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4월의 말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처음, 땅은 텅 비었고 어둠이 덮인 깊은 심연 위에는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인 듯한 곳에서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리고 마지막 남은 숨을 맡기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의 재앙 앞에서 자식은 속수무책이었건만 하느님께서는 함께 가까이 계셨군요. 몸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살과 피를 남김없이 내어주고 이제 텅 비었습니다. 만지면 산산이 부서질 것같이 한 점 무게도 없고, 붙잡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빈손, 오직 통째로 삼킨 그리움만 목에 걸려 있습니다. “끝”인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들이 본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투명해지는 어둠을 뚫고 소리가 들립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아름답구려.”(아가 4장). 신랑은 당신에 대한 애틋하고 오롯한 그리움을 간직한 신부를 맞이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경이로운 돌문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그리움으로 열렸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댑니다(마르 5,24-34). 주님은 그 모두에게 한결같이 좋으신 분이시며, 자비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 위에 미치십니다(시편 145,9).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당신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먼저 굽어보십니다(이사 66,2). 그 군중 속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우상에 흔들리며 절뚝거리던(1열왕 18,26) 걸음을 멈추고 생명이신 한 분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제는 그분 뒤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내맡깁니다. 그러자 그분은 영원에서부터 마치 처음처럼 사랑으로 다가오시며 말을 건네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하늘은 땅에 닿아, 하느님을 외면한 채 쏟아부었던 헛되고 무의미한 고생을 유의미로 바꾸어 주십니다. 치유된 여인은 분명 주님의 그 눈길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파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정한 말을 건네고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은총은 그렇게 닮아가고 부활의 “알렐루야!”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니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백성의 큰 무리도 따라갔고, 그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도(루카 23,27), 자신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그녀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고통에 다가갔습니다. 자신의 눈물보다는 타인의 눈물과 땀, 피를 닦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수건에 당신 얼굴을 인장처럼 새겨주십니다. 고통(passio)의 땅에서 연민(compassio)을 발견하는 용기있는 이들에 의해 땅은 열려 구원의 꽃이 피어납니다(이사 45,8). 바로 이 부활의 자리, 인간의 울음과 하느님의 울음이 만나 의로움이 열매 맺습니다. “누가 내 헐벗은 몸에 옷을 입혀 주었느냐? 누가 굶주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누가 내 갇힌 몸을 풀어 주었느냐?”(마태 25,31-46). 고통을 돌본 이에게 새겨진 그 얼굴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빛이 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엘 그레코 / 베로니카의 베일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16C) / 톨레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3월의 말씀

아빠, 아버지.

음서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예언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어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시편 37,31) 이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속에”(시편 40,9) 즉, 내장속에 새긴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새겨진 법을 버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요. 의로운 요셉은 가슴에 새겨진 율법, 앞날에 대한 자신의 계획, 세상의 이목에서 감히 이탈합니다.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를 보물을 취하듯 맞아들입니다(παρέλαβεν / parelaben)(마태 1,19-24).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닮은 방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타인의 수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소문없이 처리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온유한 수용이지만, 요셉은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의 온유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고, ‘아기’로 오신 하느님에 대한 탁월한 돌봄입니다. 그의 온유와 순종, 돌봄의 책임은 우리 믿는 이들이 닿아야 할 종착지이겠지요. 요셉은 거듭거듭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천사가 알려주는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납니다. 자신의 선입견, 고정된 가치관, 안정의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당연한 듯 담담하게 전합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παραλαμβάνω / paralambano) … 갔다.”(마태 2,14.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22장). 한마디 항변도 없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믿음으로”(히브 11,17).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아들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그렇게 함께 걸어갑니다. 신비의 무게로 온 세상은 침묵하고 아들의 소리만 있습니다. “아빠!” “얘야, 나 여기 있다.”(창세 22,7). “나 여기 있다.”라는 아버지의 응답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고 계시고 마련하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상의 버거움을 견디게 하는 충실함과 희망을 주시고 신앙을 자라게 하십니다.

“일어나” 마음의 귀를 열고 타자의 밤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는 한낮의 어둠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울부짖으며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멀리 떠나있던 다른 이는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루카 15,11-32). 그는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향하여 다가가 그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성 요셉의 해’ 교서에서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요셉과 같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더 큰 부성을 보여주는 표징”(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이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다른 이를 향하여 “아버지가 되는” 은총도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 / 자비로우신 아버지 (1669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2월의 말씀

내 얼굴 앞에 서라.

