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1월의 말씀

 

내어주는 생명

 루환희도骷髏幻戲圖. 이 그림은 10-13세기 송대 이 숭이라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 한자를 먼저 살펴보면 해골고, 해골루, 헛보일환, 놀이희, 그림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골을 가지고 노는 놀이인데, 헛보일 환자가 들어가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겠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황위펑이란 중국인이 방송에서 해설한 것을 다시 ‘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라는 책으로 엮었는데, 그 속에 나오는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한 학생과 대화체로 풀이하는 그림 해설에서 그는 “어렴풋하고 몽롱하고 모호하지만 알 것 같기도 해요.”라고 학생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접하는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는 참 다릅니다. 저의 식견의 좁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저는 어디서도 죽음을 놀이로 표현하는 그림이나 글을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삶의 자리에 너무도 가까이, 눈 앞에 와있다 할지라도 죽음과 삶을 장자처럼 하나라고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죽음, 그 엄연한 현실 앞에 페스트 창궐 후 서양사람들은 죽음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온갖 그림과 글들을 남겼는데, 이 그림과는 다르게 소름이 돋게 할 정도의 무서운 현실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의 독침, 십자가 위의 예수의 처절한 죽음의현실은 죽음을 결코 가벼운 것으로 볼 수는 없게 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과 분리되어, 인간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써만 생명을 얻을 수 있고,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환한 빛으로 터집니다.

이 그림에 대한 작가의 해설을 잠시 소개하면, 그림 위에 반쯤 가린 ‘오리(五里)’라고 적힌 표지는 교외에 세우는 경계석이며, 그림 앞에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이 담긴 상자 같은 것으로 보아 기예를 팔아 생활하는 우리나라로 보자면 남사당패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검은 모자를 쓴 해골과 젖을 먹이는 젊은 엄마는 분위기로 보아 같은 패에 속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 엄마는 통통한 몸과 풍만한 가슴에 튼실한 아기까지 생명이 넘쳐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거의 몸이 부딪치듯이 마치 서로 가까운 사이, 심지어 부부 사이기라도 한 듯 해골이 앉아있습니다. 해골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듯 해골 장남감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호기심에 찬 아이가 그 해골을 향해 손을 뻗치며 기어가고, 그런 아기를 젊은 엄마가 허겁지겁 달려가 잡으려 합니다.

생명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죽음의 그늘, 생명을 향한 움직임과 죽음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 안에 늘 함께 있습니다. 육체적 죽음이야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적 생명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과 은총이 함께 협력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우리의 힘으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찬 사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서는 안될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어야 생명을 키워갈 수 있고, 낡은 세포가 죽어야 새세포가 생겨나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음이 삶의 법칙임을 깨달을 때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렇게 얻게 된 생명은 하늘 생명에 근거를 둔 새 생명입니다. 죽음도 침범하지 못하는 생명, 이미 지상에서도 하늘 아빠의 생명, 내어주는 생명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