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6월의 말씀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라고 전합니다. 그 후 그 군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였다.”(사도 2,37). 그들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구약 성경을 읽으면 놀라운 하느님의 자비, 분노, 질투를 만나게 되지요. 또한 “참 불쌍하시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배신하는 아내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남편, 자식이 배반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변치 않는 사랑을 베푸는 부모이신 하느님을 전하는 호세아서를 읽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을 “아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로 안아주고, 먹여 주고, 병을 고쳐 주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그분에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잊어버리세요. 없던 자식으로 여기세요. 언젠가는 돌아오겠지요” 사람들은 이런 말로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마음의 신비는 다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한 분이시기에,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나는 나의 정의를 뒤집어엎었다.”(호세 11,8 참조)라고 선언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자비가 정의를 이깁니다.

전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드시어 사랑해 주십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사랑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고 오히려 한없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바로 이 어리석은 사랑과 용서 때문에 자식인 이스라엘은 회개하였습니다. 회개를 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바쳐야 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호세 14,3). 다시 본문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바쳤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즉시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고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시어 용서하시고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요나가 외치자(요나 4장) 니네베 사람들은 바로 자루옷을 입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임금도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라고 말하며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돌리시는 하느님”을 요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을 피하여 거듭 도망가는 요나를 죽음과도 같은 물고기 배 속에서 건져 주신 하느님의 크신 자비! 요나는 “마음을 돌이키시어 동정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배반의 죄와 우리의 악을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죄에서는 죽은 내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은 나았습니다. 잠시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1베드 2,24-25 참조). 군중이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용서받으십시오.”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마음을 돌이키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증인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함의 바닥에 닿았을 때, 이제는 정말 주님께 얼굴을 들 수도 없다고 여겼을 때, 자신의 배반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라고 루카는 말합니다. 그저 바라보시는 주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여 주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우리 때문에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죄를 감추지 않는 그의 눈물은 예수 성심의 바다에 닿았습니다.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는 성 베드로 사도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로 되돌리소서. 돌아가리이다. 당신께서 빛을 비추시면 함께 춤추고, 당신 영을 보내시면 함께 노래하리이다.”

El Greco (1541-1614) / 눈물 흘리는 성 베드로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5월의 말씀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5월

의 산과 들에 출렁거리는 초록의 생명은 “기뻐하고 춤추며 주님께 나아가세!”라며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이처럼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뛰며 춤추던 다윗”(2사무 6,1-23 참조)이 생각납니다. 어떤 이는 임금의 체통도 없이 천박하게 군다고 업신여기기도 하였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춤은 “진실한 예배자”(요한 4,23)의 몸짓이었습니다. 미드라쉬 전통에서는 “아담은 이미 어른”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아담이 우리 주님처럼 “아기”로 창조되었더라면 ……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기뻐하며 무조건 사랑받았던 기억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후, 드러난 자신들의 알몸이 비록 부끄럽고 두려웠을지라도 하느님을 피하여 숨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창세 3,1-11 참조). 달려가서, 저녁 산들바람과 함께 거니시는 아빠 하느님의 품 안에 숨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다시 깨끗이 씻어 주소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며 늙은 엘리사벳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내적 눈이 없다면 쑥스럽고 머쓱하고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일이겠지요(루카 1,5-25 참조). 여섯째 달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창세 2,1) 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자렛 고을에서 메아리칩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가 아빠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듯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성령의 기쁨이 넘치는 마리아는 서둘러 젊은 사슴처럼 산을 넘고 언덕을 뛰어 달려가(아가 2,8-10 참조)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자, 이리 나와요. 일어나요.” 마리아의 인사말을 태 안의 아기가 먼저 듣고 기뻐 뛰놉니다. 어머니 엘리사벳도 같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축복합니다(루카 1,39-45참조). 두 어머니와 태중의 두 아이, 하느님이 하시는 큰일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 기쁨과 환희, 사랑 안에서 길러진 믿음의 충만! “돌판에 새겨진 계약의 궤” 앞에서 그렇게 춤추었던 다윗의 축제를 훨씬 넘어섭니다. 살로 된 심장에 계약 자체이신 분을 품고 있는 “계약의 궤”이신 주님의 어머니와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거룩하며 아름다운 어울림입니다. 성모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아이처럼 흠이 없으신”(아가 4,7 참조) 당신의 영혼과 정신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스며들게 하여주소서. 일몰에 함께 노래하리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한처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잠언 8,30). “새 아담”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품 안에 계시는 영원한 아이”(요한 1,18 참조)이시며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아이이시며 임금이신 우리 주님을 알아 뵙고 경배드리는 이들은 그 옛날 다윗처럼 춤추며 기뻐합니다. 삼왕이라 불리는 동방박사들도 춤추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마태 2,9-12 참조). 아버지 하느님 곁에서 누리던 그 사랑은 온 세상 안으로, 모든 사람에게로 흘러넘치는 것이지요. 멈추지 않습니다. 천박하다고 비웃는 미칼에게 “나는 주님 앞이라면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착한 목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더 낮아질 수 없는 곳, 더 비참할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도 한 마리 잃은 양을 되찾아 두 팔에 안고 기뻐하며 성부께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소서.”(루카 23,39-43 참조). 이 죄수는 자기 곁에 계신 분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둠이 짙은 한낮,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인 예수님”을 부르는 성모님의 기도는 아들 곁에 매달린 죄수의 선한 믿음에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 저를 기억하소서.” 어둠이 찢어집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들을 만납니다. 그 만남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이 비롯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는 홑몸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성령과 함께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낙원으로 들어간 죄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이미 “새 하와”께서 서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집”(요한 19,27 참조)으로 들어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이란다.”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곁에 있는 이에게 다가가 전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이입니다.”

