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2월의 말씀

15.12월소식지

 

인간이라는 그릇

그림에서 누가 보입니까? 사실 조르주 드 투라라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그림 분위기가 개인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를 그린 그림은 일반적으로 평하기를 저절로 고요함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는데, 저로서는 지나치게 멜랑꼬리(?)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예수님을 진짜 아기, 그것도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그린 그림을 찾으려 하니 이 그림밖에 손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 그림을 자꾸 보다보니 원래 지녔던 선입관은 사라지고 실핏줄 가득한 아기의 모습, 그 말랑말랑 연약한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스며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화가의 생애는 우리를 감동시킬 그런 점들은 찾기 어려운 듯 합니다. 자료가 명확하지는 않다 치더라도 어쨌든 평민 출신에서 결혼을 통해 작지만 귀족 칭호도 지니고 상당한 농지도 지녔다합니다. 그리고 농민에 대한 사려깊지 못한 대우로 가족 모두가 농민반란 때 맞아죽었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문주의가 발달하고 인간의식의 새로운 면이 강조되는 바로크 시기에 유별나게 종교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인간의 이해하기 어려운 심연이라 할까요. 이중성이라 할까요. 그 깊은 심연을 엿보는 것 같아 아찔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 인간, 날 것의 인간, 그것도 갓 태어난 아기가 동시에 하느님이시라는 이 깊은 신비 앞에 설 때는 더 아찔하겠지요! 이 사실이 신비로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을 뚫고 다가오는 이는 복됩니다. 저 실핏줄 투명한 아기, 태어나 곧바로 천으로 감싸인 아기 안에서 생명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가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 아기가 하느님이시라면, 인간 모두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우리의 찬미를 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알아보지 못할 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진실이 됩니다. 하느님께 다가가고자 한다면 저 약하디 약한 인간, 쥐면 꺼질 듯, 약한 숨은 훅 불어꺼질 듯, 그렇게 약한 인간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끝없이 악해보이는 인간 안에도 그 하느님이 깃들어 계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밀밭의 가라지는 아직 뽑아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뽑으려다 내가 가라지인 것이 드러날 수도 있지요.

생명의 신비, 사람의 신비, 아기의 신비, 아기예수님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 약함의 신비, 악의 신비, 선의 신비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그릇 안에 만납니다. 인간이라는 그릇 안으로 오시어 인간 조건의 모든 약함을 함께 지닌 하느님! 그 하느님 앞에 선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불행, 악, 비참, 약함 또한 한없는 신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약하디 약한 인간이라는 그릇에 하느님이 담길 때, 동료 인간이 담길 때, 동료 피조물이 담길 때 인간은 참 인간이 됩니다.

 

<타자를 담을 때>

타자가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충만

타자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참 나

자신에게서 미끄러져 나가면

타자가 들어와도 만날 이 없네

우리는 그릇

타자를 담을 때 온전해지는 그릇

자신을 비워 생겨난 곳

타자의 자리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1월의 말씀

 

내어주는 생명

 루환희도骷髏幻戲圖. 이 그림은 10-13세기 송대 이 숭이라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 한자를 먼저 살펴보면 해골고, 해골루, 헛보일환, 놀이희, 그림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골을 가지고 노는 놀이인데, 헛보일 환자가 들어가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겠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황위펑이란 중국인이 방송에서 해설한 것을 다시 ‘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그 속에 나오는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한 학생과 대화체로 풀이하는 그림 해설에서 그는 “어렴풋하고 몽롱하고 모호하지만 알 것 같기도 해요.”라고 학생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접하는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는 참 다릅니다. 저의 식견의 좁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저는 어디서도 죽음을 놀이로 표현하는 그림이나 글을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삶의 자리에 너무도 가까이, 눈 앞에 와있다 할지라도 죽음과 삶을 장자처럼 하나라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죽음, 그 엄연한 현실 앞에 페스트 창궐 후 서양사람들은 죽음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온갖 그림과 글들을 남겼는데, 이 그림과는 다르게 소름이 돋게 할 정도의 무서운 현실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의 독침, 십자가 위의 예수의 처절한 죽음의현실은 죽음을 결코 가벼운 것으로 볼 수는 없게 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과 분리되어, 인간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써만 생명을 얻을 수 있고,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환한 빛으로 터집니다.

