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1월의 말씀

하느님의 눈물, 라자로

“어

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던 가난한 라자로가 죽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었다. 그가 저승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라자로가 아브라 함 품에 안겨 있었다. 부자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건너오지도 못한다.’는 말만 들었다.”(루카 16장).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드나드는 집 문 안과 밖, 참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건만. 눈감고 지나쳐버린 무관심이 보고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며 살았던 부자는 정작 필요한 한 가지, 하느님께서 부르실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좌정하여 있지만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한다.”(이사 57,15)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요청하십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네 자신(생명)을 내어주어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리라.”(이사 58장). 하느님은 멀리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보다 더 가까운 것도 없습니다.

갖 종류의 가까움으로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의 타자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먼 가까움을 느껴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만질 수 있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난민들, 억압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 –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장).
가난, 고통, 죽음에 닿은 라자로들을 보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나의 친구 라자로야, 일어나라.” 마침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라자로” 안으로 숨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 속에. ……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가톨릭 성가 404).
가장 겸손한 하느님 여종의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어머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 무관심, 무감각했던 마음을 회심시키는 눈물을 얻을 수 있도록.

눈물로 하느님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기를 성모님과 함께 기도 안에서 간절히 청합니다. 함께 우는 눈물에서 우리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노브고로드화파 / 러시아 / 16C초 <데에시스의 성모(일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0월의 말씀

하느님의 꿈

사랑 그 자체는 이미 앎의 시작

창한 숲 속에 누워 키 큰 나무들의 꼭대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늘에 닿은 가지들은 서로에게 햇볕이 잘 들도록 살짝 살짝 옆으로 자리를 양보하고 배려하여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놀랍도록 신비한 사랑의 질서입니다. 어느 나무의 잎들도 다른 잎에 내리는 햇볕을 탐내지 않고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이를 ‘Crown Shyness’(산꼭대기의 수줍음)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넉넉하며 한결같으신 사랑에 대한 피조물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조의 한 처음에 말씀하신 하느님의 아름다우신 꿈을 나무는 늘 기억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참 좋구나. 모두 모두 번성하여라.”

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너희는 나를 찾아라, 내 얼굴을 찾아라. 그러면 살 것이다.” 성모님께서도 하느님과 같은 꿈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께서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내치시리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꿈을 펼쳐 보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신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금 서간” 저자인 12세기 시토회 수도승인 생 티에르 윌리엄은 “사랑은 그 자체로 이미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만을 압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갈망하고, 갈망함으로써 찾고, 사랑함으로써 발견하고, 꿈꾸면서 하느님의 꿈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꿈꾸신 세상을 위해 봉쇄의 숲에서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도록 마련하여 주신 만큼 끊임없이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신뢰로써 당신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당신을 이해하며, 진실하게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언제나 당신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며 사랑하게 해 주소서.”(생 티에르 윌리엄). 우리가 꿈을 멈추지 않는다면 숲속 키 큰 나무들의 수줍은 사랑의 질서가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카리예 15c <물결을 다스리는 성모님(벨라꼬니띠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9월의 말씀

어머니의 품

“오

하느님, 당신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얼굴 위에 드러난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놀라운 당신의 은총!”(아틀라스 순교자 셀레스탱의 편지). 바다로 흘러가는 맑고 깊은 강물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결코 그 강에 시멘트를 쏟아 붓지는 못할 것이며, 폐수를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꿀을 빨면서도 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벌의 모습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타자를 넘어뜨리고 속이고 소외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요한 3장). 사람 사는 세상에 상식과 양심이 사라지고 절망, 불신앙 어쩌면 “악의 존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더러 일어납니다. 두려움, 불안이 밀려옵니다. “불안”이란, 하느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일 앞에서 그분께서 아직 움직이시기 전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나 개인에게나 “불안의 밤”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난 니코데모가 “밤”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도와 겸손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모릅니까? 내가 땅의 일을 말했어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습니까?”(요한 3장).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깊이 바라보며 작은 것들에서 경탄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고통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은 어미의 가슴이 창으로 찔리며 온 몸이 찢기는 바로 어미의 죽음입니다.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고통과 침묵”을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 피조물과 아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토닥여 주시고, 달래 주시고, 함께 우시면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밤의 니코데모들이여, 어머니 성모님께로 달려가 눈물로 어둠을 씻어냅시다. 그러면 서로에게 또 다른 “어머니의 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빈세트 반 고흐 <피에타(Pieta)> 1889 / 고흐 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8월의 말씀

