세가 클림트의 그림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불안한데도 보는 사람에게는 불안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두 사람의 옷 색깔도 같은데, 여기서는 남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각자의 널럴한 자유가 결코 두 사람의 일치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춤을 추는 듯한 자유로움과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일치가 서로 너울거리며 오락가락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샤갈의 그림은 두 남녀의 한없이 고상하고, 그지없이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담는데서 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유명한 그림들의 상쾌 발람함, 화가로서 일찍 이름을 떨친 행운아, 아름답고 지적인 부인과의 동화같은 사랑, 상징들로 가득한 난해한 그림, 이런 것들이 샤갈의 겉으로 본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살짝 들여다 보면 이 그림들의 인상과는 참 다른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러시아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몰려나 유대인들끼리만 살도록 정해진 차별구역의 어두컴컴한 골목, 가난한 가정, 신심깊은 사람들, 그의 유년시절은 색깔로 말하자면 회색빛에 가까운 듯 합니다. 결혼도 부인의 열정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가난하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젊은 화가가 부유한 보석상의 사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주변에는 유대교 신비주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이런 유대교적 분위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는 아마도 아가의 신랑과 신부 이야기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사랑 놀음보다 더 열렬하고 치열한 하느님 사랑의 구애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유대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의 고난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유대교로 남아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분명 일차적으로는 열렬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불꽃은 더 강렬히 타오르고 있음이 볼 줄 아는 이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불꽃을 품고 있지만, 남녀간의 열렬한 사랑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것을 이 지상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열렬한 사랑으로 응시하며 애타게 그 응답을 기다리시는 짝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 불꽃이 활활 타올라 불꽃과 불꽃이 저렇게 훨훨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