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 Romano Donato Bottegal
로마노 도나또 보떼갈 신부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Louise Wehbe
목 차 --------------------
가정과 신학교에서
뜨레 폰떼네 수도원과 라트론 수도원의 수도승으로
뜨레 폰떼네 수도원과 레바논에서의 은둔생활
이스라엘에서
야불레(Jabbouleh)에서 그의 마지막 해를 보내며
스파이로 고발당하다.
아린아이처럼
그의 죽음
영적 윤곽
가정과 신학교에서
로마노 도나또 보떼갈(Romano Donato Bottegal)은 1921년 12월 28일, 이태리 벨루노 싼 도나또 디 라몬(Belluno San Donato di Lamon)에서 순박한 가정의 육남매 중 여섯 번째(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호주로 이민 가서, 거기에 있는 맏아들 구이도와 합치게 되었다. 구이도는 21살에 직장에서 사고로 인해 실명하였다. 가족의 경제적 상태는 항상 극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구이도는 늘 가족들에게 물질적 가난에도 불구하고 만족하라고 격려해주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로마노는 펠뜨레(Feltre)의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그 후 벨루노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 학교의 부교장 동 알비노 루치아니(Don Albino Luciani), 미래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되실 분과 만났다. 그는 로마노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 내용을 후에 훌륭한 찬사로 표현하였다.
로마노는 17세에 종신정결서원을 발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은세수도원생활의 소명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그가 신학생이었을 때 한번은 주교를 찾아가서 독일군에 인질로 잡혀 있는 두 명의 사제를 위해 자기가 대신 인질로 바칠 수 있는지 상의한 적도 있다.
뜨레 폰따네 수도원과 라트론 수도원의 수도승으로
1946년 6월 29일에 그는 사제수품을 받았다. 그는 1946년 8월 15일에 뜨레 폰Ep네(Tre Fontane)수도원에 입회했고 정상적인 과정을 밟았다. 1946영 9월 8일 수련착복, 1948년 9월 8일 유기서원, 1951년 9월 8일 성대서원을 하였다. 그레고리안 대학 과정에 따라 그는 “에페소서에 의가한 그리스도인들”이란 소논문을 작성하여 신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공동체에서는 조수도자들의 선생, 칸톨, 수련장, 부원장 등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러냈다. 그런 그는 더욱 철저한 고독과 침묵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은사를 느꼈다. 고독에로의 갈망이 실현되기를 희망하면서 그는 레바논에서 마로니테(Maronite) 전례를 사용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창립할 계획이 있었던 라트론(Latroun)수도원의 동 엘리에 콜비시에(Elie Corbisier)의 요청에 응답하였다. 라트론 수도원은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로마노 신부는 결국 장상들로부터 이 창립 계획에 참여할 허락을 받았고,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멀지않은 라트론 수도원으로 가기 위해 예수님의 땅을 향해 출발하였다. 거기서 그는 동방전례와 아랍어와 시리아어를 공부했고, 1963년 레바논에서도 이 공부를 계속했다.
뜨레 폰떼네 수도원과 레바논에서의 은둔자
창립계획이 정지당한 관계로 1963년 12월, 로마노 신부는 동방(East)을 떠났다. 뜨레 폰떼네로 돌아온 그는 그의 갈망을 채워줄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뜨레 폰떼네의 정황이 바뀌었고, 임명받은 사도좌 관리인은 로마노 신부가 공동체 근변에 은둔소를 가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고행과 고독의 생활로 불리움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로마노 신부는 3년간 금역 밖에서 은둔생활을 할 수 있는 특전(ad ducen- dum vitam eremiticam)을 받았다. 깊이 숙고한 그는 발벡(Baalbeck)의 멜키테(Melkite)의 주교 권한 아래 야불레(Jabbouleh)의 소유지에 세워진 은둔소에서 은둔자로 살기 위해 레바논으로 떠났다. 은둔소는 주교의 소유지에 지을 수 있었다.
