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가 첫째 되다
죽다 - 죽음 - 삶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트라우고트 오세Traugott Ohse 편역
달콤한 추억Dulcis memoria
“하느님의 사람이여, 흙에 속한 사람, 너 자신을 흙에 처넣고, 유혹하여 지옥에까지 내리누르는 그 사람 벗어던지기가 두려워 떨지 말라.”(총서에서 인용, Tyrolia)(Ⅲ 391-392). 누가 말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쓰는 이 사람은 누구이고, 누가 이 사람인가? 수도원 역사와 예술사에 훌륭한 이름을 남긴 파리에 있는 쌩 데니 수도원 아빠스 쉬제Suger이다. 그와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오랜 친구로서 폭넓은 서신교환을 통해 대화해 온 사이이다. 나이도 서로 비슷했다. 쉬제는 1151년 1월 13일에 귀천했고, 베르나르도는 2년 후인 1153년 8월 20일에 그를 따랐다. 쉬제와 베르나르도, 이 두 동시대 사람, 서로 우정을 나눈 두 아빠스는 서로에게 권고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 둘은 사랑 안에 맺어져 있었다. “하느님의 사람, 흙에서 온 흙인 사람, 흙에로 돌아가지 않고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 ……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필리 4,7). 그런데 나는, 나의 사랑하는 벗, 그대를 그 전에 참 보고 싶었소. 죽어가는 그대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나는 그대를 처음부터 사랑했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오. 나는 완전한 신뢰로 내가 그토록 사랑한 그대이기에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소. 그대는 내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만 나를 앞서간 것이라고. … 그대가 우리보다 앞서간 그곳에 도착하거든 우리를 기억해 주오. 그리하여 우리도 머지않아 그대를 따라, 그대에게 도달할 수 있게. 그동안 그대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오. 그대와의 달콤한 추억을 우리가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대의 현존이 슬퍼하는 이들에게서 떠나 있을지라도.”
이토록 열린, 이토록 죽어가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는 것을(위안이 되는 것을) 쓸 수 있으려면, 죽음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죽음에게서 그의 마지막 권리를 박탈하고자 하는 확신과 확증이 필요하다. 베르나르도는 인간, 그리고 인류의 이 마지막 질문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수도승들은 우리에게 어떤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우리 삶-공동체는 하나의 죽음-공동체인가?
베네딕도회 초기 창립문서와 특히 시토 초기 문서에서, 그리고 규칙 안에서도 죽음과 장례와 관련된 것이 전혀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특이하다 할 것이다. 물론 머리말에 “너희는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에 달려, 죽음의 암흑이 너희를 덮치지 않도록 하여라.”(머리말 13) 라고 되어 있다. 죽음이 재앙처럼 위협하고 있다. 그러니 위협하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규칙 4,47). 그리고 이미 혀가 죽음과 삶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규칙 6,5). 그렇다, 죽음이 쾌락의 문 가까이에 있다(규칙 7,24). 우리 죽음은 예수의 죽음과 같아야 한다. 그분에게 충실한 자는 죽어가고, 도살당할 양들처럼 여겨진다(규칙 7,38).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과 함께 죽음은 새로운 특질을 얻는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은, 그냥 죽어가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
Ⅰ. 베르나르도는 돌봄 받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세 가지 예! 이미 병이 악화된 중태에 있는 베르나르도는 아놀드 폰 본느발Arnold von Bonneval 아빠스로부터 선물을 받고 자신의 안부를 묻는 그의 편지에 마지막 서간이 된 답장 안에 자신의 충격적인 상태를 써 보낸다. 괴로운 감정이 그의 전 인간을 휩싼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게 오히려 편안합니다.”(Ⅲ 501쪽).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위장이 고통의 원흉이었던 것 같다. 발과 종아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적 인간은 “약한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은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구세주께 간청해 주십시오,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는 그분이시니, 정확한 시간에 찾아오는 죽음을 미루지 마시기를, 그보다는 오히려 보호해 주시기를 청해 주십시오.” 이것을 그는 도움 받지 않고 자필로 썼다: “그리하여 당신이 당신에게 친숙한 이 손을 통해서 나의 사랑을 알아 주시기를.”
