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Rafael Arnáiz Barón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Alberico Feliz
목 차 --------------------
영원한 젊음
유년기와 청년기
건축학 전공
입회와 퇴회
수련기
뜻밖의 고통스럽고도 놀라운 일
영성
연대기
영원한 젊음
라파엘 수사는 젊었었고 젊음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27년의 생애는 성지주일과 부활 8부 사이에 각인되어 있고 청춘기 안에 그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전도유망한 씨앗이 청소년기 안에 뿌려졌고 성장했다. 오늘 뿌린 종자(種子)가 발아하여 싹을 틔운 것이 내일의 꽃과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번득이는 지성, 품위 있는 용모, 쾌활한 성격, 솔직하고 우호적인 성품을 갖춘, 그러면서도 대단히 단순한 사람이었다. 라파엘은 나이가 들면서, 이런 훌륭한 성품으로 성숙해갔고 그리스도교생활 안에서 영적으로도 심화되어갔다. 어릴 때부터 이런 생활 분위기 안에서 하느님의 일에 남다른 매력을 느꼈던 표징들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잘 준비된 라파엘의 마음에 은세(隱世) 수도원 생활이라는 특별한 봉헌이라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라는 부르심을 의식하게 하셨다. 어느 날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부터 그분을 아주 가까이서 따랐고 그분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다. 전도유망한 건축가로서의 출세를 뒤로하고 모든 꿈과 기대를 접고 듀에냐스(Duenas)의 산 이시드로(San Isdro) 시토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네 번이나 포기를 거듭해야만 했던 것이다. 맨 처음 수련자로, 그 다음은 헌신자로 숨은 삶의 단순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웅적으로 증거했다.
불치의 당뇨병을 앓으면서 열렬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았고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유일한 규범과 규칙으로 삼을 만큼 철저하게 그분의 뜻만을 찾았다. “나는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그분의 의지가 나의 의지이기만을 원한다.” … “하느님의 의지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복되다.” … “나의 유일한 소망은 철저하게 전면적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것이다.” …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면서 죽고 싶다.”
그의 저작과 삶의 향기는 계속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영성과 만남을 통해서 많은 은덕을 입는다. 영성은 풍부한 뉘앙스를 가졌으며 ‘오직 하느님만!’이라는 이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하느님께 매료된 그의 온 생명은 사랑 안에서 불살라졌다. 영성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마리아는 그를 지탱해준 희망이며 빛이었고 그는 무한한 신뢰와 단순함으로 그분 안에서 은신처를 찾았다.
유년기와 청년기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은 1911년 4월 9일 성지주일, 브르고스(Burgos) 시에서 태어났다. 동 라파엘 아르나이즈와 그의 부인 돈나 메르체데스 바론의 첫 아이였다. 하느님께서 그의 양친에게 그를 축복으로 주셨음이 분명하다. 4월 21일, 소교구의 성녀 아가다 성당에서 라파엘-아르투로-알바로-호세(Rafael-Arturo-Alvaro-Jose)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원죄 없으신 성모님과 성 루이스 곤자가의 보호에 맡겨졌다. 겨우 2살 8개월 되던 해, 마침 브르고스 교회 주교좌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카나리(Canary) 섬의 동 안젤 마르쿠이나 코랄레스(Don Angel Marquina Corrales) 주교에 의해 아기 예수 아카데미에서 견진을 받았다.
