룁(Loeb)가족의 비극적인 역사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Korneel Vermeiren - Gertrudis van der Donck
목 차 --------------------
서문
룁 가족
대가족으로 성장
교육
트라피스트 수사, 수녀들과의 교제
전쟁
헤드비제 수녀(Lien) 룁 O.C.S.O.
이냐시오 신부(George) 룁 O.C.S.O.
리누스 수사(Robert) 룁 O.C.S.O.
마리아 데레사 수녀(Door) 룁 O.C.S.O.
니바르드 신부(Ernst) 룁 O.C.S.O.
베로니카 수녀(Louis) 룁 O.C.S.O.
서문
1942년 8월 2일, 유대인 가톨릭 신자들 200명 이상이 독일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
다. 그 중에는 수십 명의 수도자들도 있었다. 룁 가족 중 트라피스트 수사 3명과 트라피스트 수녀 2명이 각각 그들의 수도원 코닝스훼벤(Koningshoeven)과 코닝스오르드(Koningsoord)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틸브르그(Tilburg)와 암머스포르트(Amerafoort)를 경유하여 웨스터보르크(Westerbork) 수용소로 끌려갔다. 며칠 후 8월 7일, 그들은 다시 아우슈비츠로 수송되어 그곳에서 살해 되었다.
룁 가(家)
룁 일가는 본래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며, 트리어(Trier)와 쾰른(Colonia) 사이에 위치한 라인(Rhine) 동쪽에 살았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조부모는 1882년 네델란드의 하그(Hague) 근교로 이사하기 전에 아이펠(Eifel)에 있는 오이스키르헨(Euskirchen)에서 살았다. 이 나라에서 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유대인의 오래된 관습과 전통적인 엄한 계율과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경제적, 종교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네델란드의 시민권을 취득했고 자녀들에게도 자신들의 그런 의향을 충분히 밝히고 교육을 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의 유대교 관습 중 몇 가지는 지켰다. 예를 들면 금요일 저녁은 ‘가족의 저녁’으로 정해놓고 지켰다. 그들의 조부 나탄은 큰 축일에 시나고가에 갔으나 그 외의 유대교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제한시켰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 할례를 주고, 아이들의 성인식(바르미츠바(barmitzvah))을 해주기도 했으나 사회적으로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크리스챤 학교에 다니게 했다.
1881년 11월 16일 룁 가정에 태어난 아들 루츠(Lutz)는 그들이 아직 하그로 이사가기 조금 전 오이스키르헨에서 태어났다. 루츠가 우리 형제 자매들의 아버지였고, 사업가였다. 그는 중등학교 3년을 마친 후 암스테르담에 있는 실업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지방에서 온 많은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그의 새 친구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는 물질주의와 대면하게 되었고 그것에 맹렬하게 도전해야만 했다.
졸업하자마자 루츠의 아버지는 그를 부르셀에 있는 벤자민 볼프가에 견습생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가톨릭 교회를 경험하게 되었다. 브뤼셀에서 견습 기간을 마친 그는 하그로 되돌아와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델프트에서 광산기술을 전공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했다. 루츠에게 이 시기는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에게 결정적인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비크만(Beekman)씨였다. 학생들의 지도사제였던 예수회 소속인 에르만 신부도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루츠는 열심히 일하는 연구가로서 금욕과 신비주의적인 관상을 지향하는 마음과 폭넓은 독서와 문헌연구로 종교상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루츠는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근원을 재발견하고 심화시켜갔다. 그의 가족들 안에서나 유대교 안에서 이 근원이 충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양쪽 모두를 자신이 성장해가고 있는 생활패턴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신약성서 소책자를 구입했는데 이것은 루츠에게 하느님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공부할 때 그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될 젊은 여성 제니 판 겔더(Jenny van Gelder)와 교제하게 되었다. 그녀는 유대교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음악에 비상한 소질을 타고난 여성이었고, 음악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된 루츠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 그녀는 그와 함께 세례성사를 준비했다. 1907년 10월 2일 델프트에서 학생 지도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가족들의 저항과 분노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룁 가족들로부터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가톨릭신자로 살라는 권고를 받아들였고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였다. 두 사람은 같은 달에 결혼하였다. 혼인 증인은 유대교 사제가 서 주었다. 그들이 얼마만큼 유대교 혼인 전통을 따랐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둘은 신혼여행 동안 비밀리에 수도원에서 에르만 신부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수도회의 두 형제가 증인이 되어 주었다.