천상 예복Deo Gratias!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

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9). 우리 수정 공동체는 지난 6월 24일, 창립자 중 한 분인 안드레아 수녀님을 수도원 안마당에 모셨습니다. 상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놀라운 선물에 감사드리며 기뻐합니다. 우리도 “영원한 전구자”를 맞이하였습니다. 하얀 십자가와 여름 들꽃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묘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복도에서도 볼 수 있고, 몇 걸음만 걸어 나가도 만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기보다 오히려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축복에로 더 깊이 초대하십니다. 잠시 “죽음”이 우리와 수녀님을 갈라놓았지만, 우리는 다함께 하느님의 얼굴 앞에 온전히 서 있었습니다. “영원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소서.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굉장히 먼 곳으로 떠나신 것이 분명하나 놀라울 정도의 특별한 유대로 가까이 계심을 느낍니다. 하늘의 새들도 우리 마음과 같아 안마당에는 온갖 새들이 새벽부터 모여들어 하느님 말씀을 렉시오(Lectio)하며 노래합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이제 아픔과 울부짖음을 거두고 꿀이 든 내 꿀송이를 먹고 젖과 함께 내 포도주를 마시구려.”(아가 5).

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말씀하신 후 성모님은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셨습니다(루카 1). 안드레아 수녀님은 1948년, 1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신 후, “가거라, 떠나라.”는 장상을 통한 주님 말씀에 따라 1986년 8월 6일 일본 천사원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67년간의 기나긴 봉쇄 수도자로의 일상, 언제나 모든 것에 “Deo Gratias!”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어린이처럼 참으로 투명하고 단순하셨기에 수녀님 앞에 서면 당황스럽고 부끄럽기도 했답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약해지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유일하며 영원하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新婦)! 모든 것 다 버리고 내려놓고 기도에 절여진 나무 묵주 손에 쥐고서 “주인이시며 아름다움을 열망하는 임금님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왕궁으로”(시 45) 들어가셨습니다.

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님을 분명하게 체험합니다. 죽음을 넘어 여전히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이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엘 그레코(1541-1614) <성모 승천> 1577 / 시카고 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7월의 말씀

그저 아름다운 이 아름다움이여!

