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첼리(Viaceli)와 알제메시(Algemesi)의 순교자들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Alfonso Baldeon Santiago




목 차 --------------------
1936년 9월 8일
1936년 10월 12일
1936년 12월 2일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수도자들의 이름
발렌시안의 에필로그
연대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1936년 9월 8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예수회 종탑의 큰 시계가 11시를 알리고 있었다. 비오(Pio Heredia) 신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들을 위해서 감옥으로 바뀌어버린 방 한 구석에서 마음과 머리는 잠을 쫓아버리고 있었다. 큰 시계소리는 마음속에 수도원의 평화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얼마나 거칠고 험악하게 수도원의 평화를 두고 떠나와야 했던가! 밤의 침묵 속에서 비오 신부는 기도를 해보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힘든 아픈 추억들이 쏟아져 나온다. 인민 전선의 지방정부는 수도자들에게 가톨릭의 모든 의식을 철저히 금지했으며,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의 축일 이래 3주간, 자신들의 수도원 안에서 ‘카타콤바’와 같은 생활을 하도록 강요받았었기 때문이다. 비아첼리 수도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60명의 수도자들과 헌신자들에게는 슬프기 짝이 없는 성 베르나르도의 축일! 그리고 이 날에 이어 계속 닥쳐온 슬픈 날들! 유치, 감금, 수도원의 폭발과 공포, 체포… 순교까지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안감. 이 날 수도승들은 이 순교의 가능성에 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사람들은 낙천적으로 보았으나, 미래를 보다 어둡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페인 내란은 전국을 심각한 상태로 휘몰아쳤고, 들려오는 소식들도 이쪽이나 상대방 쪽이나 모두 무섭고 충격적인 뉴스뿐이었다.
첫 날, 마음 착한 프랑스인 동 마누엘 플레취(Manuel Fleche)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공동체 수도승들 대부분은 그들의 수도원장 함께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들은 가능성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시토회적인 은세(隱世) 수도원 생활을 계속하기로 했다.
비오 신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극적으로 끝난 하루의 체험이 아직도 그의 가슴을 꽉 메우고 있었다. 점심식사 후 형제들이 침실로 올라가 잠시 짧은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돌연 연타로 치는 종소리가 형제들을 깨웠다. 그런데 지금 연타로 치는 종소리는 형제들을 9시과(None)에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날과는 달랐다. 지금 이 종은 수도원을 점령하러 온 시민군 병사들 앞에 긴급 출두하라고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명령은 절대적이고 냉엄했다. 가능한 신속히. 최소한의 소지품만 챙겨서 수도원 현관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모르는 곳으로 싣고 가려고 트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비오 신부는 밤의 침묵 속에서 그 비참했던 순간을 연상하고 있다.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걸치고 있던 복장 그대로 성 복도를 지나오면서 그는 간략하지만 온 열성을 다해 성 복도의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였다. 오! 오! 성 복도의 마리아여! … 비오 신부는 공동체의 일과를 위해서 성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얼마나 자주 사랑스런 눈길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던가!
오늘, 이 축일, 대단히 감동적인 이 날에, 마리아께 안녕을, 석별의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비오 신부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였고 일어난 일들 중에서도 이 일이 가장 깊은 체험으로 그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한 가지 더 있다. 형제들이 모두 트럭에 실려진 후 마지막으로 비오 신부도 타려고 했을 때 그의 눈은 수도원장 동 마누엘의 눈과 마주쳤다. 동 마누엘은 현관 계단 위에서 고뇌로 전율하며 잡혀가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들을 향해 강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끌려가는 형제들과 함께 가고 싶은 그의 마음,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같은 생각으로 말없이 서로 눈길을 나눈 비오 신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비오 신부는 무언중에 수도원장에게 “아버지, 안심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형제들 모두를 잘 돌보아 그 중 한 사람도 잃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마음의 약속을 드렸다.
산탄더(Santander)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수도자들을 위해 준비된 임시감옥에 그들을 집어넣었다. 그곳은 살레시오회에 속한 칼레 빈냐스(Calle Vinas)였다. 아직은 한 사람도 잃지 않았고 한 사람도 그룹에서 격리시키지도 않았다. 비오 신부는 수도자들을 안심시키고, 이 순교의 첫 밤을 조금이나마 쉬게 해주려고 애썼다.
