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2월의 말씀
성탄의 높음과 깊음 그 언저리에서
뜻함, 고요함, 거룩함, 맑음이 그림 속에 함께 어우러져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고 돌아 나옵니다. 사실 이 그림은 성탄 구유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빠의 복장이 목공 혹은 피혁 작업을 하는 사람의 것인지라 성탄 그림이려니 지레짐작을 했지만, 혹시나 하고 자료를 뒤졌더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화가는 귀족 출신에 왕립미술학교를 나왔음에도 유명한 정치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풍자만화가로 파리코뮌에 연루될 정도로 급진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으나, 파리코뮌이 십만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거의 몰살 지경에 이르자, 풍자만화의 길을 포기하고 일반 회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풍자만화와는 달리 회화 쪽은 그리 인기가 없어 경제적 궁핍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그림은 자신의 첫 아들의 탄생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된 그 감격의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예수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가족의 모습인 것입니다. 화가의 눈은 금방 태어난 아이를 향해 감탄을 넘어선 경외의 시선이 넘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 모든 아빠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을 넘어선 먼 나라의 존재, 한 인간의 존재 안에서 인간을 넘어선 어떤 신성함을 느끼는 순간 앞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큰손이 부담스럽다는 듯, 마치 큰손이 아이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 그리고 차마 입맞춤조차도 하기 어려운 듯한 모양새입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아빠의 마음속 경외심을 더 진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또 반전이 있습니다. 엄마의 표정입니다. 엄마의 표정에는 아빠와 같은 경외감과 더불어 무엇인가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이 함께 어려 있습니다. 사실 1881년에 태어난 이 아가는 1년이 채 못되어 하느님 아빠 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화가는 1880년부터 환각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1885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아가가 있는 하느님 아빠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 엄마는 장래의 이 아픔을 예견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화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요?
그런데 왜 저는 또 하필 성탄 그림으로 이런 아픔이 서린 그림을 택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성탄 구유 장면 자체가 아픔이 서린 장면 아닌지요. 사실 성탄 장면 속 주인공들의 운명은 세상적 시선에서 본다면 더 할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될 처지입니다. 게다가 출생마저 위의 아기와 달리 신비 혹은 스캔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탄 장면은 세상의 온갖 아픔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훌륭한 가문도 존경받는 위치가 아닌 시골 어느 구석의 한 처녀 안에 깃드신 하느님은 양부의 보호를 받고 자라납니다.
성탄 구유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요? 우리가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주고받는 성탄의 기쁨이 진짜 성경 속 성탄의 그 깊은 뜻과 일치할까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그 마음에 우리 마음이 닿아있을까요? 하느님이 세상 가난한 아기로 오신 그 신비가 우리의 완고함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우리 사랑의 지독한 이기성을 이 아가 앞에서 깨달을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이마저 내 사랑을 채워줄 대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뼛속까지 스민 이기심을 내려놓을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줌으로써 행복해지고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얻고 자기 뜻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묶은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요. 실제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처럼 구유가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벗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Andre Gill -신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