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9월의 말씀


수치심 새로운 자아

대인들 사고의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그림을 보면 ‘인간의 죄’를 떠올리고, 반대로 죄를 생각할 때면 이 그림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야 없겠지만 이 유명한 그림의 가볍지 않으나 흥미진진한 내용을 한번 따라가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이라 것을 빼면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절망적 모습이 우리네 어떤 체험과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멀어짐은 그림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인 두 사람에게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수치심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합니다. 정원을 함께 거닐던 하느님을 이제 아담과 하와는 피해서 숨습니다. “왜 숨느냐?”고 묻는 하느님께 아담은 알몸이 수치스러워 숨는다고 답합니다. 참 우습지요. 언제는 알몸이 아니었던가요? 이전에는 알몸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몸임이 수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자의식이 생겼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수치스러워 감추고자 하고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저자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며 죄와 수치심, 남탓과 불행이 하느님과 멀어짐에서 비롯됨을 통찰하였습니다. 금단의 열매는 하느님이 속이 좁아 인간을 잡아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의 한계를 뜻합니다. 인간은 어떤 경계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굳이 어떤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 심연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한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자연인들 동물인들 심지어 동료 인간마저도 남아나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수치심 가득한 인간에게 따라오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탓을 돌립니다. 내가 불행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 주변이 이 모양이니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꽁꽁 무장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전쟁이 터집니다. 상대방 역시 수치심 가득한 인간이니, 네탓이라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다 보면 어느새 주먹질로 바뀌는 법이지요. 악마를 뜻하는 사탄이란 말의 어원이 “고발자”라는 사실도 여기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이 수치심 가득한 자아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보면 아주 선명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아주 생생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 그 바탕이 수치심입니다. 부모의 관심조차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들리니 반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화를 내는 것도 인간은 보통 수치심이 건드려지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부모, 교사, 이웃도 이에 대한 어떤 처리법을 찾지 못해 중2는 김정은조차 무서워한다는 말이 생겨나게 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심 가득한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 창녀, 마귀들린 이들, 당시 세상이 벌레보다 무서워하고 피했던 이들이니 이들의 속마음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식탁에 불러 깊은 용서 체험으로 이끕니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엇보다 마음 가득한 사랑으로 이들을 용서합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이 수치심이라는 말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때 마음을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수치심의 죄인들의 형제자매요, 이를 진짜 체험한 사람은 깊은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미켈란젤로 시스틴 성당 “천지 창조” 중 “낙원에서의 추방”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8월의 말씀


우리의 삶은 타자에게 넘겨주는 선물

“그

랜마 모지스”라 불리는 이 그림을 그린 할머니의 본명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입니다. 이 긴 이름보다 GrandMother 즉 할머니라는 애칭인 “그랜마”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 할머니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서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린 것이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나이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이미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해야 했고, 27살이 되어 농부와 결혼하여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으며, 10명 아이 중 5명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75세가 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릴 적 꿈이 떠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내거나 마을 게시판에 붙이거나 벗들에게 선물하곤 했지요. 어느 날 한 미술가가 시골 마을 한 약국에 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구입하고, 개인전도 열고 뭐 그런 여정을 거치며 미국 전역에 소개되고, 언론도 관심을 가지며 미국 국민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92세에는 “내 삶의 역사”라는 자서전도 출간하게 되지요. 이 자서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의 말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과일과 잼으로는 상을 받았지만 그림으로는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1년을 산 그녀는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신의 유산은 농촌 기술 지원금과 가난한 이웃들, 불치병과 싸우는 환자분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랜마의 그림들과 그녀의 사진 속 투명하고 따뜻한 눈빛 그리고 생애 이 세 가지는 같은 빛으로 반짝이며, 어떤 모순의 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그림을 처음 대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화면이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밝음과 경쾌함이 전달됩니다. 이 할머니 작품들은 예술이 꼭 심오하지 않아도 인간의 마음에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서 비롯됨을 동시에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12살에 가정부의 삶을 살고 아이를 5명이나 잃고서도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가져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작품들과 그분 생애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생명을 남에게 넘겨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 무엇보다 삶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자신의 몸마저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으로 넘겨주셨습니다. 그 빵 안에서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속에는 자신을 남에게 넘겨준 사람의 가벼움이 읽히면서 동시에 그 가벼움은 바람에 휙 날려버리는 일 없는 무게를 지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지요. 한없이 밝고 경쾌하지만 그림 속 하나하나를 보면 평생 노동으로 다져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노동과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있고,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있는 장면들에는 누구도 노동으로 지치거나 힘겨워하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장면이 1년에 한번 있는 단풍나무 시럽 제조 잔치날이니 그 흥겨움이 넘쳐흐르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의 아내로 가정부로서의 삶은 노동에서 노동으로 하루가 채워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에게 노동은 몸과 인생을 짓누르는 힘겨운 일이기 전에 남을 먹여살리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위도 그녀를 짓누르지는 못했나 봅니다. 온 천지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복장을 하고 있지만 벌거벗은 나무들을 덮은 눈은 세상을 새하얀 꽃으로 뒤덮은 듯하며, 눈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없지요. 추위와 엄혹함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그녀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사랑만이 노고를 달콤함으로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랜마 모지스 Gran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단풍시럽제조 잔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7월의 말씀