선잠이 잠깐 들었는가 싶었는데 밤 12시경, 큰 시계 소리에 비오 신부는 갑자기 눈을 떴다. 밤에 일어나 늘 기도하던 습관 때문에 그는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손에 자신을 맡겨드렸고, 그 안에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런데 기억 속에 떠오르는 강한 추억 한 가지. 그것은 그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그의 어머니께서 그를 팔에 안고 흔들어주셨던 기억이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소중한 추억인가! 그가 태어난 고향 알라바(Alava) 지방, 아주 작은 동리 라레아(Larrea)에서 보낸 소년시절의 모든 추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 그는 61살이다. 유년시절과 가족들의 애정담긴 추억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그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지!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신부는 14세에 마드리드에 있는 게타페(Getafe)의 발 산 요세(Val San Jose) 시토 수도원에 헌신자로 입회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다. 거기서 양성 받고 서원을 했으며 사제 수품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기쁨과 고통을 체험하였다! 비오 신부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이 거룩한 밤, 이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또한 그는 떨리는 감사의 정으로 어떻게 그가 1918년 2월 초순에 비아첼리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그 때 장상이셨던 아버지 같은 동 마누엘과 형제들의 애정 가득한 환영을 받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동 마누엘은 비오 신부를 제2 장상과 수련장으로 임명하고 그를 신뢰하였다. 그렇다. 신부는 비아첼리에서 18년을 살았다, 열매 풍성한 18년을!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했고, 은총 충만했던 모든 세월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리고 지금 … 지금… 완전한 불확실. 그와 함께 갇힌 모든 형제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느님의 도움 외에는 아무 것도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게 없는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 형제들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고, 그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렸다.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30)고 하신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다.
1936년 10월 12일
화창한 날이었다. 오전 10시, 비오 신부는 잠시 독서하던 것을 멈추고 베란다 쪽에서 햇볕이 들어 그가 앉아있는 의자를 환히 비추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틀녘, 신부는 관습에 따라 그와 함께 있는 형제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미사성제를 거행하였다. 이 날은 신부가 대단히 존경하는 필라르(Pilar)의 성모 축일이었다.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진 이 영혼은 또 하나의 마리아 축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그들을 난폭하게 수도원에서 쫓아낸 9월 8일 마리아 탄생 축일이다. 그들은 지금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적인 은세수도원생활을 깊은 믿음으로 충실하게 사는 길만이 남아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형제들은 비냐스(Vinas)의 감옥을 체험하고 있다. 구금(拘禁), 조소와 모욕, 매일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염주알처럼 묶여서 빈민급식소까지 갔다 와야 했다.
그렇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고 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두 사람, 동 앙헬 알다소로(Dom Angel Aldasoro)와 구르투베이(Gurtubay)가 수도자들의 보증인으로 나섰고, 이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수도자들은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들은 2회에 걸쳐 석방되었다. 한 그룹은 9월 13일, 다른 그룹은 17일에. 하느님께 감사! 비오 신부는 다시 한 번 이 모든 일의 수호자이신 분께 엎드려 감사드렸다.
이렇게 형제들은 세 그룹으로 나눠졌고, 비오 신부는 한 그룹과 함께 델 솔 (del Sol)가의 27번지에 있는 동 안젤의 집에 은신하게 되었다. 다른 그룹은 에유스타키오 수사를 안내자로 마드라쏘(Madrazo)가의 26번지의 어떤 집에 은신하게 되었다. 산탄더를 떠난 세 번째 그룹은 산 페르난도(San Fernando)가의 어떤 집에 머물게 되었으며 몇몇 사람들만이 위험이 적은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산탄더를 떠날 수 있었다. 비오 신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수도성소에 충실할 수 있었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러나 오늘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짓눌렸다.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파열될 것만 같았다. 신부는 오늘 믿을만한 통로를 통해서 그들의 두 형제 에우제니오(Eugenio) 신부와 비센테(Vicente) 신부가 며칠 전에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은 그 두 형제를 위해 드리는 미사 동안, 그들의 이름조차도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다. 오직 이 정보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고, 잘못 전해진 소문이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아!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지난 달 수도자들이 수도원에서 체포되었을 때, 시민군 병사들은 에우제니오 신부, 비센테 신부, 베르나르도 신부, 토마스 수사를 수도원에 남아있으라고 강요하였다. 수도자들로부터 그들이 全생애를 거쳐 만든 치즈와 버터제조법을 전수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수도원은 엄청난 긴장과 약탈, 파괴의 나날들이 이어졌고, 더구나 거기 남아있어야 했던 형제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뇌와 협박과 불길한 전조 속에서 지내야 했던 날들이었다.
9월 21일 저녁 무렵, 비센테 신부는 수도원장을 방문했다. 프랑스 국적을 가진 동 마누엘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동네 여관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만나서 서로에게 고백성사를 보고, 깊은 애정을 담은 차분한 마음으로 서로 이별을 고하였다.
