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5월의 말씀


죽음이 빚어낸 환함

이와 비슷한 그림은 이전 시대 작품에서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 시대 인터넷 속의 세상을 엿보게 해주는데, 놀랍게도 1866년에 그려졌습니다. 인터넷이 있든 없든 옛날이든 오늘이든 사람의 심리에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림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오스테리아”라는 당시 노동자와 서민들이 음식을 나누며 소통하던 식당에 젊은이 3명이 모여 식사를 하던 중에 마치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어주는 듯, 아니면 이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세 명의 시선이 같은 듯 묘하게 다른 이 상황극 같은 모습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다고 굉장한 싸움이 벌어지기 전 극한 긴장의 상태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일어난 살짝 비틀린 모습이라고 할까요. 여기에 고양이까지 시선의 한몫을 보탭니다.

빨간 윗옷에 흰 수건을 쓴 제일 앞 소녀는 웃고 있는데도 왠지 서늘한 시선입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치켜든 모습 역시 이 소녀의 심리의 한 면을 보여주는데, 어딘지 모르게 공격성으로 가득합니다. 아니 어쩌면 과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빨간색 역시 도발적인 면을 느끼게 하는 색깔인데, 빨간 옷에 어울리는 산호 빛깔 목걸이까지 성장을 하고 나선 그녀의 속마음이 살짝 궁금해집니다. 옆자리 노란스카프 여인의 시선은 더 의미심장하며 사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어, 다른 두 명의 시선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옆눈질로 자기 친구를 의식하는 듯 하지 않나요? 웃음조차 노골적인 비웃음에 가깝습니다. 마치 “네 속을 내가 모를까봐?” 이런 느낌이 잔뜩 묻어나옵니다. 젊은 남자의 시선은 두 여인과 달리 묘한 빛은 없고 불쾌함을 가득 품었습니다. “너 여기 왜 왔니?”라고 묻고 싶은가봅니다. 심지어 고양이의 시선은 더 오묘합니다. 원래 고양이의 행동거지가 강아지와 달리 예측불가한 면이 많아 문학이나 예술에서 어떤 신비롭거나 의심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지요. 하필 고양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이들 뒤에 자리를 잡고 떠날 생각도 없이 이들의 모든 시선을 다 모은 오묘함을 품고 다소곳이 앉아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또 이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인, 자신들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신사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이 부분은 다루지 못합니다. 세 젊은이들의 시선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관찰당하는 입장에서 다시 그 관찰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군가 스쳐지나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노골적이면서도 피하는 듯 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을 화가는 그림으로 잡아내었습니다. 이 관찰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를 향한 자기식의 평가나 익명의 적의가 화살처럼 양방향으로 쌩쌩 날아다니고 있어, 우리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단지 이 시대는 그것을 일반화할 수단이 없었기에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시대는 익명성이라는 특징을 지닌 인터넷 매체를 만나면서 온세상을 장악하는 문화가 되어버렸고, 그 피해 앞에서 희생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갑니다. 높은 평가를 받는 표지인 팔로워 숫자를 늘이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어진 잔혹한 세상에 살면서도 사실 깊숙한 곳에는 어떤 평가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줄 그런 시선을 애타게 바라는 갈망이 숨어있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전해주는데,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기 전 인간은 알몸임에도 어떤 수치심도 없이 서로를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존재의 원천으로부터 멀어지자 하느님을 피해 숨고, 서로 알몸이 부끄러워 옷을 입습니다. 하느님을 심판자로 이웃은 평가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가 자신의 깊은 갈망을 발견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결코 놓을 수 없는 이유지요. 서로 바라봄은 비난, 경멸, 적의가 아니라 사랑의 시선인 것입니다.