1966년부터 1967년 사이에 교회법적으로 그의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 이태리로 돌아왔다. 그의 수도원장의 간청에 응답하여 잠시 뜨레 폰떼네 공동체를 돕기로 했다. 실제로 공동체는 그가 수도원장이 되어주기를 바랬고, 적어도 영적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는 짧은 몇 주간만 그의 이전 수도원에 머물렀다. 수도원 상황이 지나치게 애매하고 대립 그룹들에 의해 자신이 강요받고 있음을 알아차린 그는 은둔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좌로부터 은둔생활을 위한 특전(ad nutum sanctae sedis ad ducendum vitam eremiticam)을 받은 후 레바논의 야불레에 있는 그의 은둔소로 되돌아왔다. 그는 법적인 관점에서 언제나 뜨레 폰떼네 수도공동체에 속한 수도승이었으나 은둔자로 수도원 밖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몇 몇 형제들과 이전의 장상들과 좋은 형제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을 가졌다. 평소의 고요함과 평화로운 언행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해주고 사려 깊게 격려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스스로 노동해서 살아가야했다. 그 이유는 1969년, 주교의 동의를 얻은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이트 하니나(Beit Hanina) 위치한 바오로회 레바논人 신부들의 소유지에 속한 땅을 잠시 돌보아달라는 청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개간하고 경작하기 시작했다. 그 소유지가 팔렸을 때 그는 예루살렘의 멜키테의 주교 몬시뇰 힐라리온 카프치(Hilarion Capucci)에게 의존하여 살며 은둔자로 머물렀다. 상주 신부가 없는 멜키테의 수녀들을 위해서 그는 매일 미사를 드려주기 위해 먼 거리 여행했다.
야불레(Jabbouleh)
에서 그의 마지막 해를 보내며
1973년, 발벡의 주교는 로마노 신부를 다시 레바논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야불레에 있는 그의 은둔소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그의 생애의 마지막 5년을 살았다.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을 만큼의 식사와 난방 없이, 살림살이, 생필품이나 유용한 물품이란 없는 엄격한 고행 생활을 했다. 그는 좁은 영역에서 살면서도 새끼줄을 둘러쳐서 봉쇄구역을 만들었다. 그의 은둔소는 네 개의 방이 조립되어 있었다. 기도 방, 침실, 부엌, 창고 겸 작업실이다. 개인적인 숙박시설이라고는 거친 나무로 만든 깔개의 침대가 시멘트 블록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메트레스라고는 얇은 문짝 위에 낡은 모직 담료, 이것이 덮개로 쓸 수 있는 전부였다. 부엌에는 나무로 불을 피울 수 있는 작은 화덕이 있었다. 그 위에는 빵을 구웠던 철판과 작은 알루미늄 냄비 하나, 그것에 쌀이나 밀을 끓였던 것 같다. 식사 급식재료라고는 작은 박스에 쌀, 밀, 밀가루와 분유 조금 뿐이었다. 구석에 작은 세숫대야 하나가 있었다.
그가 입었던 의복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흰색 수도복뿐이었다. 그 수도복은 그가 은둔자로 전 생애 동안 착용했던 것이었다. 미사를 드릴 때나 외출할 때, 손님맞이할 때 늘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흰색 수도복만을 입었다. 작업할 때는 그가 직접 바느질한 올이 굵은 무명옷을 입었다. 식사는 그가 직접 구운 빵 과자, 쌀이나 밀, 옥수수를 끓여 먹었다. 그는 어떤 기증이나 기부도 받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장만해서 살아야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직접 재배한 몇 가지만 야채만 제외하고 주교로부터 받은 미사 봉헌금에만 의존했다.
교구의 한 그리스인 가톨릭 사제는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그를 만나러 가면, 나는 멀리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쳐서 그에게 내가 오고 있음을 알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울타리를 통과시켜서 나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거의 언제나 그는 기도하고 있거나 문 앞에 있는 돌 위에 앉아서 성서를 읽거나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작업복 차림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나를 맞이했습니다. 인간을 존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의 빛나는 얼굴을 볼 때마다, 필설 할 수 없는 기쁨과 내심의 평화를 환하게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를 방문한 다른 사제, 알프레드 하베니트(Afred Havenith)가 증언하였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감탄과 동시에 두렵기까지 한 생활조건이었습니다. 얼어붙는 눈과 칼같은 바람이 이는 겨울철에 나 같은 사람은 단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터인데, 그는 누더기옷을 껴입고 유쾌하게 나를 맞이하면서 오히려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약간의 구운 빵으로 연명했고 은둔소는 불을 피우지 않아 아이스박스 같았습니다.”
