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3월의 말씀
수난의 강이 흘러 닿는 자리
월용 작가의 그림 “어머니”입니다. 그림이 풍기는 아우라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시선이 못박힌 채 머물렀지요. 처음 들어보는 화가라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이런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의 삶이 러시아 눈 덮힌 벌판처럼 망망하게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 이념대립, 공산주의, 혁명, 세계 대전, 냉전을 꿰뚫는 삶을 통과했습니다. 그의 개인의 삶을 보면 조부 대에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그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이었고 어머니가 온 살림을 도맡으며 조부는 호랑이 사냥을 하여 가족을 건사했습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마을이 필요하더더니 그가 바로 이런 경우로, 어머니의 헌신적 희생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그림 재능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 그는 레핀 미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교수가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그만 이 행렬에서 제외되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러시아에 살아남습니다. 그는 러시아에 남아 러시아 미술계의 거목이 되지만, 바로 이런 그의 삶 때문에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잊힌 사람이 되어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물론 2016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가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며, 많은 이들이 그 업적과 작품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능란한 붓질은 서양화 동양화를 넘나들 뿐 아니라, 그의 그림에는 램브란트를 연상케 하는 영과 마음의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지난한 삶에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만이 아니라, 그 생지옥으로 떠난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 고난의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남북의 조국, 그 모든 그리움을 담아 이 어머니 그림을 그렸으리라 짐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그의 “어머니” 그림에서 뚝뚝 묻어나는 연유겠지요. 우리는 이런 그림을 수십 년 이상 보지 못하였고 그의 이름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그의 6.25 참상을 그린 동판화는 케테 콜비츠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슴 저미게 다가오고, 그의 초상화들이나 연해주와 북한 풍경은 그가 왜 러시아의 렘브란트라 불리는지 충분히 알게 해줍니다. 빨갱이, 북쪽, 러시아라는 말을 병균보다 더 무서워했던 우리 역사의 한 슬픈 장면이기도 하지요. 또 그는 북한에 공식으로 파견되어 평양 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웠고 북한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귀화를 거부하며 친소파 숙청의 물결 속에 북한에서마저 쫓겨나고 맙니다. 그는 매년 연해주를 방문하여 한국적 풍경을 그렸으며 끝까지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립니다. 한쪽 눈이 내려 앉아 거의 감긴 듯하고, 갈라지고 거칠어진 두 손을 매만지는 모습이 눈에 아련히 떠오는데 그저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유일한 외출복이었을 듯한 공단 치마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신산한 삶에도 잃지 않은 마음의 여유가 흰색 저고리와 짙은 갈색 치마에서 묻어납니다. 어머니의 표정은 삶의 고단함보다 그 삶을 품어 안은 깊은 사랑이 느껴져, 한 사람의 어머니라기보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 고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뒤편에 있는 질항아리의 정갈함이 어머니의 살림 솜씨와 마치 어머니 자신인듯 말 없는 항아리가 전해주는 말이 조곤조곤 귀에 들려오지요. 그림의 뒷배경인 옅은 검은색만이 민족 전체의 수난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 수난의 역사 속에 가족이 휩쓸려 버리고 자신만이 덩그마니 남은 디아스포라의 슬픔과 그 수난마저 껴안은 어머니의 넓은 품이 슬픔으로 그치지 않고 땅 속 뿌리같은 힘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수난의 역사의 정서가 한이라는 말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변월용,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