“그

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나를 버리고 …… 크레스켄스와 티토도 ……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9-16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사도 역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두려움, 불안, 정신적 고독을 느꼈군요. 굳센 믿음의 희망, 담대함, 복음 선포의 열정을 지닌 그였건만. 한낱 인간의 고독이 이러하다면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님께서 겪으신 버림받음의 고독은 어떠했을까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고,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르던 베드로마저 배반했지요. 우리와 조금 더 가까운 바오로의 고독한 절망을 이해하면서 감히 예수님 고통의 신비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앞서, 스스로 버림받아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신 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체적인 체험의 강도는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 고통이 왔다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이미 가신 길이고 바오로와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사도의 전구를 청합니다.

사도 바오로만큼이나 열정적이었던 엘리야 예언자를 만나봅니다.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미 이르렀건만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1열왕 19,9-18 참조). 카르멜 산에서 위풍당당하게 사백 오십 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를 사로잡은 엘리야는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그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습니다. “일어나 내 얼굴 앞에 서라.” 엘리야를 동굴에서 나오게 한 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습니다. 그저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일까요? 아닙니다. 스스로가 설정한 현실,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 자신의 계획, 자신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이 “발에 밟히듯 뭉개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내면이 다 비워지고 오직 침묵만이 남았을 때, 밖에서 주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두려움과 불안에 우리가 홀로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밖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십니다. “함께 있자.” 더 가난한 이의 얼굴로, 초라한 얼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얼굴을 맞아들이면 우리의 가난과 어둠, 초라함을 당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 일어나서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은총을 청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소서. 다시 보게 하여 주소서.”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있도록.

Sieger Köder/불이 지나간 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월의 말씀

새로운 얼굴

“나

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6,3). 이 놀라운 교환 체험의 처음을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엄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요술에 걸린 듯, 신비에 사로잡힌 듯 “엄마! 엄마! 엄마 눈 안에 내가 있어요!”라며 환성을 터뜨린 때가 있었지요. 그 경이로움을 꺼내어 새로운 듯 만지니, 맑은 새벽 하늘이 쫘악 찢기면서 별들이 후두둑 쏟아지는 그림이 겹쳐집니다. 그날에 한 소리 새겨졌지요. “얘야, 네 눈 안에는 내가 있단다.”

사람은 모방하는, 닮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욕망을 모방하고, 모방하면서 욕망하고 경쟁하고 … 점점 서로에게 짐승처럼 되어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경탄하고, 정겹게 다가가며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점점 “참사람”이신 주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길이 분명 있습니다. 좁고, 가파르고, 때론 숨쉬기조차 힘들고, 끝이 없을 듯 험난한 그 길의 종착지에서 “새로운 얼굴”을 얻은 이들이 있습니다. 성조 요셉도 그러합니다(창세기 37장-50장). 아버지 야곱이 다른 아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였기에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다정한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끝내 “물 없는 빈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은전 스무 닢”에 노예로 팔려가고, 치욕스러운 누명의 감옥살이, 재앙인 “기근”으로 인하여 드디어 형제들과 대면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재앙이 하느님 은총의 다른 얼굴인가 봅니다.

형들은 아직 자신들의 얼굴로 동생을 만나야 했기에 두렵기만 합니다.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생 요셉은 깊은 눈물의 강에 이미 다 씻어버렸으니 어떤 얼룩도 맺힘도 겨자씨 한 알 만큼의 적개심도 없는 전혀 “새로운 얼굴”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조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용서와 화해입니다. 비록 인간은 악을 꾸미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그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붙잡고 꿈과 사랑을 잃지 않았겠지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며, 야곱의 삶에 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또 찾았겠지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근심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의 인도로 영원한 임금이시며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을 감히 부릅니다. “나의 연인이여!” 성령 안에서 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의 영혼은 복됩니다. 무엇을 희망하더라도 이미 받을 것임을 믿으니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다.”(시편 145,18). 여전히 어둑하고 위태로운 현실일지라도 말씀과 기도 안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고자 달려오실 것입니다(야고 4,8 참조). 가난한 우리 이름을 부르며 “나 여기 있다.” 말씀하십니다.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Hodogetria) / 15C. 러시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2월의 말씀