Iwan Aivazovsky 아홉 번째 파도 1850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4월의 말씀


죽음이 빚어낸 환함

흐의 이 그림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 알면 아마도 조금은 놀랄 것입니다. 고흐의 그 드라마틱한 삶의 어느 순간에 이 그림을 그렸을지 한 번 상상해보는 것은 이 그림뿐만 아니라, 고흐의 삶 자체를 이해하는데 열쇠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 신비로운 수수께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흐에 대한 평가는 어떤 화가보다도 각양각색입니다. 아마도 저는 종교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빼고서는 고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교, 예수, 신비라는 말과 상관없는 세상의 흐름에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런던과 파리에서 잠시 미술품 판매업에 종사했는데, 그는 그 도시의 우아함과 회려함에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로서 그의 삶이 그의 뜻과는 반대로 강제로 종료하게 된 바로 직후였습니다. 가난한 탄광촌에서 시작한 선교사의 삶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독특했지요. 온전한 헌신이라는 말이 그 말의 뜻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지요. 그들과 같은 음식, 같은 주거환경에서 살며 “감자먹는 사람들” 속 가난과 일체가 되어 석탄가루 까맣게 뒤집어쓰고 창백하게 시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선교사로 받은 급여를 아낌없이 쏟아붓고, 자신을 위해서는 생계에 필요한 거의 최소한의 지출만으로 살아갔습니다. 그의 내면은 고통과 함께 깊이 예수의 모습이 새겨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가난한 이들 안에서 바라본 예수는 사실 그의 그림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이 사실을 빼고는 그의 그림을 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만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까마귀가 죽음과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징을 뒤엎고 결실 가득한 황금빛 밀밭과 함께 활짝 열린 길로 그의 정신이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의 모든 그림들은 종교, 예수, 복음, 생명, 희망을 집어넣으면 갑자기 새로운 빛을 띠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매료되면서도 그를 “불행한 삶의 끝에 정신병”으로 자살한 사람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려 하며 그의 그림들을 그런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에게 정신병적 현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런 면이 분명했지만, 그 병조차 덮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빛이 있고, 그 빛은 다행히도 그가 자신의 동생에게 쓴 편지들에서 아주 선명히 드러납니다. 그의 작품들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그의 동생의 부인 요안나 봉허는 고흐가 처음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한 “그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같지 않고 아주 건전해보였다.”는 증언도 참 중요합니다. 그의 작품의 가치를 알아봤던 요안나는 그의 사람됨도 놓치지 않았고, 자기 남편과 형인 고흐의 사망 후 자신의 온 생을 바쳐 자신의 남편이 아낌없이 지원했던 고흐의 그림의 가치를 알리는데 헌신합니다.

그는 평범한 우리들이 생각하는 모든 생각의 틀에 도저히 가두어 넣을 수 없는 그런 신비에 빠져 그 신비의 늪에서 살았던 사람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의 그림의 색채입니다. 그의 노란색과 파란색은 색깔 자체로 어떤 말을 걸어옵니다. 그의 그림의 어떤 색에서든 희망이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오직 좌절만이 몫인 그의 삶은 점점 그 신비와 하나 되어가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갔고, 결국에는 스스로 태양을 향해 뛰어들어 그 태양에 활활 타올라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참 놀라운 것은 분명한 그의 정신병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정신병 앓는 모든 이들에게 보이는 인격파괴나 판단력 무너짐이 없었다는 것이며, 사실 정신병원에도 스스로 판단하여 입원하였지요. 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그는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 같았다고 느낍니다. 그의 삶에는 성공이란 단어는 마치 외계 언어 같습니다. 그리 헌신했던 보리나주에서의 선교사의 삶이나 예술가로서의 삶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처참함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과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서만 솟아나는 희망의 온몸 찢어지는 역동성의 흔들림 속에 있었습니다. 이 환한 보랏빛을 보십시오. 이 그림은 셍 레미 정신병원에서 안 정원에 피어있던 아이리스를 그린 것입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라색은 검은색과 함께 예수의 죽음과 고난, 금욕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또 상식을 뒤엎습니다. 보라색을 저토록 환하게, 꽃들은 살아있어 말을 거는 듯합니다. 꽃들만이 아니라 흙도 살아 움직입니다. 고통이 운명인 듯한 사람이 이런 환한 보라색을 빚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생의 마지막 어떤 희망도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한 이가 빚은 이 빛나는 보라색을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통이 빚어낸 생명의 빛의 환함이라고…. 그는 자신의 열매를 맛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열매를 맛보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 1889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3월의 말씀


아버지의 자리

렇듯 연민 가득한 슬픔, 이렇듯 따뜻한 슬픔! 이런 눈빛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광부 화가로 유명한 황재형 화백의 대표작입니다. 막장이라 불리는 지하 땅굴에서 시커먼 석탄가루 마시며 실제로 광부 일을 했습니다. 그 막장에서 화백이 만난 얼굴입니다.

