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1월의 말씀

나의 연인은
내게 몰약 주머니

“나

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내 임은 내 가슴에 간직한 몰약 주머니”(아가 1,13 최민순 역)라고 신부(新婦)는 말합니다. 몰약은 아리고 쓰린 아픔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신부가 “몰약 주머니가 나의 연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아픔, 고통, 환난, 죽음이 결코 쉽고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신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볍게 여겨지고,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신랑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분께서 몰약 주머니이지 몰약 주머니가 그분인 것은 아니다.” 신랑이며 임금이신 그분은 단지 “몰약”인 것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쩌면 신부와 이웃도 눈을 가리고 피할 만큼 낯선 이의 모습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인간이 거하지 않는 곳에서 낯설게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선택받은 지혜로운 이들은 그분을 알아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임금으로 태어나신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2 ; 루카 2,1-14 참조).

전혀 낯선 길로, 낯선 얼굴로 오시는 그분 때문에 당황하고 도전받고 고난을 견디는 것이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당연한 몫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왕이신 그분께서 우리 때문에, 우리 안에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주님,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라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고 받아 모시나이다.”(주님공현대축일 예물기도).

“내게 문을 열어주오, 나의 애인이여.”(아가 5,2). 한밤중에 느닷없이 문을 마구 두드립니다. 어떤 얼굴인가요? 너무나 놀라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듯합니다(아가 5,5). 하지만 신부는 누구신지 물을 필요없는 절박함으로 그 얼굴로 다가갑니다. 가장 작은 이의 울부짖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린 이에게 빵을 먼저 나누고, 고뇌 가득 찬 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버림받은 이들 곁에 함께 서 있습니다. 신랑이신 임금께서는 “사랑의 깃발”(아가, 2,4)을 신부에게 걸어줍니다. 신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바로 그 낯선 얼굴들”(마태 25,31-46 참조)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숨어 계신 분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전례력으로 11월은 올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많이 아픕니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그분을 기억합시다. 어둠이 내리는 사순의 텅 빈 광야에서 모든 이의 비참을 모은 교종의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이 샘솟는 희망과 신앙은 자비의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몰약뿐인 우리의 예물을 유향으로 만드십니다. 밀쳐두고 외면했던 얼굴을 마주 보며 욕망의 헛됨을 서로 벗겨내고 우리의 진실, 우리의 빛으로 함께 걸어갈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들으시는 임금께서 이미 당신의 몸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고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나이다.”(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6c. 성소피아 성당 내부에 장식된 구세주 그리스도 모자이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0월의 말씀

너희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저

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연중 제30주일 본기도). 이 기도 안에서 마르코가 전하는 “어떤 사람”(마르 10,17-22)을 만납니다. 그는 이제 막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신 다음 예정된 길을 떠나시려는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주님을 대면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길 안으로” 들어서며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조르듯이”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그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난 후에 “영원한 생명”은 내세에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적으로 한 조각 한 조각 이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실천하라고 명령한 모든 계명을 꼭 지키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걷고 그분께 온전히 매달릴 때” 영원이신 그분은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미 보고 만지도록 당신을 허락하셨지요. 숨어 계신 임마누엘이시여! “저희가 언제 주님께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0).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이시다.”(신명 6,4 참조).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고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갈망이 깃든 그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하나가 부족하다.” 그가 지킨 것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지킨 것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라 하시며, 바라보는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마태 5,21-30). 하나가 남았습니다.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신명 5,21). “탐내지 말라.” 그가 지닌 것, 안락을 누리는 것들이 비록 성실하고 합당한 노력의 정당한 몫일지라도 “탐욕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은 어쩌면 탐욕에서 비롯된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신 주님께, 타인의 가난한 빈손에 돌려주어야지요. “주님, 당신의 법에 매달리니 제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법이 영원히 저의 재산, 제 마음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시편 119,31.111).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비틀거립니다. 함께 아파하는 근육이 굳은 탓일까요.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예수님의 눈길을 기억하고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주님 친히 깊고 내밀한 갈망을 채워 주시고자 “가슴에 당신의 새 법을 넣어 주고, 마음에 당신 새로운 계명을 새겨”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이미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지키고 행할 힘도 주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 다 주어라. 너 자신에게서 내려오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1445-1510) <책을 보고 계시는 성모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9월의 말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산