성숙해가는 정열의 아름다움

각한 추론 없이 산뜻하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그림 두 가지, 한 화가의 살짝 다른 감성을 맛볼 좋은 기회입니다. 때로 두 그림을 같이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시야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한쪽은 좋고 다른 쪽은 못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색과 다름이 오히려 그림을 보는 묘미를 더해 주지요. 사람의 연륜과 열정이 깊어가고 변화되는 모습이 마치 스냅사진 보듯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왼쪽 그림의 노인 두 사람은 복장부터 세월의 흐름이 역력하게 느껴지고, 어린 두 소녀의 하얀 빛이 주를 이루는 옷은 새 것에 가까운 청량함이 묻어납니다. 두 사람이 선 장소도 재미있습니다. 나이 든 여인들이 선 곳은 출입문 입구요, 소녀들이 앉은 곳은 집안 어느 장소, 실내입니다. 어떻게 구별하느냐고요? 소녀들이 앉아있는 문은 커튼으로 가림막이 되어있고 오른쪽 소녀 옆으로 앉은뱅이 의자와 바구니가 놓여있으며 여기저기 물건이 흩어져 있으니까요.

이제 두 스냅 사진의 핵심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장면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지요. 나이 든 두 여인은 아마도 이 장면 이전, 크게 다퉜거나, 어떤 상쾌하지 않은 작은 사건이 있었던 듯 합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여인은 몸을 상대방에게로 기울이며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해명하고 있고 펼쳐진 왼손은 곧 상대방의 팔을 덥석 잡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얼굴이 보이는 여인은 팔짱을 낀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와 함께 앙 다문 입, 살짝 내린 깐 눈이 화가 나있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왠지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즉 벌써 화가 반은 풀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장면은 오랜 세월 미운 정 고운 정 골고루 쌓으며, 모난 곳은 닳고 패인 곳은 절로 채워지며 나이듦의 가벼움이 귀여움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연륜이 쌓은 무게감도 잃지 않습니다.

자, 이제 입에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발랄한 두 소녀를 보아야지요.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오른쪽 소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깔깔 웃는 소리가 그림을 뚫고 들려올 정도입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에게 현재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는 내용이겠지요. 두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뛰게 하는 한 소년 혹은 두 사람 각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두 소년, 아니면 마을의 소년들의 장난스런 행동에 대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요. 오른쪽 소녀가 살짝 제 가슴을 만지는 모습과 온몸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며 이런 상황을 짐작해봅니다.

