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7월의 말씀

그저 아름다운 이 아름다움이여!

절이 유난히 성큼성큼 앞질러 다가옵니다. 지난 봄날엔 산야초발효액을 담그기 위해 새순과 여린 야초(野草) 잎들을 뜯어 설탕에 재우고, 비누 재료로 사용할 어성초, 약쑥도 햇볕 잘 드는 곳에 두었더니 바람, 달빛, 별빛이 한 몫 거들어 잘 건조되었습니다. 바수고 고운체에 걸러 병에 담으니 넉넉합니다. 절로 신명나게 자라는 풀들이 참 고맙습니다. 봄날 아침, 수도원 경내를 다니며 채취하다보면 그저 걸음을 자꾸만 멈춥니다. 해 뜨면 사라질 이슬을 머금고 온전하게 충만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들풀과 함께 경탄하면서. 갈퀴나물에 벌레가 찾아오고 콩제비꽃이 하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면 야성(野性)을 잃지 않는 풀들은 곧장 숲을 이룹니다. 인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는 한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땅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매실 수확 후 키위밭 풀베기를 하는 날, 돌멩이 하나 툭 튀어 오르더니 무릎을 때립니다. 덕분에, 베어진 풀더미를 베개 삼고 누웠습니다. 키 큰 풀들 아래 숨어 있던 병풀잎이 싸한 향기로 얼굴을 건드리고, 바다를 굳혀 만든 하늘 귀퉁이의 구름자락이 나무 잎을 헤치고 내려오니 “주인”께 순종하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로움이 덮치는 듯. 아주 잠시 땅과 나, 하늘이 어디론가 함께 빠져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풀도, 흙에서 난 사람도, 구름도. 그러나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희망 속에 사랑의 눈물 속에 우리의 시간 한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풀, 흙, 사람, 하늘이 서로 서로 기대어 “우리”가 됩니다. 하나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니 더 이상 무상(無常)은 없습니다. 무상의 정지, 감히 영원을 맛보게 해 주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실용의 등급’과는 상관없이 마냥 있어주어 고맙고 그저 아름다운 것들은 눈물을 품고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 마리아’(마르 16장)도 모든 다른 제자들처럼 실패한 예수님을 버리고(마르 14,50)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녀는 아름다운 사랑을 얻기 위해 빈 무덤이 있는 황량한 정원에 홀로 서 있습니다. 어두운 절망과 고독 속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이 “닫힌 정원”의 문을 두드린 것일까요? “정원의 주인”(아가 5,1)께서 되살아나시어 “왜 우느냐?”고 하시며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빵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어 온 세상을 향하여 기뻐 외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여름입니다. ‘필요의 논리’에 저항하며 몸의 노동을 묵묵히 행하는 이들의 등에 소금꽃이 피고 있습니다.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며 “좋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소금꽃의 향기를 맡으십니다. 버림받아 밀려난 이들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십니다. 우리도 바로 그곳에서 함께 주님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제대 꽃꽂이 렘브란트 1638 런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6월의 말씀

놀라운 얼굴

해가 반 고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입니다. 일곱 번의 대축일, 어느 때보다 주님의 거룩함과 은총이 하늘 햇살처럼 쏟아집니다. 전례 안에 현존하시며 살아 계신 주님을 받아 모시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는 겸손한 고백을 환호로 터뜨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구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 기쁨과 슬픔의 씨줄 날줄이 큰 무리없이 잘 직조되고 있을 것이고, 또 누구는 난데없는 돌풍을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이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후자의 처지에 있습니다(마르 4,35-41). 하늘과 바다가 한데 엉기어 거센 바람과 풍랑으로 이미 돛대는 찢어지고 물고기마냥 큰 입을 벌리고 놀란 배는 곧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후광을 쓴 제자들은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는데 한 제자가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상황에 잠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도 주무시더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제자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나십니다. 태연하게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과 호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고요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안의 모든 것도 고요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우리의 깊은 심연의 공포, 불안, 두려움, 걱정의 자리 바로 그곳에 이미 생명의 샘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그분께 손을 내밀어 옷자락에 닿기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평화가 스며듭니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숨어버리신 듯 아무리 찾아도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다면, 달려가 그분의 새벽을 흔들어 깨웁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위험에 처한 우리에게 물위라도 마른 땅처럼 달리며 어김없이 오십니다. 허나, 놀라지 않도록 합시다. 도우러 오시는 주님께서는 힘센 사자나 날개 달린 천사가 아니라 심하게 상처입으시어 오히려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오십니다. “풍채도 위엄도 바랄 만한 모습도 없는”(이사 53,2) 바로 그 얼굴이 우리를 구원하는 얼굴입니다.

