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3월의 말씀

언제까지
까닭없이

“주

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번민을 제 마음에 날마다 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시편 13). 시편 예언자의 고통이 육체적 질병인지 약자가 겪는 사회 구조적 불평등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친구, 가족, 배우자로부터도 이해는커녕 오해받고 질책당하고 버림받아,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는 소외감 때문이지요. 이것은 하느님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잊힐 것 같은 절망감입니다.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2장).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살피시던 날들”(욥 29,2)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품은 채 하느님의 말씀을 재촉하며 침묵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욥 31,35).

“까닭없이”(욥 9,17) 상처는 더하여지고 숨 돌릴 틈조차 없지만 욥의 부르짖음은 절망의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헐벗은 채 버려진 이, 덮을 것도 없는 가련한 이, 불의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과 연대합니다. 유죄를 인정하고 용서받으라는 친구들의 거짓된 위로와 회유, 술책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창세 6,6)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갈 의롭고 흠 없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한 여인을 알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부서진 몸을 끌어안고 시커먼 흙 속에 파묻힌 진실을 밝혀 드러낸 어머니. 그녀는 폭풍치는 눈물의 강을 거슬러 “또 다른 용균이들”의 어머니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무죄한 이의 고통은 결코 “까닭없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시편 13,4).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며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홀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께 나아가 자신 안으로 어머니를 맞아들이면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희 선조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고 당신을 신뢰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 감추지 않으시고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리라.”(시편 22).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아내에게 조롱받는 욥>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2월의 말씀

영원을 만지다.

“너

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말라 3장). 애타게 기다리던 주님, 성전이신 바로 그분께서 성전에 당신을 드러내실 때 성전의 기둥마냥 의연하게 굳건히 서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들, 천사의 소리에 순명하는 이들, 말씀을 위해 침묵하는 이들, 가난한 어둠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입니다. 향긋하고 좋은 포도주는 입술을 적시고 입 속으로 흘러들 듯(아가 7장), 의롭고 경건한 시메온의 질긴 그리움은 마침내 바로 그 곳에 닿았습니다. 성령 안으로 이끌린 그는 “하느님의 약속, 임마누엘”께 두 팔을 어좌로 내어드립니다. 시메온과 안나, 이미 육신의 눈은 흐려졌으나 한계 안으로 들어오시는 영원의 깊은 심연을 응시합니다. 올곧게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눈은 위로의 빛으로 밝아져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오늘, 구원의 큰 빛을 내 눈으로 보노라.”(루카 2장).

사부 베네딕도는 “수도승은 비록 자기 부모로부터 어떤 물건이 보내왔더라도, 먼저 아빠스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감히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소유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서원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승들은 몸과 마음을 원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린 후, 이제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도록, “주님의 뜻”을 지니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지요. “제 영혼 전부를 쏟아내어 당신께 감사드리며 거룩한 서원을 발하면서 저를 온전히 당신께 맡깁니다.”(복녀 가브리엘라). 하루하루 서원을 채워가노라면 때론 엎어지고, 오롯이 서 있는 그들 이름을 부르며 전구를 청합니다. 성전 마룻바닥, “놀랍고도 새로우며 낯선 영원의 순간에 접촉한 그날, 종신서원 부복”의 은총과 공동체 자비의 그릇으로 샘물을 퍼 올립니다. 여전하나, 새로워진 일상을 열고 닫으며 설렘과 두려움, 떨림을 회복합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어느 날, ‘나는 누군가의 모든 것일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의 날선 칼날에 마음도 정신도 찢겼습니다. 고개 들어 시메온의 예언(루카 2,35)을 듣는 성모님을 바라봅니다. 꿰찔린 영혼은 침묵 안으로 들어가고, 흔들림 없는 어머니의 겸손 앞에서 나의 교만은 흩어집니다. “너는 주님의 전부이며 주님 또한 너의 모든 것이란다.” 내 손을 당신 가슴의 눈물로 씻어 주시고 영원을 만지게 하여 주십니다. 함께 다시 걷게 하십니다.

두초(Duccio di Buoninsegna) 14C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월의 말씀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

님, 저의 힘이시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18). 고백을 받는 이는 행복하겠지요. 허나 더 큰 행복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음이 그것입니다. 또한 그 고백이 받아들여졌다면 온 세상을 얻는 기쁨이겠지요. 그런데 “나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나”를 이미 먼저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면!

