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2월의 말씀


미소
해방하는 생명의 힘

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들, 예를 들면, 하느님, 천사, 성인들을 묘사한 작품 중에는 웃음 지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그림에서도 웃는 모습은 사실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17세기 주디스 레이스터라는 여성화가와 프란스 할스 작품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예술사에서 예외적이라 할 만큼 드문 현상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리 유명한 것도 그 미소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찾아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을 좀 말해보자면 우리 내면에 기쁨이 없기에 웃는 얼굴도 만나기 쉽지 않고,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많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웃음에도 비웃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만,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웃음은 그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그 웃음을 만나는 이도 어떤 속박으로부터 풀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간존재의 모습 때문인지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시작하는 첫 소식이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천사의 미소 좀 보세요. 처음 이 조각을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답니다. 환한 웃음을 만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미소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환해지고 에너지가 밝아지고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천사는 자신이 품고 와, 전달할 소식이 어떤 것인지 이미 그 미소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가브리엘천사, 마리아에게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오심을 알려주는 이입니다. 즉 인류에게 기쁨 그 자체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니 어찌 그런 이의 입에서 기쁨의 미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리는 사람, 구원을 선포하는 이는 이 천사처럼 자신이 먼저 기쁨을 지녀야 그 소식이 진짜임을 사람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전하는 이를 먼저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 기쁨은 고난이나 환난, 모욕 앞에서도 사라지는 법이 없어, 십자가조차 기꺼이 지게 하는 것이지요. 이 미소에는 생명넘치는 젊음, 맑은 기쁨,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전달되는 전염력이 보는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이런 미소는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자신을 넘어 타인까지 해방시키지요.

이 천사는 이미 마리아의 입에서 나올 “피앗”을 감지하는 듯, 심지어 미소에 장난기마저 피어납니다. 마리아가 겪을 당혹감, 그리고 그 당혹감에 지지않을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당참을 미리 감지하며 세상을 가득 채울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드물게 보는 기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지지요. 그것은 바로 기쁜 소식 자체인 하느님이 우리 인간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생명을 빚은 생명의 주인이 바로 그 생명이 된다는 말이 막히고 기가 막히는 소식 앞에 천사도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로 그 현장을 13세기 한 조각가가 전해주었고, 13세기를 넘어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각은 프랑스 랭스 성당에 있는 조각으로 “랭스의 미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조각입니다.

아름다움의 힘, 예술의 힘과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쁨도 누리게 해주네요. 그런 면에서 현대 종교는 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할 힘을 혹시나 상실한 것은 아닌지, 그 밑바닥에는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은 그 본성상 자신 안에만 머물지 못하고 밖을 향해 나가는 법이니까요.

프랑스 랭스 주교좌 성당 입구 가브리엘 천사 조상, 요세프스 마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