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10월의 말씀

Between
Heaven & Earth – 하늘과 땅 사이

늘과 땅 사이 그러니까 제목이 하늘과 땅 사이라는데, 뭐 제목에 이의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얼핏 본 그림과 제목 사이 무슨 연관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최후만찬 장면인데,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좀 아득했습니다. 실제 그림이 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인터넷에서 찾아내어 확대를 해본 순간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빵을 쪼개고 계시고, 아마도 사랑받는 제자 성 요한일 듯한 인물은 예수님 품에 폭 안긴 채로 그 쪼개진 빵 속으로 들어가버릴 듯 맹렬한 자세입니다. 머리카락은 아래로 마구 쏠리고 있어도 전혀 괘념치 않는 걸 보면 주위 상황은 까맣게 잊은 채 황홀경 속인가 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 참 가관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성 요한과는 예수님의 바로 반대편에 앉은 제자는 못볼 것이라도 본 듯 민망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예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제자가 배신자 유다가 아닐런지요. 그리고 그 바로 옆 아마도 베드로일 듯한 이는 눈을 흡뜨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이 얌체같은 놈, 너만 예수님 사랑 독차지 하려는게지?”라고 외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눈치채셨나요? 최후의 만찬 장면과는 어딘지 다른 장면이 겹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의 어머니까지 대동하고 나서 자신들을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왼쪽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는 그 장면 말입니다. 그런데 또 그것만도 아닙니다. 복음에도 없는 장면을 화가 스탠리 스펜서는 첨가합니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장면을 말입니다.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게 해달라던 요한이 예수님마저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직 쪼개진 빵만을 향해 거의 그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양새지요.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인간적 욕망이나 성취는 아주 뒷전이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주 멋드러진 복음의 비틀림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가깝다는 그 사실에만 눈이 거의 뒤집힐 아니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인간 사는 공동체 어디서든 이 현상은 삶 전체를 지배할 듯 표면을 색칠합니다. 최후 만찬의 순간 배신자 유다는 열혈당원으로서의 자신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예수를 아예 팔아넘길 작정을 하고, 베드로는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 큰소리치고 있었지요. 성 요한인들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을 체험하고 온넋이 나가 버립니다. 꿈도 희망도 야망도 욕망도 모두 무너진 마당, 그 마당에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자신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체험했습니다. 온통 통짜로 비워져버린 그들 속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들어가실 수가 있었던 게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비워진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내시고자 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체험한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죽음 따위 무서워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과 생명 자체이신 분을 선포합니다. 자신들의 꿈과 야망이 그 죽음의 마당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 다른 야망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지요.

화가는 이런 모습을 최후 만찬 속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성 요한에게서 봅니다. 나머지 다른 11명의 제자들의 눈은 오로지 요한만을 향해 있지 예수님도 쪼개진 빵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는 슬픈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참생명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를 알아듣습니다. Between Hevean & Earth 딱 맞는 제목이죠.

Stanly Spencer, Between heaven & Ea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