- 말라키아스Malachias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상세한 자서전을 써 주었다(Ⅰ455). 베르나르도 자신 역시 자기 몸에서 체험한 고통들은,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서 미리 볼 수 있었던 것들이며 그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을 그는 감동적인 언어로 아름답고 감명 깊게 묘사한 것이다. 말라키아스는 아일랜드 출신이었으며 1148년, 54세의 나이로 위령의 날과 모든 성인 대축일 밤 사이에 귀천하였다. 광대한 회상의 글들, 높은 등급의 경의! “성인들은 살아있다 …, 확실히 죽은 후에도 우리 가운데 계속 살면서, 살아있는 죽은 사람들을 참된 삶에로 부르고, 삶에로 소생시킨다.”(Ⅰ455) “성인들은 세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지상에서 속량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말라키아스 주교를 다시 우리 가운데에 불러내는 것은 그다지 쓸모없는 일이 아닌 것 같다.”(457) 이 임종자는 자신의 지체를 더는 움직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을 들어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 위에 강복해 주었다. “그의 강복은 나의 상속재산이다.”(459) 그것은 마치 그와 함께 모두 아플 것만 같았다. “형제들은 부지런히 움직였으며, 호기심어린 주고받음으로 분주했다.”(589) 모든 성인 대축일에 “우리는 성가를 부르며 울었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말라키아스는 노래도 부르지 않았지만 울지도 않았다. 어떻게 울겠는가, 기쁨 가까이에 간 사람이? 뒤에 남아 있어야 하는 우리는 슬픔 속에 버려졌다.”(593) 황혼이 왔고, 이는 말라키아스를 위해서는 아침서광이었다. 베르나르도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말라키아스는 모두에게 각각 손을 얹어 축복해 주고, 그들을 쉬라고 보냈다.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밤중에 모두 돌아와서 그의 친구를 고향길에 동반하며 배웅했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손에서 천사들의 손에 넘겨졌고, 주님 안에서 복된 영면에 들었다. 그렇다. 정말 그는 영면한 것 같았다. 평화스런 얼굴은 평화로운 사별을 증거해 주었다 …. 그 자신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595) “어떤 이유가 거기 있을까, 우리가 말라키아스를 애도할 때? 그의 죽음은 소중하지 않은가? 그는 죽었다기보다 잠자고 있지 않은가, 죽음의 항구는 동시에 생명의 항구가 아닌가, 말라키아스, 우리 친구는 잠자고 있는데, 내가 슬퍼하다니? …… 울음을 지나가버린 사람을 내가 애도하다니?”(597)
아마Armagh의 대주교이며 아일랜드의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가는 도중에 클레르보에 들렀다. 그의 귀천 다음날 베르나르도는 그를 위한 조사弔辭를 썼는데, 이것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신비의 증거이며 또한 빛나는 부활신앙의 증거가 된다. 죽음은 잔인하다. 그는 한탄스런 교회에 이런 잔인한 상처를 덜어 주지 않는다. 유일한 한 사람을 빼앗아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그것으로 징벌한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덤벼들듯, 장님이고 어리석은 것이 죽음이다. 그는 광기로 말라키아스에게, 그리스도의 충실한 지체에게 덤벼들었고, 그렇게 모든 선택받은 이들의 머리 위에 돌진한 것인가? “죽음이 생명을 쳤으나, 생명은 죽음을 자신 안에 가두었고, 그렇게 생명이 죽음을 삼켜 버렸다(2코린 5,4).”(909) 그러나 만일 죽음을 이겼다면, 죽음이 죽었다면, 어떻게 그가 여전히 모든 것 위에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사탄의 무기이고, 악이 죄와 죽음의 원흉이라면, 모든 것은 이긴 것이고, 심판 받았고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죽음은 전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죽음 전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정착되고 묶이고 못박혔다. 우리에게서 떼어내려고 억지로 강요할 것도 없다. 더는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올 것이다. 그러면 ‘죽음아 너의 승리는 어디 있느냐?’(1코린 15,55)라고 물을 것이다. 마지막 원수의 힘이 빼앗길 것이다.” 지금 그는 청신한 잠을 자고 있다.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다’(시 115, 15). 노고의 끝은 소중하고, 승리의 완성, 생명의 문과 완전한 안식에로 들어가는 문(911).