지거 퀘더 / 너희는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12)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4월의 말씀

어떻게 다시 태어날까?

“어

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1코린 2,9) 두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겠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물을 숨겨두셨다면(마태 13,44)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오직 하느님을 향해 기다리는”(시편 62,2) 우리 마음이 쉴 수 없음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숨겨두신 그분께서는 우리 일상 안으로 슬며시 때론 느닷없이 침투하시고, 우리가 찾도록 재촉하시고, 스스로 발각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지혜 6,12) 보물은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알아보게”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소리를 듣고 스승을 떠납니다(요한 1,35-42 참조). 앞서가시는 분이 요한이 증언하는 “빛”이심을 알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먼저”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순간 두 제자는 놀라운 광채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마음속 깊은 열망, 존재의 심연을 찌른 “낯선 이”의 거룩함에 감전된 탓인지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며 이끌리듯 따라갑니다. 다른 제자와 “함께” 안드레아는 그분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외침은 분명하게 울려 퍼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발견하였네!” 벅찬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 자리는 누구라도 초대받을 수 있는 희망의 자리입니다. 다시 태어난 그들은 제자의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 숨겨진 생명을 다시 얻기까지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갈증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늙은 사람”이 과연 어떻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 3,1-10 참조). 우리를 지어 만드신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는 이들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지식을 갖추고 존경받는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야 없지 않을까? ……” 그는 밤의 어둠속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십자가의 어둠을 뚫은 섬광에 꿰찔렸습니다. “밤”의 니코데모는 이미 시작된 주님 빛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요한 19,39 참조). 그는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주하던 “어머니 배 속에서 탈출”하여 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주인인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 나라는 지위, 명성, 권력을 쌓고 모으는 양적인 판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과 연민이 담긴 “물 한 잔”(마르 9,41)은 세상의 목마름을 치유합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이사 25,8). 우리의 눈물 속에 당신을 숨기십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 20,11-18 참조). 그분께서 먼저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마치 눈먼 이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열리듯(마태 9,30), 그녀는 부활하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거듭 돌아서서 “하느님의 자녀”(루카 20,36)로 태어납니다. “마리아야,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당신의 하느님이신 분을 “너의 아버지, 너의 하느님”이라 하시며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랑의 눈물 속에 감추어진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후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예수님 인성의 신비 속에 더 깊이 참여할 것입니다.

루오(Georges Rouault) / 부활하신 예수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3월의 말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