표지 사진 :독일 메셰데에서 나온 히타-고사본(1020년경)<바다 위의 폭풍>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5월의 말씀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벽, 잠에서 깨우시니 독서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갑니다. 움직이는 발과 눈을 뜨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께서 기다리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니 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은 복도에 달빛이 넘실거리고 안마당 위 하늘엔 별이란 별은 다 모여 멀리서 가까이에서 주님을 찬미하는 충만한 고요가 흘러넘칩니다. 우리 자매 중 어떤 이는 이 푸른 새벽, 가까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모습에 압도당하여 입회하였다고 합니다. 보물을 발견하였기에 가진 것 다 팔아 그 보물이 묻힌 밭을 산 것이지요. 불에 타는 데도, 타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주님께서 부르십니다(탈출 3장).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당신 이름의 네 글자를 얼굴에 드러내시며 오직 모세만을 위하여 충만한 은총과 넘치는 기쁨 그 자체로 홀로 서 계십니다. “있다”는 놀라움, 전혀 뜻밖에 거기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있음”에 경탄하며 대답합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절묘하게 만나는 영원의 순간입니다. 불꽃이 닿기만 해도 금방 타버릴 것 같은 덤불 속에 사시는 분께서(신명 33,16) 우리를 방문하시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림에서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키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말라 2,10). 모세를 부르신 주님께서 놀랍게도 오늘의 “나”를 건드리십니다.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나”를 찾으시며 당신 가까이로 부르시고 사랑으로 끌어당기십니다. 온갖 풀과 꽃, 나무와 나무가 서로 기대며 출렁이는 신록의 아름다움을 빚는 5월, 잠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나의 크고 작은 일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 얼굴을 발견할 것입니다. 구하여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고, 비탄을 춤으로 바꾸어주시는 주님께 시편 예언자와 함께 감사 기도를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시편 3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손을 뻗치시어 포옹하시고 나를 찾아 헤매시며 발견해 내시고 나를 불러주시고 초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형제 자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도 꼭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정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본회 전총장 베르나르도 올리베라). 부르시는 주님께 “예”라고 응답하며 그분의 길을 따릅시다. 두려움과 떨림은 어머니 성모님께 내어 맡깁시다.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아무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으시어 모두에게 넘치도록 충만한 당신의 선물을 누르고 흔들어서 후하게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성당 제대 꽃꽂이 마르크 샤갈 (1968) <모세와 떨기나무>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4월의 말씀

가슴에 묻힌 씨가 꽃피리라 

“정

녕 하느님께서는 좋으시도다.”(시편 73)라고 시편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아름다운 고백은 신앙마저도 잃을 만큼 영혼 안에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왜 “좋으신 하느님”께서 마음 깨끗한 이들, 올바른 이들이 죽음에까지 내몰리는 절망과 부조리를 보고만 계시는지 예언자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습니다. “정녕 나는 헛되이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고 결백으로 내 두 손을 씻었단 말인가? 날마다 고통이나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이나 받으려고?” 수도원 길섶, 꼭 그 자리에 봄 풀꽃이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렇듯이 4월이면 “세월”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깊은 강물같은 아픔이 출렁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 다가가 손이라도 잡으면 온 몸에서 눈물이 바람에 마주 선 꽃잎처럼 뚝뚝 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지만 그 어떤 것도 무의미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더 가난하고 아프고 더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마음 속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폭력을 옷 입은 이들” “교만한 이들”이 오히려 잘 사는 암울한 세상,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겨자씨만큼의 작은 희망을 붙잡고 함께 일어서게 하여 주십니다. 억울한 고통과 죽음 앞에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라며 외면하지 않고 책임을 나누고자 연대하는 선하고 마음 따뜻한 이들과 진리를 찾는 이들을 모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무죄한 이들의 희생은 하느님과 세상을 더 가깝게 이어주는 길이 됩니다. 그 길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세 여인은 성 금요일의 통곡과 어둠을 침묵의 가슴에 묻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마르 16장).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세 여인이 바라보는 곳은 절망의 깜깜한 무덤 안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놀랍고도 새로운 빛의 세상이 열렸습니다. 눈부시고 두려워 아직은 보아도 알지 못하지만, 곧 믿고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갔다가 그대들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그대들을 다시 보게 되면 그대들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시편 예언자는 괴로움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며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3). 주님께서는 이 행복에로 우리를 매일 초대하십니다.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우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희망하신 대로(pro spere) 이 땅에 당신 번영(prosperity)의 꽃을 피우소서. 저희가 주님의 향기가 되어, 영원에 이르는 생명의 신비를 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성당 제대 꽃꽂이 윌리엄 아돌프 부기로 (1825- 1900) <무덤을 찾은 여인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3월의 말씀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 나와

