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1월의 말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려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여 주시며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었습니다(창세 15,5-6). 고통의 의인 욥에게도 “아침 별들이 함께 환성을 지를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제시간에 이끌어 낼 수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욥은 고백하지요. “주님,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고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욥 42,2). 캄캄한 하늘의 별은 단지 황홀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새벽, 안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시린 얼굴 위로 새삼 뜨겁고 놀라운 광경이 쏟아집니다. 두려움과 함께. “땅을 비추는 별들이 되어라!” 는 명령의 단추를 당신 손가락으로 단 한 번 누른 것이 아니라 하나씩 빚으시고 모서리의 구석구석을 씻으시어 가장 알맞은 제 위치에 별들을 걸어두셨군요. 별도 천사도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별의 말을 따른 동방박사와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들판 동굴의 구유에 누운 아기”를 뵙고 경배드렸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2,10). 하느님께서 “아기”로 오셨습니다.

경천(驚天)하고 동지(動地)할 일은 계속됩니다. 건너야 할 요르단 강 주변의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섬뜩하게 날을 세우고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이미 뿌리에 닿아있다.”(루카 3,7-9). 살려면 지금 당장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가장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악한 길과 폭행에서 돌아섰습니다(요나 3,5-10).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의 소리를 들은 세리들과 군사들, 기대에 차 있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며 그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낭패스러운 일입니까? 백성들의 행렬 맨 끝자락에 그분께서 서 계십니다. 죄인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립니다. 루카는 천연덕스럽게 전합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루카 3,21). 별빛보다 더 가벼우시니 하늘 위 하늘에 계셔야 하는 분께서 가장 낮은, 더구나 온갖 위선과 악의와 죄를 씻는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시다니요.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왜 이렇게 하십니까?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1,1).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라고 만류하거나 행렬에서 끌어내려고 할 것입니다. 정녕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하십니다. 어느 사람이 구유에서 태어나고 스스로 “흠없는 죄인”이 되었던가요. 안절부절,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로 만드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2코린 5,18.21).

세상과 인류의 온갖 죄를 짊어지시어 당신 것으로 만드시고 없애시는 예수님께서는 물살이 요동치는 죽음과도 같은 강의 깊은 심연까지 내려가시고 올라오셨습니다. 마른 땅처럼 물 위에 서시어 기도하셨습니다(루카 3,22).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어쩌면 그 세리의 기도가(루카 18,9-13) 바로 예수님께서 이날 바치신 기도일까요? “아버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들 예수님의 기도 후에 새로운 창조가 한 처음처럼 일어납니다. 물은 갈라지고 하늘 궁창은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차갑고 냉혹한 하느님의 얼굴이 아니라, 언 땅의 어둠에 묻힌 씨앗을 싹트게 하는 따사로운 햇살 같으신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그 얼굴을 보여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임에도 여전히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는 눈먼 존재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산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산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야만 합니다. 오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두 서로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도 “나는 저 사람들과는 같지 않아”라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연약함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죄 때문에 가슴을 치는 “죄인들과 친구”(루카 7,34)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그 친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여 함께 걷는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 나라의 드러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너희는 나의 연인이고 나 또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의 세례 / 17세기 / 우크라이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2월의 말씀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다.

