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성모 수도원(Notre Dame de Consolation)의
순교자들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Irenee Henriot / Joseph Dong
목 차 --------------------
최초의 경보(警報)
인민재판과 수도원 약탈
죽음의 행진
소그룹으로 나눈 석방
마지막 수인(囚人)들
크리소스톰 장(張) 신부와 5명의 수도자들의 사형집행
마지막 희생자인 테오도르 신부와 신앙 고백자 모-로 신부
최초의 경보
양가평(楊家坪)에 있는 위로의 성모 수도원의 수난은 청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도원은 두 개의 전투 사이에 놓여 있었고, 그 지역은 반 일본 게릴라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군대가 서서히 이 게릴라들을 흡수해갔고, 1938년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행정이 운영되었다. 일본인들의 정기적인 침입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일시적으로 분산되었다.
수도자들은 1939년 최초의 경보를 받았다. 공산당원들은 수도원을 포위하고 며칠 사이 군인들을 통해 무력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원을 샅샅이 뒤지고 무기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은폐시켜 둔 무기가 있는지 자백을 받아내겠다면서 중국인 수도자들을 잡아다 고문하였다. 그들은 안토니오 부(傅) 부원장을 잡아서 두 팔을 등에 묶어 수 시간동안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조수도자 베르나르도는 엄지손가락만 붙잡아 매다는 고문을 당했고, 제오르지 수사는 반나체로 심한 비바람 치는 날 밖에 노출시켜놓는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수도원은 더 이상의 심각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박해는 즉시 심각하게 닥쳐왔다. 객실 담당 수사가 공격적인 군인의 질문에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대답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수 명의 수도자들이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수도원장 동 알렉스 바이롱(Baillon)과 모르 부곤(Maur Bougon) 신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몬 데 카(Mont de Cats) 수도원의 수도승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1945년 10월 23일부터 1946년 3월 17일까지 감옥에 감금되었다. 사령관을 살해한 군인을 피난시켰다는 죄목으로 수도원장을 철로 만든 형구(形具)에 매달았다. 모르 신부도 그렇게 하였다. 인민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모르 신부의 현명한 대답은 고발자들에게 수치심을 일으키게 했고 이로 인해 경찰서장은 격분한 나머지 수인들을 석방시켰다.
그 후 동 알렉스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수도원장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수도원에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본수도회의 장상들은 모르 신부에게 프랑스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중국 교구의 성직자로 남아있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권했다. 신부는 두 번째 것을 선택했고 북경(北京)의 남쪽에 있는 교회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체포되어 위로의 성모 수도원 형제들과 북경 감옥에서 만났다. 그는 중국에서 추방당하여 프랑스로 돌아 갈 때까지 형제들과 함께 수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동 미켈 서(舒)가 위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895년경 상해(上海)에서 태어난 동 미켈은 유명한 하우-고앙-기(Hau Koang Khi)家 출신으로 마태오 리치의 선교로 개종한 고급관료였다. 미켈 신부는 상해(上海)교구의 사제였다. 1938년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주교의 허락을 10년간 간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인이 많았고 대단히 존경받는 교양인으로서 상해의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성대서원 후 수련장이 되었다.
인민재판과 수도원 약탈
1947년 7월 초순, 인민법정의 재판에 의해 수도원이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수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공산군 수장 이추사(李推事)라는 인물은 하느님께 대한 증오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 수도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끊임없이 막대와 곤봉으로 매질하게 했다. 특히 세라핌 사(事) 신부와 크리소스톰 장(張) 신부에게 더욱 가혹한 폭행을 가했다. 로취(Roch) 수사는 잔인하게 두들겨 맞았다. 어거스트 파우르(August Faure) 신부는 동 미켈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장이라고 수장에게 말한 탓으로 뭇매를 맞았다. 어거스트 신부, 세라핌 신부, 크리소스톰 신부는 모두 상반신이 벗겨진 채 7월의 뜨거운 불볕아래 내던져졌다.
