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3월의 말씀


수난의 강이 흘러 닿는 자리

월용 작가의 그림 “어머니”입니다. 그림이 풍기는 아우라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시선이 못박힌 채 머물렀지요. 처음 들어보는 화가라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이런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의 삶이 러시아 눈 덮힌 벌판처럼 망망하게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 이념대립, 공산주의, 혁명, 세계 대전, 냉전을 꿰뚫는 삶을 통과했습니다. 그의 개인의 삶을 보면 조부 대에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그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이었고 어머니가 온 살림을 도맡으며 조부는 호랑이 사냥을 하여 가족을 건사했습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마을이 필요하더더니 그가 바로 이런 경우로, 어머니의 헌신적 희생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그림 재능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 그는 레핀 미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교수가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그만 이 행렬에서 제외되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러시아에 살아남습니다. 그는 러시아에 남아 러시아 미술계의 거목이 되지만, 바로 이런 그의 삶 때문에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잊힌 사람이 되어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물론 2016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가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며, 많은 이들이 그 업적과 작품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능란한 붓질은 서양화 동양화를 넘나들 뿐 아니라, 그의 그림에는 램브란트를 연상케 하는 영과 마음의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지난한 삶에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만이 아니라, 그 생지옥으로 떠난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 고난의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남북의 조국, 그 모든 그리움을 담아 이 어머니 그림을 그렸으리라 짐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그의 “어머니” 그림에서 뚝뚝 묻어나는 연유겠지요. 우리는 이런 그림을 수십 년 이상 보지 못하였고 그의 이름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그의 6.25 참상을 그린 동판화는 케테 콜비츠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슴 저미게 다가오고, 그의 초상화들이나 연해주와 북한 풍경은 그가 왜 러시아의 렘브란트라 불리는지 충분히 알게 해줍니다. 빨갱이, 북쪽, 러시아라는 말을 병균보다 더 무서워했던 우리 역사의 한 슬픈 장면이기도 하지요. 또 그는 북한에 공식으로 파견되어 평양 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웠고 북한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귀화를 거부하며 친소파 숙청의 물결 속에 북한에서마저 쫓겨나고 맙니다. 그는 매년 연해주를 방문하여 한국적 풍경을 그렸으며 끝까지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립니다. 한쪽 눈이 내려 앉아 거의 감긴 듯하고, 갈라지고 거칠어진 두 손을 매만지는 모습이 눈에 아련히 떠오는데 그저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유일한 외출복이었을 듯한 공단 치마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신산한 삶에도 잃지 않은 마음의 여유가 흰색 저고리와 짙은 갈색 치마에서 묻어납니다. 어머니의 표정은 삶의 고단함보다 그 삶을 품어 안은 깊은 사랑이 느껴져, 한 사람의 어머니라기보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 고국 같은 느낌을 줍니다. 뒤편에 있는 질항아리의 정갈함이 어머니의 살림 솜씨와 마치 어머니 자신인듯 말 없는 항아리가 전해주는 말이 조곤조곤 귀에 들려오지요. 그림의 뒷배경인 옅은 검은색만이 민족 전체의 수난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그 수난의 역사 속에 가족이 휩쓸려 버리고 자신만이 덩그마니 남은 디아스포라의 슬픔과 그 수난마저 껴안은 어머니의 넓은 품이 슬픔으로 그치지 않고 땅 속 뿌리같은 힘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수난의 역사의 정서가 한이라는 말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변월용, 어머니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2월의 말씀


절대선도 절대악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락한 천사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보는 순간 저 눈빛이 사람을 잡아당깁니다. 이 천사의 이름은 루치펠이며, 창조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창조물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루치펠, Lucifer 빛을 나르는 자”라는 이름이 악마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무슨 일일까요? 가장 아름답던 그는 밀턴의 실락원 구절 그대로 “천국에서 섬기느니 지옥에서 다스리겠다.”, “내 마음이 곧 지옥이로다. 나 자신이 지옥이니 ….”한 그 말대로 하느님을 떠나고 천국에서 쫓겨난 직후의 그의 모습을 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렸습니다.

