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9월의 말씀

예수님의 변모, 우리의 변모

거 쾨더 신부님의 ‘거룩한 변모’ 그림입니다. 세 제자의 모습은 이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안듯이 붙잡고 있습니다. 그저 안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홀린 듯 예수님의 얼굴을 향해 온 존재를 쏟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복음의 묘사와는 조금 다른, 신부님 자신의 해석이 섞인 듯합니다. 복음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왜곡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체험에 따라 해석의 폭이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변모 혹은 기적들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하도록 복음사가들이 꾸민 이야기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지닙니다. 고대에는 성인전을 쓸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는 것도 한 증거로 세웁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오상의 비오신부님이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접었습니다. 유명한 성서학자들도 빵의 기적 같은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비오신부님을 보면 기적이 그냥 일상입니다. 그분의 평소의 삶과 기적이 하나가 되어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힘과 영광과 사랑이 지상에 온전히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비오신부님은 환자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병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거의 장난 같이 기적을 행합니다. 그만큼 일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신부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아끼는 딸이 아름다운 장미를 신부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자 순식간에 그 장미가 사라졌고, 나중에 방문했을 때 그 장미가 신부님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라고 하셨고, 이 변모 장면에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요?
이미 천상에 있는 엘리야와 모세가 마치 처음 대하는 아름다움인 듯,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바라본다는 사실도 잊고, 자신도 잊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 둘 안에 가득합니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간 모습대로 온몸이 붉고, 모세는 법을 세운 사람답게 장엄한 회색입니다. 천상에 있는 그들이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빛으로 물듭니다. 왜냐하면 천상 자체이신 분이니까요. 같은 변모 주제를 다른 식으로 그린 것이 있는데 , 그림 아래 공간에 땅에 쓰러진 세 제자를 그렸습니다. 이들은 이 빛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 색채도 검게 다릅니다. 그리고 셋 모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자고 있다기보다는 빛이 감당이 되지 않아 눈을 뜨지 못하는 듯이 보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빛을 사람의 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신 신학자 시메온이라 일컬어지는 분과 그레고리 팔라마스라는 분들이 그러합니다. 이분들은 박해에 가까운 탄압 속에서도 이 빛이 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기적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복음사가들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우리 역시 은밀하게 이 빛, 하느님 나라의 쳐들어오심인 기적들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비오 신부님의 단순함은 예수님을 바로 여기서, 있는 그대로, 때로는 복음서마저 능가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심을 직접 체험하고 자신이 그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도 들어갈 수 있음을, 의인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남을, 예수님의 사랑, 빛, 아름다움과 하나되는 변모에 참여할 수 있음을 지금 믿을 수 있는지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