오직 하나 남은 사랑

“살

아가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럽고 비참한 고백은 나의 비참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루에 한 끼 식사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독거 노인, 혼자서는 외출은 물론 일상 생활을 못하는 장애인, 교통비를 지원받아야만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청년실업자들, 이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문서로 고백,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비참을 겪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가 부끄러움과 모멸감없이 자신의 헐벗음, 배고픔을 말하고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사랑의 완성, 완전한 자비의 자리이고 그곳에는 말하지 않는 말도 들으시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그분께서 계십니다. 우리 귀와 눈을 통해서 들으시고 보십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1요한 2,16)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반대쪽을 향하여 내려가야 하겠지요.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께서 이미 작정하고 오실 것입니다.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의 비참과 고통의 수렁이 당신 목에까지 차올라”(시편 69,2-3 참조) 그분은 정녕 우리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가 앓을 병을 앓으시고,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며(이사 53,4) 치유하시기 위해 작정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질긴 욕망의 늪에서, 어둠의 구렁에서 건져 내실 분은 “힘센 사자나 날개 달린 천사”(이사 63,9)가 아니라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루카 2,1-14) 아기의 얼굴입니다. 아기는 안아주고 돌보아주는 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서로는 닮아가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는 표징인 무지개를 보여주실 때 먼저 “땅 위에 구름을 모아”(창세 9,14) 어둡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늘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살아 계신 빛, 사랑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둠을 마주해야 하고, 하느님 부재의 절망에 질식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비참을 겪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고 아름다운 우리를 다시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마음을 정하실 때 “이제 남은 것은 이 방법밖에 없다. 사람 안에는 두려움과 갈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구나. 사랑보다 더 강하게 그를 매혹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하시며 당신 친히 사람의 아들,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오직 사람을 원하신 사랑 때문에. 이제 우리의 작정만 남았군요.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에게 어서 달려가 그 아기의 전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는 어떤 것도, 누구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지요.

“이 몸은 임의 것, 임이 날 그리시니.”(아가 7,11 최민순 역). 사람이 다시 그분의 소유가 되기를 허락하면, 그분의 그리움이 우리에게 쏟아집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면 그분의 자비, 그분의 축복과 평화, 온 세상을 향한 그분의 그리움이 바로 여기에 이미 차고 넘칩니다.

예수 탄생 이콘. 안드레이 루블레프 화파 15C. 모스코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1월의 말씀

나의 연인은
내게 몰약 주머니

“나

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내 임은 내 가슴에 간직한 몰약 주머니”(아가 1,13 최민순 역)라고 신부(新婦)는 말합니다. 몰약은 아리고 쓰린 아픔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신부가 “몰약 주머니가 나의 연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아픔, 고통, 환난, 죽음이 결코 쉽고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신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볍게 여겨지고,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신랑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분께서 몰약 주머니이지 몰약 주머니가 그분인 것은 아니다.” 신랑이며 임금이신 그분은 단지 “몰약”인 것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쩌면 신부와 이웃도 눈을 가리고 피할 만큼 낯선 이의 모습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인간이 거하지 않는 곳에서 낯설게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선택받은 지혜로운 이들은 그분을 알아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임금으로 태어나신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2 ; 루카 2,1-14 참조).

전혀 낯선 길로, 낯선 얼굴로 오시는 그분 때문에 당황하고 도전받고 고난을 견디는 것이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당연한 몫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왕이신 그분께서 우리 때문에, 우리 안에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주님,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라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고 받아 모시나이다.”(주님공현대축일 예물기도).

“내게 문을 열어주오, 나의 애인이여.”(아가 5,2). 한밤중에 느닷없이 문을 마구 두드립니다. 어떤 얼굴인가요? 너무나 놀라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듯합니다(아가 5,5). 하지만 신부는 누구신지 물을 필요없는 절박함으로 그 얼굴로 다가갑니다. 가장 작은 이의 울부짖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린 이에게 빵을 먼저 나누고, 고뇌 가득 찬 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버림받은 이들 곁에 함께 서 있습니다. 신랑이신 임금께서는 “사랑의 깃발”(아가, 2,4)을 신부에게 걸어줍니다. 신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바로 그 낯선 얼굴들”(마태 25,31-46 참조)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숨어 계신 분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전례력으로 11월은 올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많이 아픕니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그분을 기억합시다. 어둠이 내리는 사순의 텅 빈 광야에서 모든 이의 비참을 모은 교종의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이 샘솟는 희망과 신앙은 자비의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몰약뿐인 우리의 예물을 유향으로 만드십니다. 밀쳐두고 외면했던 얼굴을 마주 보며 욕망의 헛됨을 서로 벗겨내고 우리의 진실, 우리의 빛으로 함께 걸어갈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들으시는 임금께서 이미 당신의 몸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고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나이다.”(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6c. 성소피아 성당 내부에 장식된 구세주 그리스도 모자이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0월의 말씀