이 시기, 인간의 열정은 가장 활활 타오르면서도 어느 방향으로 불꽃이 튈지 자신도 남도 모르는 그런 때인지라. 펄펄 뛰는 정열의 노예가 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있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열정” 이것이 아마도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요. 그래서 변덕스럽고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무엇인가 관심을 끄는 일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게 되는 일도 흔합니다. 거의 이 정열의 불꽃이 몸을 태우고 있는 형국이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이 정열 때문에 생기발랄하고, 무엇이든 시작해볼 수 있고, 인생의 걸림돌에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어, 세상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정열에 방향이 잡히고 갈 길을 찾기까지 그 성장통을 겪어내는 여정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들과 엮이며, 각자 다양하고 다른 색깔들로 입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전, 이 인류 공통의 정열이 활활 몸을 태우는 듯한 시기는 이 그림처럼 소년 소녀들을 사뭇 비슷하게 보이게 하지요. 그 출발선에 선 두 소녀의 상큼 발랄한 모습이 어른들의 선입견과 삶의 무게로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는 어떤 가벼움, 굽지 않고 꼿꼿한 여인들의 몸처럼 곧은 정신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잘못에는 용서를 빌고, 이웃의 약함에 눈감을 줄 알며, 거친 파도도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아는 그런 노인의 성숙한 열정으로 변모해가는 여정이 한눈에 보이는 두 그림을 함께 봅니다. 우리에게 있어 정열의 가장 확실한 방향잡이는 예수님이지요.

칼 블로흐, 이야기하는 두 여인(1874)-웃는 두 소녀(1865)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6월의 말씀


새로운 시야가 여는 새로운 삶

진 말에서 멋지게 나뒹군 모습이 풀어내는 서사가 호기심을 잔뜩 자극합니다. 부드러운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고, 몸통은 부드러운 갈색과 흰색 그리고 머리는 흑갈색의 조화가 절로 찬사가 터지게 만드는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그 말 아래 한 사람이 볼썽사납게 떨어져 뒹굴고, 함께 가던 이는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눈마저 감겨 있는 것을 보면 갑자기 장님이라도 된 모양입니다. 말을 타고 왔으니 원래 앞 못 보는 이는 아니었을 테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회심하여 사도 바오로가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를 믿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입니다. 사방이 캄캄한데 사도 바오로 주변만을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말이 앞발 하나를 들고 있긴 하지만 그림의 정황으로 볼 때 말이 날뛰어 그가 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말이 평소의 주인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한 편의 코미디 같기도 합니다. 마치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굴러떨어지셨어요?”라고 묻고 싶은 듯 하지않나요.

성경 속 상황은 간단히 묘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앞장서 박해하던 사울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합니다. 분노해서 펄펄 뛰는 지도자들 앞에서 한없이 고요하게 할 말 다 했던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었던 예수님을 닮아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사도 바오로는 당국으로부터 권한을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기하고 위험한 무리들에 대해 분기탱천한 것 같은 사울의 내면은 저 스테파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균열이 생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한 사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현재 권력균형의 유지를 위해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말에 누군들 뜨끔하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사울 같은 감성 예민하고 뛰어난 사람이 이 말에 무감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행전에 따르면 빛의 벼락을 맞습니다. 바오로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던 눈은 닫히고 새로운 방향으로 볼 눈이 열리기까지 그는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닫힌 눈을 하나니야라는 사람이 와서 열어주었을 때 그는 사울이 아니라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회심 후 그는 자신의 이력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겼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향, 에너지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온존재를 관통하며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지요.

대체 이 순간 그는 무엇을 누구를 만났기에 그의 자랑스런 삶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섰던 것일까요? 생명의 주인, 사랑의 원천인 분을 만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그 생명이 이 땅에 이미 와있음을, 유대교에서 그 힘겨운 율법을 지키며 기다리던 분이 이미 이 땅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참 생명, 참 빛은 이런 것입니다. 저 아름다운 말처럼 빛나는 인생조차 쓰레기처럼 뒤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생명이니까요. 세상 가치의 아름다움은 그 앞에서는 저 말 주변의 어둠처럼 캄캄한 것이지요. 최소한 죽음의 순간에라도 이 아름다움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지요. 우리의 것이니까요. 이런 빛을 보고, 그 빛을 섬세하고 장엄하게 우리 눈앞에 가져다준 카라바조 참 대단한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신학적으로 더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카라바조, 바오로 사도의 회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5월의 말씀


