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부활 강론 Ⅱ
예수 부활 - 가장 효력 있는 구원의 증거
구에릭은 여기서 첫 번째 죽음과, 마지막이며 돌이킬 수 없는 두 번째 죽음을 첫째와 두 번째 부활에 대조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 안에서 우리를 부활시키셨습니다. 더 이상 죽음은 절대적인 권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가 되어, 그분과 하나로 묶여졌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통해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었을 때, 부활은 우리의 성사가 됩니다.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묵시 20,6).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첫째이며 둘째 부활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15,20).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성사를 통해서 첫째 부활을 가져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모범삼아 두 번째 부활인 우리의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첫째 것은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해주신다는 것이며(로마 6,4), 두 번째 것은 육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분이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뜻입니다(필리 3,21).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해서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부활이 주어졌고, 그분에게 합당한 자들로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 그분과 함께 행복과 영광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째 부활이 그분의 몸인 우리의 둘째 부활의 동기와 증거가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죄로 인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파멸과 죽음에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서까지 우리 몸을 해방시키는 둘째 부활의 동기와 증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부활이 둘째 부활의 동기와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사도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줍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로마 8,11).
첫 번째 죽음과 두 번째 죽음
-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묵시 20,6)라는 말씀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첫째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그의 영혼을 얻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복되다는 것은 그의 몸까지 다시 살려주실 것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복됨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둘째 죽음이 그들에게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한다.”(묵시 20,6)라고. 만일 첫째 죽음이 한 순간 그들에게 세력을 행사했더라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죄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로마 5,14).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듯이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로마 6,9). 그러므로 둘째 죽음은 그의 세력으로 복된 이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현재 지배하고 있는 첫째 죽음도 그대로 그의 세력을 지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첫째 죽음이 우리 각자의 죽음을 쳐 이기셨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첫째 죽음은 이미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iram captos)을 해방시켰고, 둘째 죽음은 앞으로 그의 지배 아래 있게 될 사람들을(capiendos)해방시켰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음에 떨어져 파멸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둘째 죽음에 머물러 있게 될 가능성에서도 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이기셨다
“죽음아, 내가 너의 죽음이 되리라.”(호세 13,14 70인 역)라는 그리스도의 이 협박은 얼마나 진실 되고, 사랑으로 가득하며 위대합니까!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으로 대가를 지불하시고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죽음을 삼켜버린 그의 승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놀랍습니까! 참으로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도다!(1코린 15,54)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복된 사람은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한 너는 패배를 당하고 네가 사용하던 무기는 빼앗겼다고 조롱을 받으리라. 그런데 그의 독침은 어디로 갔습니까? 죽음의 독침은 죄입니다(1코린 15,56). 이 독침이 우리 인간에게 박혔으나 세기를 지나면서도 죽음의 독을 해독시킬 치료제가 없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리하여 죽음이 승리자가 되어 첫 아담으로부터 둘째 아담에까지 군림하였습니다. 태초부터 전 인류는 죄의 사슬에 묶여 있었고, 죽음의 빚 문서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1코린 15,57).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음의 빚 문서에 묶이지 않으신 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4,25). 왜냐하면 그분이 죽으심으로써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할 징벌을 대신 받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의 동기와 형태를 우리 안에 영원히 확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로마 6,9)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다시는 죽을죄를 범하지 않고 죽음 또한 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되고 거룩하다는 것은 둘째 죽음까지도 그들을 권력으로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승리함으로써 첫째 죽음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런 사실을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희망해야 합니다(필리 3,10-11).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기 위해 사도가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장해물로 여기고,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 것은(필리 3,8-9)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약하게 만들고 더럽히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모든 재산과 자기 자신마저도 온통 희생으로 바치고 그리하여 불사불멸과 영예를 이자까지 곁들여 받는 이 교환은 진정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 썩을 몸, 육신(animale)은 묻히고,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 영적인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면 이 이익을 위해서 교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1코린 15,43-46 참조) 우리가 세상에 죽는다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리 1,21)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
오, 탐욕스런 자들이여,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들이여! 왜 너희는 참된 이익이 되는 것을 얻는 기술은 배우지 않는가? 왜 너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가치 없는 것, 손해가 되는 일, 쓰레기와 같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는가?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는가?”(이사 55,2).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데도”(요한 6,33 참조) 그것을 여러분의 돈보다도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빵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려면, 이 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맛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두쇠가 돈보다 자신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할 때 비로소 그는 살아 있는 동안(집회 10,10) 자신의 영혼을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팔아넘기지 않게 됩니다. 지혜로운 장사꾼은 물건의 가치판단에 신빙성을 잃었을 때 -나는 여기서 바오로를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목숨까지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사도 20,24).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자기 영혼을 보존하기 위해 그것을 잃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요한 12,25).
