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9월의 말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루살렘 성전에서 사흘 뒤에야 아들 예수님을 찾으신 어머니는 놀라며 말씀하십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고 도움이 어디서” 오려는지 목이 탈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허공으로 흩어지고 사랑은 떠나고 낭패와 절망, 고통만이 앞을 가로 막을 때 “하느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모든 일을 먼저 겪으시고, 위로는 물론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하신 성모님이 계십니다. 그분께 배웁시다. 답을 당장 찾으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일어난 일들을 곰곰이 되새기면 주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셨고, “다른 선물”을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크든 작든 한 번쯤은 겪어 본 체험입니다.

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버림받으신 것 같은 이때, “여인이시여”라고 부르며 당신의 어머니마저 내어 놓으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죽음처럼 강한 사랑”을 잃은 자리를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버림받으신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버림받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꿰찔린 영혼의 고통을 안고 성금요일 칠흑의 어둠에서 파스카 새벽까지의 “성토요일”을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당신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널 수 있도록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신” 주님처럼 상실과 부재의 엄청난 무게를 밤새 온종일 그렇게 밀어내셨을까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성토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어둔 새벽의 하늘을 열어젖히고 전혀 새롭고도 놀라운 “주간 첫날”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낙담하고 패배감에 빠진 이들, 두려움에 휩싸여 문을 잠그고 숨은 이들, 사랑을 찾다가 지친 이들, 절망과 의심에 갇힌 이들과 함께 “위층 방”에 계십니다. 자신과 아들을 버리신 바로 그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토닥거리고 먹이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신 기억의 말씀과 사랑의 기억을 나누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성모님께서는 과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현재는 사랑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며, 희망의 내일을 열어 주십니다.

머니 성모님께 다가가 배웁시다. 그분은 위로와 도움만이 아니라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 운명”에 기쁘게 동참케 하십니다. 우리들 안에서 사랑이 되살아날 때까지, 그 사랑이 우리를 온전히 소유할 때까지 “나의 천막 터를 넓히고, 내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칠”수 있도록(이사 54,2) 겸손하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낮아짐, 버림받음, 비천함의 신비에로 초대 하십니다.

상, 사람, 피조물들에서 – 노동자의 등에 피어난 소금꽃, 버려진 쓰레기에서 재활용품을 분리, 수거하는 손, 수정성당 제대 꽃꽂이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은 어느 수사님의 얼굴, 잼공장 가는 길을 가로지르며 우리와 눈을 맞추는 다람쥐 –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오롯이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또 다른 마리아를 만나는 순간은 행복합니다.

 

15c. 쾰른, 월 라프-리츠츠 박물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8월의 말씀

 

어머니

 

머니”라고 부를 때 어느 자식이라도 가슴을 훑으며 올라오는 마음 저미는 그리운 정에 울먹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목마른 이가 마시는 샘물,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손길, 백척의 간두에서 한 발짝 내딛어 뛰어오르게 하는 고결한 침묵의 채찍입니다. “얘야,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2마카 7장 참조).