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이들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영원에서부터 “한 아기”는 가장 가까운 하느님 품 안에 계셨고, 세상을 만드실 적에도 함께 곁에 계셨으니 그분이 하시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아십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동산을 일구고 돌보도록 파견하셨습니다. 창조는 여전히 새롭게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요한 8,58) “한 아기”, 그 구원자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고 멈추십니다. 죄가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십니다(요한 9,1-41). 당신 침으로 땅의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가서 씻어라.” 명하시며 “실로암” 못으로 보내십니다. 눈먼 사람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파견된 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듯이(루카 2,40) 눈뜬 이는 차츰차츰 진리의 빛 속으로 의연히 걸어갑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하느님의 일”에 대해 “잠잠히 있을 수가 없는”(이사 62,1) 것이지요. 베드로조차도 “나는 아니오.”라고 발뺌했건만, 자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웃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Ego Eimi)라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나다.”(요한 6,20) 예수님께서 당신을 증언하셨듯이 그도 자신에 관해 증언합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시고, 이제는 제가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볼 수 있으나 그는 아직 “그분”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철벽을 쌓은 채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라며 홀로 담대하게 맞섭니다. 눈을 뜨고 본다는 현재를 무시하고 오직 눈이 멀었던 과거에만 집착하는 그들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놀라움과 감탄을 모르는 “눈먼 이들”은 “보는 이”를 시나고게에서 파문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통탄할 일이네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말씀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밖으로 내쫓겨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세상의 빛”을 얻습니다. 드디어, 자신을 보셨던 예수님을 그가 봅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보아야 할 얼굴을 보니 온몸은 밝아지고 그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완성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먼저 찾으시고, 먼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아기”로 오셨습니다. 몸짓과 울음 외에는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얼굴, 소외되고 외면당하며 끝내는 잊혀질 수도 있는 소수자의 얼굴, 바로 이 “아기의 얼굴”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끌어 당깁니다. 진리시여, 빛이시여! 제 안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어 주시어 당신 빛으로 빛을 보고, 당신의 얼굴들 앞에 있는 제 얼굴과 제 얼굴을 바라보시는 당신 얼굴을 우러러보며 경배드리게 하여 주소서.

Bicci Di Lorenzo (1373-1452) <성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1월의 말씀

행복하여라,
용서하는 사람아!

리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침과 저녁기도, 미사 때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그 이유를 “이는 흔히 일어나는 마음의 가책 때문이니, 기도문 가운데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언약을 바침으로써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허물에서 자신들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이다.”(규칙 13장) 라고 합니다.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고 말씀하십니다.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이 자비는 용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용서하는 사람들!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다.” 남을 심판하거나 섣불리 유죄판결을 하지 않으며 용서의 마음을 지닌 자비 깊은 사람은 하느님을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아니면”(마르 9,29)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벙어리, 귀머거리의 더러운 영이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용서를 청할 용기와 받아들일 겸손한 입과 귀를 막아버리니까요. 용서할 대상은 이미 없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응어리가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주님께로 피신하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달라붙어야지요. “주님, 믿음을 주소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면 아무리 큰 증오의 산도 주님 자비의 바다에 던져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합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기”(시편 145,8-9)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우러 오시면 울게 됩니다. 가까이 오시어 당신 현존의 향기로 우리 죄를 어루만져주시면 더 많은 눈물이 흐릅니다. 그 눈물은 기도입니다. 양식입니다(시편 42,4). 눈물의 빵은 우리의 믿음을 튼실하게 지켜주는 거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사랑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인 이!”(시편 32,1). 크게 탕감받은 사람은 더 극진한 사랑을 드러냅니다(루카 7,36-50). 그는 예물을 놓아두고 서둘러 달려갑니다(마태 5,23-24). 이제 주님께로 함께 달려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난 9월에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기도가 우리 수도원의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수도 서원 50년에 이른 젬마 수녀의 금경축을 기쁨으로 함께 기념한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 서원의 길이 더 철저한 “그리스도 추종”이기를 재촉하였습니다. “동정녀의 뿌리에서 피어나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시며 완전한 정결의 삶을 몸소 보여 주셨나이다. 또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받드시고 저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시며 순종하시어 당신을 가장 감미로운 제물로 아버지께 봉헌하셨나이다.” 아빠, 아버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온누리의 임금이신 평화의 왕께서 오시면 일용할 양식, 용서 그리고 구원이 저희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을 믿나이다.

