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3월의 말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

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이사 1,2). 자식들에게서 버림받은 아버지의 슬픔, 하느님 아버지의 상처 입은 사랑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간청하며 예언서의 첫 장을 여는 이사야는 하느님의 꿈을 전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기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6-8). 왕국의 제왕이 될 수 있는 각각의 동물들이 “함께” “더불어” 지내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화는 힘센 짐승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 무리 속에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새끼들이 함께 있고, 어린아이, 젖먹이, 젖 떨어진 아기가 마음껏 안전하게 평화를 만들며 누리고 있습니다. 놀랍고 낯선, 그래서 “당신의 꿈”이라고 밀쳐 버리고 싶으나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정말 꿈일 뿐이고 환상일까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 우리 일상의 현실에 이미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시작된 그 나라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미의 태 안에서, 전쟁터에서, 굶주림으로 아이가죽어가는 척박한 이 땅에 이제 막 젖 뗀 아기보다도 더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가 이미 뿌려졌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지만 자라고 커지고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 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듯이, 성경을 펼치면 온통 예수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두려움과 함께 매력을 발산하며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소와 말이 지키는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내고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마태 13,44) 이들처럼 기뻐하며 돌아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목자들(루카 2,15-20).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는 상인(마태 13,46)같은 동방 박사들(마태 2,11), 그들은 이사야가 전한 평화의 왕국이 시작됨을 보았겠지요. 몸을 숨긴 나무에서 내려와 재산의 반을 선뜻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며 횡령한 것은 네 곱절로 갚는 자캐오(루카 19,1-10). 중풍에 걸린 환자를 평상에 누이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와를 벗겨내어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이들(루카 5,17-20). 측근 제자들의 음흉한 질책에도 아랑곳없이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깨뜨려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아름다운”(마르 14,6) 일을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랑의 여인. 책임 있는 자들은 핑계를 대며 피하고 도망가건만,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기꺼이 다가가 타인의 고통을 돌보는 사마리아인(루카 11,30-37). 서 말이나 되는 밀가루 반죽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전긍긍할 때 “슬쩍” 누룩을 집어넣는 지혜로운 여인(루카 13,20-21), 반죽은 부풀어 올라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빵이 만들어져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지요. 잔치를 차리면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어김없이 초대하는 사람(루카 14,12-14). “아버지의 다스림”은 우리 관계의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저마다의 마음 그릇에 쌓인 완고함과 이기심의 진흙은 돌심장이 되어 서로를 찧고 있으니 상심하신 그분께서는 말씀으로 방문하시고, 때론 예상치 못한 얼굴로 맞대면하시며 맑은 물을 폭포처럼 쏟아부으십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장). “예”라고 지금 여기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나중에 “주님, 주님!” 부르며 문을 두드릴 때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왔을 때 왜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불렀을 때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느냐?”(이사 50,2). 함께 아파하시는 분의 목소리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겸손하게 청합시다. 그분께서는 먼저 약속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으니, 일어나 가자.”(루카 12,32:요한 14,31).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 산상설교 / 1877 / 덴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