이 그림에 대한 작가의 해설을 잠시 소개하면, 그림 위에 반쯤 가린 ‘오리(五里)’라고 적힌 표지는 교외에 세우는 경계석이며, 그림 앞에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이 담긴 상자 같은 것으로 보아 기예를 팔아 생활하는 우리나라로 보자면 남사당패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검은 모자를 쓴 해골과 젖을 먹이는 젊은 엄마는 분위기로 보아 같은 패에 속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 엄마는 통통한 몸과 풍만한 가슴에 튼실한 아기까지 생명이 넘쳐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거의 몸이 부딪치듯이 마치 서로 가까운 사이, 심지어 부부 사이기라도 한 듯 해골이 앉아있습니다. 해골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듯 해골 장남감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호기심에 찬 아이가 그 해골을 향해 손을 뻗치며 기어가고, 그런 아기를 젊은 엄마가 허겁지겁 달려가 잡으려 합니다.

생명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죽음의 그늘, 생명을 향한 움직임과 죽음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 안에 늘 함께 있습니다. 육체적 죽음이야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적 생명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과 은총이 함께 협력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우리의 힘으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찬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서는 안될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어야 생명을 키워갈 수 있고, 낡은 세포가 죽어야 새세포가 생겨나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음이 삶의 법칙임을 깨달을 때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렇게 얻게 된 생명은 하늘 생명에 근거를 둔 새 생명입니다. 죽음도 침범하지 못하는 생명, 이미 지상에서도 하늘 아빠의 생명, 내어주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0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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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마음, 하느님의 불

 

야는 스페인의 유명한 궁정화가였습니다.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야심만만한 인물로 궁정화가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실제로 최고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그런데 40세가 되었을 때 앓은 병으로 그는 소리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 갇히고 맙니다. 소리를 잃게 되자 그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 추악하고 탐욕스럽고 폭력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그에 못지않은 인간의 내면 세계입니다. 그는 ‘귀머거리의 집’이라 이름붙인 집을 사서 그 벽들에 14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을 후대 사람들은 ‘검은 그림’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 그림들을 꼭꼭 숨겨두고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검은 톤에 어둡고 기괴하지만 우리 존재와 세상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단면들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 중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라는 그림은 보는 순간,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버지인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잡아먹힐까 두려워 자식들을 낳는 족족 잡아먹지만, 제우스만은 그 어머니가 몰래 빼돌려 살아남았고,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지옥으로 내쫓습니다. 고야가 보고있는 지옥의 한 장면 같은 끔찍한 현실이 나와는 상관없는 저 멀리 있는 세상의 이야기일까요? 실제로 고야가 살았던 세상은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여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압박에 시달리던 민중이 봉기를 하였고, 그 결과는 이 그림에서 묘사된 대로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민중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돌아온 것은 피의 보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럴 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잘나고 잘살고 번듯한 사람들이 아니라 민중들입니다. 그들의 발 아래에는 이미 사살된 이들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온몸을 굽힌 사람, 공포에 질려 눈에 흰자위만 남은 사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등 모두 두려움으로 온몸을 구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한복판에 유일하게 흰옷을 입은 이가 항복의 표시로 두 팔은 번쩍 쳐들었을지언정 온몸을 똑바로 펴고 자신을 쏘려하는 이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만 두려움 외의 다른 표정이 읽힙니다. 아니 다른 이들에게는 표정이란 것이 없고 온존재가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이 처했을 상황 역시 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문이라는 더 끔찍한 수단까지 동원되어 인간 광기의 끝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밝게 빛나는 저 흰옷이 상징하듯, 그의 마음도 환히 빛나고 있음을 고야는 보지 않았을까요? 어둠을 직시하는 이의 마음에는 신적인 불이 붉게 타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태양을 직시할 수 없듯, 인간의 눈은 어둠을 꿰뚫어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불만이 약한 시력을 뚫고 그 어둠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둠을 넘어 어둠이 결코 이겨본 적 없는 하느님의 불이 자신 안에 타오르고 있는 이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었습니다. 이 불이 세상의 온갖 악의와 추함 가운데서도 빛나는 곳, 그곳에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향불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유일한 것 사랑이 있기에, 악의 온갖 괴롭힘 앞에서도 추해지거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불을 꺼트리지 않을 수 있었던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그분들의 사랑이 씨앗으로 죽어 고통과 암흑의 검은 땅을 뚫고 꽃이 피어나 진리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그 열매는 백 배, 수천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진리와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 깊고 깊은 어둠을 볼 수 있는 이 있다면 그는 이 씨앗의 열매일 것입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9월의 말씀

