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8월의 말씀

절뚝거리며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느님 얼굴을 찾는 이들의 대명사격인(시편 24,6) 야곱이 어디서 어떻게 그분을 만났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세 28,10-22 : 32,23-33). “모태에서 제 형을 속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룬”(호세 12,4) 야곱이 하느님을 처음 만난 때는 “밤”이었습니다. 낯선 땅의 어둠도 두렵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과 앞날이 더 막막하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심판받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압도됩니다. 놀라우신 그분께 사로잡혀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다.”라고 경탄합니다. 우리 인생의 컴컴한 밤, 혼란의 어둠, 죄의 순간들 속으로 그분께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할 때, 하느님은 차츰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을 맛본(sapio) 사람을 그분께서는 현자(sapiens)로 만드신다.”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형을 피해 멀리 도망가던 야곱은 바로 그 밤에 이미 형에게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혈육으로부터 속임당하고 빼앗긴 에사우는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지요(창세 27). 사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에사우와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탓이 누구에게,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빼앗겼고, 상처받았고, 억울하다고 여길 때가 있지요. 욕구에 이끌린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축복을 잃어버릴 때도 있거든요. 에사우는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축복을 남겨 두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침묵을 향해 울부짖는 에사우의 밤도 야곱의 밤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아가의 신부와는 또 다르게 분노, 원한, 억울함 때문에 “잠들었지만 마음은 깨어있는”(아가 5,2) 숱한 밤을 지새우며,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겠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나로서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릎을 꿇어 바닥에 엎드릴 때, 그 틈새로부터 하느님 은총의 빛이 쏟아지며 스며듭니다. 악이 바로 곁에(로마 7,21),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창세 4,7) “솜씨 좋은 사냥꾼”(창세 25,27)인 에사우를 유혹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결코 “카인의 나쁜 영”에(창세 4,1-16) 자신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넘어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하느님의 손에 내맡겼습니다.

“하느님을 대면”한 야곱과 에사우는 이제 “형제의 얼굴을 제대로 대면”합니다. 자신을 방어하고자 앞세운 가족들보다 앞장서 형에게로 다가가는 야곱,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얼굴이 동생임을 알아본 에사우, 서로를 향하여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춥니다. 뺏는 자와 빼앗긴 자, 그 모든 상처를 받아들여 아우르시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하느님 마음의 신비가 눈부십니다. 그 자비의 빛은 큰 아들, 작은 아들, 가난한 이, 장애인, 눈먼 이, 다리저는 이들을(루카 14,21) 다 함께 “그토록 그리운 아버지의 집”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시나요?

지거 퀘더 <요한은 신부처럼 단장한 새 예루살렘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