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5년 1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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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영혼의 그릇

말이 없어져버리게 하는 2014년을 보내고, 새롭게 한 해를 선물받았습니다. 쉰내, 썩은 내, 곰팡이 냄새로 내 코가 아예  썩어버리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안에서 맑음을 길러내지 않으면 누구라도 사회 전체 가득한 그 냄새에 같이 절어버릴 수 있음을, 인간은 누구나 약함을, 새해라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님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내 안의 맑음을 보고, 그것을 퍼올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는 세상, 그 평범함 속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우리를 가득 채워 썩게 하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 기준으로는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아이가 제 마음 속으로 한 걸음 들어와 앉았습니다. 사실 평범한 얼굴로 화가가 인물화의 주인공으로 잡을 만한 미인은 아닙니다. 화가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인데, 구도면에서는 두 그림이 무척 닮아있습니다만 두 소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상당히 다릅니다. 진주 소녀의 눈에 있는 왠지 모를 흔들림 같은 것이 이 소녀의 눈에는 없습니다. 그저 맑고 순수합니다. 하지만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과 다문 입술은 아이의 속이 제법 단단해보이게 만듭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같은 느낌을 주지만 웃을
지 울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비한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 속 깊이 흔들림이 있음이 감지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까르르 웃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습니다. 이 맑음! 새해 아침을 고요히 물들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을 때만이겠지요? 이 아이의 삶 역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눈빛의 단단함이 그 역경들을 헤치고 그 맑음을 더 큰 성숙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만들어줍니다. 설사 한 때 이 맑음을 잃을지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강함도 느껴집니다. 그렇게 견뎌내고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선 맑음은 더 깊을 터이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맑음이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에 ‘아니오’를 할 수 있는 밝은 눈과 힘참이 필요함도 깨달을 터이지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있으리요만, 늘 흔들리기만 해서는 참 사람살이를 배워갈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닫는 날, 맑음의 고귀함도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맑음은 나보다 남을 더 담을 수 있는 영혼의 그릇이니까요.

 

 

<희망의 소곡>

희망이 익고 익어
텅빈 알
하나 낳았네

눈에 보이지 않아
기다림인지
아픔인지 모를
더께 낀 세월의 골동품

누구도 탐내지 않는
허무의 흐름
그 육중함마저 날아가고

희망 아예
사라진
무의 가벼움

그 자리
텅빈 알 하나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