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ed Cyprian Tansi 복자 치프리안 텐시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Ambrose Southey




유년기
이웬 텐시(Iwene Tansi)는 현재 나이제리아의 아남브라(Anambra)주에 있는 아귤레리(Aguleri)에서 가까운 이그뵈주누(Igboezunu)에서 1903년 9월에 태어났다. 양친은 이교도였으며, 그에게는 3명의 형들과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 5명의 자녀들을 양육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웬을 그들 친척 중 한 사람인 로버트 오레키(Robert Orekyie)에게 맡겨야만 했다. 그 사람은 학교 교장이었다. 로버트는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이웬을 9살 때 가톨릭교회에서 마이켈(Michael)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는 처음부터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그의 후견인 로버트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괴팍스런 사람이었다. 화가 잔뜩 난 눈으로 마이켈을 노려보며 즉시 순명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어린 소년은 이런 것들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순명을 배워갔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인을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했으며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굴레리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주말을 어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과 놀다가 사고로 그의 왼쪽 눈을 실명했다. 이 장해에 관해서 그가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은 훨씬 후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예하였고, 오랜 시간을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보냈기 때문에 동네 젊은이들에게 조롱을 받기도 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다. 그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대단히 성실한 사람으로서 그는 생도들에 대한 관심이 컸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마침내 그는 아굴레리에 있는 성 요셉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이었고 반짝이는 눈에 항상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성격에서 오는 수줍음이 있었다.
1922년, 그는 그의 어머니가 비극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갔다.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주술사’를 불러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그 주술사는 주술을 한 다음 이 이변의 원인이 마이켈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지역 관습에 따라 그의 어머니는 독을 마시고 죽어야만 했다. 그녀는 그 촌락의 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고 느꼈고, 그렇게 확신을 가진 그녀는 독을 마시고 죽었다. 마이켈에게 이런 행위는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사제가 되고 나서 왜 그토록 엄하게 이교도의 관습에 반발했는지는 그 어머니의 사건을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 비극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도 있었다. 그의 세 형제 중 두 명이 개종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나는 나이제리아에서 수도원 창립을 위해 장소를 찾고 있었을 때 그 두 형제를 만나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마이켈의 여동생 오비암마(Obiamma) 역시 죽기 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 모든 스토리는 마이켈에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련이었다.
신학생
마이켈은 교수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항상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족과 형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제직 소명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은 그를 말리기 위해서 그가 가진 재산으로 성공할 가능성과 대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또한 그가 평생을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이켈은 사제직을 위해서 공부할 결심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이그바리암(Igbariam)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 신학교의 규율은 현대 생활수준과 비교할 때 상당히 엄했으나 그것에 적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는 자신의 이전 삶에서 유감스러운 것이 몇 가지 있었다고 부언하였다.
그의 사제직을 위한 준비는 12년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그때는 소신학교라고 부르는 코스가 있었다. 거기서 라틴어와 다른 과목을 배우게 되는데 그는 이 코스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3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그 3년 동안 마이켈은 소교구에서 일을 돕기도 하고 강좌를 해주기도 하면서 보냈다. 1933년, 오니챠(Onitsha) 교구에 대신학교를 새로 개교하게 되면서 마이켈과 다른 2명의 신학생이 1기생으로 학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즉시 다른 젊은이들도 입학했다. 마이켈은 그 학교의 회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30세가 넘었고 다른 신학생들보다 휠씬 나이가 많았다는 것을 언급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안토니 느웨도(Antony Nwedo)의 회상을 읽어보면 흥미롭다. “사실 나는 그 사람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그의 친절함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친절에는 애덕이 포함되어 있었고, 지칠 줄 모르는 애덕의 불꽃이 그 안에서 빛나는 것을 본 나의 젊은 마음에 그 빛이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선량함 자체가 널리 퍼져나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텐시 신부의 형제애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형제애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신학교를 사랑의 집, 기도와 고행의 집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텐시는 회계관 임무를 맡아서 이 세 가지 덕을 모두 스스로 체현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이켈이 회계관이라는 것에 모든 사람이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식품에 관해서 특히 그는 엄격했기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의 식품과 다른 필수품을 책임지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만족 해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굶어 죽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식물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번 식사가 끝나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 쓰레기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검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검토한 후 다음 날 식사 준비할 고구마와 가리(garri는 열대 지방에서 나는 카사바 녹말로 만든 음식)와 콩의 양을 얼마나 보충해야 할지를 정했던 것이다.”