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이사 1,2). 자식들에게서 버림받은 아버지의 슬픔, 하느님 아버지의 상처 입은 사랑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간청하며 예언서의 첫 장을 여는 이사야는 하느님의 꿈을 전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기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6-8). 왕국의 제왕이 될 수 있는 각각의 동물들이 “함께” “더불어” 지내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화는 힘센 짐승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 무리 속에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새끼들이 함께 있고, 어린아이, 젖먹이, 젖 떨어진 아기가 마음껏 안전하게 평화를 만들며 누리고 있습니다. 놀랍고 낯선, 그래서 “당신의 꿈”이라고 밀쳐 버리고 싶으나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정말 꿈일 뿐이고 환상일까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 우리 일상의 현실에 이미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시작된 그 나라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미의 태 안에서, 전쟁터에서, 굶주림으로 아이가죽어가는 척박한 이 땅에 이제 막 젖 뗀 아기보다도 더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가 이미 뿌려졌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지만 자라고 커지고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 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듯이, 성경을 펼치면 온통 예수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두려움과 함께 매력을 발산하며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소와 말이 지키는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내고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마태 13,44) 이들처럼 기뻐하며 돌아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목자들(루카 2,15-20).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는 상인(마태 13,46)같은 동방 박사들(마태 2,11), 그들은 이사야가 전한 평화의 왕국이 시작됨을 보았겠지요. 몸을 숨긴 나무에서 내려와 재산의 반을 선뜻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며 횡령한 것은 네 곱절로 갚는 자캐오(루카 19,1-10). 중풍에 걸린 환자를 평상에 누이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와를 벗겨내어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이들(루카 5,17-20). 측근 제자들의 음흉한 질책에도 아랑곳없이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깨뜨려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아름다운”(마르 14,6) 일을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랑의 여인. 책임 있는 자들은 핑계를 대며 피하고 도망가건만,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기꺼이 다가가 타인의 고통을 돌보는 사마리아인(루카 11,30-37). 서 말이나 되는 밀가루 반죽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전긍긍할 때 “슬쩍” 누룩을 집어넣는 지혜로운 여인(루카 13,20-21), 반죽은 부풀어 올라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빵이 만들어져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지요. 잔치를 차리면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어김없이 초대하는 사람(루카 14,12-14). “아버지의 다스림”은 우리 관계의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저마다의 마음 그릇에 쌓인 완고함과 이기심의 진흙은 돌심장이 되어 서로를 찧고 있으니 상심하신 그분께서는 말씀으로 방문하시고, 때론 예상치 못한 얼굴로 맞대면하시며 맑은 물을 폭포처럼 쏟아부으십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장). “예”라고 지금 여기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나중에 “주님, 주님!” 부르며 문을 두드릴 때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왔을 때 왜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불렀을 때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느냐?”(이사 50,2). 함께 아파하시는 분의 목소리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겸손하게 청합시다. 그분께서는 먼저 약속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으니, 일어나 가자.”(루카 12,32:요한 14,31).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 산상설교 / 1877 / 덴마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2월의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2월

의 평일 미사에서는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청맹과니 같은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민낯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서 “이웃”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제자들과 함께 우리를 다그칩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21).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막아버리는 완고한 마음, 깨달음을 막고 있는 그 돌심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고 대답하는 카인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와 너를 아무런 상관없는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악한 마음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타인에게로 옮겨가지 못하는 탐욕이지요.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모여와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이미 시간은 늦었고 외딴곳이었습니다(마르 6,34-44). 제자들은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스승님, 이젠 저들을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곧 가게들은 문을 닫습니다. 어서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독점하려 하고 군중의 필요를 외면합니다. 타인을 밀어내면 정작 우리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혼자”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군중에게는 “스스로”(마르 6,36) 하기를 요청했지만, 뱃사람이었던 그들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호수의 맞바람 속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요(마르 6,45-52). 제자에게도 군중에게도 주님은 함께 계셔야 합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는 “나와 그”의 갈라지고 흩어진 조각뿐인 까마득한 사이를, 한땀 한땀 꿰매시어 흘러넘치는 풍성함으로 채우시며 “나와 너”라는 아름다움을 직조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을 듣는 우리가 가진 것을 생색내지 않고 주저하지 않으며 내어놓기만 하면 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야단치고 설교하고 가르치시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힘 있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볼 수 있게, 눈을 뜨게 하십니다.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연중 제 6주간 수요일 복음 환호송). 당신께서 거저 치유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로 그렇게 될 수 있는 듯 간절한 열망으로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마르 8,22-26). 단지 보지 못하는 육의 눈을 치유코자 하심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이끄시는 복된 동행입니다. 그 옛날, 멸망할 죽음의 땅 소돔에서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온(창세 19,16) 천사들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얹으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으십니다. 다시 당신 손을 얹으십니다. 한처음, 진흙을 빚으시어 감히 담을 수 없을 만큼의 당신 연민의 영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나게 하셨지요. 그 창조의 시간입니다. 똑똑히,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는 인간을 아십니다. “약하고 초라한 정령들에게로 다시 돌아갈”(갈라 4,9) 수도 있기에 당부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소돔으로는 뒤돌아보지도 말고 들어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소돔은 육의 탐욕 – 방탕, 우상숭배, 시기, 분열, 이기심, 혐오, 노동 착취, 생태계 파괴, 대량 소비, 분쟁 – 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 탐욕들은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예수님과 늘 함께 걸었던 제자들조차도 어떤 것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는 말씀은 바로 “이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처지를 알고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 일이 “저 마을”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을 뜨게 된 이가 처음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이끄는 “걸어 다니는 생명 나무”입니다. 이 얼굴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놓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타인의 거룩한 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소경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 11c / 로마네스크 회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1월의 말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려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여 주시며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었습니다(창세 15,5-6). 고통의 의인 욥에게도 “아침 별들이 함께 환성을 지를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제시간에 이끌어 낼 수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주님,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고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욥 42,2). 캄캄한 하늘의 별은 단지 황홀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새벽, 안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시린 얼굴 위로 새삼 뜨겁고 놀라운 광경이 쏟아집니다. 두려움과 함께. “땅을 비추는 별들이 되어라!” 는 명령의 단추를 당신 손가락으로 단 한 번 누른 것이 아니라 하나씩 빚으시고 모서리의 구석구석을 씻으시어 가장 알맞은 제 위치에 별들을 걸어두셨군요. 별도 천사도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별의 말을 따른 동방박사와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들판 동굴의 구유에 누운 아기”를 뵙고 경배드렸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2,10). 하느님께서 “아기”로 오셨습니다.

