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2월의 말씀


미소
해방하는 생명의 힘

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들, 예를 들면, 하느님, 천사, 성인들을 묘사한 작품 중에는 웃음 지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그림에서도 웃는 모습은 사실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17세기 주디스 레이스터라는 여성화가와 프란스 할스 작품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예술사에서 예외적이라 할 만큼 드문 현상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리 유명한 것도 그 미소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찾아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을 좀 말해보자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없기에 웃는 얼굴도 만나기 쉽지 않고,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많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웃음에도 비웃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만,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웃음은 그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그 웃음을 만나는 이도 어떤 속박으로부터 풀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존재의 모습 때문인지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시작하는 첫 소식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천사의 미소 좀 보세요. 처음 이 조각을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답니다. 환한 웃음을 만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미소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지고 에너지가 밝아지고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천사는 자신이 품고 와, 전달할 소식이 어떤 것인지 이미 그 미소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가브리엘천사, 마리아에게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오심을 알려주는 이입니다. 즉 인류에게 기쁨 그 자체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니 어찌 그런 이의 입에서 기쁨의 미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리는 사람, 구원을 선포하는 이는 이 천사처럼 자신이 먼저 기쁨을 지녀야 그 소식이 진짜임을 사람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전하는 이를 먼저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 기쁨은 고난이나 환난, 모욕 앞에서도 사라지는 법이 없어, 십자가조차 기꺼이 지게 하는 것이지요. 이 미소에는 생명넘치는 젊음, 맑은 기쁨,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전달되는 전염력이 보는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이런 미소는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자신을 넘어 타인까지 해방시키지요.

이 천사는 이미 마리아의 입에서 나올 “피앗”을 감지하는 듯, 심지어 미소에 장난기마저 피어납니다. 마리아가 겪을 당혹감, 그리고 그 당혹감에 지지않을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당참을 미리 감지하며 세상을 가득 채울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드물게 보는 기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지지요. 그것은 바로 기쁜 소식 자체인 하느님이 우리 인간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생명을 빚은 생명의 주인이 바로 그 생명이 된다는 말이 막히고 기가 막히는 소식 앞에 천사도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로 그 현장을 13세기 한 조각가가 전해주었고, 13세기를 넘어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각은 프랑스 랭스 성당에 있는 조각으로 “랭스의 미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조각입니다.

아름다움의 힘, 예술의 힘과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쁨도 누리게 해주네요. 그런 면에서 현대 종교는 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할 힘을 혹시나 상실한 것은 아닌지, 그 밑바닥에는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은 그 본성상 자신 안에만 머물지 못하고 밖을 향해 나가는 법이니까요.

프랑스 랭스 주교좌 성당 입구 가브리엘 천사 조상, 요세프스 마이스터?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월의 말씀


저 열린 닫힘

곡을 서서히 물들이는 아침 햇살이 정겨우면서도 찬란하고, 깊은 우수도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화입니다. 미국 19세기 풍경화의 대가 호머 닷지 마틴의 “후서토닉 계곡”이라는 작품입니다. 매사추세추에 있는 후서토닉 강에 따르는 계곡인데, 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닫힌 느낌과 함께 아늑함이 전달되어옵니다. 왠지 새해 아침에 딱 맞을 듯 한 그림이지요. 어둠에 닫힌 계곡 위로 햇살이 서서히 비춰오는 장면인데 마치 닫힌 계곡이 햇살로 인해 서서히 열리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도 자연 속에 함께 앉아있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풍경화입니다.