로마노 신부는 발벡(Baalbeck)주교의 요청으로 야불레(Jabbouleh)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정원을 가꾸고 경작해서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그는 참된 시토회 수도자로서 자신이 노동한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정착한 곳은 돌과 모래뿐이었고 습기라고는 없는 메마른 땅이어서 물을 댈 수조차 없었다. 경작하는 일에 여러 번 실패한 그는 과수를 재배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어린 나무의 싹이 나기만 하면 베두인의 양들이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의식주 해결을 위한 강구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결국 그는 그런 장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곤란을 통해서 더 많은 기도와 관상에 시간을 봉헌하기를 원하셨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때, 특히 1975년부터 1977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을 떠났으나 그는 그냥 그곳에 머물렀다. 위험이 점점 더 가중되어 그에게 닥쳐왔다. 그의 비참한 은둔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가진 최소한의 소유물 중에서 어떤 것을 훔쳐가곤 했다.
샤를르 드 후코처럼 그는 전쟁이 발발한 지역에서 무슬림과 이웃해서 살았다. 그는 그들을 사랑했다. 약탈과 경멸을 참아 견디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했다.
어느 날 밤, 시리아 군인이 그를 체포했다. 그들은 그의 은둔소를 약탈했다. 그러나 즉시 그 지역의 회교도 지휘관에 의해서 석방되었다. 그 후 지휘관은 언제나 그의 소식을 묻고 기도를 부탁하곤 했다. 그를 고발한 이웃사람들은 극도로 가난하게 사는 신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스파이로 생각했고 그래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로마노 신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고발자들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동안 그는 종교의 어떤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많은 레바논 사람들의 고뇌를 짊어졌다.
자신에게 부과했던 비참한 생활조건을 생각해보면 봉헌의 삶을 언제나 살고자하는 그의 의지를 이해할 수 있다. 회교도들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도직은 그의 가난한 생활과 기도와 노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그의 사명은 혼자서 사는 것이며 가난한 그들과 가까운 곳에서 가난하게 살며 그들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에게 제공된 성 샤르벨 마클로프(Charbel Makhlouf)의 은둔소에 사는 것을 그만두고 주교가 원하는 대로 회교도들에게 자신의 보잘것없는 복음적 증거를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근교 농부들은 로마노 신부가 어떻게 이런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놀라워하면서, 그들은 신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해 주었다고 말했다.
스파이로 고발당하다.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로마노 신부가 야불레에 있는 은둔소에 있었을 때 겪었던 위에 언급된 사건들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 하면 이러하다. 악의를 가진 이웃 사람들 몇몇이 시리아 지휘관에게 로마노 신부는 사제복으로 변장한 스파이라고 고발했다. 야밤에 군인들이 그를 찾아왔다. “시리아 경찰관이다. 문 열어라!”고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괴이한 방문에 불안감을 느낀 그는 용기를 내어 “만일 대장을 데려오면 문을 열어주겠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은 문을 부수겠다고 협박했다. 신부는 등불을 켜고 성별한 성체를 모두 삼켜서 불경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후 문을 열었다. 군인들은 그를 떠밀었고, 거칠게 취급했다. 램프를 빼앗아들고 은둔소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단지 몇 권의 책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빼앗고 신부를 은둔소에서 약 30km 떨어진 사령부로 연행했다. 사람들을 다루는데 악랄하기로 평판이 났을지라도 그 사령관은 교구 사제 바라카트(Barakat)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부는 그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었었다. 사령관은 은둔자를 심문했을 때 재빨리 알아차렸다. “이 사람은 스파이가 아니라 오히려 성인이다.” 로마노 신부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잘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장님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의 군인들이 나의 안경을 가져갔기 때문에 그것 없이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의 부하들을 불러서 그들을 심하게 질책하고서 즉시 군인들에게 신부에게서 빼앗아온 것들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신부는 그의 안경을 받아쓰고는 사령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로마노 신부는 아랍어와 불어를 사용하면서 이해시키려고 그에게 수도생활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요약해 주었다. 그것은 사령관에게 충분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신부에게 사과하고 부하들이 그에게 용서를 청하게 하고 정중하게 그를 은둔소까지 데려다 주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주교 조그비(Zoghby)가 다음 날, 신부의 은둔소를 찾아왔다. 주교는 거기서 시리아 군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은둔자에게 잘못을 사과하러 왔던 것이다. 나중에 주교는 군인이 “우리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기만당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사과하고 정정하기 위해서 사령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로마노 신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웃으면서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군인은 말했다. “주교님, 저는 많은 여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 수도자처럼 저에게 깊은 감명을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드려 주십시오.” 그러나 로마노 신부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그의 이웃사람들이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 일은 로마노 신부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돌봄을 받지 못했고 몰이해와 고독 속에서 살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 다른 한 증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로마노 신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순명을 약속한 조그비 주교님께서 1년에 한 번 그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고 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리스 정교의 대수도원장, 한나 나다프(Hanna Nadaff)가 증언하였다. “로마노 신부는 나에게 그의 단순함으로 엄청난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영혼과 생각은 단순함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이 단순함이야말로 완전한 무소유를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하느님만이 중요했습니다. 그의 삶 전체는 오직 하느님께로만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걱정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았습니다. 마치 세상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경탄하며, 어린아이가 지닌 신뢰심으로 기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로마노 신부가 한나 신부에게 “가끔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해서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합니다. 뱀입니다! 그 친구는 더미 속에 들어가 쉬면서 생기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먹고 남은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친한 친구처럼 살고 있습니다.”