타락한 천사라는데 내 눈에는 누군가와 겹쳐져 보입니다. 1994년 소위 자신들을 지존파라 불렀던 7명이 살인공장을 차리고 5명을 살인한 후, 검거되어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 떠오르고 그들 중 한 명의 인터뷰 장면이 떠올라 인터넷을 뒤져보니 저의 뇌리 속에 선명한 그 비릿한 웃음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7명 중 김현양은 어떤 장면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법 없이 언제나 똑같은 웃음을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날립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인간이 아니야. 그래서 다 잡아죽이려고 …. 우리 엄마요 내 손으로 못 죽여서 한이 맺힙니다.” 그의 모습은 카바넬의 그림 속 루치펠과 너무 닮았고, 천사를 볼 수 없었던 화가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인간을 그렸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은 원망과 증오, 공포, 반발심 속에는 그보다 더 지독한 그리움이 감출 수 없이 비집고 나옵니다. 누구도 쓸어내릴 수 없는 두려움의 광기는 누구도 보듬어 줄 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을 치고 세상을 향해 그 독기를 품어댔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한이라는 김현양, 그의 눈에 생명의 빛남이 보이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그가 나온 사진들은 대부분 저 비릿하고 섬광을 내뿜는 듯한 미소를 흘리는데, 다른 6명은 어디서도 웃음을 짓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뿌리는 듯, 입은 미소를, 눈빛은 저 그림 속 루치펠을 닮았습니다.

화가가 그린 타락한 천사에게서 제 눈에는 사랑을 잃은 존재의 광기가 보입니다. 어떤 이는 마귀를 걸어다니는 무시무시한 파충류처럼 그리기도 하지요. 어쩌면 우리 인간은 절대선을 알 수 없듯, 절대악도 알 수 없는지 모릅니다. 어떤 아픈 과거를 지녔든 그들의 살인 행위를 비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들 속에도 이 두려움의 광기를 그대로 받아안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이 누구보다 함께 아파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이 보듬는 손길이 되어 주었더라면 어쩌면 그들도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미련을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삶의 진창 속에 내밀어준 누군가의 손길 덕분에 새 삶을 얻는 이야기를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사형 5분 전 김현양은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세상에 사랑이 있는 줄 알았으면 살인자 사형수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속된 다음에 사랑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제가 먼저 하늘나라 가서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가장 잔인한 사람의 밑바닥에는 가장 상처받아 짐승이 되어버린 영혼이 웅크리고 있었나 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느님의 팔이 짧아 그들을 안을 수 없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을런지요. 구속 후에야 사랑을 알았다는 김현양, 계부의 학대로 집을 나오고, 다니던 공장에서 7개월분의 월급을 못 받게 되었을 때 주린 배를 움켜쥔 그의 할퀴어진 몸과 마음이 그 팔 안에서 참 사랑의 맛을 보고 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Alexandre Cabanel 타락한 천사 부분화, 1847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1월의 말씀


새해에 맛보는 하느님의 시선

그림은 참 아름답고 장대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동화처럼 쉬우면서도 우주보다 심오하게 샤갈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의 그림은 일단 아름답고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스토리 이전에 이미 색깔로 먼저 사람을 끌어당기고, 동화같은 분위기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은 동화 같은 분위기이면서도 상당히 복잡하고 신비로 가득하여 얼핏 다가가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몇 가지 코드만 알고 나면 의외로 단순하고 수많은 이야기들은 따로 놀거나 모순되지 않고 한줄로 꿰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갖가지 전혀 다른 종류의 보석들이 조화롭게 꿰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 유사합니다. 자칫 잘못 배치하면 유치할 수 있는 배색들이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그 스토리를 환희 비추어줍니다.