호머 마틴의 풍경화들은 보는 이를 끌어들이고 그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우수 내지는 스산함을 함께 보게 만듭니다. 일종의 철학이 깃든 풍경화라 할까요. 이 그림만 해도 그렇습니다. 깊은 계곡은 노골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산자락 아래 부끄러운 듯 숨어있고, 저 멀리 흐르는 물줄기로 계곡임을 연상케 할 뿐입니다. 험준한 산세 속에 외롭게 오두막집 하나가 오두마니 서 있고 그 옆 소집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양쪽을 겸하는 그런 집이 바람이 크게 불면 부서질 듯 외롭게 서 있습니다.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 위에 소 두 마리가 마차를 끌고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흔적은 있으되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도 자연은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마차와 소가 있는데 사람은 일부러 빼버린 그의 마음이 알 듯 모를 듯 와닿습니다. 그림 전체가 우수를 담뿍 머금고 있음에도 어둡거나 칙칙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자신만으로 닫힌 자연이 닫힌 그대로가 아니라 햇살 앞에 서서히 그 닫힘을 열고 있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아무리 제 잘났다 뻐겨도 우리 인간은 밀림 속, 바닷속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닫혀있되 자신을 내놓지 않는 그런 닫힘이 아니라 신비 속에 머무는 닫힘이요, 때가 이르면 아낌없이 자신을 드러내놓는 닫힘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아이돌 문화의 영향 탓인지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 젖어있다 보니 과거 문화 속의 은근함과 신비 속 숨겨짐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섹시함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아름다움이요, 성적인 매력은 은근함이 아니라 퍼포먼스로 활짝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상반되게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할 것은 드러내지 못하고 상처로 가득 안고 살아가는 참 묘한 문명의 시대입니다.

우린 모두 지구 자체이든 작은 미생물, 원자, 양자, 전자, 쿼크까지 그 너머 우주 자체도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닫힌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우리는 우주에 감탄할 수 있고 작은 전자와 양자의 존재가 한 과학자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자연의 신비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열리고 그 존재의 때가 되면 그 닫힘을 살짝 열어 보여주는 신비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되는 닫힘 속 무엇은 과학적 분석이 다 쪼개어 놓은 산같은 지식도 따라오지 못할 열림입니다.

더욱이 인간 존재는 과학적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쥐꼬리도 그것에 비교하면 산보다 클 정도입니다. 참으로 아는 것은 마음을 열고 인생을 열고 관계를 열어 서로를 성장시키고 변모시킵니다. 저 그림을 보노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뿐더러 이름도 처음 듣는 후서토닉 계곡이 마치 내 고향인 듯한 느낌을 받게되는 것도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과 저 계곡이 사람을 품어 안아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존재든 가장 작은 미생물, 분자에든 하느님의 닫힘이 새겨져 있고, 때가 되면 언제든 그것을 열어 그 신비를 보여줄 태세가 되어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2월의 말씀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가난한 하느님-아기

수님의 성탄에 관한 복음의 기록들은 두 가지 분위기로 나뉩니다. 우선 한 가지는 천사들의 합창과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보이는 환희와 기쁨과 경건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적은 편이고 그 반대되는 분위기가 더 압도적입니다. 아기 낳을 곳조차 얻지 못한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루저였던 마리아와 요셉의 마굿간 여물통에 아기를 누일 수밖에 없는 가난함,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철없는 동방박사들의 솔직한 고백에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운 헤로데 왕의 광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베들레헴 근처 어린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이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하느님이 인간 아기로 오셨다는 그 가난함입니다. 이 사실의 가장 얕은 차원에라도 진정으로 가닿는다면 우리 인간은 온 존재가 바닥부터 뒤집히는 체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미생물 광물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그 창조물 중 하나인 인간이 되어오신 그 신비는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도 납득도 불가능한,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펄펄 살아뛰던 3세기, 고대 교부들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이 진리를 설파합니다. “징글벨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이런 성탄 분위기가 너무 싫으면서도 하느님이 이렇게 가난한 인간 아기로 오신 그 신비만 생각하면 늘 바윗덩어리가 묵직하게 제 앞을 가로막곤 했었는데, 약 30년 전 이 말에 접하는 순간, 안개처럼 그 묵직한 돌이 치워지던 그 체험이 기억납니다. 이 말 그대로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아기 앞에 아기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하듯,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 그것도 너무도 가난하고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는 그런 아기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을 들을 때면 틀린 말은 아닌데도 왠지 속이 거북했었는데, 이 말은 저를 기쁨 가득하게 해줄뿐더러 하느님이 그러셨듯이 나도 가난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서로 닮고 싶어집니다. 신분이 높은 왕족이 하층민의 여인을 사랑하면 그 여인은 그 사랑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신분을 획득할뿐더러, 점차로 왕족이 지니는 품위를 몸에 지니게 됩니다. 그 왕족 또한 귀족 집안의 여인은 지니지 못한 소박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그 자연스러움을 사랑하다 보면 자신도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사랑은 서로 속으로 스며듭니다. 성탄은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우리 인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이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성탄 그림치고 참 독특하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참 잘 보여주고 있어 골라봤습니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굉장히 고독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과 환한 빛, 천사들 가득한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화가가 살았던 19세기 농촌의 모습이 생생한 그림인데, 다른 그림에서처럼 소들이 아기 예수를 둘러싸거나 하지 않고 소 우리 속에 갇혀있으며, 마리아는 이제 막 낳은 아기에게 배내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러 나갔는지 성 요셉은 보이지 않고, 오직 동물들과 마리아, 아기 예수뿐인 곳에 적막이 깊게 흐르며, 바닥에는 짚이 깔려있긴 하지만 소똥도 묻어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여인의 복장을 한 마리아는 큰 신비 앞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이 오신 자리는 바로 이런 자리였을 듯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그리고 이런 자리를 알아보는 목동과 동방박사는 오늘에도 있습니다. 아기를 향한 엄마의 옹알이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폭 잠기는 성탄 되시길.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1월의 말씀

