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2월의 말씀

오직 하나 남은 사랑

“살

아가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럽고 비참한 고백은 나의 비참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루에 한 끼 식사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독거 노인, 혼자서는 외출은 물론 일상 생활을 못하는 장애인, 교통비를 지원받아야만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청년실업자들, 이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문서로 고백,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비참을 겪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가 부끄러움과 모멸감없이 자신의 헐벗음, 배고픔을 말하고 “목마르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사랑의 완성, 완전한 자비의 자리이고 그곳에는 말하지 않는 말도 들으시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그분께서 계십니다. 우리 귀와 눈을 통해서 들으시고 보십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1요한 2,16)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반대쪽을 향하여 내려가야 하겠지요.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께서 이미 작정하고 오실 것입니다.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의 비참과 고통의 수렁이 당신 목에까지 차올라”(시편 69,2-3 참조) 그분은 정녕 우리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가 앓을 병을 앓으시고,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며(이사 53,4) 치유하시기 위해 작정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질긴 욕망의 늪에서, 어둠의 구렁에서 건져 내실 분은 “힘센 사자나 날개 달린 천사”(이사 63,9)가 아니라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루카 2,1-14) 아기의 얼굴입니다. 아기는 안아주고 돌보아주는 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서로는 닮아가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는 표징인 무지개를 보여주실 때 먼저 “땅 위에 구름을 모아”(창세 9,14) 어둡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늘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살아 계신 빛, 사랑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둠을 마주해야 하고, 하느님 부재의 절망에 질식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비참을 겪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고 아름다운 우리를 다시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마음을 정하실 때 “이제 남은 것은 이 방법밖에 없다. 사람 안에는 두려움과 갈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구나. 사랑보다 더 강하게 그를 매혹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하시며 당신 친히 사람의 아들,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오직 사람을 원하신 사랑 때문에. 이제 우리의 작정만 남았군요.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에게 어서 달려가 그 아기의 전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는 어떤 것도, 누구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지요.

“이 몸은 임의 것, 임이 날 그리시니.”(아가 7,11 최민순 역). 사람이 다시 그분의 소유가 되기를 허락하면, 그분의 그리움이 우리에게 쏟아집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면 그분의 자비, 그분의 축복과 평화, 온 세상을 향한 그분의 그리움이 바로 여기에 이미 차고 넘칩니다.

예수 탄생 이콘. 안드레이 루블레프 화파 15C. 모스코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