꿈은 채집 목록이 아니지요

린 아이가 그렸음직한 발상의 그림입니다. 이상주의자라는 딱지가 훈장처럼 붙어다니는 화가 칼 스피츠베그의 그림입니다. 그가 이상주의자가 된 데는 시대의 격랑이 한몫을 합니다. 그는 1808년에 태어나 1885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반(反) 나폴레옹 동맹으로 수상에 오른 메테르니히가 군주제를 강화하고 18세기 후반 이래 싹튼 자유주의를 철저히 억압하는 시기였습니다. 출판과 예술 활동은 그 동안 누렸던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은 정치·사회적 현실보다 소소한 일상을 묘사하거나 전원을 예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타오르기 마련이고 그 목마름을 엉뚱한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지 않는 이들은 사회현실에 맞서 싸우거나 이 화가처럼 은둔의 삶을 택하거나 하는 양극으로 나뉘는 현상을 보이지요. 은둔의 삶을 택한 이들은 칙칙한 절망 속에 힘겨운 걸음을 내딛기도 하지만 그 절망이 품고 있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예술로 표현해내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자유는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결코 뿌리 뽑은 적이 없으니까요. 절망 속에 희망을 길어내는 이들, 그들은 신앙인과 참 닮았습니다. 이 화가도 그래서인지 수도승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나비 채집꾼이 신비로움 가득한 숲속으로 나비 채집을 나섰습니다. 물통에 배낭에 모자, 우산까지 제대로 갖춘 전문적인 채집꾼입니다. 그런데 숲속 풍경이 열대 밀림과 화가 자신의 나라인 사계절 갖춘 독일의 숲이 묘하게 뒤섞여 동화 속 이야기가 펼쳐지고 요정이나 난장이들이 나타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지요. 채집꾼이 안경을 썼는데 눈이 몹시 나쁜지 안경이 70년대 코미디언 배삼룡님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뱅뱅 도는 안경을 쓰고 있는 탓에 채집꾼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안경 속 눈동자는 보이지 않아도 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아주 굉장한 것을 만났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자신이 손에 든 채집망 속에는 도저히 담기지도 못할 엄청나게 큰 나비 한 쌍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나비는 놀라 달아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저 나비는 늘 화가 주변을 날고 있었어도 화가의 눈이 닫혀 볼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일상의 삶의 터전을 떠나 어떤 곳으로 향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채집망으로 잡을 필요도 없고, 잡아서도 안될 나비입니다. 그 나비는 우리의 꿈이니까요. 꿈을 잡아 채집망에 넣는 순간 꿈은 이미 꿈이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되어버립니다. 꿈은 우리 앞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채집망 속에 담길 채집 목록 중 하나가 아닙니다. 내가 꾼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세계, 나를 넘어서는 세계로부터 온 선물이니까요.

어떨 때는 비현실이 더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스피츠베그가 살았던 냉혹한 현실이 어쩌면 더 비현실인지도 모르죠. 아무리 엄혹한 권위주의 체제도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꿈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황홀한 착각이요, 멸망에 이르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한 가지. 그들만이 독재자라는 우리의 착각. 우린 누구나 내 자유는 최대로, 남의 자유는 빼앗고자 하는 독재자의 기질이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 비슷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꿈이 있어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창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왔습니다. 시대의 절망이 희망을 낳는 역사의 모순 안에서 우리도 채집망 따위에는 담을 수 없는 나비 한 쌍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기를 기도드립니다.

칼 스피츠베그, 나비 채집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4월의 말씀


부활
그 펄펄 살아있는 고요한 생명 앞에

수룩하고 시커먼 수염, 한방 맞으면 국물도 없을 것 같은 솥뚜껑 같은 손, 거구의 몸집 등 솔직히 이 그림 속 예수님의 모습은 산적 두목 같지요. 그런 예수님이 어울리지도 않게 온몸을 둥글게 구부려 암탉이 알을 품을 둥지가 되어주듯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런 예수의 옷자락 속에서 노란 병아리 한 마리가 엄마 품에서 나오듯 그렇게 나오고 있고, 어미 닭은 세상 안전한 둥지 속에 세상 편하게 병아리들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도 한 번 보지요. 둥글둥글 돌아가는 사막은 마치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아기를 밴 엄마의 배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젖무덤 사이를 수탉과 암탉이 여유롭게 배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머무는 곳은 사막 혹은 광야요, 유혹을 받는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서 암탉이며 병아리가 웬 말일까요? 그런데 이것이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일까요?