새로운 한 해, 동녘의 햇살이 비치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낮은 곳으로 마음을 움직여 땅을 느끼고,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일출의 하늘이 아직 캄캄하고, 소외되어 배척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닫힌 문 안에서 떨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들이쳤으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시편 18). 구체적인 상황은 다를지라도 시편 예언자의 하소연과 울부짖음이 바로 그들의 통곡입니다. 주저앉은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소리 높여 주님을 부릅시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저를 버리지 마소서.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주소서.”(시편 27). “당신을 뵙고 싶어서 죽든지, 당신을 뵙고 나서 죽든지 상관없습니다.”(12세기 시토회 수도승 생 티에르 윌리엄). 예언자들과 우리보다 앞서 신앙을 고백했던 이들의 타오르는 열망은 하늘 구름이 되어 우리 위에 은총의 비를 내려줄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아픔에도 불구하고 스며드는 희망으로 마음땅이 따뜻해지겠지요. 삶이란 혼자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함께 사는 경이로운 선물임을 알아차리게 되지요. 함께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한껏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시편 81,11).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가 필요한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을 여전히 먼저 선택하시어 자애로이 바라보시고 꽉 껴안으십니다. 마음이 부서지고 고통 중에 넋이 꺾인 이들에게 아무런 이유없이 한계도 조건도 없이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말씀 자체이신 분께서 그러하듯 성경의 말씀 역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에 앞서 이미 그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복음, “기쁜 소식”인 것이지요. 믿음 안에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사랑으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시편 예언자와 함께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 정녕 당신께서 저의 등불을 밝히십니다. 저의 하느님께서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정녕 당신의 도우심으로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시편 18).

지거 쾨더(Sieger Köder,1925~2015)<하느님과 함께 성벽을 넘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2월의 말씀

하느님의 약속, 임마누엘

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보시니 그 빛이 좋았습니다(창세 1,3).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중 유일하게 “빛”만이 “좋다”라는 서술어를 가지고 있네요! 빛 중의 빛이 오늘 우리에게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 빛은 다른 빛들을 없애거나 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 곁으로 하나되게 모으십니다.

방에서 본 별(자연의 빛)이 박사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박사들(이성의 빛)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9-11).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박사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세상의 크고 힘있는 권력 앞에서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하여 변두리에 내몰린 “목동”들도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우리도 함께 달려가 빛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기억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배고픈 이들, 까닭없이 고통받고 아파하는 이들,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 삶의 의미를 모르며 절망 속에 사는 이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과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그 가족들을 가슴에 담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낯선 목소리에 귀기울여 마음을 열고 한 걸음 내딛고 먼저 손을 내밀면,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오늘”이 됩니다.

디 내 말을 들어라,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아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린 이다.”(시편 81,10-11). “나 이제,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너희를 지켜 주리라. 지키고 건져 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 31,5). 어느 신에게서 이렇게 애절하게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동구 밖에서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는 방법은 신적 사랑의 인내, 오직 “기다림”이십니다. 이제 그 기다림이 궁극에 달하여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함께 있겠다는 당신 자비의 약속은 돌봄, 베풂을 초월하여 입장의 동일화를 취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사랑이며 어둠을 밝힐 유일한 빛이십니다.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어 주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여. 저희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Champaigne, Philippe de <목동들의 경배> 1630 런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1월의 말씀

하느님의 눈물, 라자로

“어

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던 가난한 라자로가 죽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었다. 그가 저승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라자로가 아브라 함 품에 안겨 있었다. 부자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건너오지도 못한다.’는 말만 들었다.”(루카 16장).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드나드는 집 문 안과 밖, 참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건만. 눈감고 지나쳐버린 무관심이 보고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며 살았던 부자는 정작 필요한 한 가지, 하느님께서 부르실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좌정하여 있지만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한다.”(이사 57,15)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요청하십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네 자신(생명)을 내어주어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리라.”(이사 58장). 하느님은 멀리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보다 더 가까운 것도 없습니다.

갖 종류의 가까움으로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의 타자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먼 가까움을 느껴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만질 수 있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난민들, 억압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 –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장).
가난, 고통, 죽음에 닿은 라자로들을 보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나의 친구 라자로야, 일어나라.” 마침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라자로” 안으로 숨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 속에. ……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가톨릭 성가 404).
가장 겸손한 하느님 여종의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어머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 무관심, 무감각했던 마음을 회심시키는 눈물을 얻을 수 있도록.

눈물로 하느님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기를 성모님과 함께 기도 안에서 간절히 청합니다. 함께 우는 눈물에서 우리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노브고로드화파 / 러시아 / 16C초 <데에시스의 성모(일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0월의 말씀

하느님의 꿈

사랑 그 자체는 이미 앎의 시작

창한 숲 속에 누워 키 큰 나무들의 꼭대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늘에 닿은 가지들은 서로에게 햇볕이 잘 들도록 살짝 살짝 옆으로 자리를 양보하고 배려하여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놀랍도록 신비한 사랑의 질서입니다. 어느 나무의 잎들도 다른 잎에 내리는 햇볕을 탐내지 않고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이를 ‘Crown Shyness’(산꼭대기의 수줍음)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넉넉하며 한결같으신 사랑에 대한 피조물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조의 한 처음에 말씀하신 하느님의 아름다우신 꿈을 나무는 늘 기억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참 좋구나. 모두 모두 번성하여라.”