“행

 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의로움은 길이 존속하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정녕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인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은 주님을 굳게 신뢰하네.”(시편 112). 시편 예언자의 이 노래에서 요셉 성인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보편적인 윤리, 도덕, 율법을 훌쩍 뛰어 넘은 사랑의 자리에 영원히 현존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을 내려다보는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듯이(창세 18,22), 낭패와 부조리한 현실을 맞닥뜨리는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판단, 세상의 가치, 내적 욕망을 어떻게 거슬러 저항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약자의 생명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배우라고 초대합니다. 요셉은 “남모르게”(마태 1,19)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어쩌면 의로운 그는 “더러운” 일에 연결되고 쉽지 않았나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시어 약한 것을 선택하시는 주님께서 요셉의 꿈에 당신 천사를 보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전혀 다른 길, 낯선 길을 선택합니다. 외로웠을 것입니다. 호적 등록을 위해 본향 베들레헴에 갔었건만 아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몸 누일 여관방조차 얻지 못했습니다(루카 2,1-7). 자기 자신을 넘어(metabasis) 타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준 요셉을 하느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하여 보호하십니다. “위험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시편 91). 꿈꾸는 능력을 지닌 요셉은 일몰, 밤의 시간에 하느님을 닮지 않은 방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을 닮은 길을 걸어갑니다. 창조에 버금가는 능동적인 요셉의 숨은 응답이 없었다면 어머니 마리아와 아직 태중에 계신 우리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기에 자신에게 일어난 독특하며 유일한 일을 진리 뒤편으로 묻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소명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예”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경계를 정하여 소수자와 약자를 배척하며 심지어 혐오하는 이 시대야말로 “요셉”이 필요합니다. 타자를 보호하는 요셉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두려워하지 마라.”고 인사를 건네시고, 주님 닮은 길을 따르도록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밤중과 새벽에는 아직도 제법 찬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늦둥이 매화꽃잎이 허공에 기대어 향기를 뿜어 올리니 순간 하늘이 열리는 듯.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에 기대어 함께 정성껏 기도 올립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 속에 새겨져 있나이다.”(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화답송). 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큰 밭 매화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2월의 말씀

 

번갈아 일어남찾아오심과 찾음 

경을 펼치면 온통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내 얼굴을 찾아라.” “주님, 당신을 찾고 있나이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우리를 찾고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찾아야겠지요. 허나, 성 베르나르도도 말하지만 우리의 찾음은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께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내시지만 다 볼 수도,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매번 새롭게 이끄심에 의지하며 한 걸음을 뗄 뿐입니다. 알았던 것이, 알아야 할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않으며, 부재와 현존의 시간이 계속될지라도 인내로이 숨바꼭질을 해야 하겠지요. “번갈아 일어남”(alternatio)에 대해 말하는 사부에게서 지혜를 얻습니다. “번갈아 일어나는 것 가운데, 마음은 그것들 중 하나에 더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동요되고, 두렵고 굉장히 격앙된다. … … 그분을 붙잡아 두려고 생각하자마자, 그분은 빠져나갔다. 그저 갑자기 그분은 붙잡힘에서 다시 벗어나기 때문이다.”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아름다우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또한 아름다운 주님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오른쪽 그림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조금 당혹스러웠습니다. 우선, 제목이 ‘승천’이 아니라 ‘변모’입니다. 가운데 바위를 두고 위와 아래가 너무 달라 두 그림을 붙여 놓은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다음 날 내려오시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를 ‘제자들 앞에서’ 고쳐주십니다. 이를 전하는 루카 복음 9장 28절부터 43절까지의 말씀과 그림을 함께 번갈아 천천히 읽고 보기를 반복하면 겹겹의 층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그림 그리고 각자가 나누게 될 마음의 대화를 기대하며 감히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시면서 영광에 싸여 아름답게 변모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제자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힘이 있고, 또한 산에서 내려와 추하다고까지 느껴질 우리 현실의 세상으로 오셔야 합니다. 마음이 사로잡히고 정신이 압도당한 아름다움에만 머무를 수 없고, 그림의 아래쪽을 외면하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적나라하게 묘사된 우리의 현실이 불확실하며 추하고, 아무런 인간적인 대책이 없어도 우리는 그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리가 진정으로 찾고 닿아야 하는 깊이와 궁극의 희망은 어쩌면 부재와 상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치유하실 분은 위에 계신 우리 주님이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을 따라가, 영광에 싸여 구름 위에서 하얗게 빛나시며 변모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팔은 십자가에 매달리실 모습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의 아름다우심이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2월, 주님을 찾는 여정에서 또 하나의 Alternatio를 발견하신다면 좋겠습니다.  라파엘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16c, 410×279cm, 바티칸 박물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월의 말씀