죽음의 승리

을 돌려버리고 싶은 그림이지요. 아름답고 좋은 것들로 가득 찬 이 삶이 영원하리라는 사실에 금이 가고 있는 오늘에, 눈 돌리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림 하나 만났습니다. 16세기 괴짜 화가 피터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입니다. 단 1% 치사율의 코로나로 전세계가 3년 동안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방역체계와 마스크, 격리병동, 가는 곳마다 비치된 손소독제를 지니고도 세계 전체가 마비된 듯 했고, 세계는 코로나 전과 후로 갈라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중세를 휩쓸던 전염병 그중에서도 흑사병의 치사율은 50%가 넘었습니다. 일단 전염이 시작되면 한 도시, 한 마을이 초토화되어버렸고, 죽음의 광폭함 앞에 사람들은 망연자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코로나 초기 어떤 나라들은 환자가 너무 많아 연세 든 어르신들은 병원에 받아주지도 않고, 화장장은 대기하는 사망자들이 많아 언제 장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50% 이상의 치사율에 병원도 제대로 없던 시대였으니, 아마도 밖에 나가면 사방에 시체와 죽어가는 환자가 널려있고 엄마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가득한 지옥을 방불케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모르는 데 대한 두려움은 또 얼마나 컸겠는지요. 그 원인이 하느님의 징벌, 마귀의 저주, 마녀의 짓 혹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약을 탔다거나 등 터무니없는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켜 그 희생의 대가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대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 그림 속 모습과 제목 그대로 “죽음의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끔찍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지만 아프고 시린 우리 시대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16세기 이 괴짜 화가가 펼쳐보이는 묵시록의 장면 속으로 한 번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전쟁터 같으나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전쟁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지사방이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데,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해골정예부대가 대열도 정연하게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하고 있으며, 곳곳에 고문틀과 사형집행대가 보이고 그렇지 않아도 다 죽어가는 사람의 숨통을 해골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왼쪽 제일 구석에는 영주의 복장을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그가 쌓아둔 금화를 해골이 취하려 하자 죽어가는 와중에도 빼앗기지 않으려 그 해골의 갑옷 자락을 잡으려 합니다. 이런 비극도 모자라 저편에서부터 죽음의 사신의 행렬 같은 검고 기괴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통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해골 정예부대 한복판에 무슨 통로 같은 것이 있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쪽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생명의 통로도 사실 아무 소용이 없고,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2022년 이태원 압사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정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뭐 그림 구석구석 설명하자면 아직도 한참은 더 열거할 수 있지만 이쯤 해두어도 충분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가 우리와 상관없는 저 먼 시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지요.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운명에 관한 것임을 누구나 가슴 시리게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 세균, 곰팡이, 바이러스까지도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의 집 지구가 뻥뻥 뚫리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는 이미 바다로 콸콸 방류되고 온갖 오염물로 질식되어가던 바다 생물들이 핵 오염수를 마시고 어떤 모습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올지 공포 영화 속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습니다. 저 그림 속처럼 우리에게도 생명의 통로는 분명 남아있습니다. 구약 성경 속, 홍수 예언 속에서 방주를 만든 것은 노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생명의 통로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 길로 갈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요.