룁 가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 유다 전통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루츠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루츠가 볼 때 유대교는 예비적 단계이므로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회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개종하기를 바랐다. 신앙 면에서 그의 태도는 적극적이었고 철저했다. 루츠의 확고한 신앙과 그의 확신은 이러했다. “자신의 종교를 영 안에서 진실 되게 숙지하는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은 결과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회심에 관한 스토리를 기사로 남겼다.
그들의 어머니 제니 역시 자신이 유대인이며 전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금요일 밤은 촛불을 밝혔고, 늘 축일처럼 경축했으나 동시에 가톨릭교회에 완전히 정착하여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였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종교적인 영향은 참으로 숭고한 것이었다.
대가족으로 성장
1908년 3월에 첫 아이 린(Lien)이 리스빅(Rijswijk)에서 태어났다. 그 후, 1909년 제오르지(George)가 휀스브뢰크(Hoensbroek)에서 태어났다. 두 아이 모두 비밀리에 세례성사를 받았고 제오르지는 할례도 받았다. 1910년에 로베르트(Robert)가 하그에서 출생했다. 그는 할례도 받고 세례도 비밀리에 받았다.
1911년 쌍둥이 루이스와 도로테아가 스마트라(Sumatra)에 있는 자바 뢴타(Sawah Loenta)에서 태어났고,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1913년 에른스트가 자바 뢴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례는 받지 않았고 1914년 1월 15일에 세례를 받았다. 1916년 한스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할례는 받지 않고 1916년 10월 22일 세례를 받았다.
룁 가족은 1910년에서 1919년까지 인도네시아에 체류하였다. 그들의 아버지 루츠는 산봉우리가 뾰족한 산들을 찾아다니며 광산 맥을 검토하는 모험을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22년부터 1936년까지 그는 베르겐 옵 줌(Bergen op Zoom)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화학을 가르쳤다. 이 유대인 가족은 그 지방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신자생활을 열심히 해보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숨은 신자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고 교구와 사회의 많은 단체에 가입했다.
루츠의 사도적인 바람인 ‘성체의 십자군’ 단체에 가입하여 지방지부의 책임을 맡은 주요 지도자의 역할을 잘 해냄으로써 그의 자질이 드러났다. 이 단체는 성인들의 전례적, 교리적 양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관상적인 쪽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내 제니는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가족은 베르겐 옵 줌의 성직자들과 자주 교제하였다. 안톤 판 디크(Anton van Dijk) 부 주임신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강한 신앙을 가진 이 가족의 단골손님이 되어주었다. 그는 유대인 뿌리를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이 가족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나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유대 민족임을 느끼고 여전히 유대 민족과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나는 결코 나의 유대인 혈통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루츠는 말했다. 그의 아내 제니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어떻게 신앙의 진지함과 따뜻한 친절과 문화적인 교양과 사회적 교제를 조화롭게 통합시키며 살아갈지 잘 알고 있었다.
교육
루츠와 제니는 그들의 자녀들을 차례로 가톨릭 중학교에 보냈다. 여자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당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간호학을 전공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수도회의 수녀들에게서만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쌍둥이 두 딸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을 끝내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온 후, 치메이(Chimay)에 있는 평화의 성모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몇 년을 집에 머물렀다.
