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2월의 말씀


성탄의 높음과 깊음 그 언저리에서

뜻함, 고요함, 거룩함, 맑음이 그림 속에 함께 어우러져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고 돌아 나옵니다. 사실 이 그림은 성탄 구유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빠의 복장이 목공 혹은 피혁 작업을 하는 사람의 것인지라 성탄 그림이려니 지레짐작을 했지만, 혹시나 하고 자료를 뒤졌더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화가는 귀족 출신에 왕립미술학교를 나왔음에도 유명한 정치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풍자만화가로 파리코뮌에 연루될 정도로 급진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으나, 파리코뮌이 십만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거의 몰살 지경에 이르자, 풍자만화의 길을 포기하고 일반 회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풍자만화와는 달리 회화 쪽은 그리 인기가 없어 경제적 궁핍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그림은 자신의 첫 아들의 탄생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된 그 감격의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예수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가족의 모습인 것입니다. 화가의 눈은 금방 태어난 아이를 향해 감탄을 넘어선 경외의 시선이 넘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 모든 아빠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을 넘어선 먼 나라의 존재, 한 인간의 존재 안에서 인간을 넘어선 어떤 신성함을 느끼는 순간 앞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큰손이 부담스럽다는 듯, 마치 큰손이 아이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듯, 그리고 차마 입맞춤조차도 하기 어려운 듯한 모양새입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아빠의 마음속 경외심을 더 진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또 반전이 있습니다. 엄마의 표정입니다. 엄마의 표정에는 아빠와 같은 경외감과 더불어 무엇인가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이 함께 어려 있습니다. 사실 1881년에 태어난 이 아가는 1년이 채 못되어 하느님 아빠 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화가는 1880년부터 환각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1885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아가가 있는 하느님 아빠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 엄마는 장래의 이 아픔을 예견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화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요?

그런데 왜 저는 또 하필 성탄 그림으로 이런 아픔이 서린 그림을 택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성탄 구유 장면 자체가 아픔이 서린 장면 아닌지요. 사실 성탄 장면 속 주인공들의 운명은 세상적 시선에서 본다면 더 할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될 처지입니다. 게다가 출생마저 위의 아기와 달리 신비 혹은 스캔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탄 장면은 세상의 온갖 아픔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훌륭한 가문도 존경받는 위치가 아닌 시골 어느 구석의 한 처녀 안에 깃드신 하느님은 양부의 보호를 받고 자라납니다.

성탄 구유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요? 우리가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주고받는 성탄의 기쁨이 진짜 성경 속 성탄의 그 깊은 뜻과 일치할까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그 마음에 우리 마음이 닿아있을까요? 하느님이 세상 가난한 아기로 오신 그 신비가 우리의 완고함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우리 사랑의 지독한 이기성을 이 아가 앞에서 깨달을 수 있을까요? 가장 가까운 이마저 내 사랑을 채워줄 대상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뼛속까지 스민 이기심을 내려놓을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줌으로써 행복해지고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얻고 자기 뜻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묶은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요. 실제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처럼 구유가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벗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Andre Gill -신생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1월의 말씀


기도의 자리 – 삶의 자리

억이 아련하게 돋는 그림입니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아이에게 기도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실로 기도의 힘을 믿는 엄마의 진심일 것입니다. 어디 기도뿐이겠습니까?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게임 그만하라고 잔소리, 큰소리 다하면서 자신은 TV나 컴퓨터 앞에서 즐길 것 다 즐기고 있다면 아이의 마음 속에 공부할 의지가 커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을 것이요, 반항심만 부글부글거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잔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딜 가든 잔소리는 넘치고 넘칩니다.

잔소리는 하고있는 본인과 듣고 있는 상대방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중 삼중 손해 보는 일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하나의 예술이요, 공감의 차원을 만드는 참 신명나는 일이지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것부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려놓음 역시 억지로 마음을 비틀어 속의 것을 짜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과 같이 터득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꺼움이 필수로 따라야 하지요. 내려놓으면 신기하게도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사실 내려놓음은 비워져있으니 상대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상대의 불가능한 영역과 한계가 보이고 더 뻗어 나갈 수 있는 생장점도 보이지요. 이 공감의 세계 혹은 차원 속에 있는 아이는 부모의 재촉 없이도 스스로 자기 성장의 길을 걸어갈 힘과 의지가 생겨납니다.

