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1월의 말씀

죽음의 승리

을 돌려버리고 싶은 그림이지요. 아름답고 좋은 것들로 가득 찬 이 삶이 영원하리라는 사실에 금이 가고 있는 오늘에, 눈 돌리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림 하나 만났습니다. 16세기 괴짜 화가 피터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입니다. 단 1% 치사율의 코로나로 전세계가 3년 동안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방역체계와 마스크, 격리병동, 가는 곳마다 비치된 손소독제를 지니고도 세계 전체가 마비된 듯 했고, 세계는 코로나 전과 후로 갈라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중세를 휩쓸던 전염병 그중에서도 흑사병의 치사율은 50%가 넘었습니다. 일단 전염이 시작되면 한 도시, 한 마을이 초토화되어버렸고, 죽음의 광폭함 앞에 사람들은 망연자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코로나 초기 어떤 나라들은 환자가 너무 많아 연세 든 어르신들은 병원에 받아주지도 않고, 화장장은 대기하는 사망자들이 많아 언제 장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50% 이상의 치사율에 병원도 제대로 없던 시대였으니, 아마도 밖에 나가면 사방에 시체와 죽어가는 환자가 널려있고 엄마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가득한 지옥을 방불케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모르는 데 대한 두려움은 또 얼마나 컸겠는지요. 그 원인이 하느님의 징벌, 마귀의 저주, 마녀의 짓 혹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약을 탔다거나 등 터무니없는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켜 그 희생의 대가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형대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 그림 속 모습과 제목 그대로 “죽음의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끔찍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지만 아프고 시린 우리 시대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16세기 이 괴짜 화가가 펼쳐보이는 묵시록의 장면 속으로 한 번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전쟁터 같으나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전쟁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지사방이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데,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해골정예부대가 대열도 정연하게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하고 있으며, 곳곳에 고문틀과 사형집행대가 보이고 그렇지 않아도 다 죽어가는 사람의 숨통을 해골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왼쪽 제일 구석에는 영주의 복장을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그가 쌓아둔 금화를 해골이 취하려 하자 죽어가는 와중에도 빼앗기지 않으려 그 해골의 갑옷 자락을 잡으려 합니다. 이런 비극도 모자라 저편에서부터 죽음의 사신의 행렬 같은 검고 기괴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통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해골 정예부대 한복판에 무슨 통로 같은 것이 있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쪽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생명의 통로도 사실 아무 소용이 없고,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2022년 이태원 압사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정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뭐 그림 구석구석 설명하자면 아직도 한참은 더 열거할 수 있지만 이쯤 해두어도 충분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가 우리와 상관없는 저 먼 시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지요. 바로 우리 시대, 우리의 운명에 관한 것임을 누구나 가슴 시리게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 세균, 곰팡이, 바이러스까지도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의 집 지구가 뻥뻥 뚫리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는 이미 바다로 콸콸 방류되고 온갖 오염물로 질식되어가던 바다 생물들이 핵 오염수를 마시고 어떤 모습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올지 공포 영화 속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습니다. 저 그림 속처럼 우리에게도 생명의 통로는 분명 남아있습니다. 구약 성경 속, 홍수 예언 속에서 방주를 만든 것은 노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생명의 통로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 길로 갈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요.

피터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