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0월의 말씀

하느님의 꿈

사랑 그 자체는 이미 앎의 시작

창한 숲 속에 누워 키 큰 나무들의 꼭대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늘에 닿은 가지들은 서로에게 햇볕이 잘 들도록 살짝 살짝 옆으로 자리를 양보하고 배려하여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놀랍도록 신비한 사랑의 질서입니다. 어느 나무의 잎들도 다른 잎에 내리는 햇볕을 탐내지 않고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이를 ‘Crown Shyness’(산꼭대기의 수줍음)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넉넉하며 한결같으신 사랑에 대한 피조물의 겸손한 응답입니다. 창조의 한 처음에 말씀하신 하느님의 아름다우신 꿈을 나무는 늘 기억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참 좋구나. 모두 모두 번성하여라.”

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너희는 나를 찾아라, 내 얼굴을 찾아라. 그러면 살 것이다.” 성모님께서도 하느님과 같은 꿈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께서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내치시리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꿈을 펼쳐 보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신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금 서간” 저자인 12세기 시토회 수도승인 생 티에르 윌리엄은 “사랑은 그 자체로 이미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만을 압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갈망하고, 갈망함으로써 찾고, 사랑함으로써 발견하고, 꿈꾸면서 하느님의 꿈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꿈꾸신 세상을 위해 봉쇄의 숲에서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도록 마련하여 주신 만큼 끊임없이 당신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신뢰로써 당신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당신을 이해하며, 진실하게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언제나 당신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며 사랑하게 해 주소서.”(생 티에르 윌리엄). 우리가 꿈을 멈추지 않는다면 숲속 키 큰 나무들의 수줍은 사랑의 질서가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카리예 15c <물결을 다스리는 성모님(벨라꼬니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