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너희는 나를 찾아라, 내 얼굴을 찾아라. 그러면 살 것이다.” 성모님께서도 하느님과 같은 꿈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께서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내치시리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꿈을 펼쳐 보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신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금 서간” 저자인 12세기 시토회 수도승인 생 티에르 윌리엄은 “사랑은 그 자체로 이미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만을 압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갈망하고, 갈망함으로써 찾고, 사랑함으로써 발견하고, 꿈꾸면서 하느님의 꿈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꿈꾸신 세상을 위해 봉쇄의 숲에서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도록 마련하여 주신 만큼 끊임없이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신뢰로써 당신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당신을 이해하며, 진실하게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언제나 당신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며 사랑하게 해 주소서.”(생 티에르 윌리엄). 우리가 꿈을 멈추지 않는다면 숲속 키 큰 나무들의 수줍은 사랑의 질서가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카리예 15c <물결을 다스리는 성모님(벨라꼬니띠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9월의 말씀

어머니의 품

“오

하느님, 당신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얼굴 위에 드러난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놀라운 당신의 은총!”(아틀라스 순교자 셀레스탱의 편지). 바다로 흘러가는 맑고 깊은 강물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결코 그 강에 시멘트를 쏟아 붓지는 못할 것이며, 폐수를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꿀을 빨면서도 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벌의 모습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타자를 넘어뜨리고 속이고 소외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요한 3장). 사람 사는 세상에 상식과 양심이 사라지고 절망, 불신앙 어쩌면 “악의 존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더러 일어납니다. 두려움, 불안이 밀려옵니다. “불안”이란, 하느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일 앞에서 그분께서 아직 움직이시기 전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나 개인에게나 “불안의 밤”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난 니코데모가 “밤”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도와 겸손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모릅니까? 내가 땅의 일을 말했어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습니까?”(요한 3장).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깊이 바라보며 작은 것들에서 경탄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고통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은 어미의 가슴이 창으로 찔리며 온 몸이 찢기는 바로 어미의 죽음입니다.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고통과 침묵”을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 피조물과 아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토닥여 주시고, 달래 주시고, 함께 우시면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밤의 니코데모들이여, 어머니 성모님께로 달려가 눈물로 어둠을 씻어냅시다. 그러면 서로에게 또 다른 “어머니의 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빈세트 반 고흐 <피에타(Pieta)> 1889 / 고흐 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8월의 말씀

천상 예복Deo Gratias!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

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9). 우리 수정 공동체는 지난 6월 24일, 창립자 중 한 분인 안드레아 수녀님을 수도원 안마당에 모셨습니다. 상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놀라운 선물에 감사드리며 기뻐합니다. 우리도 “영원한 전구자”를 맞이하였습니다. 하얀 십자가와 여름 들꽃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묘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복도에서도 볼 수 있고, 몇 걸음만 걸어 나가도 만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기보다 오히려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축복에로 더 깊이 초대하십니다. 잠시 “죽음”이 우리와 수녀님을 갈라놓았지만, 우리는 다함께 하느님의 얼굴 앞에 온전히 서 있었습니다. “영원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소서.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굉장히 먼 곳으로 떠나신 것이 분명하나 놀라울 정도의 특별한 유대로 가까이 계심을 느낍니다. 하늘의 새들도 우리 마음과 같아 안마당에는 온갖 새들이 새벽부터 모여들어 하느님 말씀을 렉시오(Lectio)하며 노래합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이제 아픔과 울부짖음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내 포도주를 마시구려.”(아가 5).

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말씀하신 후 성모님은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셨습니다(루카 1). 안드레아 수녀님은 1948년, 1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신 후, “가거라, 떠나라.”는 장상을 통한 주님 말씀에 따라 1986년 8월 6일 일본 천사원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67년간의 기나긴 봉쇄 수도자로의 일상, 언제나 모든 것에 “Deo Gratias!”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어린이처럼 참으로 투명하고 단순하셨기에 수녀님 앞에 서면 당황스럽고 부끄럽기도 했답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약해지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유일하며 영원하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新婦)! 모든 것 다 버리고 내려놓고 기도에 절여진 나무 묵주 손에 쥐고서 “주인이시며 아름다움을 열망하는 임금님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왕궁으로”(시 45) 들어가셨습니다.

