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10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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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남은 몫

“묶

여있는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켈란젤로의 중반기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솜씨 좋은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는 젊은 석수 3명이 3시간에 걸쳐 해낼 양을 혼자서 단 15분 만에 그 단단한 돌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쪼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고 정을 한 번 댈 때마다 어떤 형상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 자체가 경이로움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렇듯 덜 떨어진 모습 그대로의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가 묶여있는 노예의 모습을 여러 차례 조각한 것에서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 조각은 ‘최후 심판’의 벗겨진 얼굴가죽과 함께 일종의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재능과 주위 사람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 일생 자신과의 싸움에서 물러날 수 없는 끈질긴 투지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 차례 묶인 노예를 조각한 것, 그것도 어설픈 모습, 형태만 새긴 후 도중에 그만둔 듯 한 모습으로 남긴 것에는 그의 강렬한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 속 오솔길을 한 번 따라 걸어보기로 합시다. 이 노예는 형태나 윤곽만 흐릿한 것이 아니라, 왼발과 왼손은 아직 돌 속에 그대로 박혀있어 마치 이제 막 돌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 속에서 빠져나온 오른발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왼발과 함께 묶여있고,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온힘을 다해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돌 속에 갇히고, 나온 부분마저 묶인 처지! 이것이 재능 가득한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세기를 뛰어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뇌! 그 탓일까요?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에 온생을 바친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옭매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온생을 바친 이이기도 합니다. 그의 초기 작품 바쿠스나 다윗상은 젊고 힘있고, 육체적 아름다움이 사람의 눈을 끄는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말년의 그의 삐에타상(성모님이 숨을 거둔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삐에타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과연 그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성모님과 예수님의 얼굴 형상마저 뭉개지거나 혹은 서툰 조각가의 작품 같습니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작품 같은 것은 이제 필요없다는 듯 미완성으로 이 작품을 남겼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 역시 의도적 미완성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재능과 자신의 몸 구석구석 놓치않는 노예상태의 긴장은 아마도 이 시점에 풀리지 않았나 짐작해봅니다. 노예임을 자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노예인 듯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한 구도자는 묶인 끈을 풀어줄 분을, 자신이 미완성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의 짐을 대신 져줄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손을 쳐들고 반항해도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의 무게가 어떤지를, 그 무게를 벗으려 할수록 더 옥죄는 인간 비극의 드라마를 자신의 온생애를 통해 체험했던 사람 같습니다. 세기를 초월하는 재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부자유를 자신이 짊어진 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인류 공통의 짐임을 알아보고, 거기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이들이 역사상 있어왔습니다. 그는 한 예술가로서의 삶, 감탄할 그 삶 이상으로 인간 구원의 물음에 매달렸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남은 몫은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다가옵니다. 이 몫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