예수님의 변모, 우리의 변모

거 쾨더 신부님의 ‘거룩한 변모’ 그림입니다. 세 제자의 모습은 이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안듯이 붙잡고 있습니다. 그저 안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홀린 듯 예수님의 얼굴을 향해 온 존재를 쏟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복음의 묘사와는 조금 다른, 신부님 자신의 해석이 섞인 듯합니다. 복음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왜곡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체험에 따라 해석의 폭이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변모 혹은 기적들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하도록 복음사가들이 꾸민 이야기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지닙니다. 고대에는 성인전을 쓸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는 것도 한 증거로 세웁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오상의 비오신부님이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접었습니다. 유명한 성서학자들도 빵의 기적 같은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비오신부님을 보면 기적이 그냥 일상입니다. 그분의 평소의 삶과 기적이 하나가 되어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힘과 영광과 사랑이 지상에 온전히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비오신부님은 환자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병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거의 장난 같이 기적을 행합니다. 그만큼 일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신부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아끼는 딸이 아름다운 장미를 신부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자 순식간에 그 장미가 사라졌고, 나중에 방문했을 때 그 장미가 신부님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라고 하셨고, 이 변모 장면에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요?
이미 천상에 있는 엘리야와 모세가 마치 처음 대하는 아름다움인 듯,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바라본다는 사실도 잊고, 자신도 잊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 둘 안에 가득합니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간 모습대로 온몸이 붉고, 모세는 법을 세운 사람답게 장엄한 회색입니다. 천상에 있는 그들이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빛으로 물듭니다. 왜냐하면 천상 자체이신 분이니까요. 같은 변모 주제를 다른 식으로 그린 것이 있는데 , 그림 아래 공간에 땅에 쓰러진 세 제자를 그렸습니다. 이들은 이 빛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 색채도 검게 다릅니다. 그리고 셋 모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자고 있다기보다는 빛이 감당이 되지 않아 눈을 뜨지 못하는 듯이 보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빛을 사람의 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신 신학자 시메온이라 일컬어지는 분과 그레고리 팔라마스라는 분들이 그러합니다. 이분들은 박해에 가까운 탄압 속에서도 이 빛이 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기적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복음사가들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우리 역시 은밀하게 이 빛, 하느님 나라의 쳐들어오심인 기적들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비오 신부님의 단순함은 예수님을 바로 여기서, 있는 그대로, 때로는 복음서마저 능가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심을 직접 체험하고 자신이 그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도 들어갈 수 있음을, 의인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남을, 예수님의 사랑, 빛, 아름다움과 하나되는 변모에 참여할 수 있음을 지금 믿을 수 있는지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8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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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오르는 빵