같은 날 저녁, 아주 늦은 시간에 에우제니오 신부와 비센테 신부는 자동차에 타라는 강요를 받았다. 석방시키기 위해 산탄더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탄더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루모로쏘(Rumoroso) 도시 변두리에서 차를 세우고 그들을 끌어내려 거침없이 총살시켰다. 두 신부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들의 시신은 길가 도랑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이 두 신부가 자신의 목숨을 바친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공동체가 매장할 수 있었던 시신도 오직 이 두 사람의 존귀한 시신 뿐이었다. 두 신부는 각각 33살, 31살이었다.
10월 12일 아침, 비오 신부는 의자에 앉아 가을 햇살의 온기를 받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으니 그것에 직면할 준비를 하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이미 그들은 수도원에서 그리고 추방당한 후에도 순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 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앞으로 닥쳐올 사태에 대비해서 더욱 신중하게 마음과 정신을 준비해야할 것만 같았다.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비오 신부는 필라르의 성모님께 이 무의미한 형제 살상과 미움으로 찢어진 스페인을 봉헌하고 있었다. 신부는 자기가 정말로 사랑하는 형제들,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 아버지임을 느끼고 있는 이 형제들을 모두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맡겨드리고 있다.
1936년 12월 2일
하루의 빈약한 마지막 빛마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 하루는 비오 신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가혹한 날이었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방금 지하에 설치된 임시 경찰서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두 번째 심문이었다. 신부는 네일라(Neila) 경관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 경관은 음험한 질문, 모독적인 언행, 폭언, 조소, 구타를 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며 협박하였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신부는 지하실 찬 바닥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틀 동안 그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오직 하나, 고발자들 앞에 서 계신 침묵하시는 예수님 … “도살장에 끌려간 양순한 어린양처럼.” 이 무력한 예수님께서 그와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셨고, 잔혹한 감수자들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유연하게 머물 수 있게 해주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시간과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체포된 시간이 같은 9시과를 바치는 시간이었음을 상기하였다. 9월 8일과 마찬가지로 12월 1일도, 산탄더의 피난처에서도 그랬다. 9시과를 바치는 시간과 예수님이 체포된 시간,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이것은 오히려 스승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체포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특별한 사랑의 새 표징이 아닐까? 그렇다. 그 때는 9시과를 바치는 시간이었다. 병사들이 12월 1일 델 솔(del Sol)가의 집에 난입하여 선서증언을 받아내려고 형제들을 경찰서로 데려갔다. 그로부터 이틀간, 그들은 그 추운 경찰서의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심문을 받을 때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한 번 심문을 받았으나 비오 신부는 두 차례 받았다. 신부가 두 번째 심문을 받고 형제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제들이 모두 한 데 모였다. 이미 이전에 서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원죄 없으신 동정 성모님께 9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끝까지, 순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심 하나만을 가지고. 그는 지금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했던 진지한 생각들을 용감하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합시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델 솔가(家)에서 온 그룹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에유스타키오(Eustaquio) 수사를 지도자로 삼았던 그룹이 이들보다 몇 시간 전에 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 날 밤,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첫 그룹이 조용히 정적 속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의 손이 뒤로 묶여졌다. 그 다음날 밤, 두 번째 그룹도 같은 운명이었다. 두 그룹의 형제들은 짐짝처럼 모터보트에 실려졌다. 병사들은 산탄더 만을 가로질러 대해大海 한복판에서 수사들에게 무거운 추를 매단 다음 그들을 대서양 차가운 물속에 던졌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운명이었다. 며칠 후 체포된 마르셀리노(Marcelino) 수사도 같은 방식으로 죽였다. 산토스 수사를 지도자로 삼았던 세 번째 그룹은 체포되지 않았고, 뿔뿔이 흩어져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레안드로(Leandro) 수사만이 그 달 마지막 날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자 신분을 밝혔고, 결국 잔혹한 고문을 받고 끌려 나가 살해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 충실한 증인들인 이 그룹의 젊은 나이를 볼 때 마음은 깊은 감동으로 벅차오른다. 이들은 번영하는 공동체의 희망이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친, 풍부한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써 계절보다 앞서 복음의 고랑에 뿌려져야만 했다. 예수님처럼!