1919년 10월 25일, 8살 반이 되었을 때 살레시오 수녀회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였다. 어머니는 “이미 이때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라파엘은 어렸을 때부터 사물을 아주 쉽게 이해하는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고 영리해서 교육시키기가 아주 쉬운 아이였습니다. 유년기는 잔잔하게 지나갔고 본능적으로 선에로 향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20년, 9살에 브르고스의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라 메르체데스(La Mercedes)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입학 후, 그가 갖춘 교양과 경건함, 고상함이 드러나면서 머지않아 교수들 사이에도 알려졌다. 즐겨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은 학생들 가운데 라파엘 혼자였다. 가족의 종교적 분위기를 체험한 그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1922년 1월 초순, 아르나이즈 바론 가족은 산림관인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오비에도(Oviedo)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라파엘은 거기서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는 성 이냐시오 아카데미의 고등학교 2년생으로 편입하여 통학했다. 그 학교 교장은 이 학생의 품행에 대해서 “첫 순간부터 예수회 학교생활에 익숙했던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명한 아이였고 성적표에서 드러나듯이 수학에 재능이 뛰어났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항상 기분 좋은 대화의 파트너였으며 우수한 어휘력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품행과 대화하는 태도에서는 종교적인 감각의 깊이가 감탄할 만했다. 동급생 중 한 사람은 “학교에서는 그가 라 트라프 수도원에 입회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수도자가 되리라는 것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깊은 신심에 이끌려 성 스타니슬라우 신심회의 한 멤버가 되었고, 그들의 메달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한 교장은 “라파엘은 품위와 위엄이 있고 예술적인 우아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었으며, 모든 것 위에 오로지 하느님께로만 향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마치 자석의 힘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하느님께 매료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건축학 전공
오비에도에서 데생과 회화를 습득했다. 이것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건축가로서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마드리드의 건축전문 상급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18살 되던 해인 1929년 4월 26일부터 1930년의 이년(네 학기)을 위한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사실 그의 꿈은 데생과 그림을 그려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켄버스와 브리스틀(Bristol) 판지에 그의 예술가적인 혼이 착상한 것은 무엇이나 묘사하고 싶어 했다. 건축학의 첫 시험과목에 합격한 후, 6월의 시험과제로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상’을 모델로 데생한 것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잠시 여가가 생기면 ‘페드로실료(El Pedrosillo)'에 계신 외숙 내외이신 마쿠에다 공작 부처(Maqueda)를 방문했다. 그분들과의 만남을 즐겼고, 거기서 평화와 고요를 찾곤 했다.
어느 날 오후, 외숙부 레오폴드 공작은 그를 듀에냐스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데려갔다. 그곳을 구경시켜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의 성소에 하느님의 부르심의 신호를 보내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31년, 라파엘은 가톨릭 운동의 한 멤버가 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오비에도에서 철야 성체 조배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2개월 후, 성 빈첸시오 드 폴 연합회의 남성부에 참가하여 기도 사도직의 성가대 41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의무병역을 위해서 구아다라마의 시에라(Guadarrama Sierra) 산맥 눈 속에서 기술공병대대와 함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윤택한 생활에 익숙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군대의 어려운 생활을 아주 잘 극복해냈다. 그곳에서 학업과 군인으로서의 복무를 교대하며 동료 병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1933년 6월, 병역을 마친 후, 건축 상급 전문학교에 들어가 2년 코스를 전공하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숙소를 마드리드로 옮겼다. 공부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면밀한 스케줄을 짜놓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6시 반에 미사에 참례하고 저녁 8시부터 9시까지는 사랑하는 분을 방문하여 성체조배를 드리고 밤 11시 반에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부모님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하느님의 손에 제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고 시작하는 하루는 만사가 잘 되어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그리고 결코 세속적인 기분전환을 위해서 영화관, 극장, 무도회와 같은 곳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 번은 프랑스 수도원의 시토회 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퐁(Sept-Fons) 수도원의 800년제를 경축하여 찍은 영화였다. 이 기회에 그는 오래된 수도원이 보통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무대로 장식된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화면을 통해서나마 수도승들의 일상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었던 라파엘 안에서 듀에냐스의 성 이시드로 수도원에서 받은 강한 인상이 되살아났다. 그 후 그의 ‘페드로실료’ 방문은 잦았고, 그의 마음 안에 수도원 금역의 숨은 생활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하느님께 남김없이 드리고 싶은 결심이 강하게 다져졌다.