절이 유난히 성큼성큼 앞질러 다가옵니다. 지난 봄날엔 산야초발효액을 담그기 위해 새순과 여린 야초(野草) 잎들을 뜯어 설탕에 재우고, 비누 재료로 사용할 어성초, 약쑥도 햇볕 잘 드는 곳에 두었더니 바람, 달빛, 별빛이 한 몫 거들어 잘 건조되었습니다. 바수고 고운체에 걸러 병에 담으니 넉넉합니다. 절로 신명나게 자라는 풀들이 참 고맙습니다. 봄날 아침, 수도원 경내를 다니며 채취하다보면 그저 걸음을 자꾸만 멈춥니다. 해 뜨면 사라질 이슬을 머금고 온전하게 충만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들풀과 함께 경탄하면서. 갈퀴나물에 벌레가 찾아오고 콩제비꽃이 하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면 야성(野性)을 잃지 않는 풀들은 곧장 숲을 이룹니다. 인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는 한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땅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매실 수확 후 키위밭 풀베기를 하는 날, 돌멩이 하나 툭 튀어 오르더니 무릎을 때립니다. 덕분에, 베어진 풀더미를 베개 삼고 누웠습니다. 키 큰 풀들 아래 숨어 있던 병풀잎이 싸한 향기로 얼굴을 건드리고, 바다를 굳혀 만든 하늘 귀퉁이의 구름자락이 나무 잎을 헤치고 내려오니 “주인”께 순종하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로움이 덮치는 듯. 아주 잠시 땅과 나, 하늘이 어디론가 함께 빠져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풀도, 흙에서 난 사람도, 구름도. 그러나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희망 속에 사랑의 눈물 속에 우리의 시간 한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풀, 흙, 사람, 하늘이 서로 서로 기대어 “우리”가 됩니다. 하나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니 더 이상 무상(無常)은 없습니다. 무상의 정지, 감히 영원을 맛보게 해 주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실용의 등급’과는 상관없이 마냥 있어주어 고맙고 그저 아름다운 것들은 눈물을 품고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 마리아’(마르 16장)도 모든 다른 제자들처럼 실패한 예수님을 버리고(마르 14,50)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녀는 아름다운 사랑을 얻기 위해 빈 무덤이 있는 황량한 정원에 홀로 서 있습니다. 어두운 절망과 고독 속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이 “닫힌 정원”의 문을 두드린 것일까요? “정원의 주인”(아가 5,1)께서 되살아나시어 “왜 우느냐?”고 하시며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빵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어 온 세상을 향하여 기뻐 외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여름입니다. ‘필요의 논리’에 저항하며 몸의 노동을 묵묵히 행하는 이들의 등에 소금꽃이 피고 있습니다.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며 “좋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소금꽃의 향기를 맡으십니다. 버림받아 밀려난 이들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십니다. 우리도 바로 그곳에서 함께 주님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 1638 런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6월의 말씀

놀라운 얼굴

해가 반 고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입니다. 일곱 번의 대축일, 어느 때보다 주님의 거룩함과 은총이 하늘 햇살처럼 쏟아집니다. 전례 안에 현존하시며 살아 계신 주님을 받아 모시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는 겸손한 고백을 환호로 터뜨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 기쁨과 슬픔의 씨줄 날줄이 큰 무리없이 잘 직조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구는 난데없는 돌풍을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이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후자의 처지에 있습니다(마르 4,35-41). 하늘과 바다가 한데 엉기어 거센 바람과 풍랑으로 이미 돛대는 찢어지고 물고기마냥 큰 입을 벌리고 놀란 배는 곧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후광을 쓴 제자들은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는데 한 제자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상황에 잠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도 주무시더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제자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나십니다. 태연하게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과 호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고요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안의 모든 것도 고요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우리의 깊은 심연의 공포, 불안, 두려움, 걱정의 자리 바로 그곳에 이미 생명의 샘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그분께 손을 내밀어 옷자락에 닿기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평화가 스며듭니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숨어버리신 듯 아무리 찾아도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다면, 달려가 그분의 새벽을 흔들어 깨웁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위험에 처한 우리에게 물위라도 마른 땅처럼 달리며 어김없이 오십니다. 허나, 놀라지 않도록 합시다. 도우러 오시는 주님께서는 힘센 사자나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라 심하게 상처입으시어 오히려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오십니다. “풍채도 위엄도 바랄 만한 모습도 없는”(이사 53,2) 바로 그 얼굴이 우리를 구원하는 얼굴입니다.

