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에릭 아빠스 강론_부활절 강론 1
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부활절 강론 Ⅰ
예수님이 살아계시니 이제는 한이 없다.
- 우리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고파하는 우리 마음은 가끔 지치고, 피로와 좌절과 의기소침으로 가라앉을 때가 많습니다. 그분 부활의 기쁜 소식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줍니다. 예수님은 승리자,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는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이기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우리 자신마저 잊고, 그분 안에서 모든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배고파하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 있다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듣자 야곱은 제 정신이 들어 말하였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죽기 전에 가서 그 애를 봐야지”(창세 45,25-28). 지금 이 말을 들은 여러분 중에는 “다 좋은데, 요셉이 오늘 이 축일의 기쁨,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부활인데, 당신은 사순절 음식을 우리에게 차려주는 것이냐? 고. 우리 영혼은 과월절 어린 양을 먹고 싶어 하고, 오랜 단식으로 이 날을 준비하며 기다렸는데! 라고. 예수님을 향한 연민으로 우리 마음은 불타고 있소.”(루카 24,32)라고. 아직 우리가 그분을 뵈올 수 없고, 그분에 대해서 들을 자격이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우리가 배고파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요셉이 아니라고, 구세주이지 꿈쟁이가 아니라고, 하늘을 지배하는 분이지 이집트를 지배하는 지배자는 아니라고. 배만 채워주는(pavit ventres) 분이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시는 분(pascit mentes), 그러나 굶주린 영혼만을 채워주시는 분! 적어도 당신의 설교는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분, 그리워하는 분을 더욱더 그리워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6)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더 큰 배고픔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이 잔칫상을 자랑한다면 듣는 사람의 배고픔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때, 정말 귀 기울여 들음은 우리의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우리의 바숴진 뼈들마저 용약할 것입니다(시편 50,10). 우리 뼈들은 사순시기의 보속과 슬픔으로 바숴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귀에 들렸을 때, 기뻐하며 용약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계속 요셉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지금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맛들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과월절 양, 우리의 파스카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희생 제물로 봉헌되신 오늘 같은 날에는 (1코린 5,7).
요셉은 예수님을 위한 표상
형제들이여, 제가 여러분 앞에 차려놓은 것은 계란이나 호두 같은 것입니다. 껍질을 벗기십시오, 여러분은 그 안에서 먹을 알맹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배고파하는 과월절 양을 찾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깊이 숨어 있는 것일수록, 찾는데 많은 노고와 섬세함이 요구될수록 그 맛은 더 멋질 것입니다. 저에게 요셉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습니까? 제가 여러분 앞에 내놓은 스토리가 오늘 이 축일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습니까? 물론 어느 모로 보나 많습니다(로마 3,2). 이 설화를 여러분의 기억에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그 자비의 신비(pietas mysterii)가 얼마나 큰 자비를 품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역자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그분은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대해서(2코린 3,6) 말씀하셨고, 그 다음 생명을 주는 성서의 영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루카 24,32). 만일 그렇다면 선조들이나 예언자들 중에 누가 요셉보다 더 구세주의 모습을 분명하고 탁월하게 증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에게 배울 기회를 주어라, 그러면 그는 더욱 슬기로워 질 것이다”(잠언 9,9). 그래서 저도 그 사실을 짧게 요약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만일 신앙과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묵상해 본다면(창세 30,24), 우리는 그가 형제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생긴 사나이였고(창세 39,6), 그의 행동에는 결함이 없었으며, 영리했고, 형제들로부터 팔아넘겨졌으나 그것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으나 복귀되어 지배인의 신분에까지 들어 높여져 영예를 누렸고, 최종적으로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세상의 구원자”라는 칭호까지 받았음을 알았을 것입니다(창세 41,45). 이 모든 일을 신앙과 경건한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면 “나의 계획을 예언자들을 시켜 알려주었다.”(호세 12,1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합당한지, 추호의 주저함 없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을 야곱과 비교함
위에 언급한 것을 되돌아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고, 율법서와 예언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음에 기쁨과 경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로마 3,21).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신약의 신비를 너무도 명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에 예언서를 들을 때, 이름이 다른 것뿐이지 복음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야곱에게 아뢰었다, 요셉이 살아있습니다”(창세 45,26). 이 말씀에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알려주었다,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라는 말씀으로밖에 어떻게 달리 제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설명이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후손 뿐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모되는 모습, 말하자면 활동적인 싸움을 통해서 관조와 정적의 삶인 관상에로 넘어가는 것만을 체험하지 않았고(창세 32,23-28), 오히려 야곱이 육(肉)으로 이스라엘인(창세 35,11)의 아버지인 것처럼 참 이스라엘인, 즉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그들도 야곱이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며 실의에 빠져 슬퍼했던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주 어렵게, 서서히 그것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야곱에게 아뢰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다만 어리둥절하여 그 말을 곧이들을 수가 없었다.”(창세 45,26) 이 말은 복음에 나오는 다음 말씀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두 사람도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으나 그들은 그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0-13). 루가 복음에서도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열 한 제자와 그밖에 여러 사람들에게 와서 이 모든 일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루카 24,9.11). 아마도 그들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깊은 잠과 어리둥절함에서 막 깨어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다 전해 듣고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것(마차)들을 보고 나자 아버지 야곱은 제 정신이 돌아왔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죽기 전에 가서 그 애를 봐야지”(창세 45,27-28). 사도들도 이와 똑 같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그들을 깨닫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나셨으나, 성령을 그들에게 불어넣어주시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으로는 아무 확신도 주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받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요한 20,26; 루카 24,36-3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시며, 하늘로부터 같은 성령을 다른 은사와 함께 보내시자, 의심할 여지없이 이 은사는 그들에게 부활과 살아있는 생명의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증언하다.