이 그림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중앙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막 창조된 인간과 천사, 우측 상단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역사, 좌측 상단은 종말 내지 하늘나라 이야기, 하단 양쪽은 땅 위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인간창조를 두고 우주의 시작과 종말 모두를 꿰뚫으며 그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배치하는 놀라운 통찰을 보입니다. 그가 유대인이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직관력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아주 튼튼해 보이는 천사가 아직 생명의 기운이 없어 축 늘어진 인간을 안고 화폭 넘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데, 창조주 하느님임이 틀림없겠지요. 우측 상단 구원 역사는 온갖 다양한 무지개 색 바람개비 같은 것이 빙빙 돌고 있는데, 이 휘몰이는 예수의 십자가가 쐐기 역할을 하여 어딘가로 튕겨나가지 않고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아래 오른쪽에 한 사람이 촛대를 들고 구원을 향한 사다리를 비추고 있으며, 같은 사다리가 십자가 위를 향해 걸쳐져 있습니다. 십자가 위 지붕 아래 쪽으로 현대 복장을 한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유대인과 우리 모두의 고난의 역사를 그리고, 바람개비 위 천사는 이 고난의 역사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채 어둠 속에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이 지탱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왼쪽 상단 황금빛 기쁨이 출렁이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무리가 기쁨의 환호와 함께 춤을 추고 천사는 나팔을 불고 온갖 생물들도 이 천상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춥니다. 천사가 안고 있는 사람의 몸 바로 아래 땅에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 이곳이 유혹과 환난의 땅임을 보여줍니다. 그 땅 위에는 온갖 생물들이 뛰어놀고 오른쪽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로스의 기쁨 속에 서로에 대한 신뢰 가득한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기도 공간도 이 세상과 저 세상도 아무런 구별없이 한 장면 속에 당연한 일인 듯 하나의 그림을 이룹니다. 이런 시선은 성경 속 하느님의 시선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 아인슈타인이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1년이 365일인 것이 우주 공통인 줄 알았던 것이 기껏 100여 년 전일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들은 자신의 무게로 휘어진 바로 그만큼 시간은 행성마다 다릅니다. 즉 중량이 달라지면 공간이 달라지고 공간이 달라지면 시간도 달라진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천문학자들이 잠시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그 숫자는 수십억이라고 하니, 하느님의 영원에서야 말할 것도 없을 터이지요. 그 우주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감히 가늠하지 못하지만 샤갈처럼 뛰어난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작은 사랑도 감동의 파도를 타며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샤갈처럼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만드신 마음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읽어내는 마음을 지닌 이는 복됩니다.

마르크 샤갈, 인간 창조, 1956-58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2월의 말씀


연탄 이야기 – 성탄 이야기

재형 화백의 자신을 태워 피워올린 그림 하나 성탄에 나눕니다. 6-70년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참 정겨운 장면입니다. 저 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던 고등어, 갈치가 떠오르고요, 연탄 위에 자갈을 올리고 간식으로 마른 오징어나 밤을 구울 때면 아이들의 입에서 침이 돌곤 했지요. 그러나 연탄에 대해서는 이런 따뜻한 추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 이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이 시대의 아픔이 있습니다. 연탄을 갈아야 할 때를 놓쳐 아래 위 두 장 모두 하얗게 다 타버리면 아주 번거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 벌어져, 번개탄에 먼저 불을 붙이고 그 열로 새연탄을 타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새연탄에 불이 제대로 붙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 시 그대로 타다만 연탄은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일산화탄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뇌에 치명적입니다. 자다가 참변을 당하여 일가족이 몰살하거나 평생 장애를 얻는 가슴 아픈 일들이 꽤 많았습니다. 연탄에 대한 회상이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절로 이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어중간한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설픈 무당이나 돌팔이 의사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하는데, 실제로 의료사고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같은 큰 건물을 잘못 지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은 일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학문의 어떤 분야를 철두철미 관통하지 못하고 적당히 얼버무린 사람이 어설프게 더 잘난 척하는 모습은 그래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설픈 경우들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교만함입니다.

그리고 수도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이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 길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적 수단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며, 그 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것을 요구받고 체험하고 터득해가는 변모의 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일등 하라, 최고 되라, 남보다 앞서라, 지면 바보된다.” 이런 가치만이 입력되어 온 뇌속에 “꼴찌나 첫째나 다를 바 없다. 심지어 바보가 되라, 달라면 주고, 때리거든 맞아라.” 이런 소리들은 처음에는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마음은 역반응,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과거와 현재의 역동성 안에 까불리던 어느 캄캄한 밤, 이 새로운 가치들이 환한 빛이 되어 수도자를 비추는 체험을 하는 때가 옵니다. 이 말씀들이 그대로 마음 가득, 영 가득 환함이 되는 체험은 참 중요한 순간이나, 아직 몸 구석구석까지 그 가치가 내면화된 것이 아니요, 은총으로 내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새내기 수도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자신이 마치 굉장한 단계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살짝 교만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수도의 길에서 정상적인 과정 중에 하나지만, 이 과정이 오래 가거나 여기서 멈추면 아주 이상한 수도자 하나 탄생하는 것이지요. 즉 타다만 것은 쓸모 없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해를 끼칩니다.