표지 사진 :독일 메셰데에서 나온 히타-고사본(1020년경)<바다 위의 폭풍>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5월의 말씀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벽, 잠에서 깨우시니 독서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갑니다. 움직이는 발과 눈을 뜨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께서 기다리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니 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은 복도에 달빛이 넘실거리고 안마당 위 하늘엔 별이란 별은 다 모여 멀리서 가까이에서 주님을 찬미하는 충만한 고요가 흘러넘칩니다. 우리 자매 중 어떤 이는 이 푸른 새벽, 가까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모습에 압도당하여 입회하였다고 합니다. 보물을 발견하였기에 가진 것 다 팔아 그 보물이 묻힌 밭을 산 것이지요. 불에 타는 데도,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주님께서 부르십니다(탈출 3장).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당신 이름의 네 글자를 얼굴에 드러내시며 오직 모세만을 위하여 충만한 은총과 넘치는 기쁨 그 자체로 홀로 서 계십니다. “있다”는 놀라움, 전혀 뜻밖에 거기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있음”에 경탄하며 대답합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절묘하게 만나는 영원의 순간입니다. 불꽃이 닿기만 해도 금방 타버릴 것 같은 덤불 속에 사시는 분께서(신명 33,16) 우리를 방문하시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림에서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키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말라 2,10). 모세를 부르신 주님께서 놀랍게도 오늘의 “나”를 건드리십니다.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나”를 찾으시며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고 사랑으로 끌어당기십니다. 온갖 풀과 꽃, 나무와 나무가 서로 기대며 출렁이는 신록의 아름다움을 빚는 5월, 잠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나의 크고 작은 일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 얼굴을 발견할 것입니다. 구하여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고, 비탄을 춤으로 바꾸어주시는 주님께 시편 예언자와 함께 감사 기도를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시편 3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손을 뻗치시어 포옹하시고 나를 찾아 헤매시며 발견해 내시고 나를 불러주시고 초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형제 자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도 꼭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정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본회 전총장 베르나르도 올리베라). 부르시는 주님께 “예”라고 응답하며 그분의 길을 따릅시다. 두려움과 떨림은 어머니 성모님께 내어 맡깁시다.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아무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으시어 모두에게 넘치도록 충만한 당신의 선물을 누르고 흔들어서 후하게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마르크 샤갈 (1968) <모세와 떨기나무>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4월의 말씀

가슴에 묻힌 씨가 꽃피리라 

“정

녕 하느님께서는 좋으시도다.”(시편 73)라고 시편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고백은 신앙마저도 잃을 만큼 영혼 안에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왜 “좋으신 하느님”께서 마음 깨끗한 이들, 올바른 이들이 죽음에까지 내몰리는 절망과 부조리를 보고만 계시는지 예언자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날마다 고통이나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수도원 길섶, 꼭 그 자리에 봄 풀꽃이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렇듯이 4월이면 “세월”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깊은 강물같은 아픔이 출렁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 다가가 손이라도 잡으면 온 몸에서 눈물이 바람에 마주 선 꽃잎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지만 그 어떤 것도 무의미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더 가난하고 아프고 더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폭력을 옷 입은 이들” “교만한 이들”이 오히려 잘 사는 암울한 세상,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겨자씨만큼의 작은 희망을 붙잡고 함께 일어서게 하여 주십니다. 억울한 고통과 죽음 앞에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라며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나누고자 연대하는 선하고 마음 따뜻한 이들과 진리를 찾는 이들을 모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이들의 희생은 하느님과 세상을 더 가깝게 이어주는 길이 됩니다. 그 길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세 여인은 성 금요일의 통곡과 어둠을 침묵의 가슴에 묻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마르 16장).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세 여인이 바라보는 곳은 절망의 깜깜한 무덤 안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놀랍고도 새로운 빛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눈부시고 두려워 아직은 보아도 알지 못하지만, 곧 믿고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갔다가 그대들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그대들을 다시 보게 되면 그대들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시편 예언자는 괴로움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며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3). 주님께서는 이 행복에로 우리를 매일 초대하십니다.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우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희망하신 대로(pro spere) 이 땅에 당신 번영(prosperity)의 꽃을 피우소서. 저희가 주님의 향기가 되어, 영원에 이르는 생명의 신비를 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윌리엄 아돌프 부기로 (1825- 1900) <무덤을 찾은 여인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3월의 말씀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 나와