피터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0월의 말씀

Between
Heaven & Earth – 하늘과 땅 사이

늘과 땅 사이 그러니까 제목이 하늘과 땅 사이라는데, 뭐 제목에 이의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얼핏 본 그림과 제목 사이 무슨 연관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최후만찬 장면인데,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좀 아득했습니다. 실제 그림이 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인터넷에서 찾아내어 확대를 해본 순간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빵을 쪼개고 계시고, 아마도 사랑받는 제자 성 요한일 듯한 인물은 예수님 품에 폭 안긴 채로 그 쪼개진 빵 속으로 들어가버릴 듯 맹렬한 자세입니다. 머리카락은 아래로 마구 쏠리고 있어도 전혀 괘념치 않는 걸 보면 주위 상황은 까맣게 잊은 채 황홀경 속인가 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 참 가관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성 요한과는 예수님의 바로 반대편에 앉은 제자는 못볼 것이라도 본 듯 민망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예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제자가 배신자 유다가 아닐런지요. 그리고 그 바로 옆 아마도 베드로일 듯한 이는 눈을 흡뜨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이 얌체같은 놈, 너만 예수님 사랑 독차지 하려는게지?”라고 외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눈치채셨나요? 최후의 만찬 장면과는 어딘지 다른 장면이 겹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의 어머니까지 대동하고 나서 자신들을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왼쪽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는 그 장면 말입니다. 그런데 또 그것만도 아닙니다. 복음에도 없는 장면을 화가 스탠리 스펜서는 첨가합니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장면을 말입니다.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게 해달라던 요한이 예수님마저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직 쪼개진 빵만을 향해 거의 그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양새지요.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인간적 욕망이나 성취는 아주 뒷전이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주 멋드러진 복음의 비틀림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가깝다는 그 사실에만 눈이 거의 뒤집힐 아니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인간 사는 공동체 어디서든 이 현상은 삶 전체를 지배할 듯 표면을 색칠합니다. 최후 만찬의 순간 배신자 유다는 열혈당원으로서의 자신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예수를 아예 팔아넘길 작정을 하고, 베드로는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 큰소리치고 있었지요. 성 요한인들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을 체험하고 온넋이 나가 버립니다. 꿈도 희망도 야망도 욕망도 모두 무너진 마당, 그 마당에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자신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체험했습니다. 온통 통짜로 비워져버린 그들 속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들어가실 수가 있었던 게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비워진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내시고자 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체험한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죽음 따위 무서워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과 생명 자체이신 분을 선포합니다. 자신들의 꿈과 야망이 그 죽음의 마당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 다른 야망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지요.

화가는 이런 모습을 최후 만찬 속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성 요한에게서 봅니다. 나머지 다른 11명의 제자들의 눈은 오로지 요한만을 향해 있지 예수님도 쪼개진 빵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는 슬픈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참생명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를 알아듣습니다. Between Hevean & Earth 딱 맞는 제목이죠.