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님을 분명하게 체험합니다. 죽음을 넘어 여전히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이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엘 그레코(1541-1614) <성모 승천> 1577 / 시카고 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7월의 말씀

그저 아름다운 이 아름다움이여!

절이 유난히 성큼성큼 앞질러 다가옵니다. 지난 봄날엔 산야초발효액을 담그기 위해 새순과 여린 야초(野草) 잎들을 뜯어 설탕에 재우고, 비누 재료로 사용할 어성초, 약쑥도 햇볕 잘 드는 곳에 두었더니 바람, 달빛, 별빛이 한 몫 거들어 잘 건조되었습니다. 바수고 고운체에 걸러 병에 담으니 넉넉합니다. 절로 신명나게 자라는 풀들이 참 고맙습니다. 봄날 아침, 수도원 경내를 다니며 채취하다보면 그저 걸음을 자꾸만 멈춥니다. 해 뜨면 사라질 이슬을 머금고 온전하게 충만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들풀과 함께 경탄하면서. 갈퀴나물에 벌레가 찾아오고 콩제비꽃이 하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면 야성(野性)을 잃지 않는 풀들은 곧장 숲을 이룹니다. 인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는 한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땅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매실 수확 후 키위밭 풀베기를 하는 날, 돌멩이 하나 툭 튀어 오르더니 무릎을 때립니다. 덕분에, 베어진 풀더미를 베개 삼고 누웠습니다. 키 큰 풀들 아래 숨어 있던 병풀잎이 싸한 향기로 얼굴을 건드리고, 바다를 굳혀 만든 하늘 귀퉁이의 구름자락이 나무 잎을 헤치고 내려오니 “주인”께 순종하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로움이 덮치는 듯. 아주 잠시 땅과 나, 하늘이 어디론가 함께 빠져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풀도, 흙에서 난 사람도, 구름도. 그러나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희망 속에 사랑의 눈물 속에 우리의 시간 한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풀, 흙, 사람, 하늘이 서로 서로 기대어 “우리”가 됩니다. 하나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니 더 이상 무상(無常)은 없습니다. 무상의 정지, 감히 영원을 맛보게 해 주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실용의 등급’과는 상관없이 마냥 있어주어 고맙고 그저 아름다운 것들은 눈물을 품고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 마리아’(마르 16장)도 모든 다른 제자들처럼 실패한 예수님을 버리고(마르 14,50)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녀는 아름다운 사랑을 얻기 위해 빈 무덤이 있는 황량한 정원에 홀로 서 있습니다. 어두운 절망과 고독 속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이 “닫힌 정원”의 문을 두드린 것일까요? “정원의 주인”(아가 5,1)께서 되살아나시어 “왜 우느냐?”고 하시며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빵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어 온 세상을 향하여 기뻐 외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여름입니다. ‘필요의 논리’에 저항하며 몸의 노동을 묵묵히 행하는 이들의 등에 소금꽃이 피고 있습니다.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며 “좋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소금꽃의 향기를 맡으십니다. 버림받아 밀려난 이들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십니다. 우리도 바로 그곳에서 함께 주님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 1638 런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6월의 말씀

놀라운 얼굴

해가 반 고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입니다. 일곱 번의 대축일, 어느 때보다 주님의 거룩함과 은총이 하늘 햇살처럼 쏟아집니다. 전례 안에 현존하시며 살아 계신 주님을 받아 모시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는 겸손한 고백을 환호로 터뜨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 기쁨과 슬픔의 씨줄 날줄이 큰 무리없이 잘 직조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구는 난데없는 돌풍을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이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후자의 처지에 있습니다(마르 4,35-41). 하늘과 바다가 한데 엉기어 거센 바람과 풍랑으로 이미 돛대는 찢어지고 물고기마냥 큰 입을 벌리고 놀란 배는 곧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후광을 쓴 제자들은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는데 한 제자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상황에 잠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도 주무시더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제자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나십니다. 태연하게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과 호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고요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안의 모든 것도 고요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우리의 깊은 심연의 공포, 불안, 두려움, 걱정의 자리 바로 그곳에 이미 생명의 샘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그분께 손을 내밀어 옷자락에 닿기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평화가 스며듭니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숨어버리신 듯 아무리 찾아도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다면, 달려가 그분의 새벽을 흔들어 깨웁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위험에 처한 우리에게 물위라도 마른 땅처럼 달리며 어김없이 오십니다. 허나, 놀라지 않도록 합시다. 도우러 오시는 주님께서는 힘센 사자나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라 심하게 상처입으시어 오히려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오십니다. “풍채도 위엄도 바랄 만한 모습도 없는”(이사 53,2) 바로 그 얼굴이 우리를 구원하는 얼굴입니다.

표지 사진 :독일 메셰데에서 나온 히타-고사본(1020년경)<바다 위의 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