이 공감의 세계 안에 있는 이는 이미 기도의 입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세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계가 바로 공감의 세계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소박하나 정갈하게 꾸며진 방은 문고리 하며 낡은 천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식탁보까지 집주인의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입니다. 화가는 아마 상상 속 집이 아니라, 어떤 가정을 실제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직 신앙과 이성의 결별이 확실하지 않던 19세기 유럽의 시골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십자고상과 성모자 그림, 성 요셉 그림이 이 집의 유일한 장식입니다. 이 작은 방이 기도하는 곳이요, 밥을 먹는 식당이며,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는 거실이기도 합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따뜻한 햇살은 마치 하느님 아빠의 사랑인 양 모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고, 단 하나뿐인 단출한 메뉴의 식탁조차 모자라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이 가난한 식사 앞에서 식사 전 기도를 아이 스스로 바치게 합니다.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과도하지 않게 살짝 팔로 감싸 안고 옹알거리는 말로 기도를 바치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정갈하게 땋은 머리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아침식사 시간인 것일까요?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단 한 가지뿐인 메뉴, 소박한 집안, 아빠의 부재 이 모든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어느 것도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딸과 엄마의 한마음이 된 기도의 분위기 때문이겠지요. 기도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는 기특함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단정하게 모은 아이의 손이나 자세는 억지로 시켜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입니다. 더욱이 빈약한 음식과 삶의 환경에 엄마가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낸다면, 아기더러 바치라고 하는 식사 전 기도는 강요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있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엄마의 기도 분위기 푹 젖어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빈약한 음식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도 전염될 것입니다. 삶이 좋은 음식과 좋은 옷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음도 저절로 알아듣겠지요. 기도의 자리와 삶의 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Karl Gebhardt 1860-1917 Saying Grace 식사 전 기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0월의 말씀


알몸으로 보는 세상

6-70

년대 우리나라 어느 목욕탕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 같아 누드화 치고는 참 정감이 가는 그림입니다. 성적 매력이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면에 치우친 누드화만 보았던 저에게 참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자료를 좀 뒤져보니 화가가 아주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의 신산했던 삶에 대한 무지나 제3자적 여유로움이라는 평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삶을 일별하고 그녀의 작품을 보고나면 정말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절로 느껴집니다. 아마도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 즉 르노아르, 로트렉, 드가, 등이 그녀를 그리도 자주 모델로 삼아 그렸던 이유도 알 듯 해집니다. 그녀는 타고난 모델 기질로 많은 화가들의 불림을 받았고, 이들 덕분에 그녀의 여러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르노아르가 그린 그녀의 모습 속에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읽어보기 힘들 정도로 포근한 모습으로, 로트렉의 그림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당시에 모델은 그저 그림의 대상만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18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모델을 하기 전, 그녀는 지금에야 외국인들이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유명한 거리 몽마르트가 당시에는 싸구려 술집 가득한 변방의 장소였고 그곳에서 세탁일을 하는 한 여인의 아버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그녀는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서커스단의 곡예사도 된 적이 있으나 곡예를 연습하는 중에 떨어져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화가들의 모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가들과 사귀고 헤어지기도 여러 번 했으니, 어딘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생이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트렉의 그림에서 수잔 발라동의 삶의 신산함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긴 하지만 그 안에는 로트렉 자신의 삶의 여운이 묻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자신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는 험난함에 뭉개지기를 거부하였지요.