남자 아이들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주어졌다. 제오르지(George)는 예수성심 남자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소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 후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의 지도를 받았으며, 엑흐트(Echt)에 있는 성 베르나르도 신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8월 27일, 코닝스훼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로베르트(Robert)는 마리스트 수도회의 소신학교를 시작했으나, 학문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후 카푸친회의 수련자가 되었다가 1928년 3월 25일 곧바로 코닝스훼벤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편입하였다. 에른스트는 곧바로 엑흐트에 있는 성 베르나르도 대학교에 들어갔으며 1929년 8월 20일 그의 형들과 같은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한스(Hanse)도 에른스트를 따라갔지만 성 베르나르도 대학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베르겐 옵 줌으로 되돌아와서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트라피스트 수사, 수녀들과 교제
앞에서 서술했듯이 룁 가족은 베르겐 옵 줌에서 그곳 주임신부 안톤 판 딕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이 사제는 1925년 4월 25일 코닝스훼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해서 레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도원과의 첫 만남은 이 사제를 통해서 연결 되었다. 그 후 1926년부터 루츠는 매년 코닝스훼벤에 가서 개인피정을 했다. 거기서 동 시몬 두뷔손(Dom Sim on Dubuisson)을 알게 되었다. 이 만남은 룁 가족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23년부터 동 시몬은 가대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12세부터 15세 된 소년들이 성 베르나르도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필요에 따라서 학비를 보조해 주기도 했다. 휴가 때는 이 소년들이 며칠간 수도원에 머물면서 실제로 수도원생활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동 시몬은 수도원 안에서 정겨운 아버지였다. 이 교제를 통해서 룁 가족은 트라피스트 수도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딸들을 위해서도 어떤 가능성이 없는지 동 시몬에게 물었다. 동 시몬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란다에 여자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창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린의 소명을 보고 그녀를 평화의 성모 수도원에 보내서 양성을 받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일하셨는지를 볼 수 있다. 평화의 성모 수도원 공동체는 동 시몬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란다의 젊은 수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동 시몬은 은세 수도원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룁의 딸들을 위해서 평화의 성모 수도원 생활을 보여주려고 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그 수도원을 찾아갔다. 룁가의 쌍둥이 자매가 이 그룹에 속했다. 도르(Door)는 1929년 4월 12일, 위스(Wies)는 1930년 5월 3일에 그곳에 입회하였다. 이리하여 수도원은 급속히 성장했으며 수녀들의 수는 모두 98명이 되었다. 그 사이 동 시몬은 수도원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1937년 오란다 수녀들은 메르켈 엔쇼트(Berkel Enschot)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동 시몬의 요청으로 평화의 성모 수도원장 마더 젤투르디스 데마레츠(M. Gertrudis Demarrez)가 오란다의 수녀들을 동반해 주었고 젊은 공동체를 지도하기 위해서 오란다로 왔다.
전쟁
1940년 5월, 오란다 역시 참전했다. 나라 전체는 급속히 점령군에게 정복당했다. 비록 독일 통치자들에 의해 감독을 받기는 했어도, 대단히 어려웠던 처음 며칠이 지나자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유대인들은 오란다에서 그들의 권리를 조금씩 착취당했고, 급기야는 격리시키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을 변두리로 몰았고 결국 추방시키기 시작했다. 1941년 1월에는 유대인은 모두 등록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유대인 신분증에 ‘J'라는 마크를 부치게 했다. 1942년 5월 초에 의복의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다윗의 별‘을 붙이고 외출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트라피스트 수사, 수녀가 된 룁가의 일원들도 예외 없이 등록해야만 했고, 다윗의 별은 샀지만 수도원 안에서는 부착하지 않았다. 한스 수사는 그것을 부착하기를 거부하면서 잠복해 버렸다.
1942년 7월, 점령군은 오란다에 있는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기 시작했다.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것에 반대했고 그 당시 경찰서장 세이스 인쿠아르트(Seys Inquart)에게 강한 항의문을 보냈다. 7월 26일, 주교들이 이 항의문의 요망사항을 교회의 강론대에서 낭독하도록 허락했다. 일주일 후인 1942년 8월 2일 일요일, 오란다에 있는 나치 당원의 총사령관 프리츠 스미트(Fritz Schmidt)로부터 다음과 같은 반응의 회답이 왔다. “우리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교섭에 전혀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유대인 신자들을 더욱더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고 즉각 그들을 ‘동방’으로 송환하겠다.”