 

새로움 

해, 우리 주님의 흘러넘치는 축복과 사랑이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저희도, 여전히 계속되는 시간경 기도이지만 온 마음, 온 정신을 다시 여미어 찬미, 감사, 탄원의 시편기도가 주님께 올리는 “새로운 노래”이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춥고 어두운 겨울, 따스함과 넉넉함이 경계와 변두리의 구석구석에 아낌없이 나누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곁에서 이해받기를, 돌보아주기를, 기억해주기를 기다리며 이웃으로 계시는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렘을 떠나 “울부짖는 짐승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인”(신명 32,10) 광야의 땅 시토에 정착하여 1098년에 창립된 시토회는 처음에는 항상 “새수도원”(Novum Monasterium)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새로운 문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형성된 새 정신으로 창립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 수도승들은 거슬러 사막으로 갔습니다. 샘솟는 물을 마시고픈 목마름이 그들을 복음과 규칙의 원천으로 이끌었습니다. 첫사랑, 처음의 영감을 되찾은 것입니다. 시토회 소창립사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새수도원에서는 지금까지 미적지근하여 철저하게 지키지 못했던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이제부터는 더욱 엄격하고 완전하게 준수하기를 원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듯이 몰렘으로 돌아가고픈 날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였기에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엎드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은 날마다 새롭게 인내와 희망으로 일으켜졌습니다.느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듯이 무섭고 황량한 시토에 당신을 열렬하게 찾는 이들을 많이 불러 주셨습니다. 규칙과 수도원, 형제들을 사랑한 창립자들이 품었던 희망의 미래 안에 들어선 우리도 사막의 목소리, 사막의 축복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소망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소식이 없습니다. 사랑이 당신을 다시 새롭게 하리라는 것 외에는.”(12세기 어느 시토 수도승). 영원한 현재이시며 항구한 새로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리라 믿으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저희가 그분을 닮아 새로워지게 하소서.”(주님 세례 축일 본기도에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새해 새날을 시작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늘의 여왕,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가까이 계시지만,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위험과 환난 속에서 길을 잃고 있을 때 성모님께 다가가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면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고 오는 비둘기”(창세 8,11)처럼 주님께로 향하는 기쁨과 희망을 열어주십니다.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시고 말씀을 품으셨던 어머니 성모님께 기도와 신뢰를 배우도록 합시다. 우리 일상의 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지혜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표지 사진 : 수정 수도원 제대 꽃꽂이  <성가정> 렘브란트.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에레미타쥬 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2월의 말씀

 

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출 길 없는 갈망, 깊은 그리움으로 찾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습니다. 아픈 이들은 건강을, 약한 이들은 용기를, 가난한 이들은 부를, 어둠에 갇힌 이들은 빛을 기다리며 찾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영원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다른 갈망과 필요가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습니다. 오직 당신 만드신 세상과 사람에 대한 끝없는 사랑 때문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요셉에게는 주님의 천사가 “꿈”에 알려 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움직이면서 아기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였습니다. 들에 사는 목동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는 무력해 보이고, 세상의 풍요 앞에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아기”가 되신 하느님의 길은 이 세상에 참 평화와 사랑을 가져 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하여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을 과연 어디서 어떻게 알아 뵙고 희망과 기쁨을 얻고 있는지요.례자 요한은 수백년 전에 부르짖었던 예언자 이사야의 소리를 자기 영혼 안에서 들었습니다. 그 응답으로 자신과 오시는 주님에 대해 아름답고 겸손한 증언을 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런데 불가능이 없으시고 무한히 크신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먼저 그렇게 작아지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엄청나고 놀라운 일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하늘보다 크고 높으신 하느님께서 작아지고 낮아지시어 우리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분께서 마리아의 응답(Fiat)을 듣고서야 “큰일”을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목숨마저 잃게 되는 터무니없는 지점에서 마리아께서는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굽어보시는 하느님께 영혼을 통째로 맡긴 것이지요.란하여 현혹시키는 온갖 불빛과 소리 속에서 어떻게 천사의 음성을 듣고 별을 보며 믿음의 길을 따를 수 있을까요. 영혼을 깨울 사랑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로 세상에 오신 그분,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 안에 숨어계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돌보고 만지며, 주님을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거저 받는 은총의 초대입니다. 영혼을 꿰찔리는 고통을 허락하신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성탄의 축복과 믿음의 복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구세주의 탄생, 1490년경, 런던국립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1월의 말씀

