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7월의 말씀

여러 얼굴 여러 마음 그리고 …

그림을 보는 순간, 여러 버전의 메두사 그림이 떠올랐고, 그리스 신화 안에서 가장 여러 가지 설이 많아 그 유래가 확실하지 않은 것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뒤엉킨 뱀으로 이루어진 여인입니다. 사실 심장 약한 사람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질 법한 그런 모습이지만, 이렇게 저주 받기 전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해 그녀를 본 사람은 돌로 변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뭐 그리 끔찍한 것에 연결시키느냐는 분도 있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 인생에 있어 가끔은 괴물스런 존재가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이코패스라든가 심각한 인격장애를 지닌 이들이 자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을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낫기가 쉽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정신과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 사실 가장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분열되어 있어도 분열된 지도 모른 채 괴물로 살아가고 있는 슬픈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분열된 인간성의 신호로 혹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의 응시라는 양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양면성은 그 자체로는 건강한 인간성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지요. 기쁘다 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은 인간 개인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 생겼지만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슬픔이나 분노가 있을 수 있고, 나는 기쁘지만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지인은 힘겨운 상황일 때 어른이라면 그 기쁨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기쁘다 해서 그것을 온통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거두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얻는 성숙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만약 한 얼굴밖에 없다면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 앞에 기뻐 웃고 있는 그야말로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분열이 일상이 되고 거의 일반화된 현대 세계에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나타납니다. 에곤 쉴레가 자신의 모습을 백 점이 넘게 그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에는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중 자화상에서 분노 가득한 아래 쪽 얼굴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표정 속에도 슬픔이 엿보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의 그림의 대표적 성격인 가늘고 구불거리는 선 자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 아니면 적어도 편하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그림을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피하여 혼자 사는 길을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다행히도 수도승 전통은 인간성의 이런 면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많이 축적해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해서 어쩌면 뭐 그렇게 해서 될 일인가라고 웃을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냥 바라보는 것,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신 안의 이중성 내지는 그보다 더 복잡한 분열 상황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또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하더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해보겠다 덤비면 덤빌수록 상황은 더 꼬여간다는 것을 경험해본 이들은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문제는 늘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수도승 전통은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는 거의 공식화된 말로 표현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우리 자신의 알아차림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열 상황에 직면해서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참 단순하고 단순하지요.

에곤 쉴레 이중 자화상 1915년, 584×522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