리 시토회 사부, 꿀 박사라 불리는 교회학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봉쇄 광야에서의 숨은 삶을 선택하였으나 세상의 필요와 교회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외출을 해야 했던 그는 수도원으로 돌아오면 자식이 어머니에게 그러하듯 언제나 먼저 성모님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얘야”라고 부르신 어머니 성모님은 아들을 대하듯 손으로 성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받으셨다는 감미로운 전승이 있습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였던지 성모님은 천사를 데리고 성인에게 자주 발현하셨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면, 수도승의 일과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하면서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성인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대견하게 바라보십니다. 당신 마음에 품어 간직한 기쁨과 생명 충만한 말씀을 투명하게 펼쳐 보이시고, 성인도 겸손한 마음과 눈으로 귀 기울이며 성모님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합니다. 우리도 하루 중 어느 시간이라도 어머니와 마주보며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나”를 보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말씀 안에 머물고 말씀에 응답(Fiat)할 수 있기를…. 성 베르나르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정 수도원 제대 벽면에는 성모님이 서 계시고 품 안에는 아기 예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어머니의 두 손을 발판삼아 서 계십니다. 마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 “아가 예수성심상”이라고나 할까요. 보면 볼수록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꼭 닮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반나절 동안 사과를 만지며 일했다면 나머지 반나절 동안 사과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니 아홉 달 동안 머물렀던 태중에 사랑의 힘과 부드러움이 얼마나 위대한 영향을 미치겠는가?”(성 베르나르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영을 지닌 성모님은 늘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발현이나 환시가 아니라 일상의 한가운데에 오십니다. 우리 손을 잡아 주시면 절망적인 낭패를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연민을 잃어버리거나 잊지 않으며, 비록 여전히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각난 일상을 살 수 밖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영원으로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지상에서의 그 영원은 바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아래”입니다. 그곳까지 우리 혼자서는 결코 갈 수 없으나 성모님과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느님께 받은 선물인 “오늘”은 끝기도 후 성모찬가(Salve Regina)를 부르며 다시 돌려드립니다. 성당불은 모두 꺼지고 성모님 홀로 빛이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십니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귀양살이 끝날 그 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오,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성 베르나르도에게 나타나신 성모님> Filippino Lippi,1482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7월의 말씀

 

사랑하고 일하라

 

“수

도원에서 저녁, 아침, 낮에 바치는 시간경 기도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라고 시작합니다. “주님, 어서 빨리 오시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짧은 기도는 때로는 한숨처럼 때로는 애원과 절규가 되어 작업장에서도 터져 나옵니다.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이 되어”간다고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유기농 잼”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기쁨과 보람도 있지만 낭패와 예상 못한 어려움들을 경험하며 마음마저 부서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의 빚”은 자꾸만 늘어나고 있으니 우리의 모든 일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것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노동이 “길을 잃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 집에 이르는” 순례의 이정표임을 믿습니다.

밀알이 바수어지고 다른 재료들과 섞여, 달구어진 오븐에 구워질 때 쿠키가 되어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줍니다. 녹는 온도, 향이 서로 다른 12여종의 식물성 오일들을 혼합하여 저온에서 녹이고 보온한 후 40일 이상을 숙성시키면 참 좋은 세안용 비누가 됩니다. 완성된 비누는 다시 물에 녹아 거품으로 사라지면서 때를 깨끗이 없애 줍니다. 잼, 쿠키, 비누, 카드, 양초 등 우리 손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은 마치 땅에 묻힌 씨가 밤낮이 가는 가운데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처럼 놀랍고도 신비롭습니다. 은밀하며 조용한 사랑의 혁명! 비누처럼, 양초처럼, 서로 씻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주님 손의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빚진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갚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히즈키야는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이사 38,1-8 참조).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눈물입니다. “비움”의 아름다움인가요. 허나, 눈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몹시 슬퍼했기 때문도 아니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한 때문도 아니며, 자신의 비참을 관상하며 겸손을 드러냈기 때문도 아닌, 다만 깊이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여인(루카 7,36-50 참조)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승, 주님의 제자로 사는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대야”(요한 13,5)와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흘러넘치며 마르지 않는 주님 사랑을 세상 이웃을 향하여 고스란히 옮겨주어야 하는 “물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계명을 살아내는 “사랑의 일”이 수도승이며 제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우리의 지문指紋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6월의 말씀

 

베드로는 울었다

 