이 지상에서 불타는 것은 모두 재를 남기며 원래의 자신은 사라지고 주변에 열과 빛이라는 도움을 남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 유명한 ‘모세의 불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불타 올라 그 빛으로 타자를 온전히 비추며 타자 역시 불타오르게 하되, 자신은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넘긴 예수는 이 지상에 죽은 몸 즉 재로 남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태워, 아버지의 사랑을 인류에게 몽땅 넘겨주시되 자신은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충만해지셨습니다. 온전한 타오름은 자신도 타인도 풍요롭게 합니다. 성탄, 강생의 신비입니다.

황재형, 연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1월의 말씀


공감이 열어주는 세상

시대는 슬픔을 공감하는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터졌을 때 소위 “극우 매체”가 “오뎅”이라는 말을 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소름끼치는 전율, 슬픔, 분노가 섞인 감정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덮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그 깊이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들 아는 이야기 중에 ‘밥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가족의 테두리에서조차 경계가 분명한 핵가족의 삶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은 생소한 것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빚은 공감 부족의 세상 안에서 길가던 행인을 향해 자신의 울분을 쏟아붓는 ‘묻지마 살인’도 이제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린 참 난감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와는 다른 시선이 감지되는 곳도 있어 세월호나 이태원 사건, 무안 항공기 폭발 사고가 터지자 많은 이들이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이들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로 느끼는 이들이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이들의 존재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지, 어쩌면 우리 자신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이렇게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희망을 열어줍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도 이런 공감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곧바로 “클레멘타인” 노래가 제 귀에 울려퍼졌습니다. 누가 설명해 줄 필요도 없이 이 노래 가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아픔이 공명되게 해주는 애절한 내용과 그에 딱 어울리는 음율로 듣는 이의 마음 속으로 스며듭니다.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더욱이 순수한 사랑의 상실로 인한 사랑은 큰 상처도 입히지만, 그 상처를 받아들일 때 놀라운 치유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란 태초 이래 한 번도 없었건만 세상이 슬픔으로 무너진 적이 없고, 오히려 그 슬픔을 통해 새로운 것이 생겨남을 적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 노래 가사에 이어지는 장면 같지 않나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한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태양 빛 환한 바닷가와 화사한 분홍빛 옷차림의 소녀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둠이 가득 내린 집안은 좀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대비가 됩니다. 어부의 방인 듯한데, 오른쪽 창문에 걸쳐 걸린 그물이 마치 귀신의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물은 보통, 집안이 아니라 집밖에 널어 말립니다. 그리고 창 바로 밑 도마 위에는 손질하다 만 생선이 머리가 잘린 채로 붉은 피를 머금고 있는 것이 섬뜩함보다는 왠지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마치 그 아버지의 마음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침침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 묘하게 어울리게 창틀에 싱싱한 꽃들이 있는데, 이제는 아버지 곁에 없는 아이가 무척 좋아했던 꽃이리라는 짐작이 들지요. 이런 아버지를 아이가 한없는 그리움을 담아 창밖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던 세상은 이 아버지에게 늘 저렇게 환한 세상이었겠지요. 그 환한 세상을 송두리째 앗겨버린 아버지의 애끓는 슬픔을 화가는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그리지 않고도 절절하게 전달되게 만듭니다.