말라키아스 주교를 위한 장례설교 외에 다른 두 개가 전해지는데, 베르나르도의 친형제 게르하르트와 훔베르트를 위한 것이다. 이들은 클레르보 창립공동체에 속했고, 게르하르트는 1125년에 원장이었고, 가장 가까운 그의 고문이었으며 그에 앞서 1148년에 귀천하였다.
- 게르하르트Gerhard
베르나르도는 솔로몬의 아가설교 26번째 설교를 그에게 헌정하였다. 그의 형에 대한 북받치는 감정을 그는 억제하였다, 믿음보다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례행렬에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그렇게 무덤 앞에 섰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날 때까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울었고, 내가 울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그들은 그를 애도하지 않고, 그를 잃은 나를 애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391). 그는 자신의 아픔을 믿음의 힘으로 저항했고, 무의미하게 쏟아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억누른 아픔은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로 인해 쓰라림은 더욱 커갔다. “내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니, 달리할 수 없거든 내가 마음에서 겪는 고통아, 밖으로 나가라.”(391). 그런 다음 감명 깊은 말로 두 형제와의 사랑의 끈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묘사한다. “내 영혼은 혈연이 아닌, 그들의 영혼에 매달렸고, 그 일치는 두 영혼에서 하나를 만들었다.”(403). 그러나 사랑의 이 끈은 하느님이시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되며’(1코린 6,17), 신적 상태 안에서 완전히 사는 사람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느끼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살게 된다. 그는 하느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누가 하느님과 밀접하게 합일을 이룬다면, 그는 더욱더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395).
이 설교는 전부 읽든지, 아니면 봉독하는 것을 듣든지 해야 할 것이다. 어떤 마음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말이 아픔으로 가득할지라도 … 거기에 불평은 없습니다. … 당신께서 게르하르트를 주셨고, 당신께서 그를 거두어가셨습니다. 그를 빼앗겼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지라도 그가 우리에게 주어졌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를 가질 수 있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받아 주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409). “당신께서 사별한 그를 다시 청하시어 거두셨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것을 다시 가지신 것이고 당신의 소유를 되돌려 받으신 것입니다. 눈물이 제 말의 끝을 맺습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이것을 마무리해 주십시오, 그에게 경계를 지어 주십시오.”(411).
- 훔베르트Humbert
죽은 자들의 회상에 대한 가르침으로 “훔베르트의 죽음”에 관한 설교를 썼다(Ⅷ 950-965). 훔베르트는 카사 데이Casa Dei(하느님의 집) 베네딕도회에서 20년을 살았다. 그 후 1117년부터 클레르보의 창립공동체에 소속되었고, 1125년에 원장이 되었으며, 베르나르도의 가장 가까운 고문이었다. 3년 후, 이니의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0년 후, 베르나르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레르보로 되돌아왔다. 베르나르도는 심하게 그를 질책했다. “그대가 나에게 써보낸 대로 그렇게 해야 더 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고 믿는가?(서간 141, WⅡ, 919). 클레르보 수도원에 되돌아와서, 지금까지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고, 잘 죽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는 이제 여기서 죽은 것이다. 죽음은 친구들을 갈라놓는 물릴 줄 모르는 욕심꾸러기 인간 살인자이다. “오, 잔혹한 야수, 오, 가장 쓰라린 통렬함이여!” 원수는 파괴한다. 그러나 무엇을? “의심의 여지없이 육신만을, 영혼에 관한 권한은 너에게 없다. … 훔베르트가 영원히 사는 동안 너는 영원히 죽어 있을 것이다. … 너는 훔베르트도 네 뱃속 깊숙이 가두었다고 믿겠지만, 되돌려 주어야만 할 것이다.”(953).
베르나르도는 홈베르트의 생애를 감동 깊은 말로 묘사하였다. “그는 참으로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했다. 다른 덕목들도 많으나 특히 온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이에게 그의 사랑스러움으로 친절했고 늘 호의적이었다.”(955).
집회서의 한 구절(집회 11,30)을 상기한다. “살아있는 한 그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왜냐하면 확실한 칭찬은 죽은 다음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것만큼은 의식적으로 주의했다.”(961). 아부와 허영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 둘도 모두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말은 그를 더는 건드리지 못하고, 그는 더 강하게, 더 행복하게 하느님의 말씀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죽은 이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보아라, 네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그분의 넘치는 감미로움을 선포하려 애쓰더니만, 이제는 그 신적 사랑의 심오함에 잠겨 버렸구나.”