Stanly Spencer, Between heaven & Earth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9월의 말씀

아이들의 세계가 있는 세상

7,8월

무더위와 장마를 지낸 우리에게 좀 신선한 기운을 불어 넣어줄 그런 그림을 찾다 만났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림입니다. 60, 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그리움이 훅 밀려오게 합니다. 도시의 놀이터는 물론이요 시골에 가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옛날 그 시절의 모습이 되어버린 장면입니다. 인공으로 꾸며져 돈을 내고 들어가는 놀이방이 있고 아이들은 자신이 애써 구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시설과 장난감들이 수북수북 쌓인 곳이라 들었습니다. 깨진 사금파리, 옥수수 껍질까지 활용해서 소꿉놀이를 하노라면 머리든 마음이든 이리 저리 굴릴 수밖에 없는 일은 아예 없어져 버렸고, 함께 놀 친구도 뭐 그리 그리울 일이 없는 것이지요. 서로 부딪치고 그래서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하고, 인원수가 모자라니 누구 누구를 더 불러오자고 아이들 나름으로 계획도 세우고 하면서 사회성과 리더십이 길러지는 귀찮은 과정이 싹 사라져 아주 편하게 생각없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곳곳에 있습니다.

저 아이들의 모습에서 몇 겹의 그리움이 산그림자처럼 겹치며 뭉개뭉개 안개를 피워올립니다. 아이들 나름의 세계가 있는 시대를 살아온 복됨이라 할까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는 달라야 하지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 수업 마치기 바쁘게 수영에 피아노에 수학, 영어, 국어 등 배우러 다니느라 자신들의 세상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탈출해버린 아이들만이 자기들의 세상을 구축하는데 그곳이 어떨지는 저로서는 감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계산된 세상, 그곳의 법칙과 논리에 따라 자신을 키워가야만 성공하는 세상의 틀 안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사치스러운 놀이나 쓰레기 취급을 당합니다.

아이다움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야 어른들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예수님도 복음에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겠지요. 아이가 아이다워지려면 엄마 아빠의 믿음직스런 그늘이 있어야 합니다. 노골적인 천막, 그것도 절대로 찢어질 리 없는 천막으로 아이를 가려줄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느낄 둥 말 둥 그래도 아이는 그것을 마음속 깊이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늘 아래서 아이는 걱정 없이 뛰어놉니다. 그리고 이 그늘은 보일 듯 말 듯 해도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위를 덮고 있지요.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자신의 키에 맞는 그 세상에서 놀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작전도 세우고 실패도 하며 약함과 강함을 골고루 경험하며 아이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친구들과 놀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커서 직장에 다니게 되면 그 세상은 온통 위협과 불신으로 가득 찬 곳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해보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늘 아이의 키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신에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해준 천하막강 천막, 부모의 틀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부모는 또 그만큼 투자했으니 건강한 어른이기를 기대합니다. 키워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부모나 늘 어떤 보호막이 있기를 기대하는 어른-아이나 불행하기는 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서둘러 앞서가려다 넘어지는 아이, 어떻든 꼬리를 떼어내려 앞 아이의 허리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 그런 상황을 온몸으로 쳐다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역동적 움직임이 선명한 가운데 주변 자연은 대조적으로 아주 고요합니다. 아이들의 온갖 야단법석을 받아안는 땅은 어머니지요.

윈슬러 호머, snap the whip, 1872, 56×91.5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8월의 말씀

이미 꽃이 된 여인

그림을 만나는 데는 의외로 현실 안의 변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제게는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과 같은 원시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이 화가의 걸어온 걸음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딱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게 된 데는 눈 수술 후 보이는 것이 편치 않게 된 제 눈 덕분이었지요. 제목을 몰랐던 것도 한몫을 했고요.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아르누보에서, 야수파에서 입체파, 미래주의, 추상주의까지 다양한 현대미술,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두주의 또는 모든주의 Everythingism 대표주자라 불립니다. 뭐 한 마디로 다재다능하다는 이야기겠지만 예술은 또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림은 자주 만나고 자세히 보고 마음을 담아 보아야 나의 창을 두드리며 다가옵니다. 다른 안경으로 바꿔 끼고 그림 앞에 앉자 아주 새로운 그림으로 제 마음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저 아름다운 꽃들은 타히티에서처럼 자연 안에 제가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난 야생화들이겠거니 했더니 꽃줄기들 위에 걸쳐진 삽이며 화분이며 모든 것들이 사람이 가꾼 꽃들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자연 속에 꽃과 함께 유유자적하던 것으로 보였던 여인들은 꽃을 가꾸는 일꾼들 아니겠습니까. 잠시 사고정지. 그리고 새롭게 그림 앞에 앉았습니다. 정말이지 처음과는 다른 물결로 저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또 다른 설렘이요, 그림을 만나는 묘미입니다.

