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9월의 말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루살렘 성전에서 사흘 뒤에야 아들 예수님을 찾으신 어머니는 놀라며 말씀하십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고 도움이 어디서” 오려는지 목이 탈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허공으로 흩어지고 사랑은 떠나고 낭패와 절망, 고통만이 앞을 가로 막을 때 “하느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모든 일을 먼저 겪으시고, 위로는 물론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하신 성모님이 계십니다. 그분께 배웁시다. 답을 당장 찾으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일어난 일들을 곰곰이 되새기면 주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셨고, “다른 선물”을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크든 작든 한 번쯤은 겪어 본 체험입니다.

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버림받으신 것 같은 이때, “여인이시여”라고 부르며 당신의 어머니마저 내어 놓으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죽음처럼 강한 사랑”을 잃은 자리를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버림받으신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버림받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꿰찔린 영혼의 고통을 안고 성금요일 칠흑의 어둠에서 파스카 새벽까지의 “성토요일”을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당신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널 수 있도록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신” 주님처럼 상실과 부재의 엄청난 무게를 밤새 온종일 그렇게 밀어내셨을까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성토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어둔 새벽의 하늘을 열어젖히고 전혀 새롭고도 놀라운 “주간 첫날”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낙담하고 패배감에 빠진 이들, 두려움에 휩싸여 문을 잠그고 숨은 이들, 사랑을 찾다가 지친 이들, 절망과 의심에 갇힌 이들과 함께 “위층 방”에 계십니다. 자신과 아들을 버리신 바로 그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토닥거리고 먹이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신 기억의 말씀과 사랑의 기억을 나누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성모님께서는 과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현재는 사랑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며, 희망의 내일을 열어 주십니다.

머니 성모님께 다가가 배웁시다. 그분은 위로와 도움만이 아니라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 운명”에 기쁘게 동참케 하십니다. 우리들 안에서 사랑이 되살아날 때까지, 그 사랑이 우리를 온전히 소유할 때까지 “나의 천막 터를 넓히고, 내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칠”수 있도록(이사 54,2) 겸손하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낮아짐, 버림받음, 비천함의 신비에로 초대 하십니다.

상, 사람, 피조물들에서 – 노동자의 등에 피어난 소금꽃, 버려진 쓰레기에서 재활용품을 분리, 수거하는 손, 수정성당 제대 꽃꽂이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은 어느 수사님의 얼굴, 잼공장 가는 길을 가로지르며 우리와 눈을 맞추는 다람쥐 –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오롯이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또 다른 마리아를 만나는 순간은 행복합니다.

 

15c. 쾰른, 월 라프-리츠츠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