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3월의 말씀

사랑의 배신-그리고 끝?

“아

기는 분명 아긴데 심통이 단단히 난 채 잠이 들었나봅니다. 볼록한 배가 아기 특유의 모양새를 보여주지만 심통 난 얼굴은 어찌 보면 어른의 얼굴 같아보이기도 합니다. 심통 난 아기만으로 화면을 꽉 채운 그림에서 아기만 환하고 주변은 검게 그려 카라바죠 특유의 빛과 어둠이 유독 두드러지는 그림입니다. 아기에게서 눈을 돌려 화면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게 웬일입니까. 힘없이 축 늘어지긴 해도 분명 등에 달린 날개며 옆에 화살이 놓여있는 걸 보면 그 유명한 큐피트인 것이 분명한거죠. 물론 제목 “잠자는 큐피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제목 보지 않고 그림만 본다면 큐피트라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카라바죠가 그 유별난 성격으로 실연이라도 한 후 사랑에 회의를 느껴 그린 그림일까요? 이렇게 귀염성 없는 큐피트는 처음 봅니다. 화가가 의도하는 바가 있어 보이니 한 번 따라 들어가 봅시다. 우선 카라바죠는 삶이 참으로 종횡무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봉꾼이라는 말이 딱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만큼 자신의 약함을 하느님 앞에서 깊이 이해하고 엎드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몇 백년 전 일을 어찌 아느냐고요? 그의 그림들이 이야기해주는 바이지요. ‘나르키소스’, ‘끌려가는 그리스도’, ‘세리 마태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위와 같은 결론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 밑바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역시 그런 통찰의 묘미를 우리에게 맛보게 해주니 맛있는 음식을 보고 먹지 않을 수야 없지요.

우선 제목을 “사랑의 배신-그리고 끝”이라 잡았습니다만, 인간 현실 안에서 사랑이란 말만큼 달콤한 것도, 동시에 살벌한 것도 없지요. 현실 부부에게서 사랑이란 어떤 맛을 낼까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이 갈망이 헛되이 끝나는 실망을 맛봅니다. 그 목마름으로 인간은 헐레벌떡, 허덕지덕 삶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마도 수많은 세월, 인간 보편의 현실이라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라고 노래하였으니, 이 맥락에서 볼 때 참 마땅하고 옳은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랑은 그저 배신으로 끝날 뿐이니 아예 시작도 하지말자 뭐 이런 결론이라도 내야만 마땅할까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말 앞에 깊은 절망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이 사랑에 걸림돌이 되고, 동시에 이웃의 똑같은 모습 앞에 혐오감이 무거운 짐처럼 자신을 억누르는 그런 체험말입니다. 이 절망은 구원으로 이끄는 길일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는 존재 바닥의 체험 그곳으로 자신의 힘이 아닌 전혀 다른 힘을 체험할 때 비로소 이 갈망은 헛되이 메아리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빈자리를 만드는 일, 하느님이 기쁘게 들어오시어 당신 사랑을 옷입게 해줄 빈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이 헛된 사랑 안으로 기꺼이 이사 오시어 같은 주민이 되셨고, 우리는 그 하느님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이 사랑의 끝에 인간의 모든 짐을 함께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프란치스코의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고” 이 말은 바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순시기, 바로 이 사랑이 절정에 달하는 때, 그분의 사랑이 이사 오도록 빈자리 만들기 우리의 기쁨 되는 때입니다.

잠자는 큐피트, 카라바죠, 16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