막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험악한 환경, 캄캄한 지하 동굴에서 탄가루가 덮혀 시커메진 밥을 땀과 함께 먹어야 하고, 들이쉬는 한 호흡마다 폐를 채우는 검은 가루로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몸으로도 가족의 생계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서글픔, 이 모든 것보다 더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갱도 사고의 위험은 늘 광부를 무겁게 짓누르는 바윗덩이지요. 이런 막장 속 삶을 살아내는 데도 가족 건사, 자식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진저리나는 가난. 이중 단 하나만이라도 몸서리칠 인생이거늘 저 무게를 다 견디면서도 사랑을 잃기는커녕 온존재가 연민이 되어버린 사람의 눈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일반화시키는 위험을 무릎쓰며 이야기 해보자면, 대체로 가난한 이들은 오지랖이 넓습니다. 내가 가난해보니, 내가 힘들어보니 남의 사정도 쉽게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고나 할까요. 내 집, 내 재산, 내 사람 지킬 것 많은 이들은 남의 아픔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요. 내 코도 석자긴 하지만 갱도에 묻혀 스러져간 수많은 동료들, 검은 석탄 가루 마시고 온몸 만신창이 되어도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웃들, 여기저기 몸을 다치고도 위험한 갱도의 온몸을 짓누르는 노동을 그만 두지 못하는 사연 많은 동료들, 그 가족들의 한 많은 사연들이 강건너 불이 아니라 마치 내 일처럼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캄캄한 갱도에서 밥을 먹자면 내 이마에 불은 내 밥을 비춰주지 못해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며 밥을 먹는 모습을 그린 이 화백의 그림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릴는지 모르겠지만 천국의 지상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저는 이 화백이 살고 있는 황지에서 어린 시절 약 3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데, 저희 아버지는 광부가 아니었기에 직접 그 처절함을 경험하지는 못했으나 거칠지만 소박하고 마음 따뜻했던 이웃들, 저희 집에 쌀을 빌리곤 갚을 길 없어 봄에 산나물을 뜯어다 주거나 그 고소한 옥수수를 한 자루씩 들고 오던 아주머니들은 제 뇌리에 참 진득하게 박혀있습니다. 탄광이 없는 ‘절골’이란 곳의 그 맑은 개울물과 탄광촌이 이어지던 통리의 시커먼 천줄기 같던 계곡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생채기가 되어 50년이 넘은 지금도 제 안에 생생히 잔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 남 탓 세상 탓하지 않고, 자기연민이 없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억울함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탓하지 않되 그 어려움의 원인을 정확히 봅니다. 돈과 권력을 쥔 이들의 힘에 속수무책 당하면서도 그들의 논리, 돈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는 강원도 산골처럼 건강하고 신선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이 푸름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움츠러들었던 마음 한구석이 살며시 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 아름다운 슬픔이 사람을 치유하고 구한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서 생생히 봅니다. 이 십자가 위 연민과 슬픔 고통이 이 그림 속 아버지의 눈 속에서 읽혀집니다. 석탄 가루에 찌든 검고 주름 가득한 모습도 그 연민의 빛을 덮어 누르지 못합니다. 곧게 선 콧대와 닫힌 입술, 선명한 이마 주름에도 험상궂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눈빛 때문이겠지요. 제목 그대로 아버지의 자리를 꿋꿋이 살아내 온 이 시대의 아버지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는 예수님의 진복 선언이 영 어렵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행복을 잠시나마 누립니다.