라고 한 신학생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마이켈이 장상들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이지 그 자신은 엄격한 규제를 오히려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영역에서도 낭비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엄격한 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여러 가지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천적인 친절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았다. 한 번은 그가 옷을 입지 않은 가난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가지고 있던 타올을 그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입을 것조차 없는데 나는 여분으로 몸을 닦을 타올을 소유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이 밖에도 다른 실례가 많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제직
마이켈과 그의 동료 신학생들에게 서품 받을 시기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마이켈 자신은 부제가 되기 직전에 의혹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교장은 그의 두려움을 달래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사제 수품에 관해서 직접적인 상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1937년 12월 19일에 그는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사제로 수품되었다. 이 날을 그의 생애의 가장 위대한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훌륭한 사제였었다는 것은 그 후 12년 동안에 놀랍게 드러났다. 그의 열성과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과 위탁에 관해서 10명 이상이 증언한 평가 보고가 있다. 그의 첫 소임지, 네위(Nnewi) 소교구에서 그는 존 안요구(John Anyogu) 신부(후에 에누구의 주교로 수품 되었음)를 보좌하는 일을 했다. 거기서 그가 했던 역할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이 남아 있다. “마이켈 신부는 네위에 살고 간 모든 사제들 중에서 일을 가장 훌륭하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을 절약하여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소식을 했고 식탁에 앉아서 시간 낭비하는 것을 줄였다. 모두는 그를 성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차이를 두지 않았다. 성당복도를 청소하는 여인들과 함께 쓸고 닦는 일을 했다. … 무일푼인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비길 데 없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넉넉치 못한 급료에서 십일조를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내놓았다. 특히 미션에 데려온 병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특히 네위니언들 중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병환자가 많았는데 그들을 위해서 마이켈 신부는 나에게 요리된 음식을 갖다 주라고 했다. 받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악성피부병환자(나병환자)들이었다. 그는 받은 급료와 미사 봉헌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었다.”
소교구는 널리 분포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제는 고생하며 공소들을 방문해야만 했다.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보려고 신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제는 몇 시간이고 고백성사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6시 미사에 참례하려고 오면 마이켈 신부는 벌써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보통 밤중에 외출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생각했고, 이 소교구에서도 밤중에 환자가 부를 때는 가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정해놓고 있었으나 마이켈 신부는 환자가 부르면 언제든지 즉시 응답했다.
이시체이(Isichei) 부인은 그녀의 소중한 저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마이켈 이웬 텐시의 생애”에서 네위에서의 그의 사목활동의 중요한 윤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개인적인 수덕, 고행, 육체적인 힘든 노동과 인내하는 잠재력, 병자와 빈궁한 사람들에게 베푼 친절, 혼인의 성성과 여성의 양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 개인적인 카리스마.” 1940년, 두누코피아(Dunukofia)에서의 사목에서 보여준 몇 가지 다른 중요한 점은 여기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교구는 아굴레리 남부에 있는 22개의 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토지에는 미신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악마의 숲’이라고 선교사들에게 전해주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죽든지 아니면 몹쓸 병에 걸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마이켈 신부가 우선적으로 행한 것은 그 지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면서 성수를 뿌리는 일이었다. 어떤 해도 입지 않고 ‘숲’에서 나오는 그를 본 사람들은 매우 놀랐고, 용기를 얻어 그 숲을 전부 베 버릴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들은 그곳에 교회와 학교, 사제관과 기숙사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빈약한 건물이었지만 그는 벽돌을 찍어내어 지칠 줄 모르고 온 정력을 쏟아 부어 그 집을 짓는 데 앞장섰다. 그것은 그들에게 살아있는 모범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신부가 그렇게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으며 스스로 일을 돕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를 건축가로 높이 평가했고 전 지역에 건설 사업을 활성화시켰다. 이 기간 동안에도 그는 엄한 고행생활을 계속했다. 식사는 적게, 잠은 돌 위에 나무판 하나를 깔고 잤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단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젊은 신학생들이 그와 함께 생활할 때는 충분히 먹도록 배려했다. 그의 옷은 매우 검소했지만 항상 청결했다. 그는 수단 한 벌만은 좋은 것으로 보관했다. 주교가 방문 왔을 때만 그것을 입었다. 다른 세 개의 수단은 모두 헤졌지만 늘 얼룩 없이 깨끗했다. 그는 이웃 촌민들과 같은 수준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청빈과 단순을 사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아르스의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와 비교하기도 했는데 마이켈 신부는 사실 그를 가장 좋아했다.
