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월의 말씀


저 열린 닫힘

곡을 서서히 물들이는 아침 햇살이 정겨우면서도 찬란하고, 깊은 우수도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화입니다. 미국 19세기 풍경화의 대가 호머 닷지 마틴의 “후서토닉 계곡”이라는 작품입니다. 매사추세추에 있는 후서토닉 강에 따르는 계곡인데, 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닫힌 느낌과 함께 아늑함이 전달되어옵니다. 왠지 새해 아침에 딱 맞을 듯 한 그림이지요. 어둠에 닫힌 계곡 위로 햇살이 서서히 비춰오는 장면인데 마치 닫힌 계곡이 햇살로 인해 서서히 열리는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도 자연 속에 함께 앉아있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풍경화입니다.

호머 마틴의 풍경화들은 보는 이를 끌어들이고 그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우수 내지는 스산함을 함께 보게 만듭니다. 일종의 철학이 깃든 풍경화라 할까요. 이 그림만 해도 그렇습니다. 깊은 계곡은 노골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산자락 아래 부끄러운 듯 숨어있고, 저 멀리 흐르는 물줄기로 계곡임을 연상케 할 뿐입니다. 험준한 산세 속에 외롭게 오두막집 하나가 오두마니 서 있고 그 옆 소집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양쪽을 겸하는 그런 집이 바람이 크게 불면 부서질 듯 외롭게 서 있습니다.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 위에 소 두 마리가 마차를 끌고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흔적은 있으되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어도 자연은 자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마차와 소가 있는데 사람은 일부러 빼버린 그의 마음이 알 듯 모를 듯 와닿습니다. 그림 전체가 우수를 담뿍 머금고 있음에도 어둡거나 칙칙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자신만으로 닫힌 자연이 닫힌 그대로가 아니라 햇살 앞에 서서히 그 닫힘을 열고 있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아무리 제 잘났다 뻐겨도 우리 인간은 밀림 속, 바닷속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닫혀있되 자신을 내놓지 않는 그런 닫힘이 아니라 신비 속에 머무는 닫힘이요, 때가 이르면 아낌없이 자신을 드러내놓는 닫힘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아이돌 문화의 영향 탓인지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 젖어있다 보니 과거 문화 속의 은근함과 신비 속 숨겨짐의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섹시함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아름다움이요, 성적인 매력은 은근함이 아니라 퍼포먼스로 활짝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상반되게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할 것은 드러내지 못하고 상처로 가득 안고 살아가는 참 묘한 문명의 시대입니다.

우린 모두 지구 자체이든 작은 미생물, 원자, 양자, 전자, 쿼크까지 그 너머 우주 자체도 아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닫힌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우리는 우주에 감탄할 수 있고 작은 전자와 양자의 존재가 한 과학자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자연의 신비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이 열리고 그 존재의 때가 되면 그 닫힘을 살짝 열어 보여주는 신비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되는 닫힘 속 무엇은 과학적 분석이 다 쪼개어 놓은 산같은 지식도 따라오지 못할 열림입니다.

더욱이 인간 존재는 과학적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쥐꼬리도 그것에 비교하면 산보다 클 정도입니다. 참으로 아는 것은 마음을 열고 인생을 열고 관계를 열어 서로를 성장시키고 변모시킵니다. 저 그림을 보노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뿐더러 이름도 처음 듣는 후서토닉 계곡이 마치 내 고향인 듯한 느낌을 받게되는 것도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과 저 계곡이 사람을 품어 안아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존재든 가장 작은 미생물, 분자에든 하느님의 닫힘이 새겨져 있고, 때가 되면 언제든 그것을 열어 그 신비를 보여줄 태세가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