아버지의 슬픈 모습이 한 자락이라도 그림에 나왔다면 오히려 애끓는 슬픔은 그저 당연한 일로 그치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아버지의 슬픔은 세상 수많은 상실의 아픔 중 하나가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바로 우리의 슬픔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화가의 공감하는 마음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세상을 살리는 힘임을 믿습니다.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34-1890, 어부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0월의 말씀


생명 건네주기 – 생명 말리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인데도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올라 저 중년 남성의 정강이를 한 번 걷어차주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일상 안에서도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일상의 삶이 참 만만치가 않습니다. 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쉽지 않지만 남의 일이 되면 문제는 더 꼬이는데, 이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남의 일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면에서는 이 말이 맞고, 남의 일에 내가 왜 부아가 치미느냐는 면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남의 약점, 꼬이거나 뒤틀린 면에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속이 뒤집힐 때 그 사람 탓에 이리 속이 뒤집힌다는 사실이 마땅하고 옳은 듯 분통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짜증 나는 신사”가 이 그림 제목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짜증도 내야 할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이 그림을 한 번 살펴봅시다. 열차 안에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검은 상복차림의 한 젊은 여인이 앉아있습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잃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는지 아니면 돌아오는 길임에 분명합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장갑까지 정식으로 장례식 복장을 갖추었습니다. 그녀의 상실의 슬픔은 주위 시선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큰 듯 하여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경우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염치 없는 중년 신사가 위로하는 척 여인의 뒤에서 선심을 보이지만 그림 속에서도 그 검은 속내가 훤히 보입니다. 슬픔이 줄줄 흘러 옆사람까지 적실듯한 여인을 두고 실실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남의 슬픔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 생활 안에서 이런 경우를 적잖게 마주칩니다.

남의 불행을 평소 품었던 원망을 갚을 기회로 보는 사람, 남의 기쁨에 배아픈 사람, 얌체족이라 불릴만한 여러 일들 즉 고생스런 상황이 뻔할 때 자신만 쏙 빠져나가길 밥먹듯 하는 이, 맛있는 것만 먼저 골라 먹는 사람, 사람의 밑바닥을 뒤집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 남이 고생한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닌 척 하는 사람. 뭐 이런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우리 일상 안에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좌절을 겪는 사람, 세상을 등지고 고립의 방에 박히는 사람, 세상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의 경우들을 생각해보면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생명을 건네주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서로 생명을 말려버리는 그런 상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타자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받은 생명을 또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타자에게 건네주며 생명은 흘러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건네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생명을 서서히 말라가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미움, 질투, 분노, 원망, 모욕, 폭언, 중상 이런 것들은 상대를 서서히 말라가게 만듭니다.

위의 중년 신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젊은 여인의 슬픔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말라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 뻔뻔한 얼굴에 속이 뒤집히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일 듯 합니다. 여인의 눈빛 속에는 슬픔과 함께 분노와 짜증이 가득 고여있습니다. 뒤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노인은 상황을 뻔히 다 아는 듯한 얼굴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기도 뭣해서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으나, 아마도 속은 꽤나 부글거릴 것 같습니다.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전쟁터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일상 안에 너무도 깊이 들어 와있습니다.

Berthold-Woltze 베르톨트 볼체, 짜증나는 신사, 1874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9월의 말씀


