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4월의 말씀

저 열린 문

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분위기도 다르고 고흐 그림 속에서는 가족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먹는 모습인데 반해 리버만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뿐만 아니라 고흐는 식탁 위에 석유등을 밝히고 있고, 리버만은 실내에는 어떤 조명도 없이 입구 문을 활짝 열어 놓아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사실 이 그림은 부활을 주제로 한 그림을 찾다 만난 그림입니다. 환하고 밝은 저 입구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서계실 것 같지 않나요. 불도 없는 어둑한 실내에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참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젊은 부부, 아직 아이도 없는 걸 보면 이제 막 새가족을 이룬 것 같기도 합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아버지의 모습 특히 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농부의 삶, 이제 그 고난과 역경도 그에게는 식탁 위 감자처럼 온전한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반면 뒷 모습만 보이는 젊은 여인의 의자가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실내이니 바닥이 경사질 리는 없을 터인데 의자가 무너질 듯 참 어색하고 이상한 자세입니다. 의자 깊숙이 앉은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기울어진 의자에 반쯤 걸친 불안한 자세입니다. 맞은 편에 앉은 아들은 뭔가 알고 있는 듯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보입니다. 아들 얼굴에 빛이 이상하지요. 빛살이 들어오는 쪽은 오히려 검고 그 반대편 아버지 쪽 얼굴이 환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이런 실수를 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지요. 화가의 의도가 듬뿍 담긴 그림 속 비틀림입니다. 그는 앞에 앉은 아내의 마음을 알고 있고, 결혼 전 사랑했던 그 열정도 어쩌지 못할 현실의 누추함이 점점 무겁게 눌러와 서로의 관계마저 힘들어져가는 그런 상황이 절로 떠오릅니다. 젊음은 젊은 그만큼 열정과 그 열정이 비틀리기 시작할 때의 경직이 서로 지지않고 맞먹지요. 그 경직됨을 풀고 서로의 약함과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자신을 내놓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참사랑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아직 스스로는 어찌 해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온갖 역경을 뚫고 풍요로워진 아버지의 현명함에 내심 도움을 청하고 있나봅니다.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아들의 식사기도를 듣고 있습니다. 가재도구라고는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와 가난한 음식, 두 팔로 식탁에 버티고 있는 그녀의 자세는 젊은 사람 특유의 격정을 꾹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며느리를 야단치거나 비난하기보다 어떤 새로운 힘이 그녀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기를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경건해보이는 현실, 목가적으로 보이는 농촌 속 한 겹만 걷으면 아마도 저런 시리고 아린 현실이 금방 얼굴을 드러낼 것임에 틀림 없지요. 그 시리고 아린 현실 속 저 아버지와 같이 무릎 위에 두 손 모으고 온 존재로 기도하는 누군가가 있는 곳에는 열린 문으로 새로운 빛이 들어옵니다.

캄캄하기에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저 곳이 온갖 조명, 샹들리에로 환하다면 저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누구에게도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실내조명조차 없는 곳, 그래서 오히려 참 빛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후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로 가시겠다고 하셨지요.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 예수님이 오실 바로 저 열린 문입니다.

식사 기도하는 오스트프리슬란트 농부들, 막스 리버만 1847-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