황재형, 아버지의 자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2월의 말씀


비움의 무거움과 아름다움

우는 일의 무거움은 도전해본 사람은 잘 압니다. 비웠다 싶으면 슬며시 기어 나오고,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놀래키며 튀어나오기도 하고, 거의 되었나 싶었는데 원상태인 것 같고, 한숨도 참 많이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비우는 작업 자체가 성과 불문,아름답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애씀은 자신은 안타깝지만 보는 이에게는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하지요. 비우고자 하는 마음 하나 먹는 일도 사실은 인생 꽤나 걸리는 일이지 않습니까. 평생 당신 뜻대로, 마치 온 가족이 기계 속 나사 같은 부품처럼 착착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저희 아버지가 말년에 회심을 하고서는, 어느 날 수도원을 찾아와 “내가 ‘마음 바꾸기 작업’을 하는데 너희 엄마가 만고에 도움이 안된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던 기억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지금에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합니다. 엄마로서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을 것이고, 그래 봤자 얼마 가겠나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한 성질하시는 저희 아버지는 그 성질 덕분인지 그 마음 운동을 끝까지 밀고가셨고, 돌아가신 뒤 영정사진을 본 친구들은 “너희 아버지 성형수술 하셨냐?”고 물을 정도로 모습마저 변하였지요. 평생 얼음칼 같던 그 성정으로 우리들에게 상처 꽤나 남기셨지만 그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큰 선물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결국 그것은 비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비움은 왜 그리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움은 살아있으면서 자신을 작은 죽음에 넘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을 견뎌야 하고, 빼앗고자 하는 이에게 자신의 것을 넘겨주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다른 이를 도와주어야 할 때 더욱이 그 일이 자신의 일보다 하찮은 일로 보일 때, 갑작스런 불치병 통보를 받을 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할 때 이것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위의 모든 일들은 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올가미처럼 자신을 더 칭칭 옭아맵니다.

어쩌면 이 해답 없는 난관 앞에서만 비움만이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자유도 비움에서만 시작될 수 있으니, 자유를 찾고자 온 세상을 헤맬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이런 역경 안에서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비운 후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예술 작품인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많은 것을 비우고 남길 것만 남긴 예술 작품이 아름답기가 쉽지 않습니다. 뭔가 시원하긴 한데 어딘지 아쉽고 한 자리가 빈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쉽습니다. 비워내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기술적 구성미나, 평생 갈고 닦은 솜씨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비움에 담긴, 비우고 비워 그래도 남은 그 무엇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삶이요, 그 삶을 채운 어떤 정신이나 철학이요, 그 채워준 것마저 비우고 비워 남은 것,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그 무엇입니다.

이 묵상을 하게 해준 이창림 교수의 조각은 비움으로 작품이 된 드문 경우입니다. 비우니 방이 생기고 비우니 성모님이 나타나고, 성모님마저 비우니 아기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어떤 모습도, 표정도 없으나 성모님과 아기예수님, 십자가의 철두철미한 비움이 거기 나타납니다. 심지어 무덤 동굴도 나타납니다. 그 무덤 동굴은 썩는 냄새 쾨쾨하고 음침한 동굴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 단순함이 공기로 채워진 들어가고 싶은 곳입니다. 기꺼운 죽음에는 모두 이 비슷한 향기가 나고, 온 존재로 행해진 비움에는 이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비우고 남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끝없이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이 지상의 유일한 존재이니, 자신을 넘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그 복됨. 인간만이 지닌 이 복됨을 포기할 수야 없지요.

이창림, 비움의 아름다움 2024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월의 말씀


희망의 안테나

무 아름다워 저 속으로 들어가도 죽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젊음의 열기가 모든 것을 태워 제 속이 바싹 마른 사막과 같던 시절 저는 비만 오면 태종대 자살 바위로 가곤 했습니다. 학생이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완행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음에도 그런 불편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가 퍼붓는 자살 바위 위에 서면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은 묘한 일체감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자살 충동과는 다른 바다와 하나 된 느낌이랄까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과 바다의 전율 일으키는 깊이 모를 푸름이 나를 그대로 안아줄 것만 같았지요.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은 채로 ….