프라 안젤리코 / 십자가의 그리스도 <표지 : 뒤러의 기도하는 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0월의 말씀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께로

처음에, 꼴을 갖추지 않은 땅은 황량하고 공허하였습니다. 바닥 모를 심연은 어둠에 덮여 있고 물은 일렁거립니다.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혼돈입니다. “어둠이 심연의 얼굴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장엄하며 경이로운 혼돈입니다. 아름다운 명령의 말씀이 내리실 절묘한 그 순간을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견디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모두 챙겨서 먼(makron) 곳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1-24). 그는 방종하고 천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 –실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을 훼손하여 다 잃었습니다. 가까워야 할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만큼 경계를 지켜야 하는 돼지들의 먹이에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무한 탐식, 무너진 창조 질서, 이제 그의 곁에는 누구도 무엇도 없습니다. 죽음같은 절망, 상실의 격랑만이 곧 집어 삼킬 듯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립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영”이 움직입니다. 아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웁니다. “아, 나는 굶어 죽는구나.” 소리없는 각성의 틈을 비집고 빛이 스며듭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땅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욕망을 떨치고 일어납니다. 아들이 아직도 멀리(makron) 있는데 아버지께서 달려갑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상을 받는 한 사람이 달리듯이(1코린 9,24) 먼 곳까지 단숨에 달려오시어 껴안으며 속삭이십니다. “얘야, 나의 자애는 영원하단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하느님과 우리의 먼 거리는 사라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16) 영이십니다(요한 4,24). 하늘과 그 위의 하늘도 그분을 모실 수 없지만(1열왕 8,27)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 모든 실재 위에 현존하시는 주인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창조를 계속하십니다.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큰아들”(루카 15,25-32)은 그 잔치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하늘과 땅 안의 피조물들도 자신을 마구 거칠게 다루었던 아들에게 저항합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정녕 저희 영혼은 먼지 속에 쓰러져 있으며 저희 배는 땅바닥에 붙어 있습니다.”(시편 44,26) 라고 온 피조물을 향하여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무한한 너머에 계시지만 또한 지금 여기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며 듣고 보고 계십니다. “자격 없었음”을 인정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섭리의 질서를 지키며 충실한 종으로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먹는 “생명의 빵”이 정녕 생명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시고,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애가 5,21) 항상 청하면서, 기다리시며 달려오시는 아버지께 달려갑시다(히브 12,1). 탐욕은 벗어 버리고, 온 우주를 싸안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입으면 좋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도 빠라클레토 성령이 그러하듯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외젠 뷔르낭(Eugene Burnand 1850-1921) / 자비하신 아버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9월의 말씀

다 함께 탄식
다 함께 기도

“불

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두움, 안개와 구름, 땅 위의 모든 것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다니엘서 3장). 하늘 바람 곳간은 며칠째 열리지 않고 밤조차 낮처럼 뜨거운 날이 계속되고, 우리는 시간경 기도때마다 선풍기 날개 소리에 행여 시편 기도의 노래가 파묻히지 않도록 입술과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었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갔군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릴 때면 옷의 소금꽃을 씻어 말리며 기도합니다. “이 모든 고난과 위험도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소서.” 초록 꽃대를 쑤욱 뻗으며 순백의 향을 퍼뜨리던 수도원 길섶의 백합들도 9월 햇살 아래에서 시들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낯선 새 한 마리 텅 빈 안마당에서 콕콕콕 언 땅을 두드리더니 늦봄부터는 식구들을 데리고 여기서 지냅니다. 책에서 이름을 찾으니 후투티! 텃새인 딱새들은 낯섦과 다름을 내치지 않고 함께 어울립니다. “기도와 일”을 졸음의 바다에 빠뜨리던 어느 날, 긴 부리로 창문을 톡톡, 고개 드니 신비한 머리 깃털을 세우고 흑백의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건너편 벚나무로 날아갑니다. 고맙다, 새야. 봉쇄의 일상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로마 8,22) 희망의 기도에 끊임없이 동참하는 것임을 새삼 퍼뜩 깨닫습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탈출 3,7-9).

지금 비록 비탄과 애통 속에 있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숨과 탄식, 울음과 통곡, 말도 아닌 옹알이일지라도 성령께서는 다 들으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로마 8,26-27). 그리고 순교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탄식하는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남긴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내 일생에 누님만큼 천주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 내 죄가 무수하다면 또 한편으로는 천주의 자비도 끝이 없으니 이것이 내 오직 하나의 희망이오. 내 힘만 가지고는 한순간이라도 꿋꿋이 견디지 못했을 거요. 참말이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 힘은 아무것도 아니고 천주의 보호하심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인정하오.”(순교자 이 순이의 동생 이 경언의 옥중서한).