이전에 이미 세이스 인쿠아르트는 간부회의에서 세례 받은 유대인들의 추방을 면제해줄 의사가 전혀 없음을 언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2일, 유대인 출신으로 오란다에서 가톨릭 신자가 된 유대인 시민 200명 이상이 독일 점령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날 밤 룁가의 3명의 트라피스트 수사들과 2명의 수녀가 코닝스오르드 수도원과 코닝스훼벤 수도원에서 체포되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주교들의 항의문 때문에 국외로 추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외로 모든 것을 신속하게 진행시켰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었다. 추방자들의 명단과 주소는 이미 오래 전에 독일 ‘이주사무국’에 준비된 상태였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우리 형제자매들이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었는지 묻고 싶다.
종(Jong) 추기경의 탄원서가 수도원 집회에서 낭독되었다. 헤드비제 수녀의 반응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체포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은 책 몇 권: 성무일도서, 미사전례서, 신약성서, 준주성범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8월 2일 밤기도(독서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경관들이 코닝스오르드 수도원 현관 벨을 울렸다. 헤드비제와 데레사 수녀가 가대에서 불려나갔다. 수도원 병실에서 바보 판 더 함(Bavo van der Ham) 상주신부로부터 길 떠나는 사람의 양식인 성체를 받아 모셨다. 이별의 말도, 격려의 한 마디도 할 시간이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장갑차에 실려 코닝스훼벤 수도원으로 향했다. 베로니카 수녀는 잡혀가지 않았다. 그녀가 아팠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그녀를 요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녀 대신에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으로 잠시 피신하고 있던 독일계 유대인 리자마리아 메이로브스키(Lisamaria Meirowsky)를 체포해갔기 때문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은 없다.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에서 코닝스훼벤 수도원까지는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다. 현관에서 한 번 더 벨이 울렸다. 룁가의 형제들은 밤기도에서 불려나와 수도원장과 함께 수도원 정문으로 나갔다. 만일 이들 형제들이 도망친다면 공동체 전체가 보복을 당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수도원 역사가인 안젤무스 테르스테게(Anselmus Terstegge) 신부는 ‘만일 우리 형제들이 도망친다면 다른 10명의 수도자가 대신 살해당하는 보복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동 시몬은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교구장과 상의했다. 그의 대답은 수도자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었다.
세 수사가 수도원 정문 밖으로 나갔을 때, 수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던 두 자매가 세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남매들의 상봉은 열렬했다. 경관들은 이 만남을 지켜보며, 어떻게 이토록 감격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수도자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틸브르그로 이동되었고, 다시 덴 보쉬(Den Bosch)로 옮겨졌다. 체포된 모든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암머스포르트(Amersfoort)로, 그 후 웨스터브로크(Wester- brok)수용소로 이동되었다. 웨스터브로크 수용소의 명단에는 헤드비제 수녀가 25번, 데레사 수녀가 26번이었다. 코닝스훼벤의 수사들은 각각 27번, 28번, 29번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1942년 8월 7일, 그들은 웨스터브로크에서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로 이동되었다.
그들이 암머스포르트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곳 간부들은 이들 수도자들을 조소하고 비웃고 놀리는 게임으로 날을 보냈다. 그들은 룁가의 세 수사들을 발사포 앞에 세워놓고 대포머리를 조율해서 그들의 자매들과 다른 많은 이들을 겨냥하게 하곤 했다. 그들에게는 장난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엘스 엔 브란덴드 토르트에서 에머렌치아 수녀, P.160 켐프너 P. 129 참조).
포로 동료 유디트 멘데스 데 코스타 수녀는 웨스터브로크에 체류하고 있던 때의 한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오후에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신부님이 우리 바라크로 와서 그의 자매들과 산보하였다. 그 때 나는 한 신부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그는 수련장이었다고 한다.”(Als een Brandende Toorts P. 161).