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시 121). 재난과 재앙, 그 고통 앞에서 다시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심을 압니다. 당신의 완벽한 공평! 불바다, 물폭탄, 코로나 팬데믹은 악인과 선인을 골라서 덮치지 않는군요. 하지만 철저한 불공평이십니다. 이 재앙들과 재해는 가난한 이들과 오갈 데 없는 난민들에게는 고스란히 마지막 남은 한 닢의 희망마저 요구하시면서, 복구와 개발을 앞세우며 경제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마음과 정신에는 아직도 아무런 울림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주님, 오직 당신께만 신뢰를 두는 이들의 가난한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그만 “당신께 어울리지 않는”(창세 18,25)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세상과 인간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기억하시고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돌이켜주소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기후 위기를 알리고 있는 “어머니 지구”를 살리기 위해, 저희는 “마귀 들린 딸을 살린 가나안 부인”(마태 15,21-28)과 함께 더욱 굳건한 믿음의 기도로 동참합니다. 제자들의 만류와 예수님의 매정한 거절도 딸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절박함을 막지는 못했지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다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이방의 장벽을 부수십니다. 바로 그 주님께 “어머니 지구”를 살려 주시기를 그 “가나안 어미”의 심정으로 간곡히 청하며 매달립니다. 주님께서도 병든 어머니 지구를 마귀의 손에 버려두는 무심한 저희를 야단치실 것입니다. 그 어떤 모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파하며 부서지는 어머니 지구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개발 악령의 손아귀에서, 파괴자들의 손에서 지구를 살려주십시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우리 주님의 기쁨 가득한 생생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 예언자들의 소리와 선한 이들의 행동이 멈추지 않기를!

모든 피조물도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성령께는 어둠도 혼돈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은 꼴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어둠만이 덮인 땅 위를 감돌며(창세 1,2) 하느님 창조의 말씀을 기다리시는 인내의 영이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신 분께서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하시며 그 영을 우리에게도 넘겨 주셨습니다(요한 19,30).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얼굴”(이사 53장)입니다. 그 얼굴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십자가 아래까지 따른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영을 넘겨 주셨지요. 평화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어떤 것에도 절망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며 자연과 화해하고 용서 청하며 어머니 지구를 구하고자 온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나거나 들거나 모든 악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조르즈 루오 <십자가의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8월의 말씀

절뚝거리며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느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대명사격인(시편 24,6) 야곱이 어디서 어떻게 그분을 만났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세 28,10-22 : 32,23-33). “모태에서 제 형을 속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룬”(호세 12,4) 야곱이 하느님을 처음 만난 때는 “밤”이었습니다. 낯선 땅의 어둠도 두렵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과 앞날이 더 막막하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심판받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압도됩니다. 놀라우신 그분께 사로잡혀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다.”라고 경탄합니다. 우리 인생의 컴컴한 밤, 혼란의 어둠, 죄의 순간들 속으로 그분께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할 때, 하느님은 차츰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맛본(sapio) 사람을 그분께서는 현자(sapiens)로 만드신다.”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형을 피해 멀리 도망가던 야곱은 바로 그 밤에 이미 형에게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혈육으로부터 속임당하고 빼앗긴 에사우는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지요(창세 27). 사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에사우와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탓이 누구에게,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빼앗겼고, 상처받았고, 억울하다고 여길 때가 있지요. 욕구에 이끌린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축복을 잃어버릴 때도 있거든요. 에사우는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축복을 남겨 두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침묵을 향해 울부짖는 에사우의 밤도 야곱의 밤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아가의 신부와는 또 다르게 분노, 원한, 억울함 때문에 “잠들었지만 마음은 깨어있는”(아가 5,2) 숱한 밤을 지새우며,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나로서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릎을 꿇어 바닥에 엎드릴 때, 그 틈새로부터 하느님 은총의 빛이 쏟아지며 스며듭니다. 악이 바로 곁에(로마 7,21),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창세 4,7) “솜씨 좋은 사냥꾼”(창세 25,27)인 에사우를 유혹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결코 “카인의 나쁜 영”에(창세 4,1-16) 자신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넘어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하느님의 손에 내맡겼습니다.

“하느님을 대면”한 야곱과 에사우는 이제 “형제의 얼굴을 제대로 대면”합니다. 자신을 방어하고자 앞세운 가족들보다 앞장서 형에게로 다가가는 야곱,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얼굴이 동생임을 알아본 에사우, 서로를 향하여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춥니다. 뺏는 자와 빼앗긴 자, 그 모든 상처를 받아들여 아우르시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하느님 마음의 신비가 눈부십니다. 그 자비의 빛은 큰 아들, 작은 아들, 가난한 이, 장애인, 눈먼 이, 다리저는 이들을(루카 14,21) 다 함께 “그토록 그리운 아버지의 집”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시나요?