베르나르도의 설교는 기도로 그 절정을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님, 제게 남아 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거의 저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훔베르트, 그와의 우정이 이토록 깊은 이유는, 이미 아주 긴 세월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마저 저에게서 데려가셨습니다. 물론 그는 당신의 것이지요! 저만 홀로 남아 이 충격을 감내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같이 죽습니다. ‘당신의 그 모든 파도로 저를 짓누르십니다.’(시 87,8). 저는 훔베르트를 애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더는 애도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제 자신과 그들 때문에 이 집과 다른 형제들을,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좋은 충고를 기대했던 이들을 애도합니다.”(963). 그리고 우리처럼 슬픔을 입에 담고 마음에 간직한 이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슬픔도 어떤 고통도 모르는 그를 애도해서는 안됩니다. …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을 보아서도 더는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서 그를 빼앗아 갔다고 해서; 오히려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963). 그는 지극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였다.
쉬제를 위한 위로편지, 말라키아스를 위한 자서전, 그리고 말라키아스와 게하르트와 훔베르트를 위한 세 개의 큰 기념 강론들에서 그는 수도승 생활과 모든 삶의 기본주제, 즉 자신에 죽고 하느님께로 향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해 주었다.
Ⅱ. 죽음 안에서 죽음 혹은 생명에로 죽음?
우리는 죽다 - 죽음 - 삶, 이에 관해서 말할 때 신중하게 그리고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인간 안에는 보살핌 받는 죽음에 대한 갈망이 살아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아픔없이 그것에서 떠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갈망(그리움)이 그를 어디로 끌어당기는가, 어디에 그의 목표를 두는가, 누가 인간으로서, 인격체로서 하느님과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주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죽음 안에서 베르나르도처럼 말할 것이다: “노고로부터 해방된 참된 안식”. 그뿐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봄 안에서 새로움과 안전에 대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Sentzen Ⅰ,6 in Werke Ⅳ S. 267). 설교 스케치나 청중들이 메모한 것들을 모은 대단히 많은 숫자의 짧은 메모들이 바로 이 죽다 - 죽음 -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한 언급이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슬픔에 가득 차 있어서, 지상적 결핍과 비참을 영원까지 가져간다. 또 다른 사람은 고뇌에 차 있다. 하느님의 일들은 돌보지 않고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에, 인색과 탐욕이 그 사람을 찢어놓은 것이다. “그들은 탐욕의 열기로 헐떡이며, 그들의 삶의 마지막 날까지 세상적 불안에서 영원한 곤궁의 고통에로 옮겨간다. 흥청망청 쾌락 속에 산 부자는 그 환락과 향락으로 육신과 마음을 비대하게 만들었고, 현재의 찰라적 쾌락과 오락 후에는 끊이지 않는 괴로움 속에로 던져질 것이다.”(311). 사람은 삶 안에서 죽어 있을 수 있고, 산채로 죽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는 생명에로 인도하는 죽음을 감수할 수도 있다. 생명 안에 산다는 것은, 생명의 입김이 “복된 생명의 은총과 결합되어 분명히 그에 참여함으로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597).
죄를 범함은 이미 엄밀히 죽음으로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이미 생명에로의 길인 것이다. “사랑을 소유한 종은 순명한다. 즉 누구나 순명하는 이는 사랑하고 사랑으로 두려워함이 순명의 스승이다. 이 두려움은 그에게 명령을 내려 자기 의지를 정화하게 하여, 거기에 사랑 자체가 자리잡게 한다.” 이렇게 베르나르도는 그의 간결한 진술 안에서 내적, 실재적 연관성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연기延期란 없다! “누가 오늘 하고자 하는 용의가 없으면, 내일은 더 할 수 없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며, 죽음의 시간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601).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에서 양분을 공급받아 영혼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포로들을 해방시키듯 우리를 끌어내실 것이다. 그런 다음, 베르나르도는 예수님께서 소생시킨 세 명의 죽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과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 죄와 죽음은 거의 동의어이고, 또한 용서와 부활도 마찬가지다.