피터 신부의 보고에 의한 것이다. “두 명의 신부들은 많은 이들의 고백성사를 들었다. 그리고 수녀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포로들을 위로해주는 천사들과 같았다.”(켐프너 P.129).
8월 5일, 헤드비제 수녀는 웨스터브로크에서 필요한 몇 가지 물건과 옷가지, 필기도구를 보내달라는 엽서를 수녀원에 보냈다. 그들은 이 물건들을 받았을까? 8월 6일-7일 밤, 거의 모든 가톨릭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있던 많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동쪽’으로, 아우슈비츠로 이동되었다. 웨스터브로크로부터 아홉 번째로 수송된 사람들의 수는 총 987명이었다. 이들 중 464명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다른 523명은 즉시 독가스실로 보내져서 살해되었다.
8월 5일에 보낸 엽서 이후, 수도원은 1950년까지 다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1950년 4월 27일자 신문 “Jurnal Officiel No. 82 부록”에 헤드비제 수녀와 데레사 수녀, 그리고 리누스 수사의 사망 기사가 실렸다. 에른스트와 제오르지는 웨스터브로크에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지 며칠 후인 1942년 8월 19일 살해되었다.
코닝스오르트 수도원에 혼자 남겨진 베로니카 수녀는 그 동안 자신만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병은 대단히 심각했으며 떠난 형제 자매들의 생사를 극심히 걱정하고 있었다. 8월 28일, 덴 보쉬에 불려갔으나 엄청난 슬픔과 절망을 안고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덴 보쉬에서 그녀는 막내 동생 한스가 경찰차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벨지움으로 도피하려다가 국경선에서 체포되었다.
10월 16일, 그녀는 다시 한 번 암스테르담에서 강제노동을 위해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너무 병약했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런 일는 1942년 3월 22일에도 반복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 후 4월 9일, 웨스터브로크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일주간 머물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곳에서 그녀는 가족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 역시 어디론지 보내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체험을 해야만 했다. 아직도 베로니카 수녀의 수난의 길은 끝나지 않았다. 신체적으로 말할 수 없이 병약했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 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극도의 불안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8월에 다시 그녀는 웨스터브로크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번에는 수도원장이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신 원장은 그녀에게 지하저항운동을 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지하조직 안으로 잠복하도록 허락해주었다. 1943년 12월 31일, 그녀는 코닝스오르드로 되돌아와서 객실에 숨어 지냈으나 그곳도 안전한 장소는 못되었다. 1944년 1월 29일, 지하저항운동자의 도움으로 사복으로 변장한 그녀는 틸브르그에 있는 성 엘리사벳 병원에 머물렀다. 1944년 7월에 그녀는 얼마나 심하게 앓았는지 모두 거기서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거의 죽어가는 그녀를 수도원으로 다시 데려가야만 했다. 그녀는 정화된 베로니카가 되어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지난 수년간 그녀가 격은 수난의 고통과 수많은 절망을 통해서 그녀는 더욱더 정화되어 있었다. 그녀 자신은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그녀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8월 1일 밤 11시, 베로니카 수녀는 귀천하였다. 그녀를 수도원 묘지에 안장시켰다.
