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집 6

진보와 보수가 함께 연대하는 집

 

“투쟁과 묵상은 같은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대가 기도한다면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대가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책임을 감당하면서 투쟁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떼제의 로제 수사-연대를 일구는 사람).

교회는 늘 이 양자가 공존하는 집이다. 성서의 인물사에서 신약과 구약의 획을 긋는 세례자 요한을 나는 특별히 좋아한다. 그를 엄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그는 음악가의 보호자로 간주되고 있다. 요한의 찬가 Ut queant laxis 로 계명법(Sol-mi-sation)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악보

                              Ut(=Do) q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 ra ge-sto-rum               Fa-mu-li ……

요한은 지금의 한국 교회 상황에서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음악가의 주보일만큼 감미로운 사람이요, 사막으로 피해가 기도하며 고행하는 은둔 수도승이요, 때가 차자 사람들에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을 가리킨 요한이 무엇 때문에 희생되었는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정치권 인사인 왕에 대해 지적한 단순하고 사실인 말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에도 이 말을 외칠 사람이 교회 안에 필요하다.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7시간 동안 지도자가 어디에 있었는가? 밝혀지지 않은 이 사실에 대해 “당신이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지, 한쪽 날개의 퍼덕임을 꺽어버리면 날아오르지 못한다. 부도덕함에 대한 지적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랑”이라고 교황이 표현한 영역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

북한과의 관계 안에서 정부를 견제하고 교육하는 사람이 교회일 수밖에 없게 될 때, 교회는 정부를 거슬러 당연한 불법까지도 감행해야 할 것이다. 진보적 그룹이 이 일들을 수행해 나갈 때 배수진을 치며 보호할 온화한 보수 그룹이 어른으로 있으면 교회는 교회 밖 양떼에게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올 때를 예상하며 많은 이들이, 국민적 추앙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한다. 성 베르나르도가 어려운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국가 권력자의 조언자요 대항자였으며, 교회의 목자인 동시에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개입으로 교회 밖 사람들의 목자이기도 했다.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왜 사제들이 사회 문제에 관여합니까?”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전한다. “왜 사제들이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를 묻기 이전에, 그럴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상황이 어떠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육영수 여사는 자주 나를 박 대통령과 만나게 했다.” 현명한 여인이었던 이 영부인은 남편 주위에 옳은 말을 해줄 사람을 두고자 했던 것이다. 추기경은 정신적 지주였던 부인의 죽음 이후 박 대통령이 더 곤두박질쳐 갔다고 말한다. 그가 지도자층과 어떤 교류를 가졌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학생들이 데모하다 명동성당으로 피해 들어오자 추격해 들어온 경찰에게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먼저 맨 앞에 있는 나를 잡아가고, 내 뒤에 서 있을 사제들을 잡아가고, 그 뒤에 있을 수녀들을 잡아간 후에야, 학생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윤락가에서 몸을 팔던 여인들의 재활을 돕는 “막달레나의 집”에 사복을 입고 들르곤 했는데, 무릎에 벌렁 눕기까지 하던 어느 자매의 몸짓에도 절도를 갖춘 자애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그의 서재에는 기인 중광스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최종태 화가가 그 방에 들렀을 때 그림에 대한 평가를 묻자 ‘그는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변했다는 화가와의 일화가 전해진다. 추기경은 “나에게도 불교의 피가 흐른다.”라는 말을 했는데 종교간 대화에 대한 그의 열린 자세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전 국민적 추모행렬이 이어졌던 것은 교회 안에서 진보와 보수를 아울렀던 그의 넓은 품 때문이었고, 교회 밖의 양떼에게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며 어려운 사회문제에 약자를 위한 횃불을 밝혀주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교회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하느님께 신성한 존재인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 서서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북한과의 관계문제에서 정부의 박해를 각오하고 북한에의 지원과 대화를 터나갈 지도층이 필요하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김대중은 “수구세력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곧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라는 두려운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로 지금 우리 시대가 그러하다. 김수환 추기경이 교회와 세상을 향해 취했던 자세가 그립고 절실한 이유이다.

밭 담당을 하던 시기에 멧돼지에 대한 전의(戰意)에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모든 농부가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