지거 퀘더 <요한은 신부처럼 단장한 새 예루살렘을 보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7월의 말씀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18). 그녀의 시공간은 한 처음 하느님 창조의 말씀을 기다리는 혼돈의 땅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열린 무덤이 있는 텅 빈 어둠의 정원, 그녀의 눈물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한 소리가 들립니다. “왜 우느냐?” “저의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뒤를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뒤”는 바로 “제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 반박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마르 8,33) 하시며 꾸짖었습니다. “베드로! 제 위치! 내 뒤로 가라.”는 말씀이셨지요. 마리아는 거듭 돌아서며(14절,16절) 사도의 사도로 탈바꿈합니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감사송).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가장 먼저 보신 것은 마리아의 눈물이고 가장 먼저 들으신 것은 당신을 찾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눈물과 소리는 우리를 그리워하시고 찾으시는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세상의 얼굴”을 보시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Marim(마리암)입니다. 그녀의 주체성을 빼앗고 공동체로부터 소외시켰던 “일곱 마귀”에게서 완전히 해방되고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신 자신의 참된 신원을 부활하신 우리 주님에게서 되돌려 받았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응답한 은총입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 ‘마리암’, 예언자이며 아론의 누이인 미르얌은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며 하느님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여자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탈출15,19-21).

태어난 어느 시점의 장소를 ‘고향’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고향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쏟아내는 사랑 가득한 통곡의 울음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가슴에 인장처럼 새겨진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열렬한 사랑은 거침없이 격렬하게 타올라 아침 노을처럼 붉게 번집니다. 빈 무덤이 있는 정원에 새로운 생명 나무가 우뚝 높이 서고,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고향 “에덴”이 회복됩니다. 그녀는 에덴의 참 주인이시며 정원지기이신 그분을 봅니다. 되살리시고 가꾸시고 꾸미시는 분.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아가 5,1). “제가 정원지기 주님을 뵈었습니다.” 찰랑찰랑 넘쳐흐르는 동녘의 햇살을 앞질러 증언의 노래가 달려옵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 나는 보았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다그치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우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니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시네.”

알브레이트 뒤러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6월의 말씀

마음이 마음에게

연은 무심한 듯, 도도한 듯! 머위꽃, 민들레, 제비꽃들이 길섶과 틈새마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비 내리고 그치면 마치 출발선에서 신호를 듣고 달리는 마라토너들처럼 죽순은 순식간에 동시 다발로 땅을 뚫고 불쑥 올라오는 그 봄도 지났습니다. 봉쇄 울타리 안에서도 “접속”이 “접촉”의 자리를 대신한 낯섦의 현실을 직간접으로 만납니다. 어깨를 토닥이고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며 음식을 먹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 평화 인사를 나누던 평범한 매일 매일의 일상이 너무나 소중한 축복이며 기쁨이고 선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감사드리며, 온 정성과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텅 빈 외부 성당을 사랑의 기도로 채웁니다. 가득 찬 사랑이 넘치고 흘러 벗들과 이웃의 마음에 가닿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욕망하고 모방하고 거듭 욕망합니다. 정작 우리를 필요로 하는 “강도 맞아 초주검된”(루카 10) 이웃은 외면하며 딴 길로 피하거나 혐오하며 밀어냅니다. 경계를 지켜야 할 다른 피조물에게는 폭력을 숨긴 채 다가갔습니다. 용서를 청하오니, 저희 걸음을 되돌리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 11장). 사랑이시며 의지이신 성령이시여, 저희 눈을 밝혀 주시어 당신 마음을 알게 하여 주시고, 당신 뜻을 행하는 도구로 써 주소서. “광야”(호세 2,16)로 불러내시어 다정하게 들려주신 그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지금은 없고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는”(묵시 17,8) 헛된 자본과 권력의 우상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당신께로 돌아서기를”(사도 14,15) 지극하신 인내와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깨우십니다. “라자로야”(요한 11,43). “마리아야”(요한 20,16). 죽음과도 같은 어둠과 “내 뜻”의 애착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생명, 빛, 진리에 함께 머물자고 초대하십니다. 새벽의 어둠을 밝히는 별을 보아요. 꽃과 함께 춤추는 나비의 날갯짓 소리를 들어보아요. 무관심했던 이웃의 얼굴과 손을 보아요. 주님의 소리이고 주님의 얼굴이지요. 참 주인이시고 아름다운 목자이시며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시고, 생명을 얻고 또 얻는 푸른 풀밭으로 이끄십니다. 당신 친히 앞장서 가십니다. “주님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으니,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부분 <세례자 요한>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5월의 말씀