그리고 모델로서의 인기가 상당했음에도 자신을 꽃같은 존재의 틀에 가두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말 그대로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그림의 매력에 이끌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발로 그 세계 안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눈여겨 본 로트렉이 모델이 아닌 조언자 친구가 되어주었고 수산나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드가에게 그녀를 소개합니다. 드가에게 그림을 배우며 누군가의 연인이나 모델이 아닌 화가 수잔 발라동으로 삶을 시작하며 1894년에는 프랑스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예술협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녀의 그림 특히 누드화는 세상을 시끄럽게 했는데, 그 동안 남성 화가들만의 것이었던 누드화를 여성화가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회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누드화는 남성화가들의 틀을 훨씬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그림에서 앞의 여인은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고, 그런 여인을 뒤의 여인이 머리를 매만져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바라보고 있으나 그 시선은 담담할 정도로 과도하지 않습니다. 아픔이 묻은 삶을 품어주되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고난을 경험한 이에게만 가능한 일이지요. 이 두 여인의 몸은 늘어진 가슴과 접힌 뱃살로 바로 우리 자신의 친근한 몸 그대로이지요. 그녀의 그림은 남성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고, 있는 그대로 인간의 삶, 알몸인 인생 그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이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선이 확실하고 동작도 과감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겹습니다. 그녀에게서 알몸 그림은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자 찬사요, 알몸은 그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여인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9월의 말씀


수치심 새로운 자아

대인들 사고의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그림을 보면 ‘인간의 죄’를 떠올리고, 반대로 죄를 생각할 때면 이 그림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야 없겠지만 이 유명한 그림의 가볍지 않으나 흥미진진한 내용을 한번 따라가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이라 것을 빼면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절망적 모습이 우리네 어떤 체험과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멀어짐은 그림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인 두 사람에게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수치심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합니다. 정원을 함께 거닐던 하느님을 이제 아담과 하와는 피해서 숨습니다. “왜 숨느냐?”고 묻는 하느님께 아담은 알몸이 수치스러워 숨는다고 답합니다. 참 우습지요. 언제는 알몸이 아니었던가요? 이전에는 알몸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몸임이 수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자의식이 생겼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수치스러워 감추고자 하고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저자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며 죄와 수치심, 남탓과 불행이 하느님과 멀어짐에서 비롯됨을 통찰하였습니다. 금단의 열매는 하느님이 속이 좁아 인간을 잡아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의 한계를 뜻합니다. 인간은 어떤 경계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굳이 어떤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 심연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한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자연인들 동물인들 심지어 동료 인간마저도 남아나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수치심 가득한 인간에게 따라오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탓을 돌립니다. 내가 불행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 주변이 이 모양이니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꽁꽁 무장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전쟁이 터집니다. 상대방 역시 수치심 가득한 인간이니, 네탓이라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다 보면 어느새 주먹질로 바뀌는 법이지요. 악마를 뜻하는 사탄이란 말의 어원이 “고발자”라는 사실도 여기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이 수치심 가득한 자아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보면 아주 선명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아주 생생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 그 바탕이 수치심입니다. 부모의 관심조차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들리니 반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화를 내는 것도 인간은 보통 수치심이 건드려지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부모, 교사, 이웃도 이에 대한 어떤 처리법을 찾지 못해 중2는 김정은조차 무서워한다는 말이 생겨나게 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심 가득한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 창녀, 마귀들린 이들, 당시 세상이 벌레보다 무서워하고 피했던 이들이니 이들의 속마음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식탁에 불러 깊은 용서 체험으로 이끕니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엇보다 마음 가득한 사랑으로 이들을 용서합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이 수치심이라는 말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때 마음을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수치심의 죄인들의 형제자매요, 이를 진짜 체험한 사람은 깊은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미켈란젤로 시스틴 성당 “천지 창조” 중 “낙원에서의 추방”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8월의 말씀