“우

리는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 기뻐서, 슬퍼서, 억울하고 분해서, 부끄러워서 …… – 울게 됩니다. 울음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다가 울기도 합니다. 성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지난 날의 자기 잘못을 눈물과 탄식으로 매일 기도 중에 하느님께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보석을 감정하듯 눈물을 감정한다면 어떤 눈물 방울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까요? 무슨 사연들이 있어 눈물을 흘리게 될지라도, 우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고 함께 우시는 우리 주님의 눈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라며 주님을 배신했던 그 밤, 베드로는 “슬피 울며” 주저앉았습니다. 차라리 땅이 입을 벌려 자신을 삼켜 버린다면 치욕에서 벗어날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하느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자비는 이러한 “세상의 슬픔”(2코린 7,10)에 매몰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배신의 말이 베드로의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당신 눈물의 씨를 베드로 마음 땅에 뿌리셨습니다. 그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여, 기억하고 일어나십시오. 그대를 바라보시던 자비의 눈길, 높은 산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어루만져주시던 그 손길을 다시 느끼십시오. 그대의 배신, 실패, 좌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1베드 3,15)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담대히 말해 주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

발보다 빠른 것이 말이라고 하니 베드로 자신도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뒷소리들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저 사람 말이야, 저렇게 보이지만 글쎄 세 번씩이나 우리 주님을 배반한 인물이라는구먼.” 베드로는 평생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멍에를 짊어지고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말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자신의 약점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끊임없는 교회의 기도”(사도 12,5)에 힘입어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이 되어갑니다. 베드로는 분명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결코 밀려나지 않는 하느님 자비의 증인입니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침,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지난 밤의 실패에 붙들려 뒤로 물러나는 베드로를 거듭거듭 당신께로 끌어 당깁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절망하고 실패하여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베드로의 밤”을 기억하면서 베드로와 함께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5월의 말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수

도원에 입회하는 이는 일정 기간의 초기 양성기가 끝나면 수도승 서원을 발함으로써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그리고 “충실한 정주定住와 죽을 때까지 숭고한 순종을 통해서 참된 생활개선에 정진할 의무”(트라피스트 회헌)를 지닙니다. 너무 무거운 율법 조항으로 느껴지시나요? 이 의무의 짐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기도, 노동, 독서의 일상 안에서 자매들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때론 무게가 어깨를 누르기도 합니다. 허나, 놀랍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이며 선물임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옵니다.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정주를 하늘나라로 옮기는 선배들을 통해서도 주어집니다.

지난 1월, ‘천주의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을 지낸 다음 날, 일본 천사원의 카지미르 수녀는 숨겨진 봉쇄에서 단순하며 평범한 80여년의 수도생활을 끝내고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우리 시토회의 수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기적이며 신비일 수 있습니다. 일생을 한 장소에서, 매일 같은 시간표에 따라, 성당과 작업장, 식당 그리고 공부방과 침실이 움직인 영역의 전부입니다. 그녀는 병실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돌봄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있을 때 우리 후배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전해 주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듯 편안한 아기의 미소를 짓고 있는 수녀를 만난 이들은 누구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수녀의 손과 얼굴을 만지면서 감히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정공동체에서 만든 가락지 묵주를 끼고 “나를 구하신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성모님의 손을 잡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있는 수녀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있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전구자가 되었습니다. 시토회에 흐르는 생명의 강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에 모신 이가 하느님의 약속을 품은 이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을” 달려갔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어머니가 되는 것과 늙은 석녀가 어머니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낯선 축복은 인간의 눈에는 어쩌면 수치와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은총의 고통 앞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타인의 고통을 방문합니다. 자기 고통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타인의 거룩한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즐거이 뛰놀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부릅니다.