화분에 키운 꽃들을 이제 어깨에 이고 가슴에 안고 내다 팔기 위해 어디론가 운반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밭일을 하는 우리 수녀님을 보면 농작물이나 과실 등 농사의 결실들은 일종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느끼는 것을 봅니다. 씨뿌리고 물주고 벌레잡고 행여 싹이 올라오지 않을까 들여다보며 떡잎이 올라오는 순간의 뿌듯함과 씩씩하게 자랄 때의 흐뭇함 행여 병이라도 들면 여러 수단을 강구하는 등 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여정을 함께 합니다. 꽃을 나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병들고 꼬부라졌다 하여 결실물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버리면 우리 농사꾼 수녀님은 몹시 마음 상해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그런 취급을 당한 듯 한 느낌을 받나봅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무척 무거워 보이는 화분을 어깨나 가슴에 행여 떨어질세라 소중히 모시고 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인들 가운데서 유독 좀 달라 보이는 이가 있네요. 만발한 꽃들 앞에 우뚝 서서 화분의 꽃을 응시하고 있는 왼쪽 여인은 노동에 푹 빠진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정성으로 키운 꽃을 보내며 마지막 대화라도 나누는 듯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를 키우고 바라보느라 노동의 힘겨움도 잊을 수 있었단다. 어딜 가든 착한 마음 주인을 만나 사랑받고 살거라.” 뭐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 보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과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노동의 힘겨움에 찌들어 기껏 키운 꽃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작 아름답게 꽃을 피워낸 이들에게 꽃은 무거운 노동일 뿐이요, 자신들의 집이나 자신을 아름답게 해줄 것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의 표정과 몸은 다른 것을 말해줍니다. 노동의 힘겨움 속에서도 잃지 않은 꽃과 하나된 마음의 아름다움이 꽃을 바라보느라 환히 열린 눈의 창으로 투명하게 비쳐보입니다. 몸도 꼿꼿하지요. 꽃을 키우며 꽃과 하나된 마음은 꽃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이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땅이나 산을 투기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그 산천의 아름다움은 즐기지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이,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정원 가꾸기”, 1908년, 102.9 ×123.2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7월의 말씀

여러 얼굴 여러 마음 그리고 …

그림을 보는 순간, 여러 버전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고, 그리스 신화 안에서 가장 여러 가지 설이 많아 그 유래가 확실하지 않은 것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뒤엉킨 뱀으로 이루어진 여인입니다. 사실 심장 약한 사람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질 법한 그런 모습이지만, 이렇게 저주 받기 전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해 그녀를 본 사람은 돌로 변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뭐 그리 끔찍한 것에 연결시키느냐는 분도 있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 인생에 있어 가끔은 괴물스런 존재가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이코패스라든가 심각한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이 자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낫기가 쉽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정신과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 사실 가장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분열되어 있어도 분열된 지도 모른 채 괴물로 살아가고 있는 슬픈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분열된 인간성의 신호로 혹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응시라는 양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양면성은 그 자체로는 건강한 인간성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지요. 기쁘다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은 인간 개인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 생겼지만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슬픔이나 분노가 있을 수 있고, 나는 기쁘지만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지인은 힘겨운 상황일 때 어른이라면 그 기쁨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기쁘다 해서 그것을 온통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거두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얻는 성숙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만약 한 얼굴밖에 없다면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 앞에 기뻐 웃고 있는 그야말로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분열이 일상이 되고 거의 일반화된 현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나타납니다. 에곤 쉴레가 자신의 모습을 백 점이 넘게 그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에는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중 자화상에서 분노 가득한 아래 쪽 얼굴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표정 속에도 슬픔이 엿보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의 그림의 대표적 성격인 가늘고 구불거리는 선 자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 아니면 적어도 편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그림을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피하여 혼자 사는 길을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다행히도 수도승 전통은 인간성의 이런 면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많이 축적해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해서 어쩌면 뭐 그렇게 해서 될 일인가라고 웃을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냥 바라보는 것,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신 안의 이중성 내지는 그보다 더 복잡한 분열 상황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또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하더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해보겠다 덤비면 덤빌수록 상황은 더 꼬여간다는 것을 경험해본 이들은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문제는 늘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수도승 전통은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는 거의 공식화된 말로 표현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우리 자신의 알아차림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열 상황에 직면해서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참 단순하고 단순하지요.