아빌라에서 그는 원장 동 펠릭스 알롱소 가르시아(Don Felix Alonso Garcia)에게 입회허락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올 원장님, 저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그곳 수도원에서 며칠 지낸 것이 오래된 일이기는 합니다. 벌써 3년이 지났으니까요. 그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제 안에 활동하셔서 온 마음과 몸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신뢰하면서 저의 결단과 결심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원장님께서 저를 공동체에 받아들여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시기만 하신다면, 당신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한 영혼을 받아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입회와 퇴회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경험하는 이별의 아픔, 감수성이 강하고 신앙과 사랑으로 충만했던 라파엘은 이것마저도 순수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수련장으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은 라파엘은 돛을 단 배처럼 하느님의 바다를 항해하러 떠나는 사람 같았다. 단번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타는 갈망으로 부모님께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아빌라에서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이는 사실 라파엘이 자신의 마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조언자들은 그의 이런 성급한 계획에 대해 분별있게 조언해주었다. 아빌라에 있던 로마교황청 대사 테데스치니(Tedeschini)는 “부모님께 이별의 문안을 드리고 두 분의 축복을 받고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네.”라고 그를 설득시켰다. 라파엘은 이 충고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여 오비에도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약 한달 반 동안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수련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직도 저는 부모님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들마저 그럴 용기를 좌절 시킵니다 : 어머니의 포옹이나 깊은 애정 표현 등등 … 그래서 저의 결심을 한 번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당신이 저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가야만 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 믿을 수 있으시겠는지요? 저에게는 이 일로 인해서 그분들께 상처드릴 용기가 정말 없습니다. 이미 저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외삼촌 레오폴드 공작에게는 알려드렸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제가 떠나기 전에, 마치 제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을 즐기라고까지 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수술을 받는 것도 괴로운데 수술 받을 도구를 저에게 스스로 준비하라고 또 그 준비를 즐기라고 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 어머니께서는 피아노를 치고 계십니다. … 그런데 저는 떠나야만 합니다. 제가 행복해보이면 저의 부모님도 행복해하십니다. 그럴 땐 더 더욱 말씀드릴 수 없어 더 괴롭습니다 … 하느님께서 저를 당신의 고통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분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십니까! 정말로 이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조금씩 마음을 찢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두겠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라파엘은 1934년 성탄절과 새해, 주님 공현 대축일을 그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 자신만 빼고 가족들 모두는 축일을 즐겼다. 그들은 아직 그의 마음속 깊이 큰 아픔을 감추고 잠잠히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적당한 기회가 찾아왔다. 1월 7일 오후였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을 때 라파엘이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자연스러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치는 것을 멈춰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든 어머니는 몹시 마음 졸이며 “무슨 일인데? 말해보렴!”하고 대답하셨다. 라파엘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십니다 … 트라파에 입회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가 항상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오직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들아!”
라파엘의 아버지가 도착하자 부인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타격을 그의 그리스도인다운 꿋꿋한 신앙심으로 받아들였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입술의 떨림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준 다음 그는 라파엘에게 “언제 떠나고 싶으냐? 자동차로 내가 데려다주마.”라고 말했다. 이것이 전부였다. 너무도 단순하고 자연스러웠다. 전혀 극적이지 않았고 거기에는 슬픔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을 원하셨고 그들은 그저 자발적으로 바쳐야만 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아들은 첫 번째 아버지의 부르심에 달려가는 것이고 그리스도 신자인 인간 부모는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었다.
출발은 1월 15일 오전으로 정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라파엘은 듀에냐스의 성 이시드로 수도원에 도착했다. 라파엘은 아버지가 작별하려고 할 때 “평안히 가세요. 당신을 위해 기도 드릴께요.”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손에 입 맞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두 그리스도인의 이별이었다. 한 사람은 그가 왜 떠나야하고 다른 사람은 왜 그가 머물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날에 관해 수도원 일지에는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22세, 브르고스 출신, 건축과 학생, 가대수도자 지원자로 입회’라고 기입되어 있다.
수련기
행복감으로 충만한 라파엘은 이제 열망했던 소명의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느꼈다. 진심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트라파를 만드셨고, 저는 트라파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이제 저는 트라피스트 수도자가 되었으니 죽더라도 행복합니다.” 초심자인 그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께 이렇게 썼다. “새벽 2시가 되면 벨소리가 저에게 밤기도 바치러 가라고 알려줍니다.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생각은 하느님께 고정시키고, 행복한 마음으로 수련실 계단을 달려내려 갑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 수도승들의 찬미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침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 이 침묵이 하느님의 현존을 잃지 않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밭일 또한 즐겁습니다 … 그런데 좀 역설적인 이야기 같은데 여기서는 1월 중순경, 땅이 얼어붙으면 그때 괭이로 나무뿌리를 파내는 작업을 합니다.” … 그러면서 그는 서리가 멋지다고 묘사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밭에서 일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추위가 바로 하느님의 축복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렌즈콩도 조금씩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두 가지 좋은 것을 가미합니다. 하나는 배고픔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순절의 한 가지 희생은 배고픔이지만 행복합니다. 이런 희생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것들은 라파엘 수사가 관찰한 것들을 부모님께 써 보낸 것이다. “마리아 라파엘 수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의 부모님께 “저는 착복한 새 수련자입니다.”라고 썼다.