“행

 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정녕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인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은 주님을 굳게 신뢰하네.”(시편 112). 시편 예언자의 이 노래에서 요셉 성인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보편적인 윤리, 도덕, 율법을 훌쩍 뛰어 넘은 사랑의 자리에 영원히 현존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을 내려다보는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듯이(창세 18,22), 낭패와 부조리한 현실을 맞닥뜨리는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판단, 세상의 가치, 내적 욕망을 어떻게 거슬러 저항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약자의 생명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배우라고 초대합니다. 요셉은 “남모르게”(마태 1,19)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어쩌면 의로운 그는 “더러운” 일에 연결되고 쉽지 않았나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시어 약한 것을 선택하시는 주님께서 요셉의 꿈에 당신 천사를 보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전혀 다른 길, 낯선 길을 선택합니다. 외로웠을 것입니다. 호적 등록을 위해 본향 베들레헴에 갔었건만 아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몸 누일 여관방조차 얻지 못했습니다(루카 2,1-7). 자기 자신을 넘어(metabasis) 타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준 요셉을 하느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하여 보호하십니다. “위험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시편 91). 꿈꾸는 능력을 지닌 요셉은 일몰, 밤의 시간에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을 닮은 길을 걸어갑니다. 창조에 버금가는 능동적인 요셉의 숨은 응답이 없었다면 어머니 마리아와 아직 태중에 계신 우리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독특하며 유일한 일을 진리 뒤편으로 묻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소명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예”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정하여 소수자와 약자를 배척하며 심지어 혐오하는 이 시대야말로 “요셉”이 필요합니다. 타자를 보호하는 요셉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두려워하지 마라.”고 인사를 건네시고, 주님 닮은 길을 따르도록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밤중과 새벽에는 아직도 제법 찬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늦둥이 매화꽃잎이 허공에 기대어 향기를 뿜어 올리니 순간 하늘이 열리는 듯.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에 기대어 함께 정성껏 기도 올립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 속에 새겨져 있나이다.”(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화답송).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2월의 말씀

 

번갈아 일어남

찾아오심과 찾음

 

경을 펼치면 온통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내 얼굴을 찾아라.” “주님,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우리를 찾고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찾아야겠지요. 허나, 성 베르나르도도 말하지만 우리의 찾음은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께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내시지만 다 볼 수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매번 새롭게 이끄심에 의지하며 한 걸음을 뗄 뿐입니다. 알았던 것이, 알아야 할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않으며, 부재와 현존의 시간이 계속될지라도 인내로이 숨바꼭질을 해야 하겠지요. “번갈아 일어남”(alternatio)에 대해 말하는 사부에게서 지혜를 얻습니다. “번갈아 일어나는 것 가운데, 마음은 그것들 중 하나에 더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동요되고, 두렵고 굉장히 격앙된다. … … 그분을 붙잡아 두려고 생각하자마자, 그분은 빠져나갔다. 그저 갑자기 그분은 붙잡힘에서 다시 벗어나기 때문이다.”

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아름다우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또한 아름다운 주님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오른쪽 그림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우선, 제목이 ‘승천’이 아니라 ‘변모’입니다. 가운데 바위를 두고 위와 아래가 너무 달라 두 그림을 붙여 놓은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다음 날 내려오시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를 ‘제자들 앞에서’ 고쳐주십니다. 이를 전하는 루카 복음 9장 28절부터 43절까지의 말씀과 그림을 함께 번갈아 천천히 읽고 보기를 반복하면 겹겹의 층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그림 그리고 각자가 나누게 될 마음의 대화를 기대하며 감히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시면서 영광에 싸여 아름답게 변모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제자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힘이 있고, 또한 산에서 내려와 추하다고까지 느껴질 우리 현실의 세상으로 오셔야 합니다. 마음이 사로잡히고 정신이 압도당한 아름다움에만 머무를 수 없고, 그림의 아래쪽을 외면하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적나라하게 묘사된 우리의 현실이 불확실하며 추하고, 아무런 인간적인 대책이 없어도 우리는 그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리가 진정으로 찾고 닿아야 하는 깊이와 궁극의 희망은 어쩌면 부재와 상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치유하실 분은 위에 계신 우리 주님이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을 따라가, 영광에 싸여 구름 위에서 하얗게 빛나시며 변모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팔은 십자가에 매달리실 모습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의 아름다우심이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2월, 주님을 찾는 여정에서 또 하나의 Alternatio를 발견하신다면 좋겠습니다.

 

 

라파엘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16c, 410×279cm, 바티칸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