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0월의 말씀

15.10_img

 

 

순교자들의 마음, 하느님의 불

 

야는 스페인의 유명한 궁정화가였습니다.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야심만만한 인물로 궁정화가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실제로 최고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그런데 40세가 되었을 때 앓은 병으로 그는 소리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 갇히고 맙니다. 소리를 잃게 되자 그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 추악하고 탐욕스럽고 폭력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그에 못지않은 인간의 내면 세계입니다. 그는 ‘귀머거리의 집’이라 이름붙인 집을 사서 그 벽들에 14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을 후대 사람들은 ‘검은 그림’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 그림들을 꼭꼭 숨겨두고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검은 톤에 어둡고 기괴하지만 우리 존재와 세상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단면들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 중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라는 그림은 보는 순간,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버지인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잡아먹힐까 두려워 자식들을 낳는 족족 잡아먹지만, 제우스만은 그 어머니가 몰래 빼돌려 살아남았고,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지옥으로 내쫓습니다. 고야가 보고있는 지옥의 한 장면 같은 끔찍한 현실이 나와는 상관없는 저 멀리 있는 세상의 이야기일까요? 실제로 고야가 살았던 세상은 프랑스 군대가 침입하여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압박에 시달리던 민중이 봉기를 하였고, 그 결과는 이 그림에서 묘사된 대로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민중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돌아온 것은 피의 보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이럴 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잘나고 잘살고 번듯한 사람들이 아니라 민중들입니다. 그들의 발 아래에는 이미 사살된 이들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온몸을 굽힌 사람, 공포에 질려 눈에 흰자위만 남은 사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등 모두 두려움으로 온몸을 구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한복판에 유일하게 흰옷을 입은 이가 항복의 표시로 두 팔은 번쩍 쳐들었을지언정 온몸을 똑바로 펴고 자신을 쏘려하는 이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만 두려움 외의 다른 표정이 읽힙니다. 아니 다른 이들에게는 표정이란 것이 없고 온존재가 두려움과 공포로 얼어붙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이 처했을 상황 역시 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문이라는 더 끔찍한 수단까지 동원되어 인간 광기의 끝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밝게 빛나는 저 흰옷이 상징하듯, 그의 마음도 환히 빛나고 있음을 고야는 보지 않았을까요? 어둠을 직시하는 이의 마음에는 신적인 불이 붉게 타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태양을 직시할 수 없듯, 인간의 눈은 어둠을 꿰뚫어볼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불만이 약한 시력을 뚫고 그 어둠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둠을 넘어 어둠이 결코 이겨본 적 없는 하느님의 불이 자신 안에 타오르고 있는 이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었습니다. 이 불이 세상의 온갖 악의와 추함 가운데서도 빛나는 곳, 그곳에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향불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유일한 것 사랑이 있기에, 악의 온갖 괴롭힘 앞에서도 추해지거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불을 꺼트리지 않을 수 있었던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그분들의 사랑이 씨앗으로 죽어 고통과 암흑의 검은 땅을 뚫고 꽃이 피어나 진리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그 열매는 백 배, 수천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진리와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 깊고 깊은 어둠을 볼 수 있는 이 있다면 그는 이 씨앗의 열매일 것입니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