우리의 삶은 타자에게 넘겨주는 선물

“그

랜마 모지스”라 불리는 이 그림을 그린 할머니의 본명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입니다. 이 긴 이름보다 GrandMother 즉 할머니라는 애칭인 “그랜마”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 할머니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서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린 것이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나이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이미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해야 했고, 27살이 되어 농부와 결혼하여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으며, 10명 아이 중 5명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75세가 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릴 적 꿈이 떠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내거나 마을 게시판에 붙이거나 벗들에게 선물하곤 했지요. 어느 날 한 미술가가 시골 마을 한 약국에 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구입하고, 개인전도 열고 뭐 그런 여정을 거치며 미국 전역에 소개되고, 언론도 관심을 가지며 미국 국민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92세에는 “내 삶의 역사”라는 자서전도 출간하게 되지요. 이 자서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의 말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과일과 잼으로는 상을 받았지만 그림으로는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1년을 산 그녀는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신의 유산은 농촌 기술 지원금과 가난한 이웃들, 불치병과 싸우는 환자분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랜마의 그림들과 그녀의 사진 속 투명하고 따뜻한 눈빛 그리고 생애 이 세 가지는 같은 빛으로 반짝이며, 어떤 모순의 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그림을 처음 대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화면이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밝음과 경쾌함이 전달됩니다. 이 할머니 작품들은 예술이 꼭 심오하지 않아도 인간의 마음에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서 비롯됨을 동시에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12살에 가정부의 삶을 살고 아이를 5명이나 잃고서도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가져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작품들과 그분 생애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생명을 남에게 넘겨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 무엇보다 삶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자신의 몸마저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으로 넘겨주셨습니다. 그 빵 안에서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속에는 자신을 남에게 넘겨준 사람의 가벼움이 읽히면서 동시에 그 가벼움은 바람에 휙 날려버리는 일 없는 무게를 지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지요. 한없이 밝고 경쾌하지만 그림 속 하나하나를 보면 평생 노동으로 다져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노동과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있고,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있는 장면들에는 누구도 노동으로 지치거나 힘겨워하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장면이 1년에 한번 있는 단풍나무 시럽 제조 잔치날이니 그 흥겨움이 넘쳐흐르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의 아내로 가정부로서의 삶은 노동에서 노동으로 하루가 채워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에게 노동은 몸과 인생을 짓누르는 힘겨운 일이기 전에 남을 먹여살리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위도 그녀를 짓누르지는 못했나 봅니다. 온 천지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복장을 하고 있지만 벌거벗은 나무들을 덮은 눈은 세상을 새하얀 꽃으로 뒤덮은 듯하며, 눈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없지요. 추위와 엄혹함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그녀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사랑만이 노고를 달콤함으로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랜마 모지스 Gran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단풍시럽제조 잔치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7월의 말씀


성숙해가는 정열의 아름다움

각한 추론 없이 산뜻하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그림 두 가지, 한 화가의 살짝 다른 감성을 맛볼 좋은 기회입니다. 때로 두 그림을 같이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시야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한쪽은 좋고 다른 쪽은 못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색과 다름이 오히려 그림을 보는 묘미를 더해 주지요. 사람의 연륜과 열정이 깊어가고 변화되는 모습이 마치 스냅사진 보듯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왼쪽 그림의 노인 두 사람은 복장부터 세월의 흐름이 역력하게 느껴지고, 어린 두 소녀의 하얀 빛이 주를 이루는 옷은 새 것에 가까운 청량함이 묻어납니다. 두 사람이 선 장소도 재미있습니다. 나이 든 여인들이 선 곳은 출입문 입구요, 소녀들이 앉은 곳은 집안 어느 장소, 실내입니다. 어떻게 구별하느냐고요? 소녀들이 앉아있는 문은 커튼으로 가림막이 되어있고 오른쪽 소녀 옆으로 앉은뱅이 의자와 바구니가 놓여있으며 여기저기 물건이 흩어져 있으니까요.

이제 두 스냅 사진의 핵심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장면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지요. 나이 든 두 여인은 아마도 이 장면 이전, 크게 다퉜거나, 어떤 상쾌하지 않은 작은 사건이 있었던 듯 합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여인은 몸을 상대방에게로 기울이며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해명하고 있고 펼쳐진 왼손은 곧 상대방의 팔을 덥석 잡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얼굴이 보이는 여인은 팔짱을 낀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와 함께 앙 다문 입, 살짝 내린 깐 눈이 화가 나있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왠지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즉 벌써 화가 반은 풀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장면은 오랜 세월 미운 정 고운 정 골고루 쌓으며, 모난 곳은 닳고 패인 곳은 절로 채워지며 나이듦의 가벼움이 귀여움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연륜이 쌓은 무게감도 잃지 않습니다.