마이켈 신부의 사목적 활동에는 특기할만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그의 여성에 대한 배려와 젊은 남성들을 사제성소에로 분발시킨 일이다. 첫째 점에 관해서는 이시체이 여사에게서 세부적인 훌륭한 보고를 들을 수 있다. 그녀가 기록한 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주된 관심은 여성을 영성적으로 양성시키는 데 있었고, 그들의 처녀성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소교구에 특별한 주거지가 필요했고, 젊은 여성들이 결혼하게 될 경우 그들에게 도움이 될 교육을 시켰다. 그것은 주로 남편될 사람과 혼전 동거를 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끔 이것은 구혼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으나 마이켈 신부의 완강한 주장으로 최종적으로는 항상 그가 이겼다! 이런 일을 통해서 그는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조직을 구성하는데 큰 신뢰를 얻어냈다. 이 애덕의 조직의 가지들을 그의 소교구 전체에 퍼져나가게 했고, 각 장소마다 그것을 구성하게 했다. 이 조직은 많은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세례받기 원하는 환자들, 촌락의 도의적 움직임에 대한 정보, 개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준비 등을 그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여성들을 위해서 특히 교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학교를 세우고 충분한 교수진을 배속시키는 일들로 그는 조금의 여분의 시간도 가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상급 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소년들을 위해서 하나, 소녀들을 위해서 하나의 기숙사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떻게 그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았을까? 이것은 신비다. 마이켈 신부는 또한 어린 소녀가 고아가 되면 그녀를 학교에 보내고 책과 옷을 장만해주고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처한 고아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명의 고아들을 동시에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당한 교육을 받도록 온 힘을 기울였다. 위에 두 번째로 언급한 것은 그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제 소명을 격려하고 용기를 가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방면에 아주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 같다. 마이켈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은 아린제(Arinze) 추기경은 자신의 소명을 그의 은덕이라고 말했고, 오니챠(Onitsha)의 스테펜 에젠야(Stephen Ezeanya) 대주교 역시 그의 사제 소명에 대한 생각은 마이켈 신부에게서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고드프레이 오키에(Godfrey Okeye)는 그가 젊은 신학생이었을 때 소명에 회의를 느꼈고 그래서 기도하려고 성당에 갔었다. 그 때 마이켈 신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고 어느새 그의 회의감은 사라졌음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에 에누구(Enugu)의 주교가 되었다. 마이켈 신부가 사목했던 소교구에서는 70명도 넘는 사제가 배출되었다. 그는 훌륭한 설교가였으며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의 가르침은 오래 기억되었다. 특별히 잡다한 이교풍습과 미신에 단호하게 대결했다. 그런 것을 근절시킬 수 없는 경우라도 그의 교구민들이 미신에 의존하는 것을 감소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두누코피아(Dunukofia)에서 5년간 사목했고, 그 후 아크푸 아잘리(Akpu Ajalli) 교구로 전임되었다. 이 전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두누코피아에서 대단히 행복했었기 때문에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아크푸 교구민들이 흑인 사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확실히 백인 사제를 요청했다. 마이켈 신부는 이 문제를 그의 영지(英知)와 용기로 맞서기로 했다. 그는 교구의 주요 인사들을 소집해서 정황을 설명했고, 그들에게 공평한 시도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이에 동의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냈던 것이다. 두누코피아에서 경험했던 대로 신임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이전의 소교구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규율을 정해놓고 지켜나갔다. 자주 기도에 전념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노동을 했고, 자신을 위해서는 여가 시간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소임지는 아굴레리 교구였다. 1949년경이었다. 그의 보좌신부는 클레멘트 울로구(Clement Ulogu)였다. 후에 이 보좌신부는 마이켈 신부를 따라 마운트 샌트 베르나르드(Mount Saint Bernard)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마이켈 신부가 전임되어 왔을 때 교구는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가 토속적인 습관을 엄격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신부 자신도 이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으나,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다시 엄청난 일을 추진했고, 장거리를 여행하며 교구민들을 방문하면서 교구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사목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1944년, 그는 이미 대주교에게 관상생활에로의 소명에 대한 가능성을 여쭈었으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던 중 1949년, 정황이 바뀌었다.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
