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3년 2월의 말씀

너희에게 강복하리라.

“내

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너희에게 강복하겠다.”(탈출 20,24). 주도권을 갖고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드리는 곳에는 지체하지 않고 우리 곁으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렵지만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 말씀인지요. 하늘에 계신 분께서 땅에 있는 우리에게 오신답니다. 두렵다는 것은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모습과 함께(시편 18,8-9) 시나이 산의 우렛소리와 번개, 짙은 구름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시어 우리를 만나시고 강복하겠다는 곳은 일차적으로 제사의 자리입니다(탈출 20,22-26).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제물을 준비하여 바치며 당신의 자비하신 이름을 기억하는 그 찰나에 제물을 바치는 사람 곁으로 오십니다. 제단에 함께 모인 사람들을 만나시고, 마치 초대에 응하신 듯 함께 음식을 드시고(레위 3,11;민수 28,2), 복을 주십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는(신명 4,28) 우상과는 다르게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대접하는 식사를 하시고 생명을 약속하십니다(창세 18,1-15).

온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 탐욕으로 얻은 것, 강자의 폭력으로 착취한 노획물, 나누지 않고 창고에 쌓아둔 것이면 받지 않으십니다. 단지 받지 않으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시고, 더구나 “억울한 이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있다면 제단을 뒤엎어 버리십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숲 속의 모든 동물, 수천 산들의 짐승이 다 내 것이다. 나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찬양 제물을 바치고 네 서원을 채워라.”(시편 50,7-14 참조).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그분을 초대하기 위하여 상을 차려 마련하는 그 모든 제물은 애초에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단지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마련해 주신 선물이고, 먼저 허락하시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미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오시는 제사의 자리입니다. 주인이시면서도 너무나 겸손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손님처럼, 낯선 분처럼 조용하게 은밀하게 숨으신 듯 오십니다. 피 흘리는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모든 이가 다 함께 같은 것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곡식으로 예물을 마련합니다.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화해의 친교를 더 기뻐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용서와 화해를 위해 달려가는 이보다 앞질러 가시어 당신 온유하신 옷자락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시편 50,15) 하시는 그분께서는 그 어떤 제물보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소중하게 받으십니다. 사제의 목소리가 향이 되어 위로 오릅니다.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

우리와 늘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현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 우리가 마음을 모아 부르는 그분의 이름이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몸을 취하실 정도로 낮아하고 작아지신 분께서는 당신의 본래 자리인 하늘로 떠나시면서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강복하십니다(루카 24,50-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강복하시며 이별하신다. 강복하시며 떠나가시는 그분은 강복 안에 머무신다. 그분의 손은 계속 이 세상 위로 펼쳐져 있다. 그리스도의 강복하는 손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지붕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늘이 그 안에 들어서서 그 안에서 현재가 될 수 있게 세상을 열어 젖히는 개방의 몸짓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강복하시며 당신의 손을 우리 위로 펼쳐 드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기쁨이 지속되는 이유다.”(베네딕도 16세 교황, 「나자렛 예수 2」 ).

James Tissot /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