시들어 버릴 꽃이 늘 다시 피는 것도, 새가 나는 것도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가야 할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서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그 그리움 한 자락은 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구렁의 짙은 어둠보다 더 질기고 강하게 당신의 심연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며 기다리고 갈망하는 그분께서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듯”(시편 97,5) 온 땅의 재앙도 마침내 끝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히브 5,7) 올리셨습니다. 성부께서도 사랑하시는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던지심으로써 온전히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차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알브레히트 뒤러 / 1520 / 의자 위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8월의 말씀

가장 먼, 가장 가까운

편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듭거듭 “저희를 다시 일으켜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라고 기도합니다(시편 80편). 보고 싶은 얼굴, 듣고 싶은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어색하지 않게 손잡을 수 있을 만큼 친숙하며 부드러운 얼굴, 나의 꿈과 의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르심일까요? 그러나 정작 그분 얼굴, 그분 소리는 엄청 낯설고 당혹스럽고 모호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기도 하지요. 도망치거나 핑계를 대면서 응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즈카르야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천사가 말하지만 그는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루카 1,8-23). 그러나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기뻐하여라.”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지요(루카 1,29). 마치 아이가 퍼즐을 요리조리 꿰맞추며 놀이에 집중하듯.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마른 솜이 물을 흡수하듯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이 터무니없고 놀랍고 황당하건만, 천사와 마리아 두 아이 사이에서는 친밀함과 신뢰가 쌓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꿈이 시작됩니다. 나자렛 고을에서 일어난 이 일을 회상하듯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nepios 어린이,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믿으셨기에, 하늘보다 더 먼 하늘의 하느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이 모십니다.

성모님께서 누리신 가까움은 어떤 것일까요?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로 물러나시어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 8,19-21). 예수님을 낳으셨으니 어머니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자리인 “예수님의 뒤”에서 믿음과 순종과 겸손을 배우시며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 숨을 받으시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모으시어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십니다(사도 1,14). 하늘로 오르신 그분의 먼 가까움을 이젠 내적으로 더욱 친밀하게 누리며 성령강림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가장 멀리 떠난 아들의 죽음을 품에 안으시더니 이제는 하늘로 올림 받으시어 “아버지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십니다. 그 자리는 우리 여정의 종착지이며, 한처음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이지요(요한 1,18). 우리도 멀리 계신 낯설고 당혹스러운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며, 가까이 계신 주님을 알아 뵙고 섬길 수 있도록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저 먼 곳 하늘의 하느님께 가까이 계시기에 중요한, 소소한 우리 일상 안에도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넘어지면 일으켜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여 주십니다. 하늘 본향의 희망과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살게 하십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 죄인을 어여삐 보소서.”(시간경 끝기도 성모찬송가).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 16c / 성모 승천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7월의 말씀

하느님께 발각되기

네딕도 성인은 “누가 수도 생활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면 그의 정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보고, “그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si revera Deum quaerit)”를 검증하고 식별할 것을 요청합니다(규칙서 58장).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63,2 ; 42,2). 아름다운 성모 성월인 5월에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을 찾는 그리움을 폭포처럼 쏟아내는 두 자매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한 명은 수련기를 마치고 첫서원을 하였고, 다른 한 명은 수련 착복을 하였답니다. 후배를 맞이하면 “내 얼굴을 찾아라.”(시편 27,8)는 말씀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묻게 되지요. “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발견하였는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 발견의 지복이 거룩한 갈망을 해소시켜 주지는 못한다. …… 하느님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찾음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며 영원 안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학교”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찾음은 약속과 희망 안에서 이미 받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결실이지요.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예레 29,13-14).