마이켈 신부가 수도승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헤리(Heerey) 대주교가 그의 사제들에게 피정 지도를 하면서, 관상생활에 대해 해준 강의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피정 후 마이켈 신부와 클레멘트 울로구 신부는 대주교를 찾아가서 이 생활양식이 자신들이 원하는 생활이라고 밝히면서 그들의 희망사항이라고 말씀드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는 대주교 자신이 나이제리아에 관상생활을 심어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가 지원자를 구하고 있을 때 위의 두 사제가 자신들의 의사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부분은 그 자신이 젊었을 때 아일랜드의 마운트 멜러리 수도원(Mount Melleray)에 입회하기를 원했었으나 건강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이야기인데 그 후 그는 성령회에서 몇 년간 지냈고 그곳은 유럽인에게는 짐이 될 만큼 힘든 환경풍토였다고 한다. 어느 해석도 전체를 볼 때, 정확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본 해석 안에서 이미 마이켈 신부가 1944년, 대주교에게 관상생활에로의 자신의 소명에 관해서 이야기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동 골롬바 마르미온(Dom Colomba Marmion)(복자로 시복되었음)이 저술한 책 ⌜그리스도는 수도자의 이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1947년, 대주교는 그의 사제들에게 이제 관상생활이 그들에게 열려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지 이 움직임은 1949년 7월, 대주교가 아일랜드의 로스크레아(Roscrea)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어 앞으로 나이제리아에 수도원을 창립할 목적으로 두 명의 사제를 준비시킬 용의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봄으로써 시작되었다.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얼마 지난 후 그는 같은 질문의 서간을 아일랜드의 몬 멜러리 수도원과 잉글랜드의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 보냈다. 몬 멜러리 수도원은 이미 다른 곳에 창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서 새 창립을 시도하는 것은 너무 빠를 것 같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은 훨씬 적극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동 말라키 브라씰(Dom Malachy Brasil) 수도원장은 공동체에 자문을 구한 후, 현재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이 재정적으로 창립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더라도 나이제리아에 관상생활을 설립할 수 있도록 사제 두 명에게 은세 수도원 생활 양성은 시킬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후 서로간의 상세한 의견교환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마이켈 신부는 로마와 루르드를 순례한 후,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클레멘트 신부는 아굴레리에서 해야 할 일 때문에 즉시 함께 떠날 수 없어서 다음 해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이켈 신부는 헤리 대주교와 동행하여 1950년 7월 3일에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 도착했다. 마이켈 신부의 수도명을 치프리안이라고 했다.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은 1835년에 창립되었다. 그곳의 생활은 여전히 매우 엄격했다. 그 때 나는 수련실을 담당하고 있었고, 새 입회자들이 수도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치프리안 신부와 함께 나는 할 일이 많았다. 나이제리아에서의 바쁜 생활과는 상당히 다른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잘 순응했으며, 온 마음을 다해 새로운 생활양식에 적응해갔다. 수련장 그레고리 웨리잉(Gregory Wareing) 신부는 그에게 조금의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수련장 신부의 빨리 말하는 습관 때문에 치프리안 신부는 자주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나에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종종 부탁했다. 그런데 1951년,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야했기 때문에 수련실과 접촉할 기회가 없어졌다. 그 때만 해도 침묵규정이 매우 엄격했다. 수련실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 외에는 그들과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회상해 볼 때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다면, 치프리안 신부가 한 번도 자신의 이전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나이제리아에서 성취한 훌륭한 업적에 대해서 내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물론 이에 대해서 그의 수련장과 그 후 영적 지도자인 안토니오 신부에게 이야기했으리라 믿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더 이야기되어져야 할 중요한 요점이다.