경천(驚天)하고 동지(動地)할 일은 계속됩니다. 건너야 할 요르단 강 주변의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섬뜩하게 날을 세우고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이미 뿌리에 닿아있다.”(루카 3,7-9). 살려면 지금 당장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가장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섰습니다(요나 3,5-10).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의 소리를 들은 세리들과 군사들, 기대에 차 있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며 그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낭패스러운 일입니까? 백성들의 행렬 맨 끝자락에 그분께서 서 계십니다. 죄인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립니다. 루카는 천연덕스럽게 전합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루카 3,21). 별빛보다 더 가벼우시니 하늘 위 하늘에 계셔야 하는 분께서 가장 낮은, 더구나 온갖 위선과 악의와 죄를 씻는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시다니요.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왜 이렇게 하십니까?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1,1).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라고 만류하거나 행렬에서 끌어내려고 할 것입니다. 정녕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하십니다. 어느 사람이 구유에서 태어나고 스스로 “흠없는 죄인”이 되었던가요. 안절부절,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로 만드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2코린 5,18.21).

세상과 인류의 온갖 죄를 짊어지시어 당신 것으로 만드시고 없애시는 예수님께서는 물살이 요동치는 죽음과도 같은 강의 깊은 심연까지 내려가시고 올라오셨습니다. 마른 땅처럼 물 위에 서시어 기도하셨습니다(루카 3,22).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어쩌면 그 세리의 기도가(루카 18,9-13) 바로 예수님께서 이날 바치신 기도일까요? “아버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들 예수님의 기도 후에 새로운 창조가 한 처음처럼 일어납니다. 물은 갈라지고 하늘 궁창은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차갑고 냉혹한 하느님의 얼굴이 아니라, 언 땅의 어둠에 묻힌 씨앗을 싹트게 하는 따사로운 햇살 같으신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그 얼굴을 보여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임에도 여전히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는 눈먼 존재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산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산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야만 합니다. 오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두 서로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도 “나는 저 사람들과는 같지 않아”라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연약함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죄 때문에 가슴을 치는 “죄인들과 친구”(루카 7,34)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그 친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여 함께 걷는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 나라의 드러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너희는 나의 연인이고 나 또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의 세례 / 17세기 / 우크라이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2월의 말씀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다.

