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3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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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여기!

“나

 

에게 그리스도는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간적 그리스도이다.” 이 그림을 그린 샤갈의 말입니다. “하얀 십자가형”이라는 이 그림은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좋아한다고 하여 새롭게 주목을 받은 그림이기도 합니다. 샤갈은 유다인이었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인 그가 어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다인 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사건 속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십자가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설명 없이 이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첫 인상은 ‘십자가를 하얀 색으로 이렇게 고귀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갈을 조금씩 배우면서 이 그림의 배경을 알고서는 첫 인상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첫 인상이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그림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바뀌어 갔습니다.

우선 십자가를 감싸고 있는 그림들을 살펴봅시다. 오른쪽 위에는 회당이 불에 훨훨 타고 있고, 그 아래는 한 남자가 마지막 남은 재산보따리를 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한 어머니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숨기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옆에는 한 남자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애원하듯 십자가 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있는데 거의 넋을 잃은 것 같은 한 남자가 기도용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망연자실 서있습니다. 좁은 배 위에 가득 탄 유다인들이 다른 배를 향해 살려달라는 필사적인 몸짓을 하고 있고, 그 위로는 불붙기 시작한 마을을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맹렬한 기세로 모든 것을 다 부수겠다는 듯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선조 유다인들 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듯 떠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은 찾아볼 길 없습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묵시록적인 비극의 한복판에 그리스도께서 달린 십자가가 고요히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 기도용 숄 탈리트를 허리에 두르고 있으며, 발치에는 기도할 때 밝히는 ‘메노라’라는 촛대에 불이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파국의 상황에서도 기도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이 비극인 것은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동물보다 못한 참혹한 일을 저질러,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어도 도와줄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사람들이 그 안타까운 상황 속으로 함께 몸을 던져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몸부림쳐도 헤어날 길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 세월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비극적인 상황 한복판,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을 잡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직도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어, 생각만 해도 가슴아파 눈물이 나옵니다. 이 비극의 한복판 저 메노라처럼 세상 구석구석 기도의 불은 환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마음에 평화와 정의, 생명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생겨났습니다. 저 메노라가 사건의 비극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듯 우리의 기도 역시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불은 타오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태워올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극 속에 도대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표정을 한 번 보십시오. 샤갈의 말대로 슬픔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 위에 미안함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모든 비극을 함께 지고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이천 년이 지났으니 이제 내려오실 법도 하건만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샤갈처럼 비극의 한복판에서 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물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