“나

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요즘 가장 많이 와닿는 이 말씀처럼 그림을 보는 순간 제 몸에도 불이 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거 쾨더의 ‘부활 아침의 주님’이라는 그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이 장면 바로 전 예수님은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숨어있는 제자들이 함께 모인 곳에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뒤에도 제자들의 마음은 타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의 말에 다른 6명의 제자들도 함께 호수로 나갑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그 방에서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아직 이 말은 마음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해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 무겁게 가라앉아, 그저 생계 걱정이나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 속에는 자신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 이런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매일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귀로 들어와도 마음은 천근 만근 쇠붙이 같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호수로 나가 그물을 던지지만 헛수고만 할 뿐입니다. 밤새 헛수고로 지친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빈손이 아닙니다. 지치고 무기력해진 그들을 먹일 양식을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차가운 음식이 아니라 숯불 위에 따끈하게 구워주십니다. 그 숯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수평선 저쪽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태양빛보다 더 뜨겁고 더 붉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주님이십니다.”하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 불은 그의 얼굴 반쪽과 몸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아직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다른 여섯 제자들의 얼굴도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밤새 헛수고만 한 그들이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그대로 하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아마도 이 때 벌써 그들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분이 주님이심을! 주님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참되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 이 불은 타오릅니다. 자신의 계획, 자신의 능력, 자신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이들은 그 일이 성공하는 한에서만 마음에 생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을 주님의 힘으로 이루는 이들에게 성공과 실패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있는가, 주님의 불이 자신 안에 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일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한다 해도 그것 또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을 것이며, 이 실패가 오히려 그들의 마음 안에 이 불을 지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이 불이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온통 훨훨 태우는 것입니다. 사방이 온통 꽉 막혀버린 세월호 아이들의 부모들, 궁지로 내몰린 노동자들, 정권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 돈밖에 관심이 없는 기업인들, 취업난에 몰려 실망에 빠진 청년들, 하루하루 심해져가는 환경오염과 그것에 눈감는 세상! 이런 세상에 불이 타오르기를! 모세의 불꽃처럼 타올라도 태워 소진시켜버리는 일 없는 이 불길이 타올라 너도 나도 함께 이 불로 물들기를! 자기 테두리, 자기 가족,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이 불길 속에 남을 위하고, 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변모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이 불을 품고 불타는 빵으로 각 사람에게 오십니다. 이 불타는 사랑에 뛰어들어봅시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7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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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입읍시다!

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제게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는 날 어서 대답하소서.

저의 세월 연기 속에 스러져 가고

저의 뼈들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저는 잊어

제 마음 풀처럼 베어져 메말라 가고

탄식소리로

제 뼈가 살가죽에 붙었습니다.

저는 광야의 까마귀와 같아지고

폐허의 부엉이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잠 못 이루어

지붕 위의 외로운 새처럼 되었습니다.

… 당신께서는 일어나 시온을 가엾이 여기시리니 …

(시102,2-8, 13)

지거 쾨더 신부님의 시편102를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여기에 옮긴 이 시편의 앞부분은 곤경에 처한 한 개인의 울부짖음 같습니다만, 그 다음 부분들은 하느님이 시온을 굽어보시리라는 믿음, 희망, 기원들이 끝까지 이어집니다. 수천 년 전 유다의 한 시인의 탄식과 울부짖음인데, 어찌 오늘의 우리 처지와 이리도 닮았는지요! 개인의 곤경이 한 나라의 불운과 조금의 편차도 없이 나란히 이어지는 감동을 이 시편 저자를 통해 느끼며, 우리나라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조차 눈도 깜짝않는 세태 속에서 이 시편 저자의 사심없는 마음이 더 고귀하게 다가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는 꼭 이 그림과 같은 상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성 싶습니다. 폐허 위의 외로운 까마귀 한 마리와 부서진 집 속 광대뼈 앙상한 한 남자의 잠 못 이루는 괴로운 나날과 회색빛 하늘 =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에 떠는 나날들, 이미 내쳐진 이들의 자살을 부르는 회색빛 절망,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애타는 울부짖음, 부정선거의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도 언론조차 꼼짝 않는 답답함, 메르스가 창궐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 없는 상황 – 속에 힘없는 개인은 불행에 내던져진 채, 손을 뻗쳐 도움을 구할 사람 하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아무도 없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고, 지붕 위의 까마귀 역시 곤경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이니 도와줄 여지가 없지요. 내 목숨 내가 챙겨야 할 상황인데 그 마저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그야말로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절규하는 남자의 옷은 아마도 환자복 같기는 합니다만, 그 색이 파란색입니다. 이 칙칙한 그림 속 유일한 푸름입니다. 희망은 저기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희망이라는 메시지 아닐까요?????