새길 앞에서

구에게나 비켜 갈 수 없는 삶의 한 자락쯤은 있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무엇도 어떤 이도 개입할 수 없을 듯 한껏 몸을 구부린 이 연로한 이는 아브라함이요, 내 삶의 그런 순간이 오롯이 겹쳐집니다. 자신의 존재를 훌쩍 넘어서는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는데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는 무력함 앞에 던져지지만, 그 누구의 힘도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전체를 다 뒤져도 세상적 인간적 방식으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샤갈은 그림 전체를 모래알로 그린 듯한 화법으로 이 상황을 이해시켜버립니다. 그림의 틀도 모래알이요, 아브라함과 물병과 지팡이 심지어 천사마저도 모래알 같은 점으로 그렸습니다. 이전까지의 세상은 그 앞에 그렇게 스르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착의 땅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유랑의 삶으로 들어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을 샤갈이 포착한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깊이 성경을 읽어내는 그의 깊음이 새삼 부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느닷없이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 앞에 한없는 무력함을 느낄지언정 그의 몸짓에는 거부가 전혀 읽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온존재로 받아안기는 했는데, 자신에게는 한 발자욱도 그 길로 갈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천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미 온몸이 향하고 있고, 땅에 내려놓은 지팡이도 그쪽을 향합니다. 아브라함과 달리 천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힘있게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갑작스런 하느님의 지시에 무력함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간적 세상적 방식을 찾고자 동분서주하지 않으며, 앞으로 갈 길의 프로젝트 같은 것을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는 온몸을 웅크리고 내면 깊은 곳의 심연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의 힘과 지혜와 생명과 사랑의 원천은 오직 그곳에만 있음을 그는 알기 때문이지요. 그의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면의 목소리, 그의 힘과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자 마지막인 그 목소리에 닿는 일만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의 힘과 지혜는 오직 여기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생명은 이미 제단 위에 부어질 포도주로 바쳐졌습니다.”라고 한 사도 바오로가 떠오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없는 무력함과 동시에 유일한 분께 대한 신뢰입니다. 무력함과 무기력함은 아주 다릅니다. 무기력함은 자신의 힘에 의지함에서 나오며 쉽게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기력함만을 오래 경험한 이는 정신병적 상태로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전혀 가보지 않은 새길 그것도 위험과 도전이 있을 것이 너무도 뻔한 길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무력함 앞에 저렇게 온전히 그분 목소리만 귀 기울이며 내면을 향할 수 있는 그 존재의 바탕은 참 부럽고도 부러운 것입니다. 이런 신뢰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일의 성과나 사람들의 평판 여부에 삶이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새길에 들어서면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경력, 여정, 가문, 능력. 가까운 사람 등은 전부 무가 됩니다. 이것은 존재가 잊혀지는 일입니다. 삶이 온전히 무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가게 될 방향 앞에 놓인 예상되는 미래는 인간적 시선으로 볼 때 결코 탄탄대로가 아니며 오히려 고난과 역경의 연속임에 틀림없지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과 가장 필요한 것과 현재 시급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 시선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무너지는 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때입니다.

마르크 샤갈, 성경삽화 중 아브라함, 1931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8월의 말씀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다

그림 이전까지 풍경화는 미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그림 이후에야 풍경화는 미술의 한 분야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그림의 매력 속으로, 8월 더위 그림의 그늘 속으로 한 번 들어가봅시다. 그 이전 플랑드르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리긴 했으나 그저 미술계의 저 밖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풍경은 그림의 뒷배경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존 컨스터블은 그림과 같은 시골의 풍경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은 시골 어디서나 만날 것 같은 평범함과 정겨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전 플랑드르 화파에서 풍경화를 많이 그리긴 하였으나 어딘지 과장되고 기교가 잔뜩 들어간 그림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투박하고 자연스러우며 가식이 없어 보고 있으면 편안해집니다. 풍경화라면 소재가 되는 경치가 중요할 터인데 그는 그림의 소재로 특별한 명소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향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점이 있는 곳을 소재로 택합니다. 그리고 그림 속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등 그의 시선을 비켜가는 대상이 없을 정도로 그 장면에 나오는 모든 것에 깊은 애정을 담아 그러면서도 기교를 입히거나 과장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데 온힘을 쏟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가 습지의 축축함,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함이 보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는 또한 한낮 시골의 적막함만으로 정지된 화면으로 끝내지 않고 강아지 한 마리를 통해 움직임을 끌어내며, 여기에 더해 그림 한복판에, 건초를 다 내려놓고 돌아가는 마차가 고요한 움직임을 빚어냅니다. 풍경 속 빈 마차 위 두 사람은 상당히 작게 그려져 있지만, 그 작음 속에서도 두 농부의 동작이 평화로움을 빚는데 한 역할을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삼매경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평범함 속 뛰어남”이라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것 하나 없이도 명화 그것도 그림 역사 속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나온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인 듯 합니다. 이런 평범함의 아름다움 속에는 그의 치밀한 과학적 연구가 한몫을 하는데, 컨스터블을 유명하게 한 구름 묘사에서 특히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합니다.

