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월의 말씀

새로운 얼굴

“나

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6,3). 이 놀라운 교환 체험의 처음을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엄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요술에 걸린 듯, 신비에 사로잡힌 듯 “엄마! 엄마! 엄마 눈 안에 내가 있어요!”라며 환성을 터뜨린 때가 있었지요. 그 경이로움을 꺼내어 새로운 듯 만지니, 맑은 새벽 하늘이 쫘악 찢기면서 별들이 후두둑 쏟아지는 그림이 겹쳐집니다. 그날에 한 소리 새겨졌지요. “얘야, 네 눈 안에는 내가 있단다.”

사람은 모방하는, 닮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욕망을 모방하고, 모방하면서 욕망하고 경쟁하고 … 점점 서로에게 짐승처럼 되어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경탄하고, 정겹게 다가가며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점점 “참사람”이신 주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길이 분명 있습니다. 좁고, 가파르고, 때론 숨쉬기조차 힘들고, 끝이 없을 듯 험난한 그 길의 종착지에서 “새로운 얼굴”을 얻은 이들이 있습니다. 성조 요셉도 그러합니다(창세기 37장-50장). 아버지 야곱이 다른 아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였기에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다정한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끝내 “물 없는 빈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은전 스무 닢”에 노예로 팔려가고, 치욕스러운 누명의 감옥살이, 재앙인 “기근”으로 인하여 드디어 형제들과 대면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재앙이 하느님 은총의 다른 얼굴인가 봅니다.

형들은 아직 자신들의 얼굴로 동생을 만나야 했기에 두렵기만 합니다. “요셉이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되갚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생 요셉은 깊은 눈물의 강에 이미 다 씻어버렸으니 어떤 얼룩도 맺힘도 겨자씨 한 알 만큼의 적개심도 없는 전혀 “새로운 얼굴”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조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용서와 화해입니다. 비록 인간은 악을 꾸미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그때부터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붙잡고 꿈과 사랑을 잃지 않았겠지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며, 야곱의 삶에 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또 찾았겠지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근심하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의 인도로 영원한 임금이시며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을 감히 부릅니다. “나의 연인이여!” 성령 안에서 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의 영혼은 복됩니다. 무엇을 희망하더라도 이미 받을 것임을 믿으니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다.”(시편 145,18). 여전히 어둑하고 위태로운 현실일지라도 말씀과 기도 안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고자 달려오실 것입니다(야고 4,8 참조). 가난한 우리 이름을 부르며 “나 여기 있다.” 말씀하십니다.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Hodogetria) / 15C. 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