인간 안에는 그리움(갈망)이 살아있는데, 이것은 형제들과 공동체와 공동생활 안에서 자양분을 얻어, 이 죄와 죽음에 떨어진 생존을 극복하고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자기 자신과 그에게 맡겨진 이들에게 바오로가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말씀을 배워 익히라고 말한다. “나의 바람(그리움)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3-24). 그는 단숨에 이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여러분 때문에 내가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Ⅳ 425).
그러나 계속해서 묻는다: 좋은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선인(善人)들의 죽음이 더 나은 것인가? “상응하는 삶을 산 선인한테 그 삶은 죽음을 귀중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주님 안에서 죽는 이는 행복하다고 말한다.(묵시 14장 13절부터, 요한 브람스의 장례미사곡에 나오는 이 성서구절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Ⅳ 503).” 그러나 사람이 정의롭게 살지 못했더라도, 그가 주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것만으로 죽음은 귀중하다. 그렇다고 순교자들만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요한 11,11). 자신이 예수님의 친구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모두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은 확신에 차 있으며 겁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어떤 고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 주님을 위해서 죽고 싶어서 진심으로 열렬히 불타는 사람은, 죽음을 더욱더 믿는 마음으로 열정으로 갈망하며, 더욱더 헌신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귀중한 죽음을 맞는다.”(503).
베르나르도는 사순절에 시편 90을 가지고 17개의 강론을 했다. 일곱 번째 강론에서 그는 피신처의 이미지로 “진리의 방패”를 사용했다. 그 방패는 “이승의 삶의 출입구와 미래의 입구를 지켜, 원수가 뒤에서 악한 일을 꾸미고 덮치지 못하고 앞에서도 위협할 수 없게 한다. 분명히 거기에는 파수꾼이 필요할 것이고, 안내자가 필요할 것이며, 굳센 위로자도 있어야 할 것이니, 무시무시한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유혹자를 대항할 때, 원조자와 협조자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Ⅶ 561-562).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유혹과 무책임이 세상과 인류에게 어마어마한 횡포를 부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에 대한 지식이나 느낌들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유배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있는 것 같으나, 공포의 장소에서 오히려 그리움의 장소의 노래를 불러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곳에 이제 “영의 완전한 즐거움으로 하프를 타며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거룩한 열정의 강렬함으로 고무되어 그곳으로 날아오르려는, 그래서 ‘아, 내가 비둘기처럼 날개를 지녔다면 날아가 쉬련마는’(시 54,7) 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 생각과 갈망으로 우리는 구원의 항구에 가까이 다가가, 닻을 던져 그리워하던 육지에 가 닿을 수 있다. 그렇다. 매일매일 기다림 속에 산다, ‘그의 변형이 올 때까지.’” 그런 다음 베르나르도는 직설적으로 “여러분이 지금 죽음을 준비하려고 서 있는 바로 그 항구가 부르심과 신적 정당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가장 안전한 길이다.”(567). 갑작스런 뛰어오름(도약) 한 번만으로 우리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베르나르도는 얼마나 명료하게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애써라. 그렇게 하지 않으려거든 이미 놓여진 다리를 걸어가려고 더욱 노력하라.”(569).
이 길(道)의 최후의 것들, 마지막 걸음이 “너에게 위협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신뢰 가득히 계속 걸어라. 그것들이 이미 가까이 온 것처럼 여겨질 때 더욱 용감하게. 너는 이 길 한가운데 와 있는데, 어찌 마지막이 가깝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신 말씀을 상기한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그러나 전체 전열(戰列)은 무너져야 하고, 거인들은 길들을 점거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며 통행로를 점령하여 숨어서 그곳을 지나가는 이들을 습격하려 한다. “그렇더라도 깊이 신뢰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 네 둘레에서 그들은 쓰러질 것이다. 너에게는 영원히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보다 더 그들은 너에게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너를 앞장서 가고, 뒤에서 따라가고, 너의 출구뿐만 아니라 입구도 지켜 줄 것이다.”(569).
베르나르도는 형제들에게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또는 편지를 쓰는 중에도 갑자기 기도를 자주 바치며,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렇게 강론 “왜 사는가”에서는 “주 예수님, 당신 곁에서 헤아릴 수 없이 원수들이 무너지기를, 아니 무너질 뿐만 아니라 땅바닥에 던져지기를, 사방에서 그들이 밀려올지라도, 하느님의 면전에서는 불 앞에 밀이 녹듯 녹아 버리고 사라져 버리기를. 제가 어떻게 이 무력한 자들 앞에서 두려워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며, 무너지는 자들 앞에서 무엇 때문에 놀라겠습니까? 제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지라도, 저는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하느님, 당신께서 제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571).