방금 말했듯이 구름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과 같습니다. 그는 영국 사람이요, 영국이라면 날씨 고약하기로 유명하지요. 푸르고 쨍한 하늘은 만나기 힘든 현상인 그런 나라에 살면서 그는 구름을 주인공으로 삼은 “구름 습작”을 많이 남겼고, 모든 그림에서 구름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각양각색의 구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구름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공부하였고, 마치 기상학자처럼 캔버스에 스케치한 날짜, 위치, 날씨, 자연광, 구름 상태 등을 기록했다고 하니, 그의 구름 그림은 단순히 경치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배경이 아니라 바로 그 날 풍경의 있는 그대로의 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치 구름이 중심인 듯 오른쪽 화면 두둥실 떠오르는 뭉게구름과 뒤따라 오는 먹구름은 실제 구름인 양 입체적이고 선명하여 먹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올 듯 생생합니다.

당시 유명화가였던 들라크루아는 이 무명화가 컨스터블의 건초마차 속 구름을 본 후 감명을 받아 “키오스의 섬의 학살”이라는 그의 그림의 배경을 바꾸었다 합니다. 이런 감명을 주는 그림을 그리기까지 그는 부유했던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당시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풍경화는 촌스럽고 미완성작 같다는 혹평을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경제적으로도 궁핍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는 “현대 풍경화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의 그림 속 보이는 진실성은 그의 삶에도 그대로 묻어나 보는 이의 마음 속 고요한 평화를 빚어줍니다.

John Constable 건초마차 1821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7월의 말씀


삶의 층층에 쌓인 지혜

그림을 그린 크리스챤 세이볼트는 바로크 시대 독일 화가로, 현실 모습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게 이상화된 모습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이던 시대에, 있는 그대로 인물의 모습을 그린 시대를 앞서가는 초상화와 자화상을 주로 그렸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지닌 어떤 힘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의 마음 속으로 훅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인 예전 세상에서나 지금이나 사람이 늙어가면서 삶의 층층에 지혜가 쌓이고, 자신의 습성이나 약함은 뒤로 물릴 줄 알게 되어, 자신보다 주변을 감쌀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는 일은 예전 문화에서든, 현대에서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노인의 지혜는 삶이 막힐 때 빛과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만, 요즈음은 참 찾기 어려운 진기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며 난관에 봉착했을 때 친부모보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지식과 달리 지혜는 머리 속에 집어넣어 양을 불리는 일이 아니며, 머리만이 아니라 몸속으로 들어가 쌓여 자신과 하나가 되고 그 사람의 인격이 되어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노인의 지혜는 한 집안뿐 아니라 한 마을을 구하고 인도하기도 하는 등불이었지요.

눈빛의 총총함에 그대로 빠져들게 하는 그림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눈빛은 총명한 눈빛이 보통 보이는 도전적이거나 쌩한 느낌이 없고 모든 것을 수용할 너른 마음의 여지가 읽혀집니다. 주름살이 저리 고울 수도 있네요. 이탈리아의 어떤 배우는 분장사에게 자신의 주름을 보이지 않게 감추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이런 말을 했다지요. “주름은 내 평생 걸려 만든 것이니 감추지 마세요.” 이 그림 속 여인이 했을 법한 말입니다. 넓은 이마와 곧은 콧대, 다문 입술 이 세가지 요소가 합쳐지면 통상적으로 조금은 거친 모습이 나오기 쉬운데, 이 여인의 모습에서는 따뜻함이 절로 풍깁니다. 낯선 사람이 가더라도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은 어렵지 않게 내올 것 같은 인상이지요. 그럼에도 아무나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함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바치는 것과 삶과 생명을 허비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예전 어머니들 가운데 평생을 뼈 빠지게 고생하고도 자식들로부터 인정받기는커녕 무시당하고, 그 결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허망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지요. 그렇게 고생하고도 왜 그 결과는 이리 비참한 것인지요. 제가 보기에 이런 분들은 삶을 바친 것이 아니라, 허비한 결과로 보입니다. 삶을 허비하는 경우, 언젠가는 대가가 돌아오리라 헛된 희망을 품고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타인 특히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남도 들어올 자리가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삶을 바치는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길이기에 갑니다. 자신의 삶과 정열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내 꿈을 대신 채워 줄 대체물로 자녀들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에게는 그 삶 자체가 이미 보상입니다. 자신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기에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내 자리를 마련해달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과 에너지만 내놓고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 그 자체가 자신에게 보상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삶의 질곡 구석구석 힘겨운 상황마다 그 헌신은 지혜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 지혜는 그 사람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줍니다. 자식이 주는 행복 이전에 자신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지혜는 삶을 바라보는 그림과 같은 투명한 눈을 길러주어, 삶 그 자체로 타인에게 빛이 됩니다. 생명이 건너갑니다.