정말 사막에 머물러 본 사람은 그곳이 생명을 잉태하는 장소요, 새생명이 배태되는 곳임을 잘 압니다. 생명이 메말라, 생명이 바닥나서, 더 이상 유지할 도리가 없을 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풍로로운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막을 찾습니다. 생명이라고는 없는 곳, 생명과 반대의 상징인 곳 그곳으로 찾아드는 그 본능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생명이 진정 바닥나있음을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두려워서 대면하지 못했던 그 참모습을 어떤 장식도 위로물도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명이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요, 주어지는 것임을 참으로 사무쳐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습니다. 어렴풋이 알던 것을 온몸 구석구석 다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생명은 언제든 아낌없어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순간은 바로 인간 안에 생명의 못자리 아기집이 생겨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막에서 무수한 암탉과 수탉 그리고 이미 그 아이들이 낳은 노란병아리들도 봅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기를 결코 멈추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 생명은 끊임없이, 아낌없이, 언제든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누구보다 선명히 알고 계셨지요.

이런 이에게 사막은 이미 생명 풍성한 곳입니다. 오아시스를 애써 찾아야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 사막 어디서든 나타나는 곳입니다. 오아시스도 언젠가는 마를 수 있지만 이 생명은 세세대대로 결코 마르는 일이 없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풍요로움을 노란 병아리들 속에서 이미 감지한 예수님의 표정은 넉넉함이 흘러넘칩니다. 흘러넘쳐 그림을 보는 이 안으로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한 그림은 백이면 백 전부 예수님이 하늘을 향해 붕 날아오르거나 무덤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이요 그마저도, 그림 전문 사이트에서 부활이란 주제로 검색을 해보면 몇 페이지 되지 않을 분량밖에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주제 자체가 신학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특히 미술적인 시각 차원에서 묘사는 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차원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금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요상한 세계는 또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뿌리로 하고 있고, 우리의 새생명은 현재 생명과 전혀 관계없는 마술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 분명한 것은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둠, 황량함과 풍요로움, 고통과 기쁨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황량한 사막에는 벌써 암탉 수탉이 알을 낳고 그 알은 부화하여 병아리를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에 생명이 뛰어놉니까? 광야라는 말에 마음이 설레입니까? 그렇다면 이미 광야와 부활과 새생명이 당신의 마음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와 부활이 함께 하는 곳에 무덤덤한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펄펄 살아있으니까요.

스탠리 스펜서, 광야에서 그리스도, 암탉, 1932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3월의 말씀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의
전문가는 아니랍니다

마음에 드는 예수님 얼굴을 만났습니다. 렘브란트의 시골 사람같은 예수님 얼굴 이후, 진짜 예수라면 이럴 것 같은 얼굴 모습을 처음 만났습니다. 푸근하고 인간적이면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많은 검은 머리에 아시아적인 얼굴이 편하게 다가오면서도 광야 속 예수라는 사실이 잘 느껴집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스탠리 스펜서라는 영국 사람이라 더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작품일 것이라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봐왔던 그의 작품들과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다른 작품 그룹 사이 화가의 어떤 체험이 놓여있을까요?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의 불행하달까 기묘하달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결혼생활이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첫 번째 부인과 이혼 후 만난 두 번째 부인은 동성애자였고 화가는 이 사실을 알고 결혼하였으며 심지어 결혼식 때 부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 그 관계가 참 상상이 잘되지 않습니다.