너희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저

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연중 제30주일 본기도). 이 기도 안에서 마르코가 전하는 “어떤 사람”(마르 10,17-22)을 만납니다. 그는 이제 막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신 다음 예정된 길을 떠나시려는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주님을 대면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길 안으로” 들어서며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조르듯이”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그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난 후에 “영원한 생명”은 내세에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적으로 한 조각 한 조각 이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실천하라고 명령한 모든 계명을 꼭 지키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걷고 그분께 온전히 매달릴 때” 영원이신 그분은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미 보고 만지도록 당신을 허락하셨지요. 숨어 계신 임마누엘이시여! “저희가 언제 주님께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0).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이시다.”(신명 6,4 참조).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고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갈망이 깃든 그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하나가 부족하다.” 그가 지킨 것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지킨 것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라 하시며, 바라보는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마태 5,21-30). 하나가 남았습니다.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신명 5,21). “탐내지 말라.” 그가 지닌 것, 안락을 누리는 것들이 비록 성실하고 합당한 노력의 정당한 몫일지라도 “탐욕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은 어쩌면 탐욕에서 비롯된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신 주님께, 타인의 가난한 빈손에 돌려주어야지요. “주님, 당신의 법에 매달리니 제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법이 영원히 저의 재산, 제 마음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시편 119,31.111).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비틀거립니다. 함께 아파하는 근육이 굳은 탓일까요.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예수님의 눈길을 기억하고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주님 친히 깊고 내밀한 갈망을 채워 주시고자 “가슴에 당신의 새 법을 넣어 주고, 마음에 당신 새로운 계명을 새겨”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이미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지키고 행할 힘도 주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 다 주어라. 너 자신에게서 내려오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1445-1510) <책을 보고 계시는 성모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9월의 말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산

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시 121). 재난과 재앙, 그 고통 앞에서 다시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심을 압니다. 당신의 완벽한 공평! 불바다, 물폭탄, 코로나 팬데믹은 악인과 선인을 골라서 덮치지 않는군요. 하지만 철저한 불공평이십니다. 이 재앙들과 재해는 가난한 이들과 오갈 데 없는 난민들에게는 고스란히 마지막 남은 한 닢의 희망마저 요구하시면서, 복구와 개발을 앞세우며 경제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마음과 정신에는 아직도 아무런 울림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주님, 오직 당신께만 신뢰를 두는 이들의 가난한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그만 “당신께 어울리지 않는”(창세 18,25)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세상과 인간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기억하시고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돌이켜주소서.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기후 위기를 알리고 있는 “어머니 지구”를 살리기 위해, 저희는 “마귀 들린 딸을 살린 가나안 부인”(마태 15,21-28)과 함께 더욱 굳건한 믿음의 기도로 동참합니다. 제자들의 만류와 예수님의 매정한 거절도 딸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절박함을 막지는 못했지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다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이방의 장벽을 부수십니다. 바로 그 주님께 “어머니 지구”를 살려 주시기를 그 “가나안 어미”의 심정으로 간곡히 청하며 매달립니다. 주님께서도 병든 어머니 지구를 마귀의 손에 버려두는 무심한 저희를 야단치실 것입니다. 그 어떤 모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파하며 부서지는 어머니 지구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개발 악령의 손아귀에서, 파괴자들의 손에서 지구를 살려주십시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우리 주님의 기쁨 가득한 생생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 예언자들의 소리와 선한 이들의 행동이 멈추지 않기를!

모든 피조물도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성령께는 어둠도 혼돈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은 꼴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어둠만이 덮인 땅 위를 감돌며(창세 1,2) 하느님 창조의 말씀을 기다리시는 인내의 영이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신 분께서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하시며 그 영을 우리에게도 넘겨 주셨습니다(요한 19,30).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얼굴”(이사 53장)입니다. 그 얼굴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십자가 아래까지 따른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영을 넘겨 주셨지요. 평화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어떤 것에도 절망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며 자연과 화해하고 용서 청하며 어머니 지구를 구하고자 온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나거나 들거나 모든 악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조르즈 루오 <십자가의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8월의 말씀