이것이 우리의 유대인 수사, 수녀들의 비극적인 삶의 최후였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상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죽음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전례에서)
수녀 헤드비제(Lien) 룁 OCSO ------------------
세례명: 리나(Lina)
애 칭: 리엔(Lien)
수도명: 헤드비제(Hedwige)
출생: 1908년 3월 3일, 리스위크(Rijswijk)에서 출생
세례: 1908년 3월 3일
수도원 입회: 1928년 4월 18일, 치메이의 평화의 성모 수도원
수련착복: 1928년 11월 4일
유기서원: 1930년 5월 4일
성대서원: 1933년 5월 4일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으로 파견: 1937년 7월 15일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 1942년 8월 2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1942년 9월 30일
헤드비제 수녀가 20세로 수도원에 입회하였을 때, 그녀는 오란다인으로서는 첫 입회자였다. 동 시몬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당신을 위해서 나는 수도원을 증축할 것입니다.” 1930년, 코닝스오르드의 토지 매입증서에 서명한 한 사람이 헤드비제 수녀였다. 그녀가 아직 성대서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어머니의 음악적인 소질을 타고났다. 헤드비제 수녀는 만돌린을 연주할 줄 알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또 한 가지 재능은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창의력을 가진 쾌활한 성격에 시원시원한 여성이었다. 수도원 안에서 그녀는 도서실과 접수계에서 봉사하였다. 수도생활 전체를 그녀는 유대인의 회심을 위해서 바치려는 지향을 가지고 봉헌하였다(브롬베르그, 1월 22일).
그녀의 특성을 드러내는 글이 기념카드에 이렇게 적혀 있다 :
“마더 헤드비제는 어머니다운 마음을 가졌고, 기쁨에 찬 애정과 항상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열렬한 기도의 정신으로 살았다.”
사제 이냐시오(George) 룁 OCSO ------------------
세례명: 제오르지
애 칭: 제오르지
수도명: 이냐시오
출생: 1909년 9월 25일, 휀스브뢱에서 출생
세례: 1909년9월 25일
코닝스훼벤 수도원에 입회: 1923년 10월 2일
수련착복: 1926년 9월 25일
유기서원: 1928년 9월 30일
성대서원: 1931년 9월 30일
사제수품: 1936년 6월 6일
본네콤베 수도원으로 출발: 1936년 7월 20일
코닝스훼벤 수도원으로 귀원: 1939년 9월 1일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 1942년 8월 2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1942년 8월 19일
사실 제오르지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예수성심 수도회의 신부들이 운영하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년간 그곳에서 공부한 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가족들 중에서 제일 먼저 시토회 생활을 선택했다. 이냐시오 신부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엔지니어 기술자이기도 했다. 사제 수품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 시몬은 그를 본네콤베 수도원으로 보내서 그들을 도와주도록 했다. 1939년 코닝스훼벤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임박한 전쟁을 예측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로부터 음악적인 소질을 타고난 그는 첼로를 연주할 줄 알았고, 수도원에서는 칸톨을 맡았다. 이냐시오 신부는 굳은 신앙심과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를 기념하는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특성이 묘사되어 있다. “이냐시오 신부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생기 넘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늘 영예로운 기쁨을 가지고 살았던 수도승이었다.”
수사 리누스(Robert) 룁 OCSO ------------------
세례명: 로베르트
애 칭: 롭
수도명: 리누스
출생: 1910년 10월 15일, 덴 하그(Den Haag)
세례: 1911년 1월 22일 파당(Padang in Sumatra)
수도회 입회: 1928년 3월 25일, 코닝스훼벤 수도원
수련착복: 1928년 9월 29일
유기서원: 1931년 3월 19일
유기서원갱신: 1934년 3월 11일
성대서원: 1937년 3월 19일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 1942년 8월 2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1942년 9월 30일
롭(Rob)은 삶에 나름대로 풍미를 첨가할 줄 알았고, 원기 왕성한 장난꾸러기 젊은이였다. 조수도자로 있으면서도 이런 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래서 그의 유기서원기를 연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수도원에서 그는 대부분 농장에서 일했다. 그 역시 테크닉에 타고난 재능과 창의력을 드러냈다. 전쟁 초기에 그는 혼자서 라디오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규 시찰하는 수도원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견책을 받아야만 했다.