부인과 침실에서의 모습을 그린 두 명의 초상화는 그의 결혼생활이 어땠을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부인과 자신 두 명 모두 나체이지만 이렇게 섹시하지 않은 나체 그림도 참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게다가 관람자 쪽으로 돌린 자신의 등은 마치 추위에 얼어붙은 듯 파리한 색깔로 묘사되어있지요. 남성으로서 침실에서 느꼈을 비참함이 그의 표정에서도 줄줄 흐릅니다. 그의 이런 삶이 광야에서의 예수 시리즈를 이렇게 독창적으로 표현하게 하는데 결정적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이란 그야말로 인생의 반쪽을 만나는 일이니 그 반쪽과의 맞물림이 근본에서 틀어지면 그 삶의 모습이란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인가 봅니다.

예수의 표정은 깊은 슬픔과 함께 가슴 저미는 연민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묘함이 잘 잡혀있습니다. 손바닥 위에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저런 표정으로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걸까요? 전갈입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는 듯 행여 떨어질까 살짝 오므린 손바닥 위에 전갈이 꼬리를 치켜들고 독을 쏘는 것이 아니라 재롱이라도 부리나봅니다. 저리 꼬리를 들면 독을 쏘는 자세라 하는데, 뭐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광야 시리즈 다섯 가지 중 이 작품에서 예수의 표정이 가장 어둡고 연민 가득한 것은 아마도 전갈로 대표되는 인간세상의 어둠과 죄, 유혹 앞에 선 인간에 대한 예수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는 전갈을 우리네처럼 혐오와 증오, 공포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 또한 하느님 아빠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마치 고귀한 것을 대하는 듯한 손의 자세로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세상이 우리네처럼 둘로 쫙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모순되게도, 외부의 선과 악은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면서 자기 내면의 선과 악은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흐물흐물 섞여있는 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악에 대해서는 마치 선과 악의 전문가라도 되는 양 옳은 것 그른 것, 악인 선인을 쉽게 단정 짓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의 모습에서는 그런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갈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 여긴다면 저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없는 연민의 눈길로 바라볼 수는 없지요. 다른 한편, 저 깊은 슬픔을 보면 전갈이 지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독의 힘을 모르는 바도 아님이 분명하지요. 인간 현실이 지닌 양면성과 인간존재의 이중성이 빚는 악의 요소는 분명 세상에 있고,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지만 그것들을 무찌르는 방법은 없습니다. 창과 방패로 무장할수록 그것들은 더 교묘해지고 힘을 기를 뿐입니다. 유일한 길은 저 예수처럼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교부들에게서 계속 확인되며, 악은 희한하게도 이런 눈길 앞에서는 저 전갈처럼 맥을 못춥니다.

스탠리 스펜서, 광야에서 그리스도 전갈, 1932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2월의 말씀


미소
해방하는 생명의 힘

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들, 예를 들면, 하느님, 천사, 성인들을 묘사한 작품 중에는 웃음 지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그림에서도 웃는 모습은 사실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17세기 주디스 레이스터라는 여성화가와 프란스 할스 작품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예술사에서 예외적이라 할 만큼 드문 현상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리 유명한 것도 그 미소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찾아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을 좀 말해보자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없기에 웃는 얼굴도 만나기 쉽지 않고,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많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웃음에도 비웃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만,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웃음은 그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그 웃음을 만나는 이도 어떤 속박으로부터 풀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존재의 모습 때문인지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시작하는 첫 소식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천사의 미소 좀 보세요. 처음 이 조각을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답니다. 환한 웃음을 만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미소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지고 에너지가 밝아지고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천사는 자신이 품고 와, 전달할 소식이 어떤 것인지 이미 그 미소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가브리엘천사, 마리아에게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오심을 알려주는 이입니다. 즉 인류에게 기쁨 그 자체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니 어찌 그런 이의 입에서 기쁨의 미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리는 사람, 구원을 선포하는 이는 이 천사처럼 자신이 먼저 기쁨을 지녀야 그 소식이 진짜임을 사람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전하는 이를 먼저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 기쁨은 고난이나 환난, 모욕 앞에서도 사라지는 법이 없어, 십자가조차 기꺼이 지게 하는 것이지요. 이 미소에는 생명넘치는 젊음, 맑은 기쁨,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전달되는 전염력이 보는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이런 미소는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자신을 넘어 타인까지 해방시키지요.

