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8월의 말씀

이미 꽃이 된 여인

그림을 만나는 데는 의외로 현실 안의 변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제게는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과 같은 원시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이 화가의 걸어온 걸음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딱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게 된 데는 눈 수술 후 보이는 것이 편치 않게 된 제 눈 덕분이었지요. 제목을 몰랐던 것도 한몫을 했고요.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아르누보에서, 야수파에서 입체파, 미래주의, 추상주의까지 다양한 현대미술,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두주의 또는 모든주의 Everythingism 대표주자라 불립니다. 뭐 한 마디로 다재다능하다는 이야기겠지만 예술은 또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림은 자주 만나고 자세히 보고 마음을 담아 보아야 나의 창을 두드리며 다가옵니다. 다른 안경으로 바꿔 끼고 그림 앞에 앉자 아주 새로운 그림으로 제 마음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저 아름다운 꽃들은 타히티에서처럼 자연 안에 제가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난 야생화들이겠거니 했더니 꽃줄기들 위에 걸쳐진 삽이며 화분이며 모든 것들이 사람이 가꾼 꽃들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자연 속에 꽃과 함께 유유자적하던 것으로 보였던 여인들은 꽃을 가꾸는 일꾼들 아니겠습니까. 잠시 사고정지. 그리고 새롭게 그림 앞에 앉았습니다. 정말이지 처음과는 다른 물결로 저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또 다른 설렘이요, 그림을 만나는 묘미입니다.

화분에 키운 꽃들을 이제 어깨에 이고 가슴에 안고 내다 팔기 위해 어디론가 운반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밭일을 하는 우리 수녀님을 보면 농작물이나 과실 등 농사의 결실들은 일종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느끼는 것을 봅니다. 씨뿌리고 물주고 벌레잡고 행여 싹이 올라오지 않을까 들여다보며 떡잎이 올라오는 순간의 뿌듯함과 씩씩하게 자랄 때의 흐뭇함 행여 병이라도 들면 여러 수단을 강구하는 등 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여정을 함께 합니다. 꽃을 나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병들고 꼬부라졌다 하여 결실물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버리면 우리 농사꾼 수녀님은 몹시 마음 상해합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그런 취급을 당한 듯 한 느낌을 받나봅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도 이런 면이 느껴집니다. 무척 무거워 보이는 화분을 어깨나 가슴에 행여 떨어질세라 소중히 모시고 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인들 가운데서 유독 좀 달라 보이는 이가 있네요. 만발한 꽃들 앞에 우뚝 서서 화분의 꽃을 응시하고 있는 왼쪽 여인은 노동에 푹 빠진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정성으로 키운 꽃을 보내며 마지막 대화라도 나누는 듯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를 키우고 바라보느라 노동의 힘겨움도 잊을 수 있었단다. 어딜 가든 착한 마음 주인을 만나 사랑받고 살거라.” 뭐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 보입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다른 이들의 표정과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노동의 힘겨움에 찌들어 기껏 키운 꽃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작 아름답게 꽃을 피워낸 이들에게 꽃은 무거운 노동일 뿐이요, 자신들의 집이나 자신을 아름답게 해줄 것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이 여인의 표정과 몸은 다른 것을 말해줍니다. 노동의 힘겨움 속에서도 잃지 않은 꽃과 하나된 마음의 아름다움이 꽃을 바라보느라 환히 열린 눈의 창으로 투명하게 비쳐보입니다. 몸도 꼿꼿하지요. 꽃을 키우며 꽃과 하나된 마음은 꽃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이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땅이나 산을 투기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그 산천의 아름다움은 즐기지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이,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 ,“정원 가꾸기”, 1908년, 102.9 ×123.2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