우리의 희망은 세상 안의 긍정적 상황이나 좋은 국가 같은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자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자신일 수도 없습니다. 옷의 색깔이 파란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에게 희망을 입혀줍니다. 그 누군가는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한 인간일 수는 결코 없고, 더욱이 오늘날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누가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시편 저자처럼 오직 한 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향해 외치는 이, 절망 속에서도 믿음 잃지 않고 희망을 찾아내는 이, 그가 바로 희망입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6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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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은 1818년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방랑자라는 제목이 선뜻 와닿지 않고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어 그림 앞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선 거친 파도를 연상케 하는 짙은 안개가 압도적으로 와닿습니다. 온통 시야를 가로막는 저 속, 몇 겹의 능선과 계곡이 신비롭게 겹쳐져 사람의 접근을 허락 않는 듯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거친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 나무들은 그 위에 간신히 서있는데, 저너머 안개에 반쯤 가린 산 또한 희미하지만 웅장한 모습이 느껴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의 한복판에 한 인간이 떡 버티고 서있습니다. 자칫 파괴적일 수도 있는 이 웅장한 자연을 한 인간이 관조하거나 명상하는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왼쪽 손은 주머니에 넣은 듯 한데, 보통 사람들이 높은 사람 앞에서나 자연 경관에 압도당할 때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는 듯 어깨를 활짝 펴고 고개를 당당히 세워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표정이 어떨지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는지요? 더욱이 화가가 이 경관의 한 복판 그것도 중심에 인간을 두었다는 사실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이 그림에서 인간은 결코 자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자연을 관장하고 지배하며 심지어 통제하고변화시킬 수도 있는 주체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입니다. 주인이기에 자신이 뜻하는 대로 바꾼다 한들 별 문제가 되지 않지요.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풍조가 현대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하느님마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으로,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부재로 이어져 왔습니다. 바로 그 사고가 떡하니 제 앞에 버티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빛나는 이성의 힘으로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의 발전의 몇 백배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가히 위대한 일입니다. 이렇게 발달된 기술로 뱃속에 잉태된 자신의 생명마저 함부로 죽이고, 수천만 년 생성되어온 강줄기도 함부로 파헤치고, 발전을 위해서는 열대 밀림도 시베리아 숲도 마구 베어버려 지구는 몸살을 앓고, 무기를 팔기 위해서는 일부러 적을 만들고, 발달된 문명을 누리느라 생성된 쓰레기는 처치곤란에, 오염으로 뜨거워진 지구의 기후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법을 기술도 문명도 과학도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발전소, 핵쓰레기, 전세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핵폭탄은 또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가장 발달된 문명 속에 살아가는 현대만큼 지구의 멸망을 걱정해야 할 가장 큰 위험을 안고 살아간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의 삶의 종말인 죽음조차 과거 사람들에 비해 제대로 준비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은 해체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심각한 불신으로 정신병은 이제 감기를 앓는 일만큼이나 흔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고귀함이 자연 위에 우뚝 서서 마음대로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일까요? 생명의 소중함이 과학의 발전만으로 지켜질 수 있을까요? 인간의 참행복이 물질이 있다 하여 얻어지는가요? 참된 자유가 우주를 여행한다 하여 누릴 수 있는 것일까? 하느님 없는 이성,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발전의 끝이 이제는 보이지 않나요? 이제 우리는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을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역설적인 의미에서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제목은 잘 맞는 듯 합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5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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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부활의 빛