이 천사는 이미 마리아의 입에서 나올 “피앗”을 감지하는 듯, 심지어 미소에 장난기마저 피어납니다. 마리아가 겪을 당혹감, 그리고 그 당혹감에 지지않을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당참을 미리 감지하며 세상을 가득 채울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드물게 보는 기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지지요. 그것은 바로 기쁜 소식 자체인 하느님이 우리 인간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생명을 빚은 생명의 주인이 바로 그 생명이 된다는 말이 막히고 기가 막히는 소식 앞에 천사도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로 그 현장을 13세기 한 조각가가 전해주었고, 13세기를 넘어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각은 프랑스 랭스 성당에 있는 조각으로 “랭스의 미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조각입니다.

아름다움의 힘, 예술의 힘과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쁨도 누리게 해주네요. 그런 면에서 현대 종교는 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할 힘을 혹시나 상실한 것은 아닌지, 그 밑바닥에는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은 그 본성상 자신 안에만 머물지 못하고 밖을 향해 나가는 법이니까요.

프랑스 랭스 주교좌 성당 입구 가브리엘 천사 조상, 요세프스 마이스터?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월의 말씀


저 열린 닫힘

곡을 서서히 물들이는 아침 햇살이 정겨우면서도 찬란하고, 깊은 우수도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화입니다. 미국 19세기 풍경화의 대가 호머 닷지 마틴의 “후서토닉 계곡”이라는 작품입니다. 매사추세추에 있는 후서토닉 강에 따르는 계곡인데, 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닫힌 느낌과 함께 아늑함이 전달되어옵니다. 왠지 새해 아침에 딱 맞을 듯 한 그림이지요. 어둠에 닫힌 계곡 위로 햇살이 서서히 비춰오는 장면인데 마치 닫힌 계곡이 햇살로 인해 서서히 열리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도 자연 속에 함께 앉아있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풍경화입니다.

호머 마틴의 풍경화들은 보는 이를 끌어들이고 그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우수 내지는 스산함을 함께 보게 만듭니다. 일종의 철학이 깃든 풍경화라 할까요. 이 그림만 해도 그렇습니다. 깊은 계곡은 노골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산자락 아래 부끄러운 듯 숨어있고, 저 멀리 흐르는 물줄기로 계곡임을 연상케 할 뿐입니다. 험준한 산세 속에 외롭게 오두막집 하나가 오두마니 서 있고 그 옆 소집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양쪽을 겸하는 그런 집이 바람이 크게 불면 부서질 듯 외롭게 서 있습니다.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 위에 소 두 마리가 마차를 끌고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흔적은 있으되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도 자연은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마차와 소가 있는데 사람은 일부러 빼버린 그의 마음이 알 듯 모를 듯 와닿습니다. 그림 전체가 우수를 담뿍 머금고 있음에도 어둡거나 칙칙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자신만으로 닫힌 자연이 닫힌 그대로가 아니라 햇살 앞에 서서히 그 닫힘을 열고 있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아무리 제 잘났다 뻐겨도 우리 인간은 밀림 속, 바닷속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닫혀있되 자신을 내놓지 않는 그런 닫힘이 아니라 신비 속에 머무는 닫힘이요, 때가 이르면 아낌없이 자신을 드러내놓는 닫힘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아이돌 문화의 영향 탓인지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 젖어있다 보니 과거 문화 속의 은근함과 신비 속 숨겨짐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섹시함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아름다움이요, 성적인 매력은 은근함이 아니라 퍼포먼스로 활짝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상반되게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할 것은 드러내지 못하고 상처로 가득 안고 살아가는 참 묘한 문명의 시대입니다.

