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월의 말씀

불꽃과 불꽃이 만나

 

갈의 그림입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샤갈 특유의 색깔이 분명하여,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샤갈의 그림은 알 수 없는 기호같은 표현들이 넘쳐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넘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이렇게 절절하게 그러면서도 상큼, 우아하게 표현한 그림은 앞으로도 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클림트의 “키스”를 보면 애절하리 만큼 열렬한 포옹임에도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게 만듭니다.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 위태한 절벽 끝에서 마치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듯 바늘 구멍 하나 없이 밀착해있지요. 그런데 이 그림의 두 남녀는 시원스럽게 적당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여인은 이제 곧 바닥에서 떠오를 듯한 자세이고, 남자는 이미 무중력 상태인 듯 자신을 잊고 오롯이 여인과의 입맞춤의 황홀경에 빠져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이 두 사람의 자세가 클림트의 그림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불안한데도 보는 사람에게는 불안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두 사람의 옷 색깔도 같은데, 여기서는 남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각자의 널럴한 자유가 결코 두 사람의 일치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춤을 추는 듯한 자유로움과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일치가 서로 너울거리며 오락가락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샤갈의 그림은 두 남녀의 한없이 고상하고, 그지없이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담는데서 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유명한 그림들의 상쾌 발람함, 화가로서 일찍 이름을 떨친 행운아, 아름답고 지적인 부인과의 동화같은 사랑, 상징들로 가득한 난해한 그림, 이런 것들이 샤갈의 겉으로 본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살짝 들여다 보면 이 그림들의 인상과는 참 다른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러시아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몰려나 유대인들끼리만 살도록 정해진 차별구역의 어두컴컴한 골목, 가난한 가정, 신심깊은 사람들, 그의 유년시절은 색깔로 말하자면 회색빛에 가까운 듯 합니다. 결혼도 부인의 열정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가난하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젊은 화가가 부유한 보석상의 사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주변에는 유대교 신비주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이런 유대교적 분위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는 아마도 아가의 신랑과 신부 이야기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사랑 놀음보다 더 열렬하고 치열한 하느님 사랑의 구애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유대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의 고난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유대교로 남아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분명 일차적으로는 열렬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불꽃은 더 강렬히 타오르고 있음이 볼 줄 아는 이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불꽃을 품고 있지만, 남녀간의 열렬한 사랑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것을 이 지상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열렬한 사랑으로 응시하며 애타게 그 응답을 기다리시는 짝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 불꽃이 활활 타올라 불꽃과 불꽃이 저렇게 훨훨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