형제들의 사목자인 그에게 설교는, 그의 설교가 가닿은 모든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도 자신을 위해서도 사목자요 설교가가 되어 주었음을 “여러가지 설교 모음집”에서 엿볼 수 있다(Ⅸ 425-439). 그것은 “세상 창조 시초부터 그 나라를 위해 준비되어진 이들과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전적으로 걸맞은 일이고, 정의의 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429). 누가 하느님의 손님으로 천막에 머물 수 있는가? “흠없이 살아가는 이”(시 14,2)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희망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지체들이 생활 태도와 신앙 안에서 머리에 붙어 있기만 하면, 머리와 비슷한 모상으로 변화된다(431).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 태도로 산다는 것은 전생애 동안의 과제이다. 이 싸움을 게을리 해서도 안되고,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도 안된다!(435). 확실히 죽음은 온다. 그렇지만 주님의 애인을 위해서 그것은 잠자는 것일 뿐이다. … 죽음은 생명의 문이고, 위안의 시작이다 …. 결코 소홀히 하지마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에 두려움이, 죽을 때에 고통스러움이, 그리고 크신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봄에 부끄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437).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위험스런 태만과 저주받을 태평에 빠지는가? “어찌하여 우리 이 처량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오류에로 끌고 가는가?” 이 괴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말한 베르나르도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우리의 이 마지막 때를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합시다!”(437). “가장 복된 사람은, 부끄러움으로 가릴 필요 없이 완전히 덮개를 벗긴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킨 사람이며, 그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 위에 찬미와 찬양과 영광을 영원히 받을지어다.”(439).
아빠스는 전례력의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주제로 설교하지 않고, 솔로몬의 아가에 대한 해설을 80주기에 걸쳐 설교했다. 거기서 우리는 그의 마음 전부를 발견하게 된다. 베르나르도는 큰 열정으로 자신의 신부를 보살피는 애정 가득한 신랑의 이미지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복된 신비체험을 보았다. 그는 얼마나 아름답게 이것을 묘사하였는가! “나는 기뻐 어쩔 줄 모르겠네. 임금께서 주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친밀하고 복된 공동체를 우리 안에 형성하시다니.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 낯선 곳에서 영혼과 혼약을 맺으시고, 열렬한 사랑에 사로잡힌 신랑이 그녀에게 애정을 베푸시다니. 이렇게, 그렇다, 의심할 나위 없이 지금 내가 지상에서 읽고 있는 이것과 똑같이 천국에서 이럴 것이다 ….”(Ⅵ 197).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라! 육체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여겨지며, 그분과 함께 사는 것으로 간주된다. 영혼은 여기서 이미 자신의 습관적인 사고방식과 사고하는 습관들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빠져나간 것이다. “생명과 관계를 끊지 않은 죽음은 좋구나. 그것이 더 나은 것에로 들어 올려진다면 더더욱, 그 안에서 육신이 부서지지 않으면서 영혼이 들어 높여지는 것은 참으로 좋구나.”(199).
우리는 이런 황홀경을 관상(Contemplatio)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삶 안에서 탐욕으로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적 덕행을 쌓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변에 연루되지 않음은 천사같은 순수함을 지녔다고 하겠다. “두 가지 모두 하느님의 은사이다. 두 가지 다 황홀경이고, 양쪽 모두 자기 자신을 초월함이며, 자기중심에서 벗어남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종류의 상상들이 사방에서 밀려들어 너를 덮쳐올 때, 하느님의 순수함을 통해서 한 번의 날갯짓으로 그것들을 네 등 뒤로 던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전에는, 침묵의 장소, 고독한 은둔처, 맑은 햇빛, 평화의 보금자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안식에 들어가면, 그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다: “여기 이 고독한 곳, 빛 속에 거처가 있네.”(201).
이렇게 지금은 탄식만 하고 있지만, 이 억눌린 탄식은 큰 소리를 가지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기만 한다면, 그렇다, 몰려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꼴찌가 첫째 될 것이다.”
부록: Cistercienser Chronik(시토회 역사) 122호, 2015년 1/2 독어에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