우리의 “하느님 찾음”은 그분께서 먼저 찾으셨고,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숨은 것도 보시고 먼저 찾으시는 분께서 마치도 눈이 어두운 것처럼(창세 27,1), 들리지 않으시는 것처럼 나를 찾지 못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실 수 있도록 모세가 그랬듯이 신을 벗고(탈출 3,5) 거룩한 땅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익숙한 내 신발을 벗고 낯설고 거룩한 타인의 땅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분께 여기 이곳으로 오시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계시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합니다. 게으름, 질투, 불평, 시기심을 부수고 허물고 뽑아 던져 버리고, 한 처음 그분께서 빚으신 모습으로 광야에 서야 합니다. 내 이기심의 좁은 방에서 빠져나와 하느님께 발각되기. 나의 뜻, 나의 계획의 그물을 잘라 버리고 하느님께 발각되기. 베네딕도 성인은 “찾음”에 있어 좋은 도구를 주었습니다. “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규칙서 4장). 양파의 껍질을 벗기면 눈물이 나듯 쉽지 않으나 신비롭습니다. 외면하고픈 타인의 얼굴에서 찾는 얼굴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지요. 더러는 홀연히 혹은 서서히 당신 좋으신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오늘이 첫날이면서 마지막 날인 듯 매번 그렇게 시간경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 105,3-4). 사흘 후면,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어김없이 지체하지 않으시고(하바 2,3) 말씀이신 신랑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 행복한 희망과 사랑을 전합니다. “나는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아가 3장).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마리아님,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니 우리를 도우소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17c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6월의 말씀

놓아 드리지 않겠나이다.

6월,

새벽 산의 초록이 참 싱그럽습니다. “그리스도님, 여기 없는 이들과 앓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소기원을 바치고 독서기도를 끝낸 후 성당을 나오면, 이미 새들의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소리가 하늘을 두드리며 동녘 햇살을 깨우고 있습니다. 하루가 주님 안에서 열립니다. 촘촘한 그물로 맺어진 관계의 일상이 시작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틋하지만 성가시기도 하고, 마주하고 싶지만 멀어지고, 온갖 겸손으로 순종하기도 하나 다시는 보지 않을 듯 논쟁하고, 그때마다 너의 얼굴을 통하여 차츰차츰 낯선 나를 만나고, 서로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지요. 우리 사이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이러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함께 일하셨음을 지나고 나면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벼락치듯 지금 이 순간에 엄습하시기도 합니다. 숨기신 채 우리 두려움 속으로 쳐들어오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편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창세 32,23-32). 밤의 어둠과 건너야 할 야뽁강의 거친 물결만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그 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씨름을 합니다. 그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칙으로 야곱을 절뚝거리게 만든 것을 보면 한밤중의 낯선 이는 까닭없는 “공격자”이군요. 이길 듯한 싸움에서 지게 되자 야곱은 매달립니다. “저는 이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저를 축복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싸움을 걸어온 낯선 자는 “축복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매달리며 씨름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투 끝에 야곱은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야곱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변화시키시며 드러내십니다. 싸움을 거는 “낯선” 사람에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알리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태생 싸움꾼(창세 25,22) 야곱의 끈질긴 집념의 승부는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산, 건너야 할 강이 있고, 어처구니없이 ‘공격당할 수도 있음’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를 붙들고 씨름하듯 매달리지요. 붙잡고, 놓지 않고, 결코 거리를 두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계속 그분을 밀어붙이며 재촉하는 것이지요. 나의 책임과 의무를 그분께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몫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투쟁이니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며 그가 실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도록, 죽음의 구렁에 떨어지지 않도록 내 목숨을 걸고 투쟁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폭력과 무죄한 이들의 피로 물드는 척박한 세상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창세 18,25).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바꾸십니다. 응답이 없어도 쉽게 물러서지 말고 그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숨어 계시지만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더 간절히 그분께서 먼저 찾고 계십니다. 싸매 주시고, 살려 주시고, 일으키시어 우리가 다시 그분 얼굴 앞에서 살게 하여 주십니다. 하느님과 야곱, 두 승자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 해는 떠오릅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1925~2015) <해가 야곱 위로 떠올랐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5월의 말씀

만남,
두려움과 끌림

물이 찢어질 만큼, 두 척의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될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자 시몬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루카 5,1-11). 낯선 상황이네요.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소리, 눈부신 비늘빛, 단지 억세게 운 좋은 날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몹시 놀란” 베드로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함께 일하던 어부들 중에는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친 이들도 있었겠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과연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난 것일까요?