아이좁스키가 위험을 무릅쓰고 태풍 몰아치는 바닷속으로 들어갔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디지털 측정계기가 없던 시절에 선원들은 먼바다에서 파도를 만날 때 자신의 본능과 관찰의 힘으로 파도의 정도를 헤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적된 오랜 관찰은 아홉 번째 덮쳐오는 파도가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알아내었고, 아홉 번째 파도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그 아홉 번째 파도의 직격탄을 맞고 다 부서진 배의 한 부분에 6명의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사람들은 거의 유령에 가까운 모습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파도의 그 무서운 위력에 죽음의 사신의 손길이 바로 자신의 목덜미를 휘감는 체험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을 터이지만, 짠 소금물을 들이키고 바싹 갈라진 목과 쓰라린 눈, 아직 출렁이는 파도 속에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공포감만으로도 거의 죽은 모습일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 앞을 향해 필사적으로 붉은 천조각을 흔들지만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들이 유령이라도 본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널브러진 가운데도 힘이 아직 남은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붉은 천을 흔들어댑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각이 길러진 이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제3의 눈이 생깁니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바다의 대조는 삶과 죽음의 상징일까요. 삶과 죽음은 늘 맞닿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렇듯 장엄합니다. 죽음과 삶을 딱딱 분류할 수 있다면 아주 단순하겠지만,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죽음과 삶의 그 아슬아슬한 맞닿음이 현실에서는 실감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저 아홉 번째 파도처럼 우리는 그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부서진 돛대가 십자가 모양인 것은 화가의 선명한 의식 이전에 보는 이로 하여금 참희망이 솟는 샘자리가 어딘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희망의 원천을 찾을 때 절망만이 남을 뿐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2025년 첫 달을 맞았습니다. 그저 2024년의 끝에 이어지는 늘 그런 시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요, 또한 그것만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운 한 해입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들이쉬면서 어떤 사람은 정신이 맑아진다 하는데 어떤 이는 마음이 시려진다 합니다. 어느 쪽도 현실이나 두 현실은 각 사람의 그 다음 순간들을 아주 다르게 물들입니다. 삶의 가장 마지막, 아무런 선택권도 남지 않은 죽음의 순간조차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선물입니다. 그 큰 선물일랑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인생은 불공평이라는 방석 위에 주저앉는 일 없는 새로운 한 해를 기원합니다.

Iwan Aivazovsky 아홉 번째 파도 1850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2월의 말씀


성탄의 높음과 깊음 그 언저리에서

뜻함, 고요함, 거룩함, 맑음이 그림 속에 함께 어우러져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고 돌아 나옵니다. 사실 이 그림은 성탄 구유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빠의 복장이 목공 혹은 피혁 작업을 하는 사람의 것인지라 성탄 그림이려니 지레짐작을 했지만, 혹시나 하고 자료를 뒤졌더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화가는 귀족 출신에 왕립미술학교를 나왔음에도 유명한 정치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풍자만화가로 파리코뮌에 연루될 정도로 급진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으나, 파리코뮌이 십만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거의 몰살 지경에 이르자, 풍자만화의 길을 포기하고 일반 회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풍자만화와는 달리 회화 쪽은 그리 인기가 없어 경제적 궁핍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그림은 자신의 첫 아들의 탄생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된 그 감격의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예수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가족의 모습인 것입니다. 화가의 눈은 금방 태어난 아이를 향해 감탄을 넘어선 경외의 시선이 넘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 모든 아빠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을 넘어선 먼 나라의 존재, 한 인간의 존재 안에서 인간을 넘어선 어떤 신성함을 느끼는 순간 앞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큰손이 부담스럽다는 듯, 마치 큰손이 아이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 그리고 차마 입맞춤조차도 하기 어려운 듯한 모양새입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아빠의 마음속 경외심을 더 진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또 반전이 있습니다. 엄마의 표정입니다. 엄마의 표정에는 아빠와 같은 경외감과 더불어 무엇인가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이 함께 어려 있습니다. 사실 1881년에 태어난 이 아가는 1년이 채 못되어 하느님 아빠 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화가는 1880년부터 환각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1885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아가가 있는 하느님 아빠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 엄마는 장래의 이 아픔을 예견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화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요?