그들은 세라핌 신부가 일본인의 유력한 스파이라고 고발하도록 전도사 마담 장(張)을 불렀다. 그녀는 세라핌 신부는 스파이가 아니라 교리를 가르친 분이라고 용감하게 진실을 선언하였다. 그 이유로 마담 장(張)은 기둥에 묶인 채로 죽을 지경까지 구타당했다. 그 때 헌신자였던 이시드로 수사는 어떻게 여성을 그렇게 두들겨 패느냐고 항의했기 때문에 그도 또한 뭇매를 맞았다. 잠깐 잠깐 행해지는 심문은 의례 구타로 시작되었다. 수도자들 8명은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과 발을 철봉에 매달았다. 8월 12일 한밤중 최초의 출애급(Exodus)이 시작되었다. 공산당원들의 습격이라고 했다. 8월 15일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조수도자 브르노 부(傅)가 82세로 극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8월 18일에 그들은 수도원으로 돌려보내졌다. 75세 된 클레멘스 고(高) 수사와 66세인 필립 류(劉) 수사가 기아와 피로와 엄청난 고뇌로 귀천하였다. 이미 8명 이상이 철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가슴 앞으로 손을 수갑에 채우거나 등 뒤로 돌려 쇠고랑에 묶었다. 어떤 사람은 벌거벗긴 채 어찌나 심하게 묶였던지 뼈가 허옇게 보일 지경이었다. 손발이 묶인 이 불쌍한 사람들은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어서 동물처럼 먹어야만 했다. 8월 28일에서 29일 밤, 이들에게는 두 번째 결정적인 일이 닥쳤다. “죽음의 행진”의 출발이었다.
죽음의 행진
71명의 수도자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손발이 묶인 채로, 전원은 수도복의 일부를 벗기운 채 굶주림과 비바람 속에서 감시인들의 무거운 식량자루를 짊어지고 떠나야했다. 최연장자와 병약한 이들은 임시로 만든 들것에 실려서 형제들이 들고 가야만 했다. 밤 동안 수도자들을 돼지우리에 밀쳐 넣었다. 9월 6일 기옴 감보류(Cambourieu) 신부가 숙박지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그는 72세였다. 기옴 신부의 들것을 운반하는 수도자가 미끄러지면서 들것 손잡이를 놓치는 바람에 그는 들것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돌멩이에 세게 부딪혀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수도자들은 비밀리에 서둘러 그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다. 그를 위한 임종예식과 기도드리기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시 그를 이웃 마을에서 화장시켰다. 기옴 신부는 오베른(Auvergne) 사람으로 파리외방선교회 수도자였고, 1937년 62세로 위로의 성모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9월 7일에 텅-기이우(Teng-Kiau)에 도착했다. 이 가엾은 무리는 10월 10일까지 32일간을 거기 머물렀다.
에티엔 모리(Etienne Maury) 신부는 나자리스트 회원이었는데, 4년 전에 뇌출혈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재발하여 임종하게 되자 용감한 세라핌 신부는 비밀리에 그에게 종부성사를 주었고 그때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빛났다. 텅-기이우(Teng-Kiau)에서 머문 기간은 그들에게 휴식은 말할 것도 없고 한 숨 돌릴 겨를도 없었던 완전히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수도자들 중 많은 이들이 춥고 습한 어두운 곳에서 병에 걸렸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을 수도 빨아 입을 수도 없었으며 해충들로 뒤덮혔다. 쇠고랑에 채워져 있었으니 해충들을 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자들은 어떤 신호를 보내거나 기도를 하거나 입술을 움직이는 것마저 금지 당했다. 공개재판은 물론 개인적인 심문을 받을 때도 철봉이나 채찍으로 사정없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우리가 알기로 사형집행인들은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니 우리는 너희를 반쯤 죽을 때까지 때릴 것이다. 그러면 항복하겠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항복하지 않았고 그대로 죽어갔다.
세라핌 신부로부터 수도원에 대한 고발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지 못한 사형집행인들은 맹수처럼 그를 공격하며 때렸다. 그렇게 구타를 당할 때마다 숨도 쉴 수 없이 허약해졌지만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쇠사슬로 묶어놓았다. 그는 오직 무릎을 꿇거나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아주 작은 움직임도 그에게는 엄청난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원장 동 미켈 서(舒)와 테오도르 신부, 니베르 신부와 알렉시스와 다미엔 수사들 역시 손이 등 뒤로 묶였다. 다미엔 수사는 걸을 수조차 없어 무릎으로 기어가야만 했다. 채찍질을 가한 후 그들을 돼지우리 속에 던졌다. 혹시나 크리소스톰 장(張) 신부가 다른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특별히 잔혹한 고문으로 고통을 준 다음 돼지들과 함께 우리에 가두었다.