누군가, 무엇인가를 대면하여 잠시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바로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탈출 3,1-6), 이사야(이사 6장), 의로운 요셉(마태 1,18-2,23), 파트모스 섬의 요한(묵시 1,9-20)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신비(mysterium tremendum) 앞에 압도당하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에 깊이 이끌리어 자기의 실존과 운명을 내어 맡깁니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다가갑니다. 그리하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응답하며 경외로운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몇몇 선택된 이들만의 것일까요? 탈출기 19장을 읽으면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무서우리만큼 놀라운 하느님의 두려운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또 배반하여 주님을 분노케 합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세와는 다르게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이 말을 성경은 두 번씩이나 전합니다(탈출 20,18.21). 죽음의 공포, 마지막 순간의 뒷걸음 때문에 하느님의 바다가 아닌 불안의 늪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도 크든 작든 “몹시 놀라는”(루카 1,29) 낯설고 두려운 일이 생깁니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의 약함과 불안, 때론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과 불신 때문에 쉬운 길, 익숙한 자기 중심성으로 도망가기도 하지요. 경험을 정직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응시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그 경험이 두렵고도 떨리는, 그러나 한없이 매혹적인 하느님의 신비와 만나는 초대임을 알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서 아무 자격 없는 나를 당신의 자비 안으로 맞아주셨기에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기뻐 뛰나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기를.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 매인 사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 / 성모 영모 (15C) / 테라코타 / 라 베르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4월의 말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처음, 땅은 텅 비었고 어둠이 덮인 깊은 심연 위에는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인 듯한 곳에서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리고 마지막 남은 숨을 맡기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의 재앙 앞에서 자식은 속수무책이었건만 하느님께서는 함께 가까이 계셨군요. 몸으로 낳은 자식들에게 살과 피를 남김없이 내어주고 이제 텅 비었습니다. 만지면 산산이 부서질 것같이 한 점 무게도 없고, 붙잡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빈손, 오직 통째로 삼킨 그리움만 목에 걸려 있습니다. “끝”인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들이 본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투명해지는 어둠을 뚫고 소리가 들립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 아름답구려.”(아가 4장). 신랑은 당신에 대한 애틋하고 오롯한 그리움을 간직한 신부를 맞이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경이로운 돌문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그리움으로 열렸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며 밀쳐 댑니다(마르 5,24-34). 주님은 그 모두에게 한결같이 좋으신 분이시며, 자비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 위에 미치십니다(시편 145,9).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당신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먼저 굽어보십니다(이사 66,2). 그 군중 속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우상에 흔들리며 절뚝거리던(1열왕 18,26) 걸음을 멈추고 생명이신 한 분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제는 그분 뒤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내맡깁니다. 그러자 그분은 영원에서부터 마치 처음처럼 사랑으로 다가오시며 말을 건네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하늘은 땅에 닿아, 하느님을 외면한 채 쏟아부었던 헛되고 무의미한 고생을 유의미로 바꾸어 주십니다. 치유된 여인은 분명 주님의 그 눈길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파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정한 말을 건네고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은총은 그렇게 닮아가고 부활의 “알렐루야!”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니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백성의 큰 무리도 따라갔고, 그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도(루카 23,27), 자신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그녀는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고통에 다가갔습니다. 자신의 눈물보다는 타인의 눈물과 땀, 피를 닦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수건에 당신 얼굴을 인장처럼 새겨주십니다. 고통(passio)의 땅에서 연민(compassio)을 발견하는 용기있는 이들에 의해 땅은 열려 구원의 꽃이 피어납니다(이사 45,8). 바로 이 부활의 자리, 인간의 울음과 하느님의 울음이 만나 의로움이 열매 맺습니다. “누가 내 헐벗은 몸에 옷을 입혀 주었느냐? 누가 굶주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누가 내 갇힌 몸을 풀어 주었느냐?”(마태 25,31-46). 고통을 돌본 이에게 새겨진 그 얼굴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빛이 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엘 그레코 / 베로니카의 베일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16C) / 톨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