 

두려움 너머

11월, 전례력으로는 2018년 나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날수 셀 줄 아는 슬기로움”을 얻고자 했던 시편 예언자의 갈망이 예사롭지 않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얼굴들, 감사의 인사를 미처 다 하지 못한 일들, 밍밍하거나 알알하여 미적거리다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둔 부끄러움들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놀라운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증오와 불신, 긴장의 빗장이 풀리고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렸으니 더 큰 자유와 평화를 향하여 멈춤없이 걸어가면 좋겠습니다.계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폭력과 악의 사슬은 역시 한계없는 용서, 순도 높은 비폭력과 사랑으로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아틀라스 수도원의 일곱 형제들”도 그 진실의 증인입니다. 그들은 1996년 5월, “이슬람 무장 집단”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베르나르도 올리베라,「하느님의 일곱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살아있는 희망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고 상처받고 갈라지고 흩어지는 이 세상에 그들은 무슨 말을 전하고 있을까요? 폭력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무의미한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영광스러운 수난”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티앙 원장의 영적 유언과 크리스토프 신부의 일기에서 해석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의 생명은 하느님과 이 나라에 바쳐졌음을/모든 생명의 유일한 주인께서 이 폭력적 출발을 외면하지 않으셨음을/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나의 가족이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 그때가 오면/하느님의 용서와 나의 형제들의 용서에 연대하며/나를 죽일 그 사람을 온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영적 명료함의 한 순간을 갖고 싶습니다.”(크리스티앙 원장의 영적 유언). “당신께 종이 될 은총과/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은총을/이 날 이곳에서/청하오니/평화를 위한 몸값으로/생명을 위한 몸값으로/예수님 나를 끌어당기소서/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의/기쁨 안으로”(크리스토프 신부의 일기).는 12월 8일, “하느님의 일곱 사람들”인 우리 형제들이 시복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 더구나 그 자체가 “기적이며 기도”인 순교를 기억한다는 것은 일상에 파묻힌 삶의 “유의미”를 빛 안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며 그 갈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바다가 요동치듯 뒤흔들리는 고통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나 질병으로, 헐벗고 배고픈 가난으로, 뜻밖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피터 포르부스, 16c, 브뤼게의 어부 3부작 중 오른쪽 날개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0월의 말씀

 

다가가 멈추고, 돌봄

머니 성모님께서 매듭을 풀고 계십니다. 한 천사가 얽히고 묶이고 뒤섞인 매듭을 성모님께 올려 드리고, 성모님께서는 온갖 자애와 지혜의 손길로 그것을 곱게 풀고 펼치어 다른 천사를 통하여 내려 주십니다.정 수도원 미사에 피조물인 새들도 찾아옵니다. 내려온 하느님의 선물과 축복에 대해 사제가 “저희도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한 목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나이다.”라고 기도하고 다함께 환호를 올릴 때 새들도 고양되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 높은 데서 호산나!”라는 천사의 찬미 노래는 우리와 새들의 목소리와 합하여져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천사? 때마침 새들이 요란하게 울었겠지.’라고 생각하시나요? 허나, 눈맑은 이는 천사 날개자락의 빛도 보았답니다.수한 영인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고 날개 달린 천사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천사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살펴봅시다.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힘들어 하는 이, 절뚝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이,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소외된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나의 손을 내밀고, 기댈 어깨를 내어 주고, 그들의 소외와 고통을 마음에 담아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라고 말을 건네어 봅시다. 신비롭게도, 바로 내 곁에 내 가까이 “나의 천사”가 늘 함께 있었던 기억이 투명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만일 천사가 나에게 머물지 않았다면, 만일 내가 그때 그 천사의 보호와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되살아 솟아오르는 이 사랑과 감사의 벅찬 기쁨은 우리 모두를 다시 다른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되도록 재촉할 것입니다. 우리 사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천사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현존합니다. 그들의 현존과 보살핌에 대해 공경과 신뢰심을 품어야 합니다.”절과 절망의 순간에 우리 나약함의 벽은 자존심, 비겁함 때문에 두껍고 강합니다. 어머니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며 인내로이 약함에 주저앉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요. 이것저것 섣부르게 찾아 헤매다 보면 헛된 우상에 빠지는 더 큰 위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무력하게 견딘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뚫고 천사를 보내십니다. “일어나 먹어라.”(1열왕 19,5). 천사는 두려움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하시고 빵과 물을 주십니다. 다시 일어나 사랑의 산으로 향할 때까지.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 1700 / 독일 성 베드로 암펠트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