이 두 명의 나이제리아인이 공동체에 입회했을 때 계획했던 본래 목적은 그들이 은세 수도원 생활을 양성 받은 후, 나이제리아로 돌려보내서 그곳에 관상생활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만으로 창립계획을 진행시킨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들도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아주 자유로이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서 그들의 서원을 발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공동체에서 창립을 위한 그룹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창립할 기회가 왔다. 그러나 공동체는 나이제리아가 아닌 카메룬에 창립하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실은 치프리안 신부를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은 책자에 치프리안 신부의 영성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깊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것이 그의 생애에서 행한 다른 많은 사적을 광범위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온 영혼과 육신을 바쳐서 그가 하려 했던 계획과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모든 것을 완전히 봉헌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성, 한계를 모르는 애덕, 겸손, 고행, 기도로 가득한 생활 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영적 생활에 바탕을 둔 가르침, 거기서 흘러나온 설교는 특히 주목할 만했고, 조언을 구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왔다고 한결같이 증언했다.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치프리안 신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성모 소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뒷모습이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는 그것을 경청하기 위해서 머리를 약간 한 쪽으로 기울인 자세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늘 하느님의 현존 앞에 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그의 영성은 복잡함이 없는, 단순 그 자체였다.
그의 죽음과 시복
카메룬에 창립하기 위해서 그룹이 지명되었고, 치프리안 신부는 그곳에서의 수련장으로 임명되었다. 아프리카 지원자들의 양성을 위해서 그보다 더 이상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다른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1963년 10월 28일, 4명의 창립멤버는 다음해 봄, 예정된 주요그룹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건물 준비를 위해서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을 출발했다. 그런데 1964년 1월, 치프리안 신부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처음에 그의 지병은 그다지 중병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 병동에 있는 병실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조금 지난 후, 그의 왼쪽 대퇴부가 부어올랐다. 의사는 대퇴부에 뿌리 깊은 혈전증(deep-seated Thrombosis)이 생겼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위에도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는 레이체스터(Leicester)시 왕립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는 수술 시도 중 대동맥 유종 파열로 사망했다. 1964년 1월 20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끊임없이 기도했다.
1981년 나이제리아 교회 고위성직자들은 치프리안 신부의 시복조사 청원을 개시하였다. 이 뉴스가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 전해졌을 때,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그가 나이제리아에서 성취한 훌륭한 업적에 관해서 공동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공동체 안에서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다름없이 노동했으며 겸손했고, 기도에 열성적이었던 한 수도자였다는 인상이 남아 있었다. “5년간 그의 원장이었던 나도, 그의 선량함은 존중했으나 그를 성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러 면에서 이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누가 50년을 어떤 사람과 나란히 가대에 섰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성인으로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복조사는 비교적 신속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이제리아에서는 이 시복조사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기도그룹이 형성되었다. 1986년, 치프리안 신부의 유골을 오니챠(Onitsha) 교회에 이장시키기로 하였다. 유골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중병에 걸린 한 젊은 여성에게 그의 관을 만질 수 있는 허락을 주었다. 그녀가 관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 사례에 관해서는 많은 의학진단서가 있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이 갑작스런 치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리하여 시복성성(聖省)에서는 이 사례를 충분히 확인된 기적으로 처리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8년 3월 22일, 나이제리아에서 이 시복식을 직접 집전하였다. 60명이 넘는 주교들이 시복식에 참석했고, 나이제리아 가톨릭교회에서만도 성대한 이 순간을 위해서 200만 명이 참가했던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다. 나이제리아와 카메룬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그룹이 점점 더 많이 결성되어 가고 있다.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에도 그를 위한 작은 기념성당이 증설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고, 그리스도교 성성(聖性)의 교화적 모범을 공경하려고 이곳을 찾고 있다.
연대기 -------------------
1903년 9월 탄생
1912년 마이켈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
1913년-1919년 면학. 교수자격증 취득
1920년-1924년 아굴레리와 오니챠 학교에서 교수
1925년 신학교 입학
1937년 12월 12일 사제 수품
1938년-1950년 네위(Nnewi),
두누코피아(Dunukofia),
아크푸 아잘리(Akpu Ajalli)에서 사목
1950년 몬 상 베르나르드 수도원 입회.
치프리안이라는 수도명을 받음
1953년 12월 8일 유기서원
1956년 12월 8일 성대서원
1964년 1월 20일 대동맥 유종(tumor) 파열로 사망
1988년 3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서 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