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7월의 말씀
아이의 눈, 아이의 마음
소년이 상처 입은 천사를 들것에 태워 가는 장면. 핀란드 화가 휴고 심베르그가 1903년 무슨 뜻을 품고 이 그림을 그렸든, 이 단순한 그림만큼 이 시대를 잘 묘사해 주는 그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기괴한 종말론적 모습도 죽음과 절망을 감지하게 하는 상징도 없습니다. 천사는 다친 눈에 붕대를 감고 날개가 살짝 꺾이고 피가 얼핏 보이긴 해도 하얗고 순수한 모습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몸의 크기로나 얼굴 모습으로나 어른이 아닌 그림 속 아이들과 같은 연령대(?)임을 짐작케 하며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지만 들것 위에 몸을 유지할 정도의 기력은 남은 것 같습니다. 소년 두 명이 더 할 수 없이 화난 표정으로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기력함에 절망이 깃든 표정으로 천사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이 그림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년들이 알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보는 사람들 각자에게 돌려지고 있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든 어른들은 이 천사를 보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특히 뒤쪽 소년의 원망 가득 담긴 눈길은 그림을 보는 이를 향하는 듯 가슴 서늘하게 만듭니다. 앞의 소년은 검은 상복 같은 옷차림에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저 앞을 향해 발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누구도 기댈 곳 없는 소년들의 막막함이 그림을 뚫고 전해져 그저 가슴이 먹먹해질 뿐입니다. 원망과 울분 가득하지만 세상 그 누구도 자신들의 이웃이 되어줄 것 같지 않은 상황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우리 모두는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 이 사건의 공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사와 두 소년이 지나가고 있는 그림 속 장소는 헬싱키 근처 툴루 만에 있는 한 공원입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공원으로 많은 자선 단체가 공원 안에 소재하고 있었다 하는데, 소년들은 공원 내에 있는 한 보호 단체로 이 천사를 데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이 공원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지만 그림 속 공원은 강너머 잿빛 산과 잿빛 강물이 우울하게 흐르고 하늘도 비슷한 색깔로 덮여 있습니다. 갈색 대지 위에는 관목 한 그루와 푸른 잎도 없이 덩그렇게 핀 꽃송이들만 용케도 살아남았다는 안스런 느낌이 들게 합니다. 갈색 대지와 같은 빛을 띤 아이들의 얼굴에도 생명감은 없어 보입니다. 화가의 조국인 핀란드는 북구 쪽 사람들의 고유한 흰 피부색이 특히 두드러지는 지역임을 고려한다면 아이들의 얼굴빛은 화가가 상당히 강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살벌한 현장에 오늘 우리 시대를 대입시키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듯 싶으나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그 묵시록적 상황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이 상황에서 피해입은 이도 어린 천사요,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무력한 힘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이도 아이들이라는 점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점입니다.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도 떠오르지요. 자신의 이익이 앞서 분명한 세상의 모순 앞에서도 옳은 것과 틀린 것조차 헷갈리게 되어버린 어른들, 더 지독하게는 무엇이 옳은지 분명히 알면서도 사람의 생명도 우리 동료인 동물과 식물 그리고 지구 자체도 위험에 빠지는 일을 정의인 양 앞세우는 양심이 틀어져버린 어른들. 그 어른들 앞에서 어린 아이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저 아이들마냥 무기력합니다. 이 그림은 그 무기력함을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러나 정말 다행하게도 이 그림은 짙은 우울함의 고발성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천사의 손에 들린 꽃은 설강화 혹은 눈풀꽃으로, 꽃말은 치유 재생입니다. 어린 소년들과 어린 천사 자체가 희망임을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요. 아무리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우리 안에는 세상의 이익에만 따라가지 않고 옳은 것을 볼 줄 아는 아이의 눈, 아이의 마음이 있습니다.
Hugo Simberg 상처입은 천사 1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