우린 모두 지구 자체이든 작은 미생물, 원자, 양자, 전자, 쿼크까지 그 너머 우주 자체도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닫힌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우리는 우주에 감탄할 수 있고 작은 전자와 양자의 존재가 한 과학자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자연의 신비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열리고 그 존재의 때가 되면 그 닫힘을 살짝 열어 보여주는 신비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되는 닫힘 속 무엇은 과학적 분석이 다 쪼개어 놓은 산같은 지식도 따라오지 못할 열림입니다.

더욱이 인간 존재는 과학적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쥐꼬리도 그것에 비교하면 산보다 클 정도입니다. 참으로 아는 것은 마음을 열고 인생을 열고 관계를 열어 서로를 성장시키고 변모시킵니다. 저 그림을 보노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뿐더러 이름도 처음 듣는 후서토닉 계곡이 마치 내 고향인 듯한 느낌을 받게되는 것도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과 저 계곡이 사람을 품어 안아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존재든 가장 작은 미생물, 분자에든 하느님의 닫힘이 새겨져 있고, 때가 되면 언제든 그것을 열어 그 신비를 보여줄 태세가 되어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2월의 말씀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가난한 하느님-아기

수님의 성탄에 관한 복음의 기록들은 두 가지 분위기로 나뉩니다. 우선 한 가지는 천사들의 합창과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보이는 환희와 기쁨과 경건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적은 편이고 그 반대되는 분위기가 더 압도적입니다. 아기 낳을 곳조차 얻지 못한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루저였던 마리아와 요셉의 마굿간 여물통에 아기를 누일 수밖에 없는 가난함,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철없는 동방박사들의 솔직한 고백에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운 헤로데 왕의 광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베들레헴 근처 어린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이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하느님이 인간 아기로 오셨다는 그 가난함입니다. 이 사실의 가장 얕은 차원에라도 진정으로 가닿는다면 우리 인간은 온 존재가 바닥부터 뒤집히는 체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미생물 광물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그 창조물 중 하나인 인간이 되어오신 그 신비는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도 납득도 불가능한,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펄펄 살아뛰던 3세기, 고대 교부들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이 진리를 설파합니다. “징글벨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이런 성탄 분위기가 너무 싫으면서도 하느님이 이렇게 가난한 인간 아기로 오신 그 신비만 생각하면 늘 바윗덩어리가 묵직하게 제 앞을 가로막곤 했었는데, 약 30년 전 이 말에 접하는 순간, 안개처럼 그 묵직한 돌이 치워지던 그 체험이 기억납니다. 이 말 그대로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아기 앞에 아기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하듯,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 그것도 너무도 가난하고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는 그런 아기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을 들을 때면 틀린 말은 아닌데도 왠지 속이 거북했었는데, 이 말은 저를 기쁨 가득하게 해줄뿐더러 하느님이 그러셨듯이 나도 가난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서로 닮고 싶어집니다. 신분이 높은 왕족이 하층민의 여인을 사랑하면 그 여인은 그 사랑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신분을 획득할뿐더러, 점차로 왕족이 지니는 품위를 몸에 지니게 됩니다. 그 왕족 또한 귀족 집안의 여인은 지니지 못한 소박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그 자연스러움을 사랑하다 보면 자신도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사랑은 서로 속으로 스며듭니다. 성탄은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우리 인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이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성탄 그림치고 참 독특하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참 잘 보여주고 있어 골라봤습니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굉장히 고독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과 환한 빛, 천사들 가득한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화가가 살았던 19세기 농촌의 모습이 생생한 그림인데, 다른 그림에서처럼 소들이 아기 예수를 둘러싸거나 하지 않고 소 우리 속에 갇혀있으며, 마리아는 이제 막 낳은 아기에게 배내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러 나갔는지 성 요셉은 보이지 않고, 오직 동물들과 마리아, 아기 예수뿐인 곳에 적막이 깊게 흐르며, 바닥에는 짚이 깔려있긴 하지만 소똥도 묻어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여인의 복장을 한 마리아는 큰 신비 앞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이 오신 자리는 바로 이런 자리였을 듯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그리고 이런 자리를 알아보는 목동과 동방박사는 오늘에도 있습니다. 아기를 향한 엄마의 옹알이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폭 잠기는 성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