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10월의 말씀

너희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저

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연중 제30주일 본기도). 이 기도 안에서 마르코가 전하는 “어떤 사람”(마르 10,17-22)을 만납니다. 그는 이제 막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신 다음 예정된 길을 떠나시려는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주님을 대면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길 안으로” 들어서며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조르듯이”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그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난 후에 “영원한 생명”은 내세에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적으로 한 조각 한 조각 이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실천하라고 명령한 모든 계명을 꼭 지키고, 주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걷고 그분께 온전히 매달릴 때” 영원이신 그분은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미 보고 만지도록 당신을 허락하셨지요. 숨어 계신 임마누엘이시여! “저희가 언제 주님께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0).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이시다.”(신명 6,4 참조).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고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갈망이 깃든 그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하나가 부족하다.” 그가 지킨 것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지킨 것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라 하시며, 바라보는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마태 5,21-30). 하나가 남았습니다.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신명 5,21). “탐내지 말라.” 그가 지닌 것, 안락을 누리는 것들이 비록 성실하고 합당한 노력의 정당한 몫일지라도 “탐욕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은 어쩌면 탐욕에서 비롯된 전리품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신 주님께, 타인의 가난한 빈손에 돌려주어야지요. “주님, 당신의 법에 매달리니 제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법이 영원히 저의 재산, 제 마음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시편 119,31.111).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비틀거립니다. 함께 아파하는 근육이 굳은 탓일까요.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예수님의 눈길을 기억하고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주님 친히 깊고 내밀한 갈망을 채워 주시고자 “가슴에 당신의 새 법을 넣어 주고, 마음에 당신 새로운 계명을 새겨”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이미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지키고 행할 힘도 주셨습니다. “가서 가진 것 다 주어라. 너 자신에게서 내려오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1445-1510) <책을 보고 계시는 성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