에곤 쉴레 이중 자화상 1915년, 584×522 Cm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6월의 말씀

절망, 그 새로움 그 오래됨

크의 그림은 일견 섬찟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왠지 친숙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매력을 뿜습니다.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그의 그림들이 현대인들을 묘하게 잡아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법 합니다. 그의 그림들에는 한결같이 두려움, 공포, 불안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운 이들의 연속적인 죽음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는 다섯 살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13살 때는 누이가 같은 병으로 사망했으며,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고, 스물여섯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서른두 살에는 남동생이 죽었습니다.

죽음이 꿰뚫고 지나간 그의 삶이 비참, 고독, 불안으로 관통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불안을 그림 속에 꾹꾹 담아냈습니다. 자살 충동도 있었을 것이요, 구불거리는 그림 속 선들처럼 늘 요동치는 자신의 형언할 길 없는 불안에 삼켜지지 않은 것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됩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눈에 이 상황은 과장으로 다가오지 않고 아주 현실감있게 느껴집니다. 듣는 것만으로 소름끼치는 그의 삶의 흐름 속에 그가 매몰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그림이라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과 함께 바로 여기에 그의 비극적 삶에 대한 이 시대를 위한 일종의 사명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시대 역시 바로 불안과 고독의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이만큼 풍요로운 시대도 없었거니와, 지식의 차원에서도 만물의 바닥이라도 꿰뚫을 듯 속으로 파고들고 우주의 끝으로 날아가고 가장 작은 것들 속으로도 거침없이 들어가는 과학의 힘은 마치 신의 부재 내지 신의 다음 자리 정도는 인간이 충분히 차지 할 듯 거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의 불안과 존재의 고독 또한 이에 못지않게 모든 시대 가운데 최고를 치고 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이제 감기 앓는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됩니다. 예전과 달리 드문 현상으로 감추고 숨기려 들지 않는 것은 이제 누구나 그런 증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고 뭉크의 정신상태가 참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내면의 한 풍경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저 역시 눈 수술을 하며 폐쇄공포증과 일시적 공황장애를 뼈 속 시리도록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인간은 진실로 하느님인지 아니면 에고로 똘똘 뭉친 자신인지를 선택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하느님 부재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도 아마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자신의 의지에만 의지하던 인간이 새로운 차원으로 즉 하느님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지요.

그림에서 보면 하늘에는 붉은 불이, 땅에는 검은 늪이 가득 차 인간은 갈 곳조차 없어 좁디좁은 다리 위에 오밀조밀 밀쳐대며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리 진 이들의 눈동자가 텅 비고, 눈 코 입도 뭉그러져, 형체들이 비슷한 좀비 무리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맨 앞쪽 여인의 눈만이 공포가 담겨있기는 하나 눈동자가 제대로 박혀 있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은 당당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환하게 제일 앞에 놓으면서도 마치 수수께끼처럼 심어놓은 여인은 절망의 바닥에서도 결코 스러지는 일이 없는 구원의 실자락 같이 느껴집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개인의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스러질 수 없는 희망을 뭉크는 보여줍니다. 그의 그림은 깊이 볼수록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고 그 두려움만 눈에 담은 후 돌아서면 결코 눈에 뜨이지 않는 숨겨놓은 그림찾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뭉크, 불안, 1894, 94*74cm, 오슬로 뭉크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5월의 말씀

