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3월의 말씀

아빠, 아버지.

음서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예언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마음에 있어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시편 37,31) 이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속에”(시편 40,9) 즉, 내장속에 새긴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새겨진 법을 버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요. 의로운 요셉은 가슴에 새겨진 율법, 앞날에 대한 자신의 계획, 세상의 이목에서 감히 이탈합니다.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를 보물을 취하듯 맞아들입니다(παρέλαβεν / parelaben)(마태 1,19-24).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닮은 방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타인의 수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소문없이 처리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온유한 수용이지만, 요셉은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의 온유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고, ‘아기’로 오신 하느님에 대한 탁월한 돌봄입니다. 그의 온유와 순종, 돌봄의 책임은 우리 믿는 이들이 닿아야 할 종착지이겠지요. 요셉은 거듭거듭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천사가 알려주는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납니다. 자신의 선입견, 고정된 가치관, 안정의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당연한 듯 담담하게 전합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παραλαμβάνω / paralambano) … 갔다.”(마태 2,14.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22장). 한마디 항변도 없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믿음으로”(히브 11,17).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아들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그렇게 함께 걸어갑니다. 신비의 무게로 온 세상은 침묵하고 아들의 소리만 있습니다. “아빠!” “얘야, 나 여기 있다.”(창세 22,7). “나 여기 있다.”라는 아버지의 응답만으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고 계시고 마련하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상의 버거움을 견디게 하는 충실함과 희망을 주시고 신앙을 자라게 하십니다.

“일어나” 마음의 귀를 열고 타자의 밤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누군가는 한낮의 어둠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울부짖으며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멀리 떠나있던 다른 이는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루카 15,11-32). 그는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향하여 다가가 그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성 요셉의 해’ 교서에서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요셉과 같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이며, 더 큰 부성을 보여주는 표징”(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이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다른 이를 향하여 “아버지가 되는” 은총도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 / 자비로우신 아버지 (16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