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5월의 말씀
죽음이 빚어낸 환함
이와 비슷한 그림은 이전 시대 작품에서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 시대 인터넷 속의 세상을 엿보게 해주는데, 놀랍게도 1866년에 그려졌습니다. 인터넷이 있든 없든 옛날이든 오늘이든 사람의 심리에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림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오스테리아”라는 당시 노동자와 서민들이 음식을 나누며 소통하던 식당에 젊은이 3명이 모여 식사를 하던 중에 마치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어주는 듯, 아니면 이들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세 명의 시선이 같은 듯 묘하게 다른 이 상황극 같은 모습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다고 굉장한 싸움이 벌어지기 전 극한 긴장의 상태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일어난 살짝 비틀린 모습이라고 할까요. 여기에 고양이까지 시선의 한몫을 보탭니다.
빨간 윗옷에 흰 수건을 쓴 제일 앞 소녀는 웃고 있는데도 왠지 서늘한 시선입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치켜든 모습 역시 이 소녀의 심리의 한 면을 보여주는데, 어딘지 모르게 공격성으로 가득합니다. 아니 어쩌면 과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빨간색 역시 도발적인 면을 느끼게 하는 색깔인데, 빨간 옷에 어울리는 산호 빛깔 목걸이까지 성장을 하고 나선 그녀의 속마음이 살짝 궁금해집니다. 옆자리 노란스카프 여인의 시선은 더 의미심장하며 사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어, 다른 두 명의 시선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옆눈질로 자기 친구를 의식하는 듯 하지 않나요? 웃음조차 노골적인 비웃음에 가깝습니다. 마치 “네 속을 내가 모를까봐?” 이런 느낌이 잔뜩 묻어나옵니다. 젊은 남자의 시선은 두 여인과 달리 묘한 빛은 없고 불쾌함을 가득 품었습니다. “너 여기 왜 왔니?”라고 묻고 싶은가봅니다. 심지어 고양이의 시선은 더 오묘합니다. 원래 고양이의 행동거지가 강아지와 달리 예측불가한 면이 많아 문학이나 예술에서 어떤 신비롭거나 의심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지요. 하필 고양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이들 뒤에 자리를 잡고 떠날 생각도 없이 이들의 모든 시선을 다 모은 오묘함을 품고 다소곳이 앉아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또 이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인, 자신들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신사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이 부분은 다루지 못합니다. 세 젊은이들의 시선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관찰당하는 입장에서 다시 그 관찰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군가 스쳐지나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노골적이면서도 피하는 듯 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을 화가는 그림으로 잡아내었습니다. 이 관찰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를 향한 자기식의 평가나 익명의 적의가 화살처럼 양방향으로 쌩쌩 날아다니고 있어, 우리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단지 이 시대는 그것을 일반화할 수단이 없었기에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시대는 익명성이라는 특징을 지닌 인터넷 매체를 만나면서 온세상을 장악하는 문화가 되어버렸고, 그 피해 앞에서 희생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갑니다. 높은 평가를 받는 표지인 팔로워 숫자를 늘이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어진 잔혹한 세상에 살면서도 사실 깊숙한 곳에는 어떤 평가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줄 그런 시선을 애타게 바라는 갈망이 숨어있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전해주는데,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기 전 인간은 알몸임에도 어떤 수치심도 없이 서로를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존재의 원천으로부터 멀어지자 하느님을 피해 숨고, 서로 알몸이 부끄러워 옷을 입습니다. 하느님을 심판자로 이웃은 평가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가 자신의 깊은 갈망을 발견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결코 놓을 수 없는 이유지요. 서로 바라봄은 비난, 경멸, 적의가 아니라 사랑의 시선인 것입니다.
Iwan Aivazovsky 아홉 번째 파도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