수도자들의 이름:
비오 에레디아 신부(Pio Heredia), 61세 아마데오 신부, 31세
발레리아노 신부, 30세 우안 밥티스타 신부, 31세
에유제니오 신부, 33세 빈센테 신부, 31세
알바로 수사, 21세 마르첼리노 수사, 23세
에유스타키오 수사, 45세 안젤 수사, 68세
에제키엘 수사, 19세 에유로지오 수사, 20세
비엔베니도 수사, 28세 레안드로 수사, 21세
여기 다른 두 개의 이름을 포함시킨다: 아이토나(Aytona)에서 태어났고 교구 사제였던 28세의 호세 카미 카미(Jose Cami Cami)이다. 그는 비아첼리 수도원의 청원자로 입회허락을 받았고, 1936년 7월에 입회할 예정이었다. 고향에 가서 그의 가족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려 했다가 7월 27일 밤, 다른 사제와 함께 체포되었다. 병사들은 이 두 사람을 차에 묶어서 매달고 13km 이상 되는 도로를 끌고 달렸다. 그들은 토레스 델 세그레(Torres del Segre)에서 가까운 교차점에 도착하자 이 두 사람을 총살시킨 다음 그 시신을 차바퀴로 짓뭉개놓고 사라졌다. 이렇게 전원은 묵묵히 죽어갔다. 이성을 잃은 형제살상과 증오의 대상이 된 수도자들은 희생자들로서 그들의 목숨을 바쳤다. 박해자들을 용서하면서, 사랑이신 분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 틀림없이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발이 충실하게 스승의 발자국 위를 디디며 걸어갔고, 그분과 결합하여 그분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안의 에필로그
비아첼리 수도원 수도자들의 시복조사에는 같은 수도회 가족에 속한 두 수녀가 순교자 명단에 올라있다. 마더 미카엘라 발도비(Micaela Baldovi)와 마더 마리아 나티비다드 메데스 페를레스(Natividad Medes Ferres)이다. 이들은 알제메시(Algemesi)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지방인 폰스 살루티스(Fons Salutis) 수도원의 수녀들이었다. 마더 마리아 미카엘라는 1891년 말, 발렌시아 시토 수도원 라 자이디아(La Zaydia)에 입회했으며 마더 마리아 나티비다드는 1914년 10월에 입회했다. 두 수녀는 1927년 10월 30일, 그들이 태어난 알제메시 지방에 시토 수도회를 창립하기 위해서 출발했고, 마더 마리아 미카엘라가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30년, 공동체는 자기 수도원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수녀들을 모두 그들의 가족들에게로 돌려보냈다. 마더 미카엘라는 여동생 엔카르나시온의 집에 숨었고 마더 나티비다드는 남동생 호세의 집에 은신했다.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인 두 남동생 에르네스트(Ernest) 신부와 비센테 수사도 그녀와 함께 호세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10월 18일에서 20일 사이에 마더 미카엘라와 여동생 엔카르나시온, 마더 나티비다드와 세 남동생이 모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임시감옥으로 바뀐 자신들의 폰스 살루티스 수도원에 유치되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점점 더 가까워오는 최후의 준비를 위해서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야만 했다.
11월 9일 밤, 마더 미카엘라와 그의 여동생 엔카르나시온은 감옥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수도원 밖으로 끌려 나가 길바닥에서 총살당했다. 새벽녘까지 마더 미카엘라는 빈사상태였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것을 안 병사들은 살아나지 못하도록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해서 완전히 파열시켜 버렸다.
다음날 밤, 이번에는 마더 나티비다드와 세 남동생을 동리 밖 길거리에서 총살했다. 마더 미카엘라는 67세, 마더 나티비다드는 55세였다. 이 두 사람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을 그들의 피로 증거하였다. 이렇게 이들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분 외에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들을 누가 감히 그분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들의 생명을 씻었고, 영원히 그분의 사랑과 결합되었다.
연대기 -------------------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란 발발.
7월 22일 폰스 살루티스 여자 수도원 강제 추방.
7월 27일 비아첼리 수도원의 입회허락을 받은 지원자 호세 카미 카미 신부 살해.
8월 20일 비아첼리 수도원이 모든 종교제의를 금지당함.
9월 8일 수도공동체의 대부분이 검거, 체포되어 산탄더의 임시감옥에 투옥됨.
9월 13일. 17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수도자들을 가석방.
11월 9일 폰스 살루티스 여자수도원장 마더 미카엘라 발도비가 살해됨.
11월 10일 같은 수도회의 마더 나티비다드 메데스 페레스가 살해됨.
12월 1일 산탄더에 있는 집에 피신하고 있던 두그룹의 수도자들이 다시 체포됨.
12월 2일-3일 밤, 다시 체포된 첫 번째 그룹의 수도자들이 살해됨.
12월 3일-4일 밤, 다시 체포된 두 번째 그룹의 수도자들이 살해됨.
12월 28일-29일 레안드로(Leandro) 수사의 체포와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