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9월의 말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느님께서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언하십니다. 구약 성경의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일까요? 이 구절만 따로 떼어 놓으니 선뜻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읽는 짙고 어둡고 무거운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의 시작입니다(이사 52,13-53,12).

여태껏 그런 일은 일어난 바가 없었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사야 예언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의 영광을 보았지만(요한 12,41) 정작 “주님의 종”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하여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리며 피해갔으니 그의 모습은 사람 같지 않게 망가졌다.” 그러나 그가 짊어진 고통과 병고는 우리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고 정녕 무죄하다면 항소를 해야지요.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시니 우리 사는 세상의 법도 공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멸망 당할 세상을 구하시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시어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모두의 죄악과 악행을 그에게 넘기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말인가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르 12,6) 하였건만 주인의 마지막 바람은 한 조각 사라지는 바람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음을 내려놓고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의 놀라운 침묵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한 것일까요? 이사야는 무죄한 이에 대한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판결을 전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다.” 이제 이는 화석이 되었네요. 지금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고, 늙고 병들고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우리는 객관의 거리를 유지하는 무관심으로 책임을 피하거나 또 더러는 “하느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면 … ”하며 그분께 또다시 죄를 뒤집어씌우며 그 가혹한 언덕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의 상처로 내 상처가 나았고, 그의 아픔으로 내 아픔이 위로받았으며 그의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 안에는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온 우주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침묵으로 숨으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지는 그 순간, 인간의 미움과 증오를 사랑으로 갚아 주시고자 하느님께서는 백인 대장의 입을 통하여 선언하십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비록 이방인 한 사람의 고백일지라도 인간의 무지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온 인류의 기도이며 찬양입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하였지요.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만약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 주고 그 고통을 달래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하늘도 땅도 담을 수 없는 당신의 무한하신 마음은 이 작은 영혼만이 전부인 양 차지하셨습니다. 사람이 되시어 땅에 당신 장막을 치신 하느님, 당신의 지상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폭력과 저주와 죄악으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얼굴 없는 그 종은 우리에게 자화상을 드러내어 보여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것은 내 작은 양들의 것입니다. 나는 슬픕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슬픈 이들과 함께 내 아버지의 위로와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마릅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물을 마실 것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자화상은 십자 나무에 걸렸습니다.

온통 어둠뿐이고, 하느님은 찾을 수도 부를 수도 없고 무서움이 밀려올 때면, 홀로 스스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깨어있게 해 달라고 청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합시다. 혼자가 아닙니다. 내 앞에는 나와 똑같이 그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아빠,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자코모 만추(Giacome Manzu) / 바티칸 죽음의 문 일부, 19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