초록의 생명 충만한 5월, 세상을 떠난 선배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원천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립니다. “수녀들은 통회의 정신과 타오르는 열렬한 갈망으로 자주 기도에 전념할 것이며, 지상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천상 것에 이끌려 온전한 영적 갈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 그리고 지상을 순례하는 모든 이의 생명, 기쁨, 희망이신 동정 마리아를 늘 마음에 모실 것이다.”(트라피스트 회헌).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4월의 말씀

듣고, 보고, 만지고

 

렐루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요한19,41)이 있었습니다. 배반과 죽음이 일어난 바로 그 정원에 “생명나무”가 나타났습니다. 닫혔던 동산이 열렸습니다. 도망치거나 숨거나 무관심한 우리를 생명과 사랑, 평화의 자리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웃도 외면한 채 앞만 보고 바삐 걷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몸을 낮추며 가까이 다가가서, 꿈틀거리며 땅을 뚫고 올라오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희망을 느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지난 일에 대한 두려움은 당신께 맡기고 타인의 눈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바로 그 눈 안에서 “나의 모습”을 새로움과 놀라움으로 발견하여 용서와 평화를 얻으라 하십니다.

통한 표정의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터벅터벅 걸으며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토론도 해보지만 답도 없고 절망의 먼지만 발 앞에 쌓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까이 먼저 다가가시어 함께 걸으십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완고한 돌심장을 말씀께서 친히 어루만지어 말씀을 되새겨주시니 살아있는 심장이 되어 말씀의 불꽃이 타오릅니다. 그들은 곧바로 평화의 도시로 되돌아갔습니다.

느님께서는 고통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나, 함께 고통 받지 않으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Impassibilis est Deus, sed non incompassibilis.”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주님께서는 깊고 짙은 어둠의 바다로 내려가시어, 천 날보다 오랜 기다림과 사무친 그리움의 이름들을 영원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그 이름들은 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가리키는 별이 되어 아름다운 하늘 꽃으로 피었습니다. 4월, 그들을 불러봅니다. “승진님, 현철님, 영인님, 재근님, 그리고 혁규야!”(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님과 혁규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의 기도 안에서 기억하겠습니다. 이미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 그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 공동의 희망, 공동의 진실입니다.

상의 악과 고통, 인간의 희노애락을 듣고 보시는 주님께서는 당신 약속 –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 – 을 기억하시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도움과 위로, 연대와 실천의 손을 내미는 우리의 이웃으로 오십니다. 우리가 그 손을 맞잡으면 “마른 나무”(루카 23,31)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주님 포도나무의 살아있는 가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열매 풍성히 맺을 것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3월의 말씀

 

너 어디 있느냐?

 

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 무엇일 때,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할까요? 그림의 “어떤 여인은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어 그것을 찾고자 온 집안을 쓸고 뒤적이며 찾고” 있습니다. 혹 장롱의 옷 안에 있는지 탈탈 털어 보았고, 의자도 광주리도 엎어져 있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듯 아홉 개의 나머지 동전은 바닥에 드러누운 의자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등불을 켜들고” 몸을 구부려 “샅샅이 뒤지며” 찾다가 드디어 잃어버린 하나의 동전이 바닥의 틈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의 기쁨과 평온은 천사의 기쁨이고 하늘도 그 기쁨의 빛을 감출 수 없어 방안을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짐작하면, 여인은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잃어버렸던 은전 한 닢을 찾았다고 기쁨의 잔칫상을 차렸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다시 찾은 것의 정체를 알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들은 아무런 실리 없음, 현명하지 못함, 비효율성, 궁색한 살림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그나마 가진 것마저 방탕하게 허투루 낭비하는 것에 대해 비웃거나 조롱하거나 질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을 구부린 채 등불을 켜들고 틈새에 끼인 동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인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세상과 사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나서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십니다. 질병, 불안, 슬픔, 분노, 소외, 억울함, 완고함과 비겁함 등의 온갖 어려움의 틈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빛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몸을 굽혀 찾고 계십니다. 절망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기(利己)의 땅에서 이타(利他)의 땅으로 건너가 새롭게 살고파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굳은 결심을 합니다. 물론 “내가 돌아서야 하는 나의 의지적 행동”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회심은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의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애가 5,21).