숭아꽃이 만발한 이 그림은 고난과 역경의 사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입니다. 봄의 색채와 힘찬 생장의 기운이 느껴지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고 싶은 봄의 기운 속으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터져나오는 생명의 힘, 기쁨, 환한 색채를 드러낸 그의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그의 독특한 삶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로 삶을 살고 싶어 신학교에 갑니다만, 라틴어 등 고전어에 막혀 1년을 고투한 후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 그를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선교학교로 보냈고, 그는 보리나주라는 탄광촌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19세기의 탄광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매일 직면해야 하는 지하갱도의 폭발위험, 지하의 숨막힌 공기 속의 살인적인 노동에 비해 턱없이 적어 입에 풀칠도 겨우 할 정도의 임금 등으로 인해 탄광촌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습니다. 그는 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돈과 옷가지들을 전부 나누어주고, 자신은 포장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적은 양의 빵과 몇 가지 음식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며, 거주지조차 빌렸던 세집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짓눌려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회개를 강요하거나 복음을 의무지우는 위압적인 선교사가 아니라, 성서 속의 고난이 서린 인물을 광부들 안에서 보고 그들에게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도록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독특한 젊은이를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도 티푸스가 퍼지자 의사도 포기한 중환자를 고흐가 돌보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는 그의 헌신을 보고는 그에게 흔들림 없는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파업이 일어나자 턱없는 임금으로 비참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던 광부들의 편에 서자, 광산 관리자들은 물론 선교위원회 지도층과 돌이킬 수 없는 긴장관계가 생겨나고, 결국 부르조아적인 감성을 지닌 그들로부터 선교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 상황이 고흐에게 얼마만한 고통을 주었는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로 하여금 삶의 또 다른 결정을 하게 만드는데, 늦은 나이에 그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보리나주에서 확신하고 체험했던 예수와 복음의 철저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이 확신을 표현하게 됩니다. 초기에 그가 그린 그림은 감자먹는 사람들, 직조공 등 당시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림의 색채는 그의 경험과 닮은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검은 색조였습니다. 그런 그가 프랑스로 가서 인상주의 그림과 만나고 그들의 색채에 경이를 느낍니다. 그는 인상주의의 가벼움은 따르지 않지만 색채의 신비와 대면하면서 그의 삶도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사하며, 그곳의 밝고 상쾌한 날씨, 소박한 시골 사람들에 푹 빠져, 검은 늪에서 빠져나오듯 빛과 생명, 색채, 생기로 가득 찬 그림들을 그려냅니다. 그의 모진 인생 한복판 선사받은 부활의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밝음은 어둠과의 대면, 삶의 바닥에 내팽개쳐진 고립감, 세상의 냉혹함과의 힘겨운 투쟁을 뚫고 솟아오른 빛입니다. 아를에서 그는 고갱과 시도했던 화가공동체 삶이 실패로 끝나고,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정신병원생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만, 그가 체험한 이 생명, 부활은 결코 단절되지 않고 죽음 너머 그가 그토록 바라던 영원 안에서의 진정한 부활을 만발한 복숭아꽃 그림에서 감지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들은 오직 이 죽음과 부활의 빛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4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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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십자가 Ⅱ

