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1월의 말씀
공감이 열어주는 세상
시대는 슬픔을 공감하는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터졌을 때 소위 “극우 매체”가 “오뎅”이라는 말을 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소름끼치는 전율, 슬픔, 분노가 섞인 감정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덮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그 깊이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들 아는 이야기 중에 ‘밥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가족의 테두리에서조차 경계가 분명한 핵가족의 삶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은 생소한 것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빚은 공감 부족의 세상 안에서 길가던 행인을 향해 자신의 울분을 쏟아붓는 ‘묻지마 살인’도 이제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린 참 난감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와는 다른 시선이 감지되는 곳도 있어 세월호나 이태원 사건, 무안 항공기 폭발 사고가 터지자 많은 이들이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이들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로 느끼는 이들이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이들의 존재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지, 어쩌면 우리 자신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이렇게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희망을 열어줍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도 이런 공감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곧바로 “클레멘타인” 노래가 제 귀에 울려퍼졌습니다. 누가 설명해 줄 필요도 없이 이 노래 가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아픔이 공명되게 해주는 애절한 내용과 그에 딱 어울리는 음율로 듣는 이의 마음 속으로 스며듭니다.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더욱이 순수한 사랑의 상실로 인한 사랑은 큰 상처도 입히지만, 그 상처를 받아들일 때 놀라운 치유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란 태초 이래 한 번도 없었건만 세상이 슬픔으로 무너진 적이 없고, 오히려 그 슬픔을 통해 새로운 것이 생겨남을 적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 노래 가사에 이어지는 장면 같지 않나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한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양 빛 환한 바닷가와 화사한 분홍빛 옷차림의 소녀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둠이 가득 내린 집안은 좀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비가 됩니다. 어부의 방인 듯한데, 오른쪽 창문에 걸쳐 걸린 그물이 마치 귀신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물은 보통, 집안이 아니라 집밖에 널어 말립니다. 그리고 창 바로 밑 도마 위에는 손질하다 만 생선이 머리가 잘린 채로 붉은 피를 머금고 있는 것이 섬뜩함보다는 왠지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마치 그 아버지의 마음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침침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 묘하게 어울리게 창틀에 싱싱한 꽃들이 있는데, 이제는 아버지 곁에 없는 아이가 무척 좋아했던 꽃이리라는 짐작이 들지요. 이런 아버지를 아이가 한없는 그리움을 담아 창밖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던 세상은 이 아버지에게 늘 저렇게 환한 세상이었겠지요. 그 환한 세상을 송두리째 앗겨버린 아버지의 애끓는 슬픔을 화가는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그리지 않고도 절절하게 전달되게 만듭니다.
아버지의 슬픈 모습이 한 자락이라도 그림에 나왔다면 오히려 애끓는 슬픔은 그저 당연한 일로 그치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아버지의 슬픔은 세상 수많은 상실의 아픔 중 하나가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바로 우리의 슬픔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화가의 공감하는 마음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세상을 살리는 힘임을 믿습니다.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34-1890, 어부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