3월, 수도원 뜨락과 길섶 마다에는 땅 밑에서 추위와 어둠을 이겨낸 씨앗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용기와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맨몸으로 겨울을 지낸 나무들의 가지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어 새순이 움트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우리도 일상의 단순함과 충실성이 행여 모자라거나 지나치지는 않는지 기도의 발걸음과 일하는 손에 더욱 정성을 다하며, 원천의 맑고 깊은 샘물에 몸도 마음도 다시 한 번 비추어 봅니다. “자매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 함께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우선시키지 않으며, 단순하고 숨겨지며 노고에 찬 생활 안에 항구하는 그만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트라피스트회헌).

나의 동전을 찾고자 여인이 밝힌 등불은 한 사람의 죄인을 구원하고자 밝히는 부활초가 되어 우리 앞에 곧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그 빛을 만날 때까지, 그 빛 안에 쉴 때까지, 모든 이와 그 빛을 나눌 때까지는”(프란치스코 교종) 초조한 갈망의 기쁨을 멈추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표지 : 렘브란트 <돌아온 아들> 부분그림

도메니코 페티(1589~1624)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프레스텐 국립미술관, 독일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2월의 말씀

당신의 기억을 향하여

 

“우

리는 하늘도 땅도 주님의 것, 밤도 낮도 주님의 것,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 온 누리와 거기 있는 그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 존재 자체도 분명 주님의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나의 주인께 돌려 드리는 여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모든 것이 내 것임을 주장하고, 더 많은 것이 내 것이기를 바랍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몸을 가두고 사는 우리도 “내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모든 영적 욕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는 성 베네딕도의 권고에서 희망과 길을 얻습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생각과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도 선물입니다.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며 은총임을 깨닫는 그 자리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보다 앞선 것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그 존재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선물에 개방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이 근원적인 선물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인정할 때에만 구원이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신앙의 빛 19항).

빗방울이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며 유지한다면 세상은 비가 내릴 때마다 홍수가 날 것입니다. 빗방울은 땅에 떨어져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땅에 스미어 새싹이 돋게 하고 수액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하고 온갖 것의 생명수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에 보내진 몸, 아버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몸”임을 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 속으로 투신하되 세속적인 것에서는 멀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권력, 명예, 재물을 따르는 것을 거슬러, 다르게, 낯설게, 더욱 차별화된 삶의 형태를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시메온, 그는 결코 시대의 거짓, 우상, 폭력과 거대 자본, 화려한 소비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깊은 차원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기억,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 바로 이런 것들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며 삶의 중심은 무엇인지, 삶에 의미와 방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행동하며, 기다렸습니다. 세상도 아니고, 스스로도 아닌, 오직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겸손을 지녔기에 시메온은 죽기 전에 구원의 빛을 만난 것입니다. 놀랍게도 “계시의 빛이며 영광”인 구원을 부드럽고 여리고 아주 작으며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봅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 무장 해제된 이 아기가 “배척당하는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이사 26,8).

표지 그림 : 렘브란트 <시메온의 예언> 유채, 98×79cm, 1669년,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8년 1월의 말씀

복되어라,

복을 짓는 사람들!

 

“새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좋은 말을 건네며 복을 빌어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쩌면 여전히 아프고, 힘들고, 버겁고, 먹먹하고, 억울하며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새해 아침은 우리 모두에게 전혀 새롭고 설레는 시간이 열리는 문이기를 바랍니다. 웃음과 울음, 가난과 부요, 상실과 연대 그 모든 것에서 희망이 꿈틀거리고 평화가 흐르며 주님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처음, 하느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으로 빚으시어 창조하신 인간에게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며 복을 내리셨습니다. “번성하여라.” 아담에게, 아브라함에게, 이웃에게, 이방인에게도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며 축복하셨습니다. 바라보시면서 좋아하신 그 얼굴은 찾고 돌아가야 할 그리움의 고향처럼 우리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생명의 땅에서 주님의 복을 누리고픈” 시편 예언자도 바로 그 주님 얼굴 뵙기를 간절히 열망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주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러나 늘 새롭게 “땅을 찾아오시어 풍요롭게 하시고 새싹들에게 강복하시며 당신 선하심으로 한해를” 꾸미십니다. 당신 백성인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아파하시며 우리 모두를 해방과 자유, 치유와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 한가운데 오시어 함께 숨쉬며 살고 계십니다.