자, 이제 입에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발랄한 두 소녀를 보아야지요.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오른쪽 소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깔깔 웃는 소리가 그림을 뚫고 들려올 정도입니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에게 현재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는 내용이겠지요. 두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뛰게 하는 한 소년 혹은 두 사람 각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두 소년, 아니면 마을의 소년들의 장난스런 행동에 대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요. 오른쪽 소녀가 살짝 제 가슴을 만지는 모습과 온몸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며 이런 상황을 짐작해봅니다.

이 시기, 인간의 열정은 가장 활활 타오르면서도 어느 방향으로 불꽃이 튈지 자신도 남도 모르는 그런 때인지라. 펄펄 뛰는 정열의 노예가 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있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열정” 이것이 아마도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요. 그래서 변덕스럽고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무엇인가 관심을 끄는 일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게 되는 일도 흔합니다. 거의 이 정열의 불꽃이 몸을 태우고 있는 형국이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이 정열 때문에 생기발랄하고, 무엇이든 시작해볼 수 있고, 인생의 걸림돌에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어, 세상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정열에 방향이 잡히고 갈 길을 찾기까지 그 성장통을 겪어내는 여정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들과 엮이며, 각자 다양하고 다른 색깔들로 입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전, 이 인류 공통의 정열이 활활 몸을 태우는 듯한 시기는 이 그림처럼 소년 소녀들을 사뭇 비슷하게 보이게 하지요. 그 출발선에 선 두 소녀의 상큼 발랄한 모습이 어른들의 선입견과 삶의 무게로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는 어떤 가벼움, 굽지 않고 꼿꼿한 여인들의 몸처럼 곧은 정신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잘못에는 용서를 빌고, 이웃의 약함에 눈감을 줄 알며, 거친 파도도 어찌 대처해야 할지 아는 그런 노인의 성숙한 열정으로 변모해가는 여정이 한눈에 보이는 두 그림을 함께 봅니다. 우리에게 있어 정열의 가장 확실한 방향잡이는 예수님이지요.

칼 블로흐, 이야기하는 두 여인(1874)-웃는 두 소녀(1865)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6월의 말씀


새로운 시야가 여는 새로운 삶

진 말에서 멋지게 나뒹군 모습이 풀어내는 서사가 호기심을 잔뜩 자극합니다. 부드러운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고, 몸통은 부드러운 갈색과 흰색 그리고 머리는 흑갈색의 조화가 절로 찬사가 터지게 만드는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그 말 아래 한 사람이 볼썽사납게 떨어져 뒹굴고, 함께 가던 이는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눈마저 감겨 있는 것을 보면 갑자기 장님이라도 된 모양입니다. 말을 타고 왔으니 원래 앞 못 보는 이는 아니었을 테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회심하여 사도 바오로가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를 믿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입니다. 사방이 캄캄한데 사도 바오로 주변만을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말이 앞발 하나를 들고 있긴 하지만 그림의 정황으로 볼 때 말이 날뛰어 그가 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말이 평소의 주인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한 편의 코미디 같기도 합니다. 마치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굴러떨어지셨어요?”라고 묻고 싶은 듯 하지않나요.

성경 속 상황은 간단히 묘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앞장서 박해하던 사울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합니다. 분노해서 펄펄 뛰는 지도자들 앞에서 한없이 고요하게 할 말 다 했던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었던 예수님을 닮아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사도 바오로는 당국으로부터 권한을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기하고 위험한 무리들에 대해 분기탱천한 것 같은 사울의 내면은 저 스테파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균열이 생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한 사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현재 권력균형의 유지를 위해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말에 누군들 뜨끔하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사울 같은 감성 예민하고 뛰어난 사람이 이 말에 무감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행전에 따르면 빛의 벼락을 맞습니다. 바오로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던 눈은 닫히고 새로운 방향으로 볼 눈이 열리기까지 그는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닫힌 눈을 하나니야라는 사람이 와서 열어주었을 때 그는 사울이 아니라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회심 후 그는 자신의 이력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겼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향, 에너지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온존재를 관통하며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지요.

