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2월의 말씀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가난한 하느님-아기

수님의 성탄에 관한 복음의 기록들은 두 가지 분위기로 나뉩니다. 우선 한 가지는 천사들의 합창과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보이는 환희와 기쁨과 경건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적은 편이고 그 반대되는 분위기가 더 압도적입니다. 아기 낳을 곳조차 얻지 못한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루저였던 마리아와 요셉의 마굿간 여물통에 아기를 누일 수밖에 없는 가난함,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철없는 동방박사들의 솔직한 고백에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운 헤로데 왕의 광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베들레헴 근처 어린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이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하느님이 인간 아기로 오셨다는 그 가난함입니다. 이 사실의 가장 얕은 차원에라도 진정으로 가닿는다면 우리 인간은 온 존재가 바닥부터 뒤집히는 체험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미생물 광물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그 창조물 중 하나인 인간이 되어오신 그 신비는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도 납득도 불가능한,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펄펄 살아뛰던 3세기, 고대 교부들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이 진리를 설파합니다. “징글벨 징글벨 메리 크리스마스” 이런 성탄 분위기가 너무 싫으면서도 하느님이 이렇게 가난한 인간 아기로 오신 그 신비만 생각하면 늘 바윗덩어리가 묵직하게 제 앞을 가로막곤 했었는데, 약 30년 전 이 말에 접하는 순간, 안개처럼 그 묵직한 돌이 치워지던 그 체험이 기억납니다. 이 말 그대로 하느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인간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가 아기 앞에 아기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하듯,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 그것도 너무도 가난하고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는 그런 아기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을 들을 때면 틀린 말은 아닌데도 왠지 속이 거북했었는데, 이 말은 저를 기쁨 가득하게 해줄뿐더러 하느님이 그러셨듯이 나도 가난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서로 닮고 싶어집니다. 신분이 높은 왕족이 하층민의 여인을 사랑하면 그 여인은 그 사랑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신분을 획득할뿐더러, 점차로 왕족이 지니는 품위를 몸에 지니게 됩니다. 그 왕족 또한 귀족 집안의 여인은 지니지 못한 소박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그 자연스러움을 사랑하다 보면 자신도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렇듯 사랑은 서로 속으로 스며듭니다. 성탄은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우리 인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이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성탄 그림치고 참 독특하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참 잘 보여주고 있어 골라봤습니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굉장히 고독합니다. 예배하는 사람들과 환한 빛, 천사들 가득한 그런 그림이 아닙니다. 화가가 살았던 19세기 농촌의 모습이 생생한 그림인데, 다른 그림에서처럼 소들이 아기 예수를 둘러싸거나 하지 않고 소 우리 속에 갇혀있으며, 마리아는 이제 막 낳은 아기에게 배내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러 나갔는지 성 요셉은 보이지 않고, 오직 동물들과 마리아, 아기 예수뿐인 곳에 적막이 깊게 흐르며, 바닥에는 짚이 깔려있긴 하지만 소똥도 묻어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여인의 복장을 한 마리아는 큰 신비 앞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이 오신 자리는 바로 이런 자리였을 듯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그리고 이런 자리를 알아보는 목동과 동방박사는 오늘에도 있습니다. 아기를 향한 엄마의 옹알이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폭 잠기는 성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