반적으로 샤갈을 떠올릴 때 밝고 명랑한 색채와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년 시절은 깊은 우울함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가 성장했던 게토, 유다인 분리지역이라는 곳이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곳입니다. 역사 속 수없는 환란과 핍박, 분리되어 살아야했던 게토마저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세기에 세기를 걸친 고난은 우울이 그들의 게토 분위기를 형성하는 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우울함 위에 또 한 가지 더 결정적인 특징은 동유럽 게토의 경건한 신비주의 하시디즘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 하시디즘이 18세기 이 동유럽에서 바알 셈 토브라는 전설적 인물에 의해 생겨났고, 샤갈의 고향인 비텝스크는 러시아지만 지형적으로 동유럽에 가까웠기에, 그가 살았던 게토 역시 신비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생선가게에서 차가운 생선을 다듬고 무거운 짐을 져야했던 그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가는 길에 회당에 들러 홀로 기도하곤 했다합니다. 그의 그림 중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시디즘으로 인해 유다인 역사에서 드물게 열광적으로 타올랐던 희망, 구원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이 사그라드는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체험했던 나치의 잔인성, 아우슈비츠의 전율할 현실 속에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동족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그가 예수라는 인물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그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빛은 오직 십자가만을 비추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는 이미 빛입니다. 끝까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남았지만 그는 이 십자가 위 빛을 체험한 듯 합니다. 어떤 고난, 악랄함의 희생도 십자가 위에서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오른쪽 구석 펼쳐진 토라에서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이 사다리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구약의 특히 이사야서의 수난받는 종이 이 십자가 위 예수라는 인물이요, 유다백성이 그리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이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온갖 환난 속에 외롭게 선 십자가, 이미 오신 하느님, 엠마누엘, 수난받는 종, 메시아를 향해 사다리가 놓여있습니다. 십자가로 오르는 사람만이 이 사람, 하느님을 만납니다. 삶의 모든 고난은 이 통찰 속에서 하나의 줄기로 모여 ✝,죽음, 부활의 큰 바다로 흘러듭니다.

 

✝위는 이미 빛이다 라고 외치면

뭇시선의 돌팔매 맞게 될까

하지만

참빛이 있는 모든 곳에는

모든 곳에는

어떤 꼴이든

어떤 자취든

어떤 향기든

✝의 흔적이 있지않나요

✝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아래, 위에 떨어도 보고

✝로부터 도망쳐보기도 하고

✝의 구원의 빛으로 해방, 자유를 맛보기도 하고

✝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 위는 늘 환한 빛임을

환히 보게 됩니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몸 속을 비추니까요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3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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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여기!

“나

 

에게 그리스도는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간적 그리스도이다.” 이 그림을 그린 샤갈의 말입니다. “하얀 십자가형”이라는 이 그림은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좋아한다고 하여 새롭게 주목을 받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샤갈은 유다인이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인 그가 어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다인 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사건 속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십자가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설명 없이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첫 인상은 ‘십자가를 하얀 색으로 이렇게 고귀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갈을 조금씩 배우면서 이 그림의 배경을 알고서는 첫 인상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첫 인상이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그림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바뀌어 갔습니다.

우선 십자가를 감싸고 있는 그림들을 살펴봅시다. 오른쪽 위에는 회당이 불에 훨훨 타고 있고, 그 아래는 한 남자가 마지막 남은 재산보따리를 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한 어머니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숨기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옆에는 한 남자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애원하듯 십자가 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있는데 거의 넋을 잃은 것 같은 한 남자가 기도용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망연자실 서있습니다. 좁은 배 위에 가득 탄 유다인들이 다른 배를 향해 살려달라는 필사적인 몸짓을 하고 있고, 그 위로는 불붙기 시작한 마을을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맹렬한 기세로 모든 것을 다 부수겠다는 듯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선조 유다인들 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듯 떠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은 찾아볼 길 없습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묵시록적인 비극의 한복판에 그리스도께서 달린 십자가가 고요히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 기도용 숄 탈리트를 허리에 두르고 있으며, 발치에는 기도할 때 밝히는 ‘메노라’라는 촛대에 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파국의 상황에서도 기도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이 비극인 것은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동물보다 못한 참혹한 일을 저질러,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어도 도와줄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사람들이 그 안타까운 상황 속으로 함께 몸을 던져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몸부림쳐도 헤어날 길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 세월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비극적인 상황 한복판,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직도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어, 생각만 해도 가슴아파 눈물이 나옵니다. 이 비극의 한복판 저 메노라처럼 세상 구석구석 기도의 불은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평화와 정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생겨났습니다. 저 메노라가 사건의 비극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듯 우리의 기도 역시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불은 타오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태워올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극 속에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표정을 한 번 보십시오. 샤갈의 말대로 슬픔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위에 미안함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모든 비극을 함께 지고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이천 년이 지났으니 이제 내려오실 법도 하건만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샤갈처럼 비극의 한복판에서 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물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