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1월의 말씀

 

두려움 너머

11

월, 전례력으로는 2018년 나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날수 셀 줄 아는 슬기로움”을 얻고자 했던 시편 예언자의 갈망이 예사롭지 않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얼굴들, 감사의 인사를 미처 다 하지 못한 일들, 밍밍하거나 알알하여 미적거리다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둔 부끄러움들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놀라운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증오와 불신, 긴장의 빗장이 풀리고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렸으니 더 큰 자유와 평화를 향하여 멈춤없이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계없는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폭력과 악의 사슬은 역시 한계없는 용서, 순도 높은 비폭력과 사랑으로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아틀라스 수도원의 일곱 형제들”도 그 진실의 증인입니다. 그들은 1996년 5월, “이슬람 무장 집단”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베르나르도 올리베라,「하느님의 일곱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살아있는 희망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고 상처받고 갈라지고 흩어지는 이 세상에 그들은 무슨 말을 전하고 있을까요? 폭력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무의미한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영광스러운 수난”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티앙 원장의 영적 유언과 크리스토프 신부의 일기에서 해석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의 생명은 하느님과 이 나라에 바쳐졌음을/모든 생명의 유일한 주인께서 이 폭력적 출발을 외면하지 않으셨음을/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나의 가족이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 그때가 오면/하느님의 용서와 나의 형제들의 용서에 연대하며/나를 죽일 그 사람을 온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영적 명료함의 한 순간을 갖고 싶습니다.”(크리스티앙 원장의 영적 유언). “당신께 종이 될 은총과/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은총을/이 날 이곳에서/청하오니/평화를 위한 몸값으로/생명을 위한 몸값으로/예수님 나를 끌어당기소서/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의/기쁨 안으로”(크리스토프 신부의 일기).

는 12월 8일, “하느님의 일곱 사람들”인 우리 형제들이 시복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 더구나 그 자체가 “기적이며 기도”인 순교를 기억한다는 것은 일상에 파묻힌 삶의 “유의미”를 빛 안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며 그 갈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바다가 요동치듯 뒤흔들리는 고통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나 질병으로, 헐벗고 배고픈 가난으로, 뜻밖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피터 포르부스, 16c, 브뤼게의 어부 3부작 중 오른쪽 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