그런데 왜 저는 또 하필 성탄 그림으로 이런 아픔이 서린 그림을 택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성탄 구유 장면 자체가 아픔이 서린 장면 아닌지요. 사실 성탄 장면 속 주인공들의 운명은 세상적 시선에서 본다면 더 할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될 처지입니다. 게다가 출생마저 위의 아기와 달리 신비 혹은 스캔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탄 장면은 세상의 온갖 아픔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훌륭한 가문도 존경받는 위치가 아닌 시골 어느 구석의 한 처녀 안에 깃드신 하느님은 양부의 보호를 받고 자라납니다.

성탄 구유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요? 우리가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주고받는 성탄의 기쁨이 진짜 성경 속 성탄의 그 깊은 뜻과 일치할까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그 마음에 우리 마음이 닿아있을까요? 하느님이 세상 가난한 아기로 오신 그 신비가 우리의 완고함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우리 사랑의 지독한 이기성을 이 아가 앞에서 깨달을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이마저 내 사랑을 채워줄 대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뼛속까지 스민 이기심을 내려놓을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줌으로써 행복해지고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얻고 자기 뜻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묶은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요. 실제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처럼 구유가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벗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Andre Gill -신생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1월의 말씀


기도의 자리 – 삶의 자리

억이 아련하게 돋는 그림입니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아이에게 기도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실로 기도의 힘을 믿는 엄마의 진심일 것입니다. 어디 기도뿐이겠습니까?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게임 그만하라고 잔소리, 큰소리 다하면서 자신은 TV나 컴퓨터 앞에서 즐길 것 다 즐기고 있다면 아이의 마음 속에 공부할 의지가 커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을 것이요, 반항심만 부글부글거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잔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딜 가든 잔소리는 넘치고 넘칩니다.

잔소리는 하고있는 본인과 듣고 있는 상대방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중 삼중 손해 보는 일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하나의 예술이요, 공감의 차원을 만드는 참 신명나는 일이지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것부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려놓음 역시 억지로 마음을 비틀어 속의 것을 짜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과 같이 터득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꺼움이 필수로 따라야 하지요. 내려놓으면 신기하게도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사실 내려놓음은 비워져있으니 상대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상대의 불가능한 영역과 한계가 보이고 더 뻗어 나갈 수 있는 생장점도 보이지요. 이 공감의 세계 혹은 차원 속에 있는 아이는 부모의 재촉 없이도 스스로 자기 성장의 길을 걸어갈 힘과 의지가 생겨납니다.

이 공감의 세계 안에 있는 이는 이미 기도의 입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세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계가 바로 공감의 세계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소박하나 정갈하게 꾸며진 방은 문고리 하며 낡은 천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식탁보까지 집주인의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입니다. 화가는 아마 상상 속 집이 아니라, 어떤 가정을 실제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직 신앙과 이성의 결별이 확실하지 않던 19세기 유럽의 시골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십자고상과 성모자 그림, 성 요셉 그림이 이 집의 유일한 장식입니다. 이 작은 방이 기도하는 곳이요, 밥을 먹는 식당이며,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는 거실이기도 합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따뜻한 햇살은 마치 하느님 아빠의 사랑인 양 모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고, 단 하나뿐인 단출한 메뉴의 식탁조차 모자라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이 가난한 식사 앞에서 식사 전 기도를 아이 스스로 바치게 합니다.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과도하지 않게 살짝 팔로 감싸 안고 옹알거리는 말로 기도를 바치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정갈하게 땋은 머리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아침식사 시간인 것일까요?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단 한 가지뿐인 메뉴, 소박한 집안, 아빠의 부재 이 모든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어느 것도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딸과 엄마의 한마음이 된 기도의 분위기 때문이겠지요. 기도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는 기특함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단정하게 모은 아이의 손이나 자세는 억지로 시켜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입니다. 더욱이 빈약한 음식과 삶의 환경에 엄마가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낸다면, 아기더러 바치라고 하는 식사 전 기도는 강요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있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엄마의 기도 분위기 푹 젖어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빈약한 음식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도 전염될 것입니다. 삶이 좋은 음식과 좋은 옷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음도 저절로 알아듣겠지요. 기도의 자리와 삶의 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Karl Gebhardt 1860-1917 Saying Grace 식사 전 기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0월의 말씀


