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6년 4월의 말씀

4월 소식지_달빛-예수

 

부활의 얼굴

활하신 예수님을 그린 그림은 이콘이든 다른 그림이든 보통 환한 빛이 동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지나가는 행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정원지기, 고기를 잡으러 나간 제자들에게는 조언을 해주는 분으로, 아주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놀라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도 잡수시고, 의심하는 토마 앞에서는 손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분으로,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에게는 빵과 구운 물고기를 준비하는 엄마같은 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질문하시며 그를 준비시키는 분으로 제자들에게는 인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그 고난 그리고 부활과 성령강림을 목격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화려하지도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 다른 모습은 하늘의 천사나 왕의 모습이 아니라, 정원지기나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이었던 것도 결코 작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은 살아계실 때와 다름없이 가난한 이, 온유한 이, 슬퍼하는 이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요, 가장 가난하게, 가장 작은 목소리로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위엄과 힘과 찬란한 광채로 악을 압도하고, 엄청난 것을 세우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들은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이런 모습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제2의 그리스도라 자신을 칭하는 사이비 종교에서 그 교주의 모습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작아지셔서, 지상에서 해방을 선포하시며 앓는 이 눈먼 이 다리저는 이를 고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그 모습마저 보이지 않고 사람들 안에, 바로 우리 안에 그리고 성체 안에 인간의 모습마저 감추신 채 마치 우리 자신인 듯 그렇게 숨어계십니다. 복음에서처럼 정원지기로, 지나가는 행인으로 빵을 구워놓고 기다리는 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2월달에도 소개했던 김 호원 화백의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참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독특한 그림, 화백의 사고가 선명하게 빛이 되어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나무 가지 사이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들이 채워져 있고 나뭇가지 자체가 예수님의 얼굴 형상을 이루고 있으니, 가난한 이들과 자연이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계시어,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자신 안에 계신 그분의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부활하신 분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지요. 더 숨으시고 더 작아지시고 더 비천해지신 분을 만나려면 더 이상 작아질 것도 없는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 바깥, 세상의 휘황한 풍요로움, 부, 명예, 권력, 외모를 뒤좇을 때 그 어디서도 그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본능을 끝없이 자극하는 현대 세상의 휘황한 빛이 우리를 얼마나 당기고 있을까요? 부활하신 분은 그 빛에 밀리어 어디까지 쫓겨나 계시는 것일가요? 가장 작은 것, 가장 비천한 것, 가장 가난한 이를 선택할 용기가 있을까요? 고난받는 특권이라는 말을 자신의 것으로 담을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분이 머무는 그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