성인들의 마음과 입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진리요(1요한 5,6), 부활이요 생명이심(요한11,25)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사도들 역시 살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맛본 후에야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였습니다(사도 4,33). 그러므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육체적인 외적 감각보다 얼마나 더 힘 있게 내적 인간의 감각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지요! 증언을 하시는 분이나 증언을 받으시는 분이 같은 한 성령이시니, 거기에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요한 5,6-10). 그리고 유일한 성령이시기 때문에 오로지 유일한 뜻과 완전한 통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그들의 생명
이 사건은 우리가 야곱에게서 읽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야곱, 실망과 좌절로 거의 매장되었던 그에게 제 정신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 각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의 예수님이 살아 계시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되기 때문에!”(필리 1,21) 그러니 이제 예수께서 일러 주신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가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겠습니다(마태 28,16). 왜냐하면 여러분을 결코 완전히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요한 6,40), 죽더라도 살게 되겠기 때문입니다.”(요한 11,25).
기쁜 소식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여러분에게 입증해 준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만,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이 살아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부활하셨든지 그분을 정말 사랑했다면, 그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전교회와 온통 일치하여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용약하며 “예수님, 나의 하느님, 당신은 살아계십니다.”라고 나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피로에 지쳐 잠 속에 빠졌고, 핍진하여 병들고, 좌절로 의기소침해졌던 나의 영은 제 정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렁찬 소리는 죄 속에 깊이 매장된 죽은 사람까지도 제정신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 돌아오실 때 우리를 그곳에 버려두고 데려 내오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절망과 망각 속에 매장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영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나의 모든 것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전하는 친구의 목소리는 얼마나 충실하고, 그 사랑의 행위는 얼마나 순수하며 우정에 잘 어울리는 말입니까! 그분이 살아계시면, 나도 살아 있습니다. 내 영혼은 그분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내 삶의 전부이며, 그분은 나의 충만함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데,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그 이상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좋습니다. 예수님만 살아계시면, 그 이상 아무 것도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분 마음에 드시는 일이라면 내 자신마저 없어져도 좋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신 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비록 그분이 자신만을 위해서 사신다 하더라도! 이렇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인간의 모든 능력을 요구할지라도,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일 외에는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이미 완전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난도 짐이 되지 않고, 상처의 아픔도 느끼지 않으며, 멸시도 상처가 되지 않고 불행도 경시하고 죽는 것도 이득으로 생각될 것입니다(필리 1,21). 그보다 더할 것입니다. 그는 죽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가리라는 것을 알고 믿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죽기 전에 가서 그 애를 봐야지!”(창세 45,28).
완전함에로 건너가는 도상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직 마음의 완전한 순수함에 도달하는 은총을 받지 못했더라도 길을 떠납시다! 갑시다, 가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갈릴래아의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을 만납시다! 가는 도중에 사랑은 자랄 것이고, 우리가 도착하면 드디어 그것도 완전함에 도달하겠지요. 가다보면 처음에 거칠고 힘들었던 길도 넓어질 것이고, 약한 이들의 힘도 커지겠지요. 그리하여 야곱뿐만 아니라 야곱의 가문에서 그 누구도 길을 떠나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지 않도록, 가난하고 늙은 노인에게 먹을 것 외에 타고 갈 마차까지 대령했으니, 아무도 가난과 약함을 구실로 떠나지 않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양식이고, 그분의 영은 마차입니다. 그분 자신이 양식이고 그분 자신이 병거이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기병입니다(2열왕 2,12). 당신이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보화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집트 것이 아니라 천상 것입니다. 그 나라의 가장 좋은 자리를 당신의 요셉이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았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제일 먼저 천사를, 그 다음으로 여인들을 그리고 사도들을 보내신 분께서 지금은 천국에서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보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죽었고, 죽은 줄로만 알고 3일 동안 너희가 슬퍼했던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다”(묵시 1,18).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여러분을 그곳에로 데려가 주시기를,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그곳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