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이들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영원에서부터 “한 아기”는 가장 가까운 하느님 품 안에 계셨고, 세상을 만드실 적에도 함께 곁에 계셨으니 그분이 하시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아십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동산을 일구고 돌보도록 파견하셨습니다. 창조는 여전히 새롭게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요한 8,58) “한 아기”, 그 구원자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고 멈추십니다. 죄가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십니다(요한 9,1-41). 당신 침으로 땅의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가서 씻어라.” 명하시며 “실로암” 못으로 보내십니다. 눈먼 사람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파견된 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듯이(루카 2,40) 눈뜬 이는 차츰차츰 진리의 빛 속으로 의연히 걸어갑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하느님의 일”에 대해 “잠잠히 있을 수가 없는”(이사 62,1) 것이지요. 베드로조차도 “나는 아니오.”라고 발뺌했건만, 자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웃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Ego Eimi)라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나다.”(요한 6,20) 예수님께서 당신을 증언하셨듯이 그도 자신에 관해 증언합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시고, 이제는 제가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볼 수 있으나 그는 아직 “그분”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철벽을 쌓은 채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라며 홀로 담대하게 맞섭니다. 눈을 뜨고 본다는 현재를 무시하고 오직 눈이 멀었던 과거에만 집착하는 그들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놀라움과 감탄을 모르는 “눈먼 이들”은 “보는 이”를 시나고게에서 파문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통탄할 일이네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말씀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밖으로 내쫓겨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세상의 빛”을 얻습니다. 드디어, 자신을 보셨던 예수님을 그가 봅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보아야 할 얼굴을 보니 온몸은 밝아지고 그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완성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먼저 찾으시고, 먼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아기”로 오셨습니다. 몸짓과 울음 외에는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얼굴, 소외되고 외면당하며 끝내는 잊혀질 수도 있는 소수자의 얼굴, 바로 이 “아기의 얼굴”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끌어 당깁니다. 진리시여, 빛이시여! 제 안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어 주시어 당신 빛으로 빛을 보고, 당신의 얼굴들 앞에 있는 제 얼굴과 제 얼굴을 바라보시는 당신 얼굴을 우러러보며 경배드리게 하여 주소서.

Bicci Di Lorenzo (1373-1452) <성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1월의 말씀

행복하여라,
용서하는 사람아!

리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침과 저녁기도, 미사 때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그 이유를 “이는 흔히 일어나는 마음의 가책 때문이니, 기도문 가운데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언약을 바침으로써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허물에서 자신들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이다.”(규칙 13장) 라고 합니다.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고 말씀하십니다.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이 자비는 용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용서하는 사람들!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남을 심판하거나 섣불리 유죄판결을 하지 않으며 용서의 마음을 지닌 자비 깊은 사람은 하느님을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아니면”(마르 9,29)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벙어리, 귀머거리의 더러운 영이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용서를 청할 용기와 받아들일 겸손한 입과 귀를 막아버리니까요. 용서할 대상은 이미 없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응어리가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주님께로 피신하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달라붙어야지요. “주님, 믿음을 주소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면 아무리 큰 증오의 산도 주님 자비의 바다에 던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합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기”(시편 145,8-9)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우러 오시면 울게 됩니다. 가까이 오시어 당신 현존의 향기로 우리 죄를 어루만져주시면 더 많은 눈물이 흐릅니다. 그 눈물은 기도입니다. 양식입니다(시편 42,4). 눈물의 빵은 우리의 믿음을 튼실하게 지켜주는 거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사랑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인 이!”(시편 32,1). 크게 탕감받은 사람은 더 극진한 사랑을 드러냅니다(루카 7,36-50). 그는 예물을 놓아두고 서둘러 달려갑니다(마태 5,23-24). 이제 주님께로 함께 달려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난 9월에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가 우리 수도원의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수도 서원 50년에 이른 젬마 수녀의 금경축을 기쁨으로 함께 기념한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 서원의 길이 더 철저한 “그리스도 추종”이기를 재촉하였습니다. “동정녀의 뿌리에서 피어나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시며 완전한 정결의 삶을 몸소 보여 주셨나이다. 또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받드시고 저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시며 순종하시어 당신을 가장 감미로운 제물로 아버지께 봉헌하셨나이다.” 아빠, 아버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온누리의 임금이신 평화의 왕께서 오시면 일용할 양식, 용서 그리고 구원이 저희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을 믿나이다.