십자가의 성 요한 신비가 역시 하느님의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 좁은 문은 감각의 밤이며 영혼에게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 벌거숭이로 만든 후 통과하라고 명령한다. 정신의 어둔 밤은 이 좁은 길을 통과하여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한다.”(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 1,11,4」).
지금은 주님께서 그에게 천국과도 같은 신선한 감동과 기쁨을 맘껏 즐기도록 허락하신다. 그가 신앙 안에 튼튼히 설 수 있을 때, 트라피스트 소명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을 때, 시련의 가혹한 순간과 감각과 정신의 암흑이 조용히 다가왔다. 이것이 하느님의 놀라운 길이다. 그분은 영혼을 사랑으로 정복하실 때 그리고 성성의 정상까지 그를 들어 높이려 하실 때 그렇게 하신다.
뜻밖의 고통스럽고도 놀라운 일
사랑과 기쁨은 채 4개월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꿈속의 성채는 붕괴되었으며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운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라파엘 자신에게 무슨 변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상태로 혼자 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분해되는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중증 당뇨병”이었다. 며칠 사이에 체중이 24kg이나 줄었고 갑자기 시력마저 몹시 약해지면서 사물을 볼 수 없는 실명상태가 되었다. 거의 파멸지경에서 이 영혼은 자신 앞에 놓인 모든 길이 막혀버렸고, 나침반도 없이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다.
라파엘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극심한 정화의 도가니에서 철저한 격리와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담금질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트라프 생활을 두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1934년 5월 26일,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오비에도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한 달 가량은 수도원과도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깊은 최면술과도 같은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서서히 빛을 감지하게 되었고 조금씩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질환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미 나는 집을 떠날 때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게 속한 모든 것, 나의 영혼과 육신마저 전부 하느님께 넘겨드렸다. … 나의 정복자 하느님은 철저하신 절대자이시다. 그렇지만 그대로 괜찮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든지 좋을 대로,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를. 어떤 불평이나 반항도 하지 않을 것이다. … 하느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종이니, 말없이 그분께 순종할 뿐이다. … 그분이 요구하시는 시련은 가혹하다. 그러나 그분의 도움으로 뒤돌아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의 병은 이 지상에서 나의 보화다.”
건강이 점차 회복되면서 라파엘의 마음에는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커졌다. 그런 자신을 시험해 보려고 아니면 자신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4개월이라는 짧은 수도원 생활 체험을 “어느 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묵상”이라는 제목의 서정시로 작성했다. 이 글은 라파엘의 영적생활과 체험을 토대로 쓴 것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서정시이다. 라파엘의 이 “귀양살이(Exil)”는 1934년 5월 26일부터 1936년 1월 11일까지 거의 2년 걸렸다. 이 긴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들은 전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며 준비하고 계획한 수도생활이 이렇게 무참하게 붕괴되어버리다니. 라파엘은 공식적으로 법적인 서원을 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에서 ‘헌신자’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상태를 진지하게 숙고하기 시작했다. 당뇨병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규칙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헌신자로 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수련실로 되돌아온 후, 그의 묵상과 체험을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어느 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대형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 위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2년간 살아온 사실들과 머지않은 장래에 닥칠 사건들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표현한 데생이다. 라파엘에게 “헌신자”라는 말이 주는 의미는 “봉헌과 헌신”외에 그리스도의 희생신비와도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사에 자신의 소명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저의 소명은 세상과 그 피조물들을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침묵 안에서 그리고 헌신자의 수도복을 입고 겸손 안에서 제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숙모에게 썼다. 하느님의 희생제물이 되기를 원했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치 빛의 그림자가 삶을 통과하듯이 소리 없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했다. 이 헌신에 대한 자기인식은 라파엘이 시련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과 합하여 봉헌함으로써 심화되어 갔다. 이것은 성부로부터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님의 희생 제물에 그 자신을 더해드리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극한까지 간 철저한 자기증여에서 순교의 소명을 보기도 한다.