축복은 “좋은 말”이고 얼굴을 통하여 전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들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마치 주인인양 이렇게 저렇게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보여지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말, 몸짓, 얼굴 표정은 나의 자리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 자리의 질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 믿는 이라면 당연하게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붙드는 심정으로 사랑과 생명, 축복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축복하시는 우리 주님의 두 손과 말씀은 하늘을 품은 지붕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여라.” 제자들은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늘로 오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당신 친밀함을 선물로 나누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복음의 기쁨 273항)입니다.

표지그림 : 시토회 창립자 이콘(프레스코화 2017년)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2월의 말씀

가난의 감각

 

“성

탄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각적 이미지는 전기불로 장식된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빨강 초록 원색의 온갖 장식품들일 것입니다. 기쁘고 흥겹고 연말파티와 모임들, 맛있는 음식이 떠오르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만, 성서 속 성탄, 예수님 탄생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추운겨울, 모닥불, 캄캄한 밤, 여관방조차 찾을 수 없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찾은 마굿간, 짐승들, 가난한 목동들. 이것이 성서의 성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캄캄하고 적막한 시골 어느 구석의 쓸쓸한 밤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가 태어나 마굿간 구유에 뉘어졌고 탄생을 축하하는 이들은 짐승들과 목동들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그림 속 동방박사들은 다른 그림들과 달리 화려한 왕의 복장도 빛나는 선물도 없이 추운 밤에 길을 잃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청승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유다 베들레헴과는 아주 먼 거리에 살았던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다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고 인간이 만든 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거쾨더 신부님의 탁월한 통찰은 별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들을 이끌었던 별은 여전히 그들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별보다는 지도에 머리를 박고 길을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끈 길을 인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들 가능할 리가 없지요. 이 길은 인간의 지도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어떤 감각, 가난의 감각만이 이 별이 가리키는 곳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혹시나 하고 헤로데 왕을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성서전문가들은 유다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유다 베들레헴’일 것이라 알려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헤로데 왕은 자신의 경쟁자가 나타났다 여기고 아기살해 계획을 세웁니다. 아기가 자랐을 때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왕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면 그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뿐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행여나 하고 찾아간 왕은 이런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찾았지만 아직 세속의 왕과 생명의 왕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동들은 다릅니다. 목동들은 남들 다 자고 있는 한밤중에도 양들을 지켜야 하고 들판에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며 들짐승들의 위협에 온몸으로 부딪치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양을 훔치는 사람들로 취급받던 그 시대 가난한 이들 중의 한 부류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무기, 식량 등 온갖 채비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알려주었을 때 어떤 의혹도 망설임도 없이 그들은 당장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아기와 너무도 가까이 있었고 너무도 닮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난의 감각입니다. 하느님의 감각입니다.

가난이 몸안 몸밖에 흘러넘쳤기에 천사들이 알려주었을 때 가난한 아기의 소식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마굿간, 추위, 무관심에도 가난한 아기의 평화로운 잠은 방해받지 않듯이 목동들의 평화의 아기를 향한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들은 완전하고 풍요롭고 휘황한 자리가 아니라 불완전하며 부족하고 삭막한 곳이 하느님의 자리임을 감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텅빈 자리, 가난한 자리, 심지어 황폐한 자리입니다. 화려한 곳, 빛나는 곳에서 어슬렁거린다면 하느님 비슷한 것을 찾을 뿐입니다. 아기 예수의 마굿간 바로 그런 곳이 성탄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