프라 안젤리코 / 십자가의 그리스도 <표지 : 뒤러의 기도하는 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0월의 말씀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께로

처음에, 꼴을 갖추지 않은 땅은 황량하고 공허하였습니다. 바닥 모를 심연은 어둠에 덮여 있고 물은 일렁거립니다.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혼돈입니다. “어둠이 심연의 얼굴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장엄하며 경이로운 혼돈입니다. 아름다운 명령의 말씀이 내리실 절묘한 그 순간을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견디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모두 챙겨서 먼(makron) 곳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1-24). 그는 방종하고 천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 –실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을 훼손하여 다 잃었습니다. 가까워야 할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만큼 경계를 지켜야 하는 돼지들의 먹이에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무한 탐식, 무너진 창조 질서, 이제 그의 곁에는 누구도 무엇도 없습니다. 죽음같은 절망, 상실의 격랑만이 곧 집어 삼킬 듯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립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영”이 움직입니다. 아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웁니다. “아, 나는 굶어 죽는구나.” 소리없는 각성의 틈을 비집고 빛이 스며듭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땅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욕망을 떨치고 일어납니다. 아들이 아직도 멀리(makron) 있는데 아버지께서 달려갑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상을 받는 한 사람이 달리듯이(1코린 9,24) 먼 곳까지 단숨에 달려오시어 껴안으며 속삭이십니다. “얘야, 나의 자애는 영원하단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하느님과 우리의 먼 거리는 사라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16) 영이십니다(요한 4,24). 하늘과 그 위의 하늘도 그분을 모실 수 없지만(1열왕 8,27)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 모든 실재 위에 현존하시는 주인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창조를 계속하십니다.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큰아들”(루카 15,25-32)은 그 잔치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하늘과 땅 안의 피조물들도 자신을 마구 거칠게 다루었던 아들에게 저항합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정녕 저희 영혼은 먼지 속에 쓰러져 있으며 저희 배는 땅바닥에 붙어 있습니다.”(시편 44,26) 라고 온 피조물을 향하여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무한한 너머에 계시지만 또한 지금 여기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며 듣고 보고 계십니다. “자격 없었음”을 인정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섭리의 질서를 지키며 충실한 종으로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먹는 “생명의 빵”이 정녕 생명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시고,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애가 5,21) 항상 청하면서, 기다리시며 달려오시는 아버지께 달려갑시다(히브 12,1). 탐욕은 벗어 버리고, 온 우주를 싸안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입으면 좋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도 빠라클레토 성령이 그러하듯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외젠 뷔르낭(Eugene Burnand 1850-1921) / 자비하신 아버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9월의 말씀

다 함께 탄식
다 함께 기도

“불

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두움, 안개와 구름, 땅 위의 모든 것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다니엘서 3장). 하늘 바람 곳간은 며칠째 열리지 않고 밤조차 낮처럼 뜨거운 날이 계속되고, 우리는 시간경 기도때마다 선풍기 날개 소리에 행여 시편 기도의 노래가 파묻히지 않도록 입술과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었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갔군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릴 때면 옷의 소금꽃을 씻어 말리며 기도합니다. “이 모든 고난과 위험도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소서.” 초록 꽃대를 쑤욱 뻗으며 순백의 향을 퍼뜨리던 수도원 길섶의 백합들도 9월 햇살 아래에서 시들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낯선 새 한 마리 텅 빈 안마당에서 콕콕콕 언 땅을 두드리더니 늦봄부터는 식구들을 데리고 여기서 지냅니다. 책에서 이름을 찾으니 후투티! 텃새인 딱새들은 낯섦과 다름을 내치지 않고 함께 어울립니다. “기도와 일”을 졸음의 바다에 빠뜨리던 어느 날, 긴 부리로 창문을 톡톡, 고개 드니 신비한 머리 깃털을 세우고 흑백의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건너편 벚나무로 날아갑니다. 고맙다, 새야. 봉쇄의 일상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로마 8,22) 희망의 기도에 끊임없이 동참하는 것임을 새삼 퍼뜩 깨닫습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탈출 3,7-9).

지금 비록 비탄과 애통 속에 있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숨과 탄식, 울음과 통곡, 말도 아닌 옹알이일지라도 성령께서는 다 들으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로마 8,26-27). 그리고 순교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탄식하는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남긴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내 일생에 누님만큼 천주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인정하오.”(순교자 이 순이의 동생 이 경언의 옥중서한).

시들어 버릴 꽃이 늘 다시 피는 것도, 새가 나는 것도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가야 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서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그 그리움 한 자락은 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구렁의 짙은 어둠보다 더 질기고 강하게 당신의 심연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며 기다리고 갈망하는 그분께서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듯”(시편 97,5) 온 땅의 재앙도 마침내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히브 5,7) 올리셨습니다. 성부께서도 사랑하시는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던지심으로써 온전히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차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알브레히트 뒤러 / 1520 / 의자 위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