대체 이 순간 그는 무엇을 누구를 만났기에 그의 자랑스런 삶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섰던 것일까요? 생명의 주인, 사랑의 원천인 분을 만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그 생명이 이 땅에 이미 와있음을, 유대교에서 그 힘겨운 율법을 지키며 기다리던 분이 이미 이 땅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참 생명, 참 빛은 이런 것입니다. 저 아름다운 말처럼 빛나는 인생조차 쓰레기처럼 뒤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생명이니까요. 세상 가치의 아름다움은 그 앞에서는 저 말 주변의 어둠처럼 캄캄한 것이지요. 최소한 죽음의 순간에라도 이 아름다움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지요. 우리의 것이니까요. 이런 빛을 보고, 그 빛을 섬세하고 장엄하게 우리 눈앞에 가져다준 카라바조 참 대단한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신학적으로 더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카라바조, 바오로 사도의 회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5월의 말씀


꿈은 채집 목록이 아니지요

린 아이가 그렸음직한 발상의 그림입니다. 이상주의자라는 딱지가 훈장처럼 붙어다니는 화가 칼 스피츠베그의 그림입니다. 그가 이상주의자가 된 데는 시대의 격랑이 한몫을 합니다. 그는 1808년에 태어나 1885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반(反) 나폴레옹 동맹으로 수상에 오른 메테르니히가 군주제를 강화하고 18세기 후반 이래 싹튼 자유주의를 철저히 억압하는 시기였습니다. 출판과 예술 활동은 그 동안 누렸던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은 정치·사회적 현실보다 소소한 일상을 묘사하거나 전원을 예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타오르기 마련이고 그 목마름을 엉뚱한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지 않는 이들은 사회현실에 맞서 싸우거나 이 화가처럼 은둔의 삶을 택하거나 하는 양극으로 나뉘는 현상을 보이지요. 은둔의 삶을 택한 이들은 칙칙한 절망 속에 힘겨운 걸음을 내딛기도 하지만 그 절망이 품고 있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예술로 표현해내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자유는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결코 뿌리 뽑은 적이 없으니까요. 절망 속에 희망을 길어내는 이들, 그들은 신앙인과 참 닮았습니다. 이 화가도 그래서인지 수도승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나비 채집꾼이 신비로움 가득한 숲속으로 나비 채집을 나섰습니다. 물통에 배낭에 모자, 우산까지 제대로 갖춘 전문적인 채집꾼입니다. 그런데 숲속 풍경이 열대 밀림과 화가 자신의 나라인 사계절 갖춘 독일의 숲이 묘하게 뒤섞여 동화 속 이야기가 펼쳐지고 요정이나 난장이들이 나타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지요. 채집꾼이 안경을 썼는데 눈이 몹시 나쁜지 안경이 70년대 코미디언 배삼룡님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뱅뱅 도는 안경을 쓰고 있는 탓에 채집꾼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안경 속 눈동자는 보이지 않아도 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아주 굉장한 것을 만났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자신이 손에 든 채집망 속에는 도저히 담기지도 못할 엄청나게 큰 나비 한 쌍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나비는 놀라 달아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저 나비는 늘 화가 주변을 날고 있었어도 화가의 눈이 닫혀 볼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일상의 삶의 터전을 떠나 어떤 곳으로 향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채집망으로 잡을 필요도 없고, 잡아서도 안될 나비입니다. 그 나비는 우리의 꿈이니까요. 꿈을 잡아 채집망에 넣는 순간 꿈은 이미 꿈이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되어버립니다. 꿈은 우리 앞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채집망 속에 담길 채집 목록 중 하나가 아닙니다. 내가 꾼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세계, 나를 넘어서는 세계로부터 온 선물이니까요.

