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4월의 말씀

가슴에 묻힌 씨가 꽃피리라 

“정

녕 하느님께서는 좋으시도다.”(시편 73)라고 시편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고백은 신앙마저도 잃을 만큼 영혼 안에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왜 “좋으신 하느님”께서 마음 깨끗한 이들, 올바른 이들이 죽음에까지 내몰리는 절망과 부조리를 보고만 계시는지 예언자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날마다 고통이나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수도원 길섶, 꼭 그 자리에 봄 풀꽃이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렇듯이 4월이면 “세월”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깊은 강물같은 아픔이 출렁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 다가가 손이라도 잡으면 온 몸에서 눈물이 바람에 마주 선 꽃잎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지만 그 어떤 것도 무의미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더 가난하고 아프고 더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폭력을 옷 입은 이들” “교만한 이들”이 오히려 잘 사는 암울한 세상,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겨자씨만큼의 작은 희망을 붙잡고 함께 일어서게 하여 주십니다. 억울한 고통과 죽음 앞에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라며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나누고자 연대하는 선하고 마음 따뜻한 이들과 진리를 찾는 이들을 모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이들의 희생은 하느님과 세상을 더 가깝게 이어주는 길이 됩니다. 그 길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세 여인은 성 금요일의 통곡과 어둠을 침묵의 가슴에 묻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마르 16장).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세 여인이 바라보는 곳은 절망의 깜깜한 무덤 안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놀랍고도 새로운 빛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눈부시고 두려워 아직은 보아도 알지 못하지만, 곧 믿고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갔다가 그대들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그대들을 다시 보게 되면 그대들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시편 예언자는 괴로움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며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3). 주님께서는 이 행복에로 우리를 매일 초대하십니다.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우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희망하신 대로(pro spere) 이 땅에 당신 번영(prosperity)의 꽃을 피우소서. 저희가 주님의 향기가 되어, 영원에 이르는 생명의 신비를 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성당 제대 꽃꽂이 윌리엄 아돌프 부기로 (1825- 1900) <무덤을 찾은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