은둔소에서 제법 거리가 먼 곳에, 상주사제가 없는 착한 봉사의 성모회 자매들이 로마노 신부에게 미사를 드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일 그에게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인 고독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이 조건도 받아들여졌다. 한나 신부는 로마노 신부가 자매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에 참예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였다. “로마노 신부는 아랍어를 조금 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아랍어로 된 짧은 경문을 기도했고 아주 천천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그 경문을 읊었습니다. 그는 위풍당당한 풍채였습니다. 그가 평화의 인사를 하려고 돌아섰을 때, 나는 그리스도께서 회중에게 강복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그의 초상은 이콘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습니다. 그것은 천상적 환영과 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미사성제를 거행할 때는 그 때의 경험을 되새기며 정성을 다해 미사성제를 거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체험은 나에게 많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수년간 로마노 신부는 속세를 완전히 버린 은둔자의 삶이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이상, 예수와 일치하는 기쁨 안에서, 그분과 함께 세상을 위해서 희생하고 죽는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삶이었다.
그는 폐결핵에 걸렸다. 어느 정도 변화 시켰다 해도 자신의 금욕생활로 소모된 상태에서 폐결핵에 걸린 그는 발벡(Baalbbeck)병원에서, 그 후 바이루트(Beirut)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로마노 신부는 1978년 2월 19일, 56세로 사망했다. 그는 32년간을 사제, 수도자로, 그 중 14년을 은둔자로 살았다.
그의 유언서에는 은둔소에서 가까운 곳에 그가 자신을 위해서 파놓은 무덤에 그를 묻어달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교는 그를 발벡의 성녀 바르바라 대성당에 있는 제단 아래 장례지내기를 원했다.
한나 나다프 신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그에게 나의 가장 아름다운 제복을 입혀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서품되었을 때 입었던 것입니다. 손으로 수놓은 흰색 옷감으로 된 아름다운 제의였습니다. 나의 동료 사제들은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제복을 완전히 썩혀버리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는 이 제의를 입을 자격이 있으며 나는 그가 그것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그는 나를 기억해 줄 것이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지인들과 그의 편지를 읽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신앙의 가득한 사람의 강하고 끈질긴 의지력, 주님의 희생과 완전히 일치된 사제의 완전한 자기증여, ‘관상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쁨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그가 일컬었던 한 수도승의 영웅적인 자기포기를 볼 수 있다.
그의 주교는 “여러분은 로마노 신부가 우리를 위해 행했던 그 모든 선행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애덕에 대한 감각, 기쁨, 청빈의 정신은 나의 영혼과 그를 알고 있는 수녀들, 사제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성인이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옛 제자의 죽음을 알게 된 베니스의 총대주교이며 같은 해에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1세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레바논에서 주교, 사제, 수도자들과 신도들 안에서 감지되었던 성성의 향기에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것을 느끼고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라고(Albino Cardinal Luciani, S. Marco, Venezia, 1978년 4월 11일).
그의 은둔소에서 가까운 ‘St. Romanos le Melode'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부분적으로 완공되었다. 그것은 2001년 7월,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회교도의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 그레고리오 3세 라함(Sa Beatitude Gregoire Ⅲ Laham)에 의해 개관되었다. 로마노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 센터는 그가 시작한 기도와 관상생활을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적 윤곽
로마노 신부는 그의 유언서와 노트에 써놓은 영적 수기를 소각시켜달라고 분명히 요청 하였다. 다행히 발벡 주교는 그의 영적수기가 많은 수도자들의 영혼을 위한 좋은 영적 가르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 수기를 소각하는 것은 좀 더 숙고해 보자고 하였다.