어떨 때는 비현실이 더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스피츠베그가 살았던 냉혹한 현실이 어쩌면 더 비현실인지도 모르죠. 아무리 엄혹한 권위주의 체제도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꿈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황홀한 착각이요, 멸망에 이르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한 가지. 그들만이 독재자라는 우리의 착각. 우린 누구나 내 자유는 최대로, 남의 자유는 빼앗고자 하는 독재자의 기질이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 비슷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꿈이 있어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창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왔습니다. 시대의 절망이 희망을 낳는 역사의 모순 안에서 우리도 채집망 따위에는 담을 수 없는 나비 한 쌍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기를 기도드립니다.

칼 스피츠베그, 나비 채집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4월의 말씀


부활
그 펄펄 살아있는 고요한 생명 앞에

수룩하고 시커먼 수염, 한방 맞으면 국물도 없을 것 같은 솥뚜껑 같은 손, 거구의 몸집 등 솔직히 이 그림 속 예수님의 모습은 산적 두목 같지요. 그런 예수님이 어울리지도 않게 온몸을 둥글게 구부려 암탉이 알을 품을 둥지가 되어주듯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런 예수의 옷자락 속에서 노란 병아리 한 마리가 엄마 품에서 나오듯 그렇게 나오고 있고, 어미 닭은 세상 안전한 둥지 속에 세상 편하게 병아리들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도 한 번 보지요. 둥글둥글 돌아가는 사막은 마치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아기를 밴 엄마의 배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젖무덤 사이를 수탉과 암탉이 여유롭게 배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머무는 곳은 사막 혹은 광야요, 유혹을 받는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서 암탉이며 병아리가 웬 말일까요? 그런데 이것이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일까요?

정말 사막에 머물러 본 사람은 그곳이 생명을 잉태하는 장소요, 새생명이 배태되는 곳임을 잘 압니다. 생명이 메말라, 생명이 바닥나서, 더 이상 유지할 도리가 없을 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풍로로운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막을 찾습니다. 생명이라고는 없는 곳, 생명과 반대의 상징인 곳 그곳으로 찾아드는 그 본능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생명이 진정 바닥나있음을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두려워서 대면하지 못했던 그 참모습을 어떤 장식도 위로물도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명이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요, 주어지는 것임을 참으로 사무쳐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습니다. 어렴풋이 알던 것을 온몸 구석구석 다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생명은 언제든 아낌없어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순간은 바로 인간 안에 생명의 못자리 아기집이 생겨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막에서 무수한 암탉과 수탉 그리고 이미 그 아이들이 낳은 노란병아리들도 봅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기를 결코 멈추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 생명은 끊임없이, 아낌없이, 언제든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누구보다 선명히 알고 계셨지요.

이런 이에게 사막은 이미 생명 풍성한 곳입니다. 오아시스를 애써 찾아야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 사막 어디서든 나타나는 곳입니다. 오아시스도 언젠가는 마를 수 있지만 이 생명은 세세대대로 결코 마르는 일이 없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풍요로움을 노란 병아리들 속에서 이미 감지한 예수님의 표정은 넉넉함이 흘러넘칩니다. 흘러넘쳐 그림을 보는 이 안으로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한 그림은 백이면 백 전부 예수님이 하늘을 향해 붕 날아오르거나 무덤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이요 그마저도, 그림 전문 사이트에서 부활이란 주제로 검색을 해보면 몇 페이지 되지 않을 분량밖에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주제 자체가 신학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특히 미술적인 시각 차원에서 묘사는 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차원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금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요상한 세계는 또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뿌리로 하고 있고, 우리의 새생명은 현재 생명과 전혀 관계없는 마술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 분명한 것은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둠, 황량함과 풍요로움, 고통과 기쁨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황량한 사막에는 벌써 암탉 수탉이 알을 낳고 그 알은 부화하여 병아리를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에 생명이 뛰어놉니까? 광야라는 말에 마음이 설레입니까? 그렇다면 이미 광야와 부활과 새생명이 당신의 마음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와 부활이 함께 하는 곳에 무덤덤한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펄펄 살아있으니까요.

