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1월의 말씀

나의 연인은
내게 몰약 주머니

“나

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내 임은 내 가슴에 간직한 몰약 주머니”(아가 1,13 최민순 역)라고 신부(新婦)는 말합니다. 몰약은 아리고 쓰린 아픔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신부가 “몰약 주머니가 나의 연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아픔, 고통, 환난, 죽음이 결코 쉽고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신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볍게 여겨지고, 죽음처럼 강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신랑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분께서 몰약 주머니이지 몰약 주머니가 그분인 것은 아니다.” 신랑이며 임금이신 그분은 단지 “몰약”인 것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쩌면 신부와 이웃도 눈을 가리고 피할 만큼 낯선 이의 모습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인간이 거하지 않는 곳에서 낯설게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선택받은 지혜로운 이들은 그분을 알아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임금으로 태어나신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2 ; 루카 2,1-14 참조).

전혀 낯선 길로, 낯선 얼굴로 오시는 그분 때문에 당황하고 도전받고 고난을 견디는 것이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당연한 몫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왕이신 그분께서 우리 때문에, 우리 안에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주님, 이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라 그 예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고 받아 모시나이다.”(주님공현대축일 예물기도).

“내게 문을 열어주오, 나의 애인이여.”(아가 5,2). 한밤중에 느닷없이 문을 마구 두드립니다. 어떤 얼굴인가요? 너무나 놀라 “몰약이 뚝뚝 떨어지는” 듯합니다(아가 5,5). 하지만 신부는 누구신지 물을 필요없는 절박함으로 그 얼굴로 다가갑니다. 가장 작은 이의 울부짖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린 이에게 빵을 먼저 나누고, 고뇌 가득 찬 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버림받은 이들 곁에 함께 서 있습니다. 신랑이신 임금께서는 “사랑의 깃발”(아가, 2,4)을 신부에게 걸어줍니다. 신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바로 그 낯선 얼굴들”(마태 25,31-46 참조)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숨어 계신 분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전례력으로 11월은 올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세상과 사람이 많이 아픕니다. 우리를 기억하시는 그분을 기억합시다. 어둠이 내리는 사순의 텅 빈 광야에서 모든 이의 비참을 모은 교종의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이 샘솟는 희망과 신앙은 자비의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몰약뿐인 우리의 예물을 유향으로 만드십니다. 밀쳐두고 외면했던 얼굴을 마주 보며 욕망의 헛됨을 서로 벗겨내고 우리의 진실, 우리의 빛으로 함께 걸어갈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들으시는 임금께서 이미 당신의 몸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고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나이다.”(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

6c. 성소피아 성당 내부에 장식된 구세주 그리스도 모자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