1963년 8월 5일 편지에 로마노 신부는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의 희망과 수도승의 삶은 언제나 하늘의 문을 열어주는 사순절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권고를 보다 철저하게 살기 위해서 고독과 침묵의 장소를 가지고 싶다고 자신의 갈망을 표현했다.” 라고 썼다.
1974년 10월 5일에 쓴 편지에서 그는 혼자서 생활하는 것은 단지 서약한 계율을 보다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가능한 한 사순절과 부활을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은둔생활을 선택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알프래드 하베니트 신부는 증언하기를 “로마노 신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날, 그에게 관상에 대해서 써놓은 것이 없느냐고 감히 물었습니다. 가끔 도움이 되도록 자신의 사상을 명시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죽기 전에 쓴 종이를 태워버리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직 젊었을 때 그는 노트(274번)에 “자비깊은 사랑”에 대한 자신의 봉헌을 갱신한다고 적었다. “최대의 은사는 하느님의 섭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시어 죽을 때까지 내가 호스티아가 될 만큼 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나의 은둔생활 15년 동안 사랑은 내가 은둔생활 안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희생제물이 되고, 사랑에 대한 목마름, 예루살렘과 근동에 평화를 위한 산제물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n.209). 완전한 헌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살도록 허락하는 것, 즉 이것은 그분의 사랑, 그분의 확신, 그분의 기쁨, 그분의 기도, 그분의 부활을 뜻하며, 마치 뜨거워진 전열기체가 전류의 열기로 가득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 하나 하나는 죽음의 행위와 같다고나 할까,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이탈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분에게서 왔다가 그분을 향해가는 것, 그 ‘사랑’이신 분을 만나고 싶어서 열망하는 것입니다.”(노트 210).
로마노 신부는 그의 삶을 몇 가지 인상적인 구분으로 요약했다:
“소명 :
- 피조물인 인간으로 존재함
- 1세부터 12세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 12세부터 25세까지, 사제로 사는 것.
- 25세부터 40세까지, 수도승으로 사는 것. 특성: 성성(聖性)
- 40세부터 55세까지, 은둔자로 사는 것. 특성: 순교
- 55세, 속세를 버린 구도자로 사는 것. 특성: 신비적 비젼
- 완성. (노트 118).”
그는 자신의 인격(personality)을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lity) 안에서 변용시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우주적 존재들 안에서도 가장 작은 피조물…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 제단 가까이서, 혼인 잔치에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가장 보잘 것 없는 선물을 들고, 작은 조각의 빵부스러기를 친구와 원수를 위해 기쁘게 받들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정복당한 사람, 그리스도에 의해 쇄신되고, 그리스도처럼 변용된 작은 그리스도, 당신의 즐거움의 품 안에 나의 몸과 영혼을 맡겨드립니다.”(노트 274).
그의 노트에서 좀 더 다른 것을 읽어보자. “내 생애에서 12세, 25세, 40세, 55세는 사랑의 품에서 전진하고 쉬는 시기였습니다.… 오, 기쁨이여, 사랑이여, 나는 당신의 은사를 받았고,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나는 당신의 포옹을 받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쉬며, 당신의 품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쉼 안에서 내 자신이 녹아버립니다. 기쁨이시며 사랑이신 예수님, 삼위일체시여, 성가정, 천사들, 성인들, 우주, 교회, 형제들-천국…. 내 생애의 55년을 종합해보면 그것은 은총의 세계를 즐기는, 신비스런 하나의 무(無)입니다.”(노트 127)
우리는 그의 노트들을 통해서 일종의 어둔 밤 속에서 의심, 슬픔, 불안, 걱정을 만들어냈던 고통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체험들은 그를 근원적인 문제와 맞서게 했다: 하느님의 존재,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성, 가톨릭교회의 권위, 자신의 삶의 유익성과 필요성, 미래의 삶, 자신의 순수성, 은총, 영광 등등. 이런 근원적인 문제와 맞서 분투했음을 볼 때 우리는 왜 그의 기도가 비탄에서 나왔는지를 알아듣기에 충분하다. 거기서 신앙의 부르짖음, 희망과 사랑의 절규, 포기의 부르짖음, 감사의 기도가 나온 것이다.