위로(con_solatio)
함께 있기

“땅

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창세 1장). 어김없이 땅은 푸른 싹과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게 하고 온갖 새들이 풀숲과 나무들 사이로 포로롱 포로롱 훨훨 쑤우웅 날고, 그 날개짓 소리 또한 얼마나 고운지요. 머위잎 가장자리엔 밤새 빚은 이슬이 보석처럼 매달리고, 쇠뜨기는 빛의 이슬로 작은 초록탑이 되었네요. 낮추어 다가가면 거저 흘러넘치는 깨끗함이여! 경이로움이여! 당신께서는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구나,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인간은 폭력과도 같은 재앙을 겪으며 많이 아픕니다. “가까움”이 멀어진 2020년 봄, 가족들의 방문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노약자분들과 아픈 이들,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주님 품으로 떠난 이들, 한끼 식사 도시락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 봉쇄의 울타리 안에서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의 눈물로 “하느님의 기억”을 두드리며 기도합니다. “이는 나에게 노아의 때와 같다. 노아의 물이 다시는 땅에 범람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맹세하였듯이 너에게 분노를 터뜨리지도 너를 꾸짖지도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이사 54,9-10).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창세 1,28)고 말씀하시며 복을 내리셨는데 … 어찌된 일입니까? 코로나19, 메르스,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라는 기이한 바이러스가 인간 속으로 들어와 괴롭힙니다. 우리가 괴롭힘을 당하기 전에, 자연을 부수고 망가뜨린 인간의 폭력이 있었군요.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 폭력의 사슬에서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면”(요한 8,9)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진리와 마주 서게 되겠지요. 소외, 차별, 억압, 착취의 구조에서 한 사람이라도 먼저 그분께로 돌아서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혁명은 점차점차 또한 재빠르게 전염되겠지요. 우리 사는 세상에 봄풀마냥 기쁨과 희망이 출렁출렁 다시 넘쳐 흐를 것입니다. 구원받은 질병, 구원받은 죽음을 믿음 안에서 보게 되겠지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장). 우리의 희망입니다. 허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희망,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이기도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타락하여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창세 6장) 인간과 세상을 살피시고 기다리시며 한 사람 “위로자 노아”를 찾으셨습니다. 당신의 진노, 대홍수가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지개가 있고 하느님 자비가 있습니다.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5장:66장). 구원하시는 하느님 위로의 궁극인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돌이키면 모든 좌절과 절망을 딛고 다시 태어나게 되겠지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지키면 나와 아버지는 너희에게 가서 너희와 함께 살 것이다.” 위로자 성령이시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굳센 믿음을 더해 주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15C. 크레타 <달콤한 입맞춤의 성모>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4월의 말씀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땅

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창세 1,2) 있었던 그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들고 완성하셨습니다. “생명의 숨”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온갖 살아있는 피조물 속에 깃들어 빛이 생기고 땅에는 푸른 싹이 돋았습니다.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는 빛이 생기기 전의 어두운 심연, 꼴이 갖추어지지 않은 죽음 같은 혼돈 또한 알고 계시는 증인이십니다.

고통 받는 시편 예언자는 통곡과 절망을 하느님께 쏟아냅니다. “저는 죽은 이들 사이에 버려져 마치 무덤에 누워있는 살해된 자들과 같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십니까? 무덤에서 당신의 자애가, 멸망의 나라에서 당신의 성실이, 어둠에서 당신의 기적이, 망각의 나라에서 당신의 의로움이 알려지겠습니까?”(시편 88). 그는 “어둠만이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는 말로 기도를 마칩니다. 여전히 고통 중에 놓여있고, 아직도 슬프고, 의식없이 중환자실에 누워있거나 죽음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우리 믿는 이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사흘 날에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보다는 “저승에 가신”(사도 신경)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목숨이 저승에 다다라 주님의 손길에서 떨어져 나가”(시편 88)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바로 그 사람 곁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선포가 오히려 복음이 아닐까요? 저승에 내려가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분명 친히 저승문을 여시어 땅에서 푸른 싹이 돋아나듯, 하늘에서 번쩍 번개가 치듯 당신의 자애와 당신의 기적을 알리실 것입니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에 일곱 번 시편으로 기도하는 우리 역시 “심연이 심연을 부르는” 크고 작은 죽음, 하느님으로부터 내팽개쳐지는 지독한 아픔을 직면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그때에야 비로소 나 자신과 내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맡기고, 매달리며 온전히 의탁하게 되더군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숨을 넘겨”(요한 19,30)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숨”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받는 제자의 깊은 울음과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스승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아무런 희망없이 그저 머물며 인내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목격합니다. “바라봄”은 보호자 성령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내 안에,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남아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남아있겠다. 내가 너희의 고통 안에 남아있듯이 너희도 나의 죽음과 고통 안에 남아있으라.”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요한 19,34)은 우리의 눈물들을 거두어 모든 것을 되살리는 강이 되어 흐릅니다. 이제 우리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의 모든 샘은 주님 안에 있도다.”

