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9월의 말씀

아이들의 세계가 있는 세상

7,8월

무더위와 장마를 지낸 우리에게 좀 신선한 기운을 불어 넣어줄 그런 그림을 찾다 만났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림입니다. 60, 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그리움이 훅 밀려오게 합니다. 도시의 놀이터는 물론이요 시골에 가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옛날 그 시절의 모습이 되어버린 장면입니다. 인공으로 꾸며져 돈을 내고 들어가는 놀이방이 있고 아이들은 자신이 애써 구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재미있고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시설과 장난감들이 수북수북 쌓인 곳이라 들었습니다. 깨진 사금파리, 옥수수 껍질까지 활용해서 소꿉놀이를 하노라면 머리든 마음이든 이리 저리 굴릴 수밖에 없는 일은 아예 없어져 버렸고, 함께 놀 친구도 뭐 그리 그리울 일이 없는 것이지요. 서로 부딪치고 그래서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하고, 인원수가 모자라니 누구 누구를 더 불러오자고 아이들 나름으로 계획도 세우고 하면서 사회성과 리더십이 길러지는 귀찮은 과정이 싹 사라져 아주 편하게 생각없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곳곳에 있습니다.

저 아이들의 모습에서 몇 겹의 그리움이 산그림자처럼 겹치며 뭉개뭉개 안개를 피워올립니다. 아이들 나름의 세계가 있는 시대를 살아온 복됨이라 할까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는 달라야 하지요. 요즘 아이들은 학교 수업 마치기 바쁘게 수영에 피아노에 수학, 영어, 국어 등 배우러 다니느라 자신들의 세상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탈출해버린 아이들만이 자기들의 세상을 구축하는데 그곳이 어떨지는 저로서는 감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계산된 세상, 그곳의 법칙과 논리에 따라 자신을 키워가야만 성공하는 세상의 틀 안에서 자신의 개성 따위는 사치스러운 놀이나 쓰레기 취급을 당합니다.

아이다움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야 어른들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예수님도 복음에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겠지요. 아이가 아이다워지려면 엄마 아빠의 믿음직스런 그늘이 있어야 합니다. 노골적인 천막, 그것도 절대로 찢어질 리 없는 천막으로 아이를 가려줄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느낄 둥 말 둥 그래도 아이는 그것을 마음속 깊이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그늘 아래서 아이는 걱정 없이 뛰어놉니다. 그리고 이 그늘은 보일 듯 말 듯 해도 아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위를 덮고 있지요.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자신의 키에 맞는 그 세상에서 놀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작전도 세우고 실패도 하며 약함과 강함을 골고루 경험하며 아이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친구들과 놀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커서 직장에 다니게 되면 그 세상은 온통 위협과 불신으로 가득 찬 곳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해보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늘 아이의 키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신에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해준 천하막강 천막, 부모의 틀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부모는 또 그만큼 투자했으니 건강한 어른이기를 기대합니다. 키워지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부모나 늘 어떤 보호막이 있기를 기대하는 어른-아이나 불행하기는 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서둘러 앞서가려다 넘어지는 아이, 어떻든 꼬리를 떼어내려 앞 아이의 허리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 그런 상황을 온몸으로 쳐다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역동적 움직임이 선명한 가운데 주변 자연은 대조적으로 아주 고요합니다. 아이들의 온갖 야단법석을 받아안는 땅은 어머니지요.

윈슬러 호머, snap the whip, 1872, 56×91.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