선한 의지의 가난함 안에서
-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루카 18,24) 돈을 모으는 데만 집착하는 사람은 오늘 우리가 먹을 과월절 희생양인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1코린 5,8)과 바꿀 돈을 손으로 저울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복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가난한 아들들이여! 여러분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돈 없는 이들이여, 어서 와서 양식을 사서 먹어라.”(이사 55,1)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부자보다 더 쉽고 빠르게 보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2코린 6,10) 그것을 살 돈이 없다면 좋은 의지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더 부유합니다. 성서에 “어서 와서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1)하신 말씀은 옳습니다. 복된 가난한 이여, 내가 이런 멋진 교환의 조건으로 좋은 의지만을 당신에게서 요구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당신에게 거저 주려고 하는 것을 배은망덕(ingratus)하게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당신이 복된 가난으로 얻은 것을 안타깝게도 배은망덕으로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얼마나 큰 이득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세상의 멸망에 넘겨지는 대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지를! 세상의 헛된 영예와 영화에 도취하지 않는 대신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는 것이(마태 26,29)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아들으십시오.
어린양의 잔치에 초대받음
어린양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진수성찬을 준비하시고 벗들을 초대하십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벗들이여, 먹고 마시어라. 흠뻑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이 음식과 음료야말로 생명의 신비, 불사불멸의 명약, 첫째 부활의 동기, 둘째 부활의 보증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안의 신적 본성(substantiae)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지켜나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히브 3,14)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받은 은총을 잘 보존하라!
은총을 받은 사람이 그 후 그가 토해놓은 것에로 되돌아간다면(잠언 26,11), 집어삼켰던 재산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밀어내시거나 아니면 그의 뱃속에 들어 있는 음식은 썩어 독과 쓸개로 변할 것입니다(욥 20,14-15 참조). 만일 인간을 구원하는 계약의 피를 더럽히고 은총의 성령을 모욕한다면(히브 10,29), 그가 받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고, 삼켰던 재산을 다시 토해내게 되는데, 성서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남아 날것 없이 마구 집어삼키고, 어찌 자기의 영화가 오래 가리라고 믿겠는가?”(욥 20,21)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열매를 맺어라
- 아마도 이런 가혹한 심판은 은총을 받고 하느님 집에서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 크신 선의를 잊어버리고 우리에게 전파하지 않은데 대한 심판일 것입니다. 입속으로만 중얼대는 그들의 말은 무미건조하고, 그들의 행동은 부도덕하여 내장으로 스며드는 약물 같습니다. 더욱이 은총은 그에게 진노의 심판이 될 것이고 그의 허영과 멍청한 행동은 모든 것을 토해낼 것입니다. 성서는 또 말합니다. “남아 날 것 없이 마구 집어삼키고 어찌 자기의 영화가 오래 가리라고 믿겠는가? 남아돌아 흥청대다가, 재난이 밀어닥치면 갑자기 옹색하게 되고 만다네. 배를 채우려거든 채우게. 그러나 진노의 불길이 떨어지고 죽음의 화살이 쏟아져 내릴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욥 20,21-25 참조) 예언자가 한 이 말은 옳은 말이며 그대로 증명 되었습니다. “죄인들 위에 그리고 은총의 축복을 받고도 평화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 위에 전쟁의 비가 쏟아져 내릴 것이고,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물처럼 불과 유황의 비를 내리시어 타는 듯한 바람이 그들 잔의 몫이 될 것입니다”(시편 10,7).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면 하느님께서 그 땅을 축복하실 터이지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되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오래지 않아 저주를 받아 마침내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좋은 구원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우리는 확신 합니다”(히브 6,7-9).
처음 받은 은총을 완전에 도달하게 하라
여러분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부활이 가져다 준 구원의 힘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모된 여러분은 이제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동반자를 통해서 성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성령 안에서 일치를 통해 그리스도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본성의 시작을 변함없이 보존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성장에도 힘써야 하고, 여러분이 받은 특은을 통해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이 위대한 담보에 신뢰를 두십시오. 그리하여 두 번째 부활에도 영원한 참여자가 되는 구원의 증거를 내놓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며(요한 11,25) 우리를 위해서 삼일이나 죽음 속에 묻혀계셨고, 지금은 살아계시며 영원히 다스리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