1936년 9월 29일, 스페인 내란 당시, 군에 징병되어 두 번째로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질병 때문에 부적격 판정을 받고, 하고 싶었던 애국적 의무이행을 하지 못하고, 12월 6일 세 번째로 수도원에 돌아왔다. 그의 동생 레오폴도와 여동생 메르체데스가 그를 동행해 주었다.
1937년 2월 7일, 병이 악화되어 세 번째로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마리 라파엘 수사는 다시 흰 수도복을 벗고, 엄격한 생활과 수도자의 침묵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주님, 언제까지 이렇게 당신은 충실한 당신 종의 마음을 후려치려 하시나이까?”
그는 부모님의 집, 그의 켄버스와 붓에게로 돌아왔다. 이 예술가의 영혼은 하느님과 켄버스, 화필에로 되돌아왔으며, 이 열렬한 구도자는 그것에로 피신했다.
1937년 12월 15일, 비오고 춥고 우중충한 날씨에 최종적으로 그의 네 번째이며 마지막이 될 라 트라프 수도원에로의 발길을 옮겼다.
가족과의 이별은 조용하고 단순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모두의 마음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이것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너를 데려다 줄 수는 없겠니?” “아니요. 이번만은 저 혼자 가겠어요.” 그는 영원히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아직 회복기에 있었기 때문에 라 트라프에 정식 간호사가 없어서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라파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병으로 집에 누워있으면서 거의 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고 간호나 배려를 받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 한 마디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나병환자들의 큰 무리를 이끄시고 당신이 누워있는 창가를 지나시는 것이 보였다고 하자. 그가 당신을 부르시면서 당신의 방문을 여셨다면, 그리고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넘치는 하느님의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면, ‘너는 왜 나를 따라오지 않느냐?’고 당신에게 말씀하셨다면, 당신이라면 그때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당신은 ‘주님, 당신이 저에게 간호사를 주신다면 따라가겠습니다.’ 혹은 ‘만일 당신이 의료진을 저에게 주신다면 그리고 저의 건강이 위태롭지 않고 안전하다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건강하고 튼튼해서 무엇인가 해 볼만 하다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감미롭고 다정한 눈길을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당신은 간호나 배려를 받게 되든지 말든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생각지 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따라나설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꼴찌에 서게 되더라도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먹고 마시는 것도.’ 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제가 따르는 것을 허락해주신다면, 당신이 저를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의 길이 가파르고 험난하더라도, 가시밭길이더라도, … 제가 십자가상에서 당신과 함께 죽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주님, 당신이 저를 안내하시고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시는 분도 당신, 구원하시는 분도 당신. … 오직 당신만이 제 영혼을 충만케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미래의 걱정은 물러가라! 인간적인 두려움은 사라져라. 나자렛 예수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 무엇이 두렵습니까? 형제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분을 따르기만 한다면 세상도 자신도 그 어떤 것도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제 영혼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이 눈길을 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저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오직 하느님 … 오직 하느님 만 … 하느님 한 분만 …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원할 때 오너라 … 네가 꼴찌면 어떠냐? 그렇다고 내가 너를 덜 사랑하겠느냐? 아마 더 사랑할 것이다.”
영성
라파엘 수사가 금역에서 세속으로, 집에서 수도원에로 몇 번이고 입·퇴회를 거듭하면서도 ‘하느님만(Solo Dios)’을 중심으로 살았고, 영혼의 자양분을 독서와 저술에서 섭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도원에 재입회할 때의 기억을 작은 노트에 적었다.
- 수도원을 처음으로 방문한 감상을 ‘트라프에서 받은 인상’에
- 수련기를 시작할 때를 ‘어느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묵상’에
- 두 번째 입회를 ‘나의 노트’에
- 마지막으로 1937년 12월부터 1938년 4월까지 6개월간을 영적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과 나의 영혼’과 ‘양심의 비망록’에 적었다. 그렇게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느님 탐구의 영성을 그의 깊은 마음 안에 배양시키고 내면화 시켰다. 이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이라는 단순한 두 단어로 표현했고, 이것이 그의 내적 생활을 채워주는 전부였다.