알몸으로 보는 세상

6-70

년대 우리나라 어느 목욕탕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 같아 누드화 치고는 참 정감이 가는 그림입니다. 성적 매력이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면에 치우친 누드화만 보았던 저에게 참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자료를 좀 뒤져보니 화가가 아주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의 신산했던 삶에 대한 무지나 제3자적 여유로움이라는 평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삶을 일별하고 그녀의 작품을 보고나면 정말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절로 느껴집니다. 아마도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 즉 르노아르, 로트렉, 드가, 등이 그녀를 그리도 자주 모델로 삼아 그렸던 이유도 알 듯 해집니다. 그녀는 타고난 모델 기질로 많은 화가들의 불림을 받았고, 이들 덕분에 그녀의 여러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르노아르가 그린 그녀의 모습 속에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읽어보기 힘들 정도로 포근한 모습으로, 로트렉의 그림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당시에 모델은 그저 그림의 대상만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18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모델을 하기 전, 그녀는 지금에야 외국인들이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유명한 거리 몽마르트가 당시에는 싸구려 술집 가득한 변방의 장소였고 그곳에서 세탁일을 하는 한 여인의 아버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그녀는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서커스단의 곡예사도 된 적이 있으나 곡예를 연습하는 중에 떨어져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화가들의 모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가들과 사귀고 헤어지기도 여러 번 했으니, 어딘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생이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트렉의 그림에서 수잔 발라동의 삶의 신산함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긴 하지만 그 안에는 로트렉 자신의 삶의 여운이 묻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자신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는 험난함에 뭉개지기를 거부하였지요.

그리고 모델로서의 인기가 상당했음에도 자신을 꽃같은 존재의 틀에 가두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말 그대로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그림의 매력에 이끌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발로 그 세계 안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눈여겨 본 로트렉이 모델이 아닌 조언자 친구가 되어주었고 수산나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드가에게 그녀를 소개합니다. 드가에게 그림을 배우며 누군가의 연인이나 모델이 아닌 화가 수잔 발라동으로 삶을 시작하며 1894년에는 프랑스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예술협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녀의 그림 특히 누드화는 세상을 시끄럽게 했는데, 그 동안 남성 화가들만의 것이었던 누드화를 여성화가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회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누드화는 남성화가들의 틀을 훨씬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그림에서 앞의 여인은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고, 그런 여인을 뒤의 여인이 머리를 매만져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바라보고 있으나 그 시선은 담담할 정도로 과도하지 않습니다. 아픔이 묻은 삶을 품어주되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고난을 경험한 이에게만 가능한 일이지요. 이 두 여인의 몸은 늘어진 가슴과 접힌 뱃살로 바로 우리 자신의 친근한 몸 그대로이지요. 그녀의 그림은 남성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고, 있는 그대로 인간의 삶, 알몸인 인생 그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이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선이 확실하고 동작도 과감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겹습니다. 그녀에게서 알몸 그림은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자 찬사요, 알몸은 그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여인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9월의 말씀


