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4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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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십자가 Ⅱ

반적으로 샤갈을 떠올릴 때 밝고 명랑한 색채와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년 시절은 깊은 우울함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가 성장했던 게토, 유다인 분리지역이라는 곳이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곳입니다. 역사 속 수없는 환란과 핍박, 분리되어 살아야했던 게토마저도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세기에 세기를 걸친 고난은 우울이 그들의 게토 분위기를 형성하는 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우울함 위에 또 한 가지 더 결정적인 특징은 동유럽 게토의 경건한 신비주의 하시디즘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 하시디즘이 18세기 이 동유럽에서 바알 셈 토브라는 전설적 인물에 의해 생겨났고, 샤갈의 고향인 비텝스크는 러시아지만 지형적으로 동유럽에 가까웠기에, 그가 살았던 게토 역시 신비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생선가게에서 차가운 생선을 다듬고 무거운 짐을 져야했던 그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가는 길에 회당에 들러 홀로 기도하곤 했다합니다. 그의 그림 중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시디즘으로 인해 유다인 역사에서 드물게 열광적으로 타올랐던 희망, 구원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이 사그라드는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체험했던 나치의 잔인성, 아우슈비츠의 전율할 현실 속에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동족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그가 예수라는 인물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그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빛은 오직 십자가만을 비추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는 이미 빛입니다. 끝까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남았지만 그는 이 십자가 위 빛을 체험한 듯 합니다. 어떤 고난, 악랄함의 희생도 십자가 위에서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사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오른쪽 구석 펼쳐진 토라에서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이 사다리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구약의 특히 이사야서의 수난받는 종이 이 십자가 위 예수라는 인물이요, 유다백성이 그리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이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온갖 환난 속에 외롭게 선 십자가, 이미 오신 하느님, 엠마누엘, 수난받는 종, 메시아를 향해 사다리가 놓여있습니다. 십자가로 오르는 사람만이 이 사람, 하느님을 만납니다. 삶의 모든 고난은 이 통찰 속에서 하나의 줄기로 모여 ✝,죽음, 부활의 큰 바다로 흘러듭니다.

 

✝위는 이미 빛이다 라고 외치면

뭇시선의 돌팔매 맞게 될까

하지만

참빛이 있는 모든 곳에는

모든 곳에는

어떤 꼴이든

어떤 자취든

어떤 향기든

✝의 흔적이 있지않나요

✝를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아래, 위에 떨어도 보고

✝로부터 도망쳐보기도 하고

✝의 구원의 빛으로 해방, 자유를 맛보기도 하고

✝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 위는 늘 환한 빛임을

환히 보게 됩니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몸 속을 비추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