그의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그를 묘사했다. “리누스 수사는 유모어 감각이 뛰어나고 천성이 쾌활했다. 모든 것에서 웃음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그가 수도규칙을 잘 준수하는 모범인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는 깊은 신앙심과 인내심을 가졌고, 활동적이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는 남다르게 참을성이 있었고 충실했다.” 암머스포르트에서 그는 공동체에 용서를 청하는 짧은 글을 보냈다.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행동을 용서해주기를 바라며 보다 많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를 기념하는 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특성을 묘사했다. “리누스 수사는 쾌활하고 만사태평한 사람이었으나 심성이 깊고 예수님께 대한 충실성에 있어서는 감동적인 사람이었다.”
수녀 마리 데레사(Door) 룁 OCSO ------------------
세례명: 도로테아(Dorothea)
애칭: 도르(Door)
수도명: 마리아 데레사
출생: 1911년 10월 22일, 자바 뢴타 스마트라(Sawah Loenta Sumatra)
세례: 1911년 10월 22일
수도회 입회: 치메이의 평화의 성모 수도원
수련착복: 1929년 10월 20일
유기서원: 1931년 4월 21일
성대서원: 1934년 5월 13일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으로 파견: 1937년 7월 15일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 1942년 8월 2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1942년 9월 30일
도르의 건강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의 삶은 그녀에게 분명히 힘든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대수녀로서 그녀의 소명에 충실했고,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봉사했다. 바느질을 맡아했으며, 꽃 가꾸는 일을 했다. 그녀 역시 양친이 가진 강한 신앙심과 경건함을 지녔었고 유대인의 회심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를 원했다.
그녀의 기념 카드에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마더 마리아 데레사는 마리아의 열심한 딸이었고, 어머니 공경에 열렬했던 사람이었다.”
사제 니바르드(Ernst) 룁 OCSO ------------------
세례명: 에른스트
수도명: 니바르드
출생: 1913년 8월 20일, 자바 뢴타 스마트라
세례: 1914년 1월 15일
수도회 입회: 1929년 8월 29일, 코닝스훼벤 수도원
수련 착복: 1929년 9월 27일
유기서원: 1931년 9월 30일
유기서원갱신: 1934년 10월 21일
성대서원: 1935년 9월 29일
사제수품: 1939년 6월 3일
독일 나치에 의해 체포: 1942년 8월 2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1942년 8월 19일
니바르드 신부는 친구로서 대단히 사랑받았다. 그는 진지함과 유모어를 자신 안에서 통합할 줄 알았다. 그와 함께 수련기를 보낸 사람 가운데 한 수도자는 그를 룁가의 다른 어떤 구성원보다 심성이 깊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니바르드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순교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트라피스트 수도자가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기념하는 카드에는 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니바르드 신부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골수에 박힌 수도승이었다. 언제나 하느님 생각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았으며 예수님의 엄청나게 큰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수녀 베로니카 (Louise) 룁 OCSO ------------------
세례명: 루이제
애칭: 위스(Wies)
수도명: 베로니카
출생: 1911년 10월 22일, 자바 뢴타 스마트라
세례: 1911년 10월 22일
수도회 입회: 1930년 5월 3일, 치메이의 평화의 성모 수도원
유기서원: 1932년 5월 12일
성대서원: 1935년 5월 12일
코닝스오르드 수도원에로 파견: 1939년 7월 15일
베르켈 엔쇼트에서 사망: 1944년 8월 1일
베로니카 수녀는 쌍둥이 중 한 사람이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다른 쌍둥이 자매보다 일 년 늦게 수도원에 입회한 이유도 건강 때문이었다. 치메이에서는 그녀를 코닝스오르드의 제의실을 담당해줄 사람으로 준비시켰다. 그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은 일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타이핑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일도 겸임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에 합당하게 존경심을 가지고 일했다. 온몸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녀는 병약함과 고통을 통해서 정화되었다.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이에 충실했으며 주님의 손에 완전히 자신을 넘겨드렸다. 그분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녀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는 새 생명에로 건너가 그녀의 형제자매들과 재회하였을 것이다. 충실과 용기와 깊은 신앙으로 점철된 생애, 질병의 고통, 가족들과 유대인 모든 형제자매들의 생사에 대한 고뇌로 가득했던 생애였다.
“모두 다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