스산함과 따뜻함

노레 도미에, 이 화가의 일생 이야기만 해도 이번 달 소식지 난은 꽉 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만 접하는 것으로 만족할까 합니다. 하나는 그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식이 아주 날카로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초기에 풍자 만화로 유명하여, 왕이 백성을 먹고 배설하는 장면으로 감옥과 정신 병원 유폐까지 당하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 권력의 비뚤어짐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서민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서민의 스산함과 따스함 양쪽 모두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상류 계층의 위선과 또 그만큼 하층민의 애환과 그들 심성의 따뜻함에 아주 민감하였습니다. ‘3등 열차’, ‘이주민들’ 등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서 아주 독창적인 장면들을 잡아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그런 장면들을 화폭에 담았지만 살아 생전 풍자 만화로는 알려졌어도 화가로는 이름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후 그의 그림은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고 시인 보들레르, 화가 들라크루아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서민의 일상 중 한 컷 스냅 사진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으로, 엄마 따라 어영차 계단을 오르는 어린아이의 걸음새가 당찹니다. 다리 길이보다 긴 계단을 짧고 통통한 다리로 오르는 모양을 보자면 마음이 절로 흐뭇해져옴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힘은 힘차게 그러쥐고 있는 엄마 손 때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이는 그 와중에도 자기도 엄마를 돕겠다는 듯 빨래방망이를 두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올라오는 계단 뒤로 푸른 강이 보이는 것을 보면 빨래를 끝내고 그 빨래 뭉치를 손에 들고 올라오는 길이라 보여집니다. 빨래를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물먹은 세탁물은 그 무게가 엄청납니다. 저 가파른 계단을 무거운 세탁물을 한 손에 들고, 아이의 손을 잡고 엄마는 계단을 오릅니다. 아이를 향해 살짝 숙인 엄마의 자세에 아이를 향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남자 못지 않게 건장한 어깨와 팔뚝은 그녀가 단지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는 주부가 아니라 삶의 전선에서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아마도 저 빨래는 가족의 것이 아니라 품삯을 받고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삶의 스산함이 가득한 환경 속에 거칠게 살아가는 여인 같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향한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그림에서 모락모락 연기 오르듯 피어납니다. 어쩌면 삶이 스산하기에 그 사랑이 더욱 절실하고 깊고 순수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귀족 부인과 아이 그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조화입니다. 스산함으로 인한 황폐함뿐이거나, 따뜻함으로 마냥 솜사탕 같은 장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슴 찡한 감동이 있지요.

하루 노동으로 지친 엄마의 모습은 내색 안 해도 아이들에게도 느껴지지만, 엄마는 그런 빛 한 번 비치지 않고 힘든 노동 후에도 맛있는 밥 만들어 아이들을 먹입니다. 아이들은 그 사랑의 품이 넓어 저 아이처럼 힘찬 걸음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 아이는 큼지막한 빨래 방망이가 무거워 아래로 쳐져도 그 방망이를 꼭 그러쥐고 계단을 오릅니다. 아마 나름 엄마를 도와 주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물에 젖어 한없이 무거워진 빨래가 건장한 엄마의 팔 힘만으로도 지탱이 안 되어 무릎 위에 살짝 얹듯 들고 올라옵니다. 그래도 아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고 아이를 향한 시선도 거두지 않습니다. 남자인 도미에가 이런 모습을 포착했다는 것이 새삼 가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앞에 살짝 언급한 그의 삶의 언저리가 있기에 이런 평범한 모습 속에서 예술을 끌어낼 수 있겠지요. 사실은 5월 성모님의 모습을 찾다 이 그림을 만났고, 보자마자 이 그림 위에 성모님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성모님의 삶의 스냅 사진 한 장 건진 행운을 만났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1863년 48.9×3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