스탠리 스펜서, 광야에서 그리스도, 암탉, 1932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3월의 말씀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의
전문가는 아니랍니다

마음에 드는 예수님 얼굴을 만났습니다. 렘브란트의 시골 사람같은 예수님 얼굴 이후, 진짜 예수라면 이럴 것 같은 얼굴 모습을 처음 만났습니다. 푸근하고 인간적이면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많은 검은 머리에 아시아적인 얼굴이 편하게 다가오면서도 광야 속 예수라는 사실이 잘 느껴집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스탠리 스펜서라는 영국 사람이라 더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작품일 것이라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봐왔던 그의 작품들과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다른 작품 그룹 사이 화가의 어떤 체험이 놓여있을까요?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의 불행하달까 기묘하달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결혼생활이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첫 번째 부인과 이혼 후 만난 두 번째 부인은 동성애자였고 화가는 이 사실을 알고 결혼하였으며 심지어 결혼식 때 부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 그 관계가 참 상상이 잘되지 않습니다.

부인과 침실에서의 모습을 그린 두 명의 초상화는 그의 결혼생활이 어땠을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부인과 자신 두 명 모두 나체이지만 이렇게 섹시하지 않은 나체 그림도 참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게다가 관람자 쪽으로 돌린 자신의 등은 마치 추위에 얼어붙은 듯 파리한 색깔로 묘사되어있지요. 남성으로서 침실에서 느꼈을 비참함이 그의 표정에서도 줄줄 흐릅니다. 그의 이런 삶이 광야에서의 예수 시리즈를 이렇게 독창적으로 표현하게 하는데 결정적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이란 그야말로 인생의 반쪽을 만나는 일이니 그 반쪽과의 맞물림이 근본에서 틀어지면 그 삶의 모습이란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인가 봅니다.

예수의 표정은 깊은 슬픔과 함께 가슴 저미는 연민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묘함이 잘 잡혀있습니다. 손바닥 위에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저런 표정으로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걸까요? 전갈입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는 듯 행여 떨어질까 살짝 오므린 손바닥 위에 전갈이 꼬리를 치켜들고 독을 쏘는 것이 아니라 재롱이라도 부리나봅니다. 저리 꼬리를 들면 독을 쏘는 자세라 하는데, 뭐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광야 시리즈 다섯 가지 중 이 작품에서 예수의 표정이 가장 어둡고 연민 가득한 것은 아마도 전갈로 대표되는 인간세상의 어둠과 죄, 유혹 앞에 선 인간에 대한 예수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는 전갈을 우리네처럼 혐오와 증오, 공포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 또한 하느님 아빠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마치 고귀한 것을 대하는 듯한 손의 자세로 알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세상이 우리네처럼 둘로 쫙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 모순되게도, 외부의 선과 악은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면서 자기 내면의 선과 악은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흐물흐물 섞여있는 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악에 대해서는 마치 선과 악의 전문가라도 되는 양 옳은 것 그른 것, 악인 선인을 쉽게 단정 짓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의 모습에서는 그런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갈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 여긴다면 저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없는 연민의 눈길로 바라볼 수는 없지요. 다른 한편, 저 깊은 슬픔을 보면 전갈이 지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독의 힘을 모르는 바도 아님이 분명하지요. 인간 현실이 지닌 양면성과 인간존재의 이중성이 빚는 악의 요소는 분명 세상에 있고,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지만 그것들을 무찌르는 방법은 없습니다. 창과 방패로 무장할수록 그것들은 더 교묘해지고 힘을 기를 뿐입니다. 유일한 길은 저 예수처럼 어떤 평가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교부들에게서 계속 확인되며, 악은 희한하게도 이런 눈길 앞에서는 저 전갈처럼 맥을 못춥니다.

스탠리 스펜서, 광야에서 그리스도 전갈,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