절뚝거리며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느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대명사격인(시편 24,6) 야곱이 어디서 어떻게 그분을 만났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세 28,10-22 : 32,23-33). “모태에서 제 형을 속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룬”(호세 12,4) 야곱이 하느님을 처음 만난 때는 “밤”이었습니다. 낯선 땅의 어둠도 두렵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과 앞날이 더 막막하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심판받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압도됩니다. 놀라우신 그분께 사로잡혀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다.”라고 경탄합니다. 우리 인생의 컴컴한 밤, 혼란의 어둠, 죄의 순간들 속으로 그분께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할 때, 하느님은 차츰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맛본(sapio) 사람을 그분께서는 현자(sapiens)로 만드신다.”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형을 피해 멀리 도망가던 야곱은 바로 그 밤에 이미 형에게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혈육으로부터 속임당하고 빼앗긴 에사우는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지요(창세 27). 사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에사우와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탓이 누구에게,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빼앗겼고, 상처받았고, 억울하다고 여길 때가 있지요. 욕구에 이끌린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축복을 잃어버릴 때도 있거든요. 에사우는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축복을 남겨 두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침묵을 향해 울부짖는 에사우의 밤도 야곱의 밤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아가의 신부와는 또 다르게 분노, 원한, 억울함 때문에 “잠들었지만 마음은 깨어있는”(아가 5,2) 숱한 밤을 지새우며,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나로서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릎을 꿇어 바닥에 엎드릴 때, 그 틈새로부터 하느님 은총의 빛이 쏟아지며 스며듭니다. 악이 바로 곁에(로마 7,21),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창세 4,7) “솜씨 좋은 사냥꾼”(창세 25,27)인 에사우를 유혹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결코 “카인의 나쁜 영”에(창세 4,1-16) 자신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넘어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하느님의 손에 내맡겼습니다.

“하느님을 대면”한 야곱과 에사우는 이제 “형제의 얼굴을 제대로 대면”합니다. 자신을 방어하고자 앞세운 가족들보다 앞장서 형에게로 다가가는 야곱,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얼굴이 동생임을 알아본 에사우, 서로를 향하여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춥니다. 뺏는 자와 빼앗긴 자, 그 모든 상처를 받아들여 아우르시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하느님 마음의 신비가 눈부십니다. 그 자비의 빛은 큰 아들, 작은 아들, 가난한 이, 장애인, 눈먼 이, 다리저는 이들을(루카 14,21) 다 함께 “그토록 그리운 아버지의 집”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시나요?

지거 퀘더 <요한은 신부처럼 단장한 새 예루살렘을 보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7월의 말씀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

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18). 그녀의 시공간은 한 처음 하느님 창조의 말씀을 기다리는 혼돈의 땅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열린 무덤이 있는 텅 빈 어둠의 정원, 그녀의 눈물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한 소리가 들립니다. “왜 우느냐?” “저의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뒤를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뒤”는 바로 “제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 반박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마르 8,33) 하시며 꾸짖었습니다. “베드로! 제 위치! 내 뒤로 가라.”는 말씀이셨지요. 마리아는 거듭 돌아서며(14절,16절) 사도의 사도로 탈바꿈합니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감사송).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가장 먼저 보신 것은 마리아의 눈물이고 가장 먼저 들으신 것은 당신을 찾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눈물과 소리는 우리를 그리워하시고 찾으시는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세상의 얼굴”을 보시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Marim(마리암)입니다. 그녀의 주체성을 빼앗고 공동체로부터 소외시켰던 “일곱 마귀”에게서 완전히 해방되고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신 자신의 참된 신원을 부활하신 우리 주님에게서 되돌려 받았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응답한 은총입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 ‘마리암’, 예언자이며 아론의 누이인 미르얌은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며 하느님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여자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네.”(탈출15,19-21).

태어난 어느 시점의 장소를 ‘고향’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고향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쏟아내는 사랑 가득한 통곡의 울음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가슴에 인장처럼 새겨진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열렬한 사랑은 거침없이 격렬하게 타올라 아침 노을처럼 붉게 번집니다. 빈 무덤이 있는 정원에 새로운 생명 나무가 우뚝 높이 서고,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고향 “에덴”이 회복됩니다. 그녀는 에덴의 참 주인이시며 정원지기이신 그분을 봅니다. 되살리시고 가꾸시고 꾸미시는 분.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의 정원으로 내가 왔소.”(아가 5,1). “제가 정원지기 주님을 뵈었습니다.” 찰랑찰랑 넘쳐흐르는 동녘의 햇살을 앞질러 증언의 노래가 달려옵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무덤,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 나는 보았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다그치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우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니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시네.”

알브레이트 뒤러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