케테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3월의 말씀

언제까지
까닭없이

“주

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번민을 제 마음에 날마다 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시편 13). 시편 예언자의 고통이 육체적 질병인지 약자가 겪는 사회 구조적 불평등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친구, 가족, 배우자로부터도 이해는커녕 오해받고 질책당하고 버림받아,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는 소외감 때문이지요. 이것은 하느님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잊힐 것 같은 절망감입니다.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2장).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살피시던 날들”(욥 29,2)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품은 채 하느님의 말씀을 재촉하며 침묵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욥 31,35).

“까닭없이”(욥 9,17) 상처는 더하여지고 숨 돌릴 틈조차 없지만 욥의 부르짖음은 절망의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헐벗은 채 버려진 이, 덮을 것도 없는 가련한 이, 불의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과 연대합니다. 유죄를 인정하고 용서받으라는 친구들의 거짓된 위로와 회유, 술책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창세 6,6)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갈 의롭고 흠 없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한 여인을 알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부서진 몸을 끌어안고 시커먼 흙 속에 파묻힌 진실을 밝혀 드러낸 어머니. 그녀는 폭풍치는 눈물의 강을 거슬러 “또 다른 용균이들”의 어머니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무죄한 이의 고통은 결코 “까닭없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시편 13,4).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며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홀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께 나아가 자신 안으로 어머니를 맞아들이면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희 선조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고 당신을 신뢰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 감추지 않으시고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리라.”(시편 22).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아내에게 조롱받는 욥>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2월의 말씀

영원을 만지다.

“너

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말라 3장). 애타게 기다리던 주님, 성전이신 바로 그분께서 성전에 당신을 드러내실 때 성전의 기둥마냥 의연하게 굳건히 서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들, 천사의 소리에 순명하는 이들, 말씀을 위해 침묵하는 이들, 가난한 어둠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입니다. 향긋하고 좋은 포도주는 입술을 적시고 입 속으로 흘러들 듯(아가 7장), 의롭고 경건한 시메온의 질긴 그리움은 마침내 바로 그 곳에 닿았습니다. 성령 안으로 이끌린 그는 “하느님의 약속, 임마누엘”께 두 팔을 어좌로 내어드립니다. 시메온과 안나, 이미 육신의 눈은 흐려졌으나 한계 안으로 들어오시는 영원의 깊은 심연을 응시합니다. 올곧게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눈은 위로의 빛으로 밝아져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오늘, 구원의 큰 빛을 내 눈으로 보노라.”(루카 2장).

사부 베네딕도는 “수도승은 비록 자기 부모로부터 어떤 물건이 보내왔더라도, 먼저 아빠스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감히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소유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서원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승들은 몸과 마음을 원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린 후, 이제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도록, “주님의 뜻”을 지니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지요. “제 영혼 전부를 쏟아내어 당신께 감사드리며 거룩한 서원을 발하면서 저를 온전히 당신께 맡깁니다.”(복녀 가브리엘라). 하루하루 서원을 채워가노라면 때론 엎어지고, 오롯이 서 있는 그들 이름을 부르며 전구를 청합니다. 성전 마룻바닥, “놀랍고도 새로우며 낯선 영원의 순간에 접촉한 그날, 종신서원 부복”의 은총과 공동체 자비의 그릇으로 샘물을 퍼 올립니다. 여전하나, 새로워진 일상을 열고 닫으며 설렘과 두려움, 떨림을 회복합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어느 날, ‘나는 누군가의 모든 것일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의 날선 칼날에 마음도 정신도 찢겼습니다. 고개 들어 시메온의 예언(루카 2,35)을 듣는 성모님을 바라봅니다. 꿰찔린 영혼은 침묵 안으로 들어가고, 흔들림 없는 어머니의 겸손 앞에서 나의 교만은 흩어집니다. “너는 주님의 전부이며 주님 또한 너의 모든 것이란다.” 내 손을 당신 가슴의 눈물로 씻어 주시고 영원을 만지게 하여 주십니다. 함께 다시 걷게 하십니다.

두초(Duccio di Buoninsegna) 14C <성전에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