어떤 증인은 “그가 관상에 대해서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가장 나쁜 사람일지라도 결코 단 한 사람도 사랑에서 제외시켜서는 안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러 오시지 않는다고 역설했습니다.” 라고. 같은 증인은 또 “사제로서 나처럼 이렇게 무슬림 동네를 많이 여행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 동네에서는 자주 범죄가 발생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찾아가는 것조차 망설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노 신부는 두려움을 없애는 사랑의 힘을 완전히 이해시키면서 나에게 놀랄만한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독특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면서, ‘그런데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쓴 노트와 그의 행동에서 시종일관 십자가의 현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노 신부의 생활을 통틀어 생각해 보면, 그의 생활양식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자신의 성화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적생활 전부를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카(Baqaa)의 하다트-발벡(Hadath-Baalbeck)에서 전교하는 살레시오회 수녀들이 알프래드 하베니트 신부를 모시고 로마노 신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손님들을 친절하게 맞이했으나,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들은 그에게 관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나는 먹는 것, 자는 것, 기도하는 것을 아주 조금밖에 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려고 하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성성(聖性)은 십자가의 성성(聖性)입니다. 관상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성성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성에 절대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라고.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저술한 것도 이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소명은 고통을 통해서 기쁨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레바논 지역의 베카(Beqaa)를 순례하는 알프래드 신부는 한 달에 한두 번 로마노 신부를 방문했는데 한번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관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아니면 복음 독서를 통해서 다다를 수 있습니까?” 로마노 신부는 그에게 “기도와 복음 독서는 초심자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관상은 좀 다릅니다. 그것은 기쁨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굳이 기도와 관상의 차이점을 찾는다면, 관상은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죽기 전에 소각시켜 버리려고 했던 그의 노트에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명확하게 적어놓았다. “그리스도교 신자와 교회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만큼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적 위대함의 절정에 도달한 것은 십자가상에서였다. … 가시적인 세계, 현재 생활에서 이 십자가는 구약성서(유대인의 예루살렘)가 향해서 가야할 정점이며 신약성서(교회)가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점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자신 안에서 실현해야 하고, 이 정점을 지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자는 이 정점 안에서만 참 그리스도인이며 스스로 복음을 실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어떠하셨는가? 그분은 승리하셨으나 패배하기도 하셨다(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그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사랑하셨으며 모든 인간을 위해서 완전히 자신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는 어떤 토론의 여지가 없고, 지상적 것에 대한 애착도 없다. 오히려 천상적인 것을 기다리는 것만 있을 뿐이다. 정점인 십자가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영원함은 십자가에 달려있다. 그것만이 필요한 현실이며 값진 보석이다. 이 정점(보석)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발견한 것만큼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노트 54).
연대기 --------------------
1921년 12월 28일 이탈리아 벨루노의 싼 도나또 디 라몬에서 탄생
1921년 12월 31일 세례
1933년 10월 2일 펠뜨레 소신학교 입학
1938년 7월 개인적으로 종신정결서원과 자비깊은 사랑에 생명을 봉헌
1939년 - 1946년 벨루노의 그레고리오 신학교에서 면학
1945년 8월 로마의 뜨레 폰떼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1개월간 수도승체험
1946년 6월 29일 사제수품
1946년 8월 5일 뜨레 폰떼네 트라피스트 수도원 입회
1946년 9월 8일 수련 착복
1948년 9월 8일 유기서원
1951년 9월 8일 성대서원
1953년 6월 15일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수료
1961년 8월 8일 라트론으로 출발
1963년 12월 뜨레 폰떼네 수도원으로 돌아옴
1964년 10월 29일 3년간의 은둔생활 허용 특전
1964년 11월 20일 레바논의 야불레에 도착
1966년 8월 로마노 신부는 은둔소 앞에 자신을 위한 무덤을 파놓았다.
1967년 7월 28일 성좌로부터 은둔생활을 위한 특전을 받음
1969년 - 1973년 이스라엘에서 은둔생활
1973년 - 1978년 야불레에서 은둔생활
1976년 완전히 속세를 떠난 은둔자 생활
1976년 9월 시리아군에게 체포됨
1978년 1월 22일 은둔소에서 엄청난 각혈(咯血)을 함
1978년 2월 19일 바이루트에 있는 호텔 듀(Diu)에서 사망
1978년 2월 20일 발벡의 성녀 바르바라 주교좌 성당의 제단 아래, 사제들을 위 한 묘지에 매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