수치심 새로운 자아

대인들 사고의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그림을 보면 ‘인간의 죄’를 떠올리고, 반대로 죄를 생각할 때면 이 그림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야 없겠지만 이 유명한 그림의 가볍지 않으나 흥미진진한 내용을 한번 따라가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이라 것을 빼면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절망적 모습이 우리네 어떤 체험과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멀어짐은 그림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인 두 사람에게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수치심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합니다. 정원을 함께 거닐던 하느님을 이제 아담과 하와는 피해서 숨습니다. “왜 숨느냐?”고 묻는 하느님께 아담은 알몸이 수치스러워 숨는다고 답합니다. 참 우습지요. 언제는 알몸이 아니었던가요? 이전에는 알몸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몸임이 수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자의식이 생겼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수치스러워 감추고자 하고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저자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며 죄와 수치심, 남탓과 불행이 하느님과 멀어짐에서 비롯됨을 통찰하였습니다. 금단의 열매는 하느님이 속이 좁아 인간을 잡아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의 한계를 뜻합니다. 인간은 어떤 경계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굳이 어떤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 심연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한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자연인들 동물인들 심지어 동료 인간마저도 남아나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수치심 가득한 인간에게 따라오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탓을 돌립니다. 내가 불행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 주변이 이 모양이니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꽁꽁 무장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전쟁이 터집니다. 상대방 역시 수치심 가득한 인간이니, 네탓이라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다 보면 어느새 주먹질로 바뀌는 법이지요. 악마를 뜻하는 사탄이란 말의 어원이 “고발자”라는 사실도 여기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이 수치심 가득한 자아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보면 아주 선명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아주 생생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 그 바탕이 수치심입니다. 부모의 관심조차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들리니 반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화를 내는 것도 인간은 보통 수치심이 건드려지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부모, 교사, 이웃도 이에 대한 어떤 처리법을 찾지 못해 중2는 김정은조차 무서워한다는 말이 생겨나게 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심 가득한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 창녀, 마귀들린 이들, 당시 세상이 벌레보다 무서워하고 피했던 이들이니 이들의 속마음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식탁에 불러 깊은 용서 체험으로 이끕니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엇보다 마음 가득한 사랑으로 이들을 용서합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이 수치심이라는 말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때 마음을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수치심의 죄인들의 형제자매요, 이를 진짜 체험한 사람은 깊은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미켈란젤로 시스틴 성당 “천지 창조” 중 “낙원에서의 추방”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8월의 말씀


우리의 삶은 타자에게 넘겨주는 선물

“그

랜마 모지스”라 불리는 이 그림을 그린 할머니의 본명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입니다. 이 긴 이름보다 GrandMother 즉 할머니라는 애칭인 “그랜마”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 할머니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서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린 것이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나이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이미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해야 했고, 27살이 되어 농부와 결혼하여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으며, 10명 아이 중 5명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75세가 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릴 적 꿈이 떠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내거나 마을 게시판에 붙이거나 벗들에게 선물하곤 했지요. 어느 날 한 미술가가 시골 마을 한 약국에 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구입하고, 개인전도 열고 뭐 그런 여정을 거치며 미국 전역에 소개되고, 언론도 관심을 가지며 미국 국민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92세에는 “내 삶의 역사”라는 자서전도 출간하게 되지요. 이 자서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의 말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과일과 잼으로는 상을 받았지만 그림으로는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1년을 산 그녀는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신의 유산은 농촌 기술 지원금과 가난한 이웃들, 불치병과 싸우는 환자분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랜마의 그림들과 그녀의 사진 속 투명하고 따뜻한 눈빛 그리고 생애 이 세 가지는 같은 빛으로 반짝이며, 어떤 모순의 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그림을 처음 대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화면이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밝음과 경쾌함이 전달됩니다. 이 할머니 작품들은 예술이 꼭 심오하지 않아도 인간의 마음에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서 비롯됨을 동시에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12살에 가정부의 삶을 살고 아이를 5명이나 잃고서도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가져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작품들과 그분 생애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생명을 남에게 넘겨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 무엇보다 삶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자신의 몸마저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으로 넘겨주셨습니다. 그 빵 안에서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속에는 자신을 남에게 넘겨준 사람의 가벼움이 읽히면서 동시에 그 가벼움은 바람에 휙 날려버리는 일 없는 무게를 지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지요. 한없이 밝고 경쾌하지만 그림 속 하나하나를 보면 평생 노동으로 다져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노동과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있고,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있는 장면들에는 누구도 노동으로 지치거나 힘겨워하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장면이 1년에 한번 있는 단풍나무 시럽 제조 잔치날이니 그 흥겨움이 넘쳐흐르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의 아내로 가정부로서의 삶은 노동에서 노동으로 하루가 채워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에게 노동은 몸과 인생을 짓누르는 힘겨운 일이기 전에 남을 먹여살리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위도 그녀를 짓누르지는 못했나 봅니다. 온 천지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복장을 하고 있지만 벌거벗은 나무들을 덮은 눈은 세상을 새하얀 꽃으로 뒤덮은 듯하며, 눈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없지요. 추위와 엄혹함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그녀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사랑만이 노고를 달콤함으로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랜마 모지스 Gran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단풍시럽제조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