라파엘 수사의 인간적 영적 성품은 날이 갈수록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생애와 저작물, 영성에 관한 많은 저서가 출판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카리스마적 매력은 영성의 깊이와 동시에 하느님 백성이 가까이하기 쉬운 신앙의 단순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랑과 고통은 샘솟듯이 솟아나는 기쁨이 그러하듯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깊은 내면을 반영한다. 이것들은 라파엘 수사의 영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저술 안에서 타고난 문학적 소질로 자신의 영적 체험들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그의 어휘력은 뛰어났고 풍부한 문학적 탈렌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산문적인 표현은 탁월했고 풍경화를 그릴 때나 풍자화를 그릴 때처럼 절묘했다.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불가사의한 힘과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 개인적인 비망록은 그의 인품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를 한데 모아서 반영한 것이었다. 라파엘의 은세수도원적 삶의 여정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절대자를 향한 불타는 열망으로 영혼을 불사르는 그 자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깊은 감명을 저작품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그가 아니고서는 표현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신비스러움과 홀로 있으면서, 생각을 분석하고 소명을 해독하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갈망과 봉헌의 공유자로 만들었다. 이런 “증거”의 문학적인 표현방식은 그리스도교 문학 안에서는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하느님과 자신과의 사랑체험을 표현하도록 강요받은 사람만이 기록할 수 있는 ‘자서전적인 장르’이다. 어떤 신학자는 그의 저술에 대해서 “이것은 오직 성령의 압도적인 개입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라파엘은 그의 “묵상” “신심 깊은 성찰” “묵상기도” 안에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저작물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인 동시에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이다. 하느님께 글로 쓰는 것도 하나의 기도 방법이다.”
끊임없이 변모되어가는 그의 영혼은 변함없는 ‘상승’이었다. 그의 영적 변모와 영성은 전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성성이며 아주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서 급격히 이생의 삶의 베일을 찢어 던지고, 하느님의 생명 안에 흡수되어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싶은 갈망이었다. “영적 생활은 내적 삶이며,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만 계신다. 그 앞에서 말은 침묵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영혼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직 하느님의 위대하심만이 드러나도록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리고 싶다. 한 마디로 나를 잃고 싶다.”
우리는 라파엘 수사가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의 눈길이 그 위에 머물렀고 그분의 눈길과 만났으며 영웅적으로 충분히 아낌없이 응답할 줄을 알았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이 그를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연대기 --------------------
1911년 4월 9일 브르고스에서 출생, 4월 21일 세례성사
1913년 12월 1일 견진성사
1919년 10월 25일 첫 영성체
1920년 고열성 질환. 다음 해 중증 늑막염
1921년 완전히 치유받음. 아버지가 그를 필라르의 성모님께 봉헌
1922년 가족이 오비에도로 이사
1926년 동 에우제니오 타마요에게서 개인 미술 레슨을 받음
1930년 4월 26일 마드리드의 건축학 전문학교에 입학
1930년 9월 23일 듀에냐스의 산 이시드로 수도원 첫 방문
1933년 공수부대에서 군복무와 제대
1934년 1월 15일 듀에냐스의 산 이시드로 수도원에 입회
1934년 5월 26일 중증 당뇨병 발병, 원장은 그가 집에 가서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결정을 내림
1936년 1월 11일 헌신자로 수도원에 귀원
1936년 9월 29일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징집되어 수도원을 떠남, 군복무에 완전 히 부적격임을 판정받고 귀원
1937년 2월 7일 병이 다시 악화, 전쟁으로 인해 수도원 사정이 어려운 관계로 장상은 그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냄
1937년 12월 15일 가족의 안전한 보호와 보살핌을 물리치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 아옴, 최종적으로 그가 죽을 곳으로.
1938년 4월 26일 성성의 향기 속에서 라파엘은 하느님께 영혼을 맡겨드렸다.
1989년 9월 7일 그의 영웅적인 성덕에 대한 교령 공포
1992년 9월 27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도 16세에 의해 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