크리스챤 세이볼트 1695-1768 An old woman

(51779)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석곡로 378

E-mail : ocsokr@daum.net ☎ 055-222-3801 Fax 055-221-8961

엄률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6월의 말씀


생명, 싱싱함 & 폭력성

명력, 싱싱함, 폭력성이 구별할 수 없이 뒤섞여 아이들 장난 속에 펄떡거리는 그림입니다. 사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생명과 폭력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기가 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깨물거나, 심지어 맛있게 빨아먹던 엄마의 젖을 물어버려 엄마가 비명을 지르게 하는 일도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아주 딴판은 아닌가 봅니다.

19세기 말,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다 해어진 옷에 신발조차 없이, 장난감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는데도 자신들의 놀이 속에 푹 빠져있습니다. 장난감이 지천으로 널린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지만 옛날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장난감도 자연이나 쓰다 버린 폐물에서 스스로 구해왔지요. 그래서인지 진지하다 못해 놀이와 현실이 구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어, 보는 사람도 그 놀이 속에 빠져들게 해줍니다. 장님 역할을 하는 아이를 살펴보면 두 아이보다 옷이 더 남루하여 윗옷은 거의 흘러내릴 지경이고 바지는 무릎이 훤히 다 보이는데도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다른 두 아이와 달리 머리를 제법 예쁘장하게 길렀습니다. 두 소년은 장님 역할을 하는 한 소년을 진심으로 골려주고 싶은 심정이 표정에 잔뜩 고여있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남루해도 평소 주눅 드는 일 없는 친구가 살짝 밉살스러웠을까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렇듯 함께 놀고 있는 놀이 속에도 인간관계 역학은 멈추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놀이 속에서 더 리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이들의 놀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인을 대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법까지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 역학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느냐고요? 장님 놀이를 하는데 두 녀석이 함께 의자 있는 쪽으로 장님 역의 친구를 끌어들입니다. 이 놀이는 자신을 유혹하는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잡으면 역할을 바꾸게 되는데, 제법 넓어보이는 창고에서 하필이면 걸려넘어져 다칠 수도 있는 의자 쪽에서 장님을 유도합니다. 약간 고의성이 보이지요. 골려주고 싶은 마음, 약올려주고 싶은 꼬인 마음이 폭력성을 띠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어쩌면 생명력이 펄펄 뛰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요소들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봅니다.

인간성 안에는 누구나 잘 알고 경험하듯이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다 함께 엮이고 풀리고 하면서 삶을 영위해갑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우리는 부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그에 대처하는 방법도 배우는 것이지요. 점잖아야 할 어른들은 체면 차리다 오히려 체면 구기거나, 상대의 폭력성에 속절없이 당하고는 더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엮여 본 적이 없는 탓에 상대의 행동이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그러다 보니 쉽사리 상대를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기 쉽습니다. 현실 안에서 많은 일들은 우리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역동성은 영이 단순한 어린이 시절에는 몸으로 뒹굴며 자연스럽게 체득합니다. 삐지고 뾰루퉁해지고 약올리고 속이고 쥐어박고 발로 차기도 하고 이 모든 폭력성이 배인 행동과 말들이 자신과 친구에게 미치는 영향을 싱싱한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배워갑니다. 무시도 당하고 무시도 해보고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을 준비는 어린 시절에 이미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놀이인 장난을 대신하여 이 시대 어린이들은 비싼 장난감만 상대합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같이 장님 놀이할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와 놀 시간 따위는 엄마가 짠 프로그램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생명력은 또래 친구들을 만나 경쟁하고 아끼고 놀려주기도 하며 쑥쑥 자라 건강한 어른이 되어갑니다.

Guiseppe Constantini 장님 놀이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