9월 10일경, 마르틴 류(劉) 수사가 극도의 피로로 사망했다. 9월 13일 토요일, 일본에서 포로로 잡혔던 캐나다 출신, 예수회원 알퐁소 우루(L Heuureux)가 심문을 받을 차례였다. 그는 45세였다.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조소와 놀림에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이 사람들의 논증을 맹렬하게 반박했다. 그들은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켰고, 발가벗긴 채 손을 등 뒤로 묶어놓았다. 죽기 이틀 전, 다른 공산당원들보다 좀 덜 잔인한 젊은 한 병사가 알퐁소 신부가 갇혀있던 작은 방에서 세바스티안 신부가 누워있는 작은 옆방으로 그를 옮겨주었다. 알퐁소 신부가 그 병사를 불렀으나 그는 신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병사는 마지막 순간 고백성사를 보고싶어하는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알퐁소 신부에게 세바스티안 신부를 부축해서 데려왔다. 알퐁소 신부는 웃으면서 분명하게 머지않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바스티안 신부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그런 후 젊은 병사에게 정중하게 감사의 말을 하였다. “당신은 나에게 대단한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음날 이 젊은 공산당원은 알퐁소 신부의 귀천을 다른 수도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사람은 평안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양가평(楊家坪) 수도원의 ‘십’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십’은 중국어로 ‘十’(십자)로 표시한다. 이 남자는 ‘십’으로 십자가를 표현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수도원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수도승들은 즉시 그 말을 알아들었고, 알퐁소 신부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것을 의미했음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다.
9월 15일경, 에밀 이(伊)(65세)가 귀천하였다. 그는 대단히 건장한 사람이었고 애국심도 남다른 중국인이었다. 같은 동족에게 고문당하는 자신을 보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다 사망했다. 그 후 며칠 사이에 네 명의 조수도자들이 연이어 귀천하였다. 콘라드 마(馬), 제롬 류(劉), 발토로메오 진(陳), 루이 곤자가 임(任)이다.
소그룹으로 나눈 석방
1947년 9월경, 수도자 전원에게 내려진 사형판결은 고등법원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이추사(李推事)와 그의 자문들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자들을 소그룹으로 석방시키기 시작했다. 우선 사제가 아닌 가장 젊은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다시 모이거나 사제로 수품 되면 죽을 각오하라는 협박과 함께. 그렇지만 수도자들은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위로의 성모 수도원 수도승들은 동 쟌-마리 스트뤼벤(Jean-Marie Struyven)과 합세하여 북경(北京)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35명의 수도자들이 이렇게 석방되었다. 5명의 수도자들은 극도의 쇠약함으로 사망했거나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거나 강제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5명은 시종직을 받은 후고 원(苑), 이레네 왕(王) 수사, 마르틴 사(事) 수사, 시몬 사(事) 신부, 젠 가브리엘 천(天) 수사였다.
젊은 서원자 테오파노 신부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재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에 보내졌다. 하느님의 존재를 모독하는 소리를 듣고 공개재판에서 증명하려는 각오 하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신부는 먼저 수도자들과 함께 돌려보내졌으나 다시 구류되었다가 석방되어 최종적으로 북경(北京)에 도착했다.
마지막 수인(囚人)
들
공산주의자들 손에는 아직도 24명의 수도자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중 13명이 사제, 1명이 부제, 1명이 시종직, 9명이 수사들이었다. 이추사(李推事)는 이 가엾은 수도자들을 악착같이 폭행과 구타로 심하게 박해했다. 1/3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부원장 안토니오 부(傅)는 그리스도의 용감한 용사답게 죽었다. 그는 오랫동안 부원장직에 있었고, 규칙준수의 모범자였다. 수갑이 가혹하게 손목을 옥죄었기 때문에 손과 팔목이 부어오르기기 시작하더니 살이 썩고 뼈가 훤히 드러났다. 지독한 통증을 감수하면서도 신부는 결코 그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했다. 죽기 3일 전에도 그는 쇠고랑을 발목에 차고 여전히 연장자 수도승을 운반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식사 후에 죽었는데 독살된 것 같다. 어거스틴 사제 역시 안토니오 사제와 마찬가지로 식사 후 발열이 있으면서 정신착란을 일으킨 후 사망했다. 그들은 이 두 사람의 음식에 독을 넣은 것으로 보고 있다.
11월 1일, 말라키 조(趙)와 아메데 류(劉)를 선택된 사람들에 포함시켰다. 12월 초반에는 인원이 4명의 사제로 줄었다. 틸브르크의 수사였던 엘레드 드로스트(Aelred Drost)는 암스테르담 출신이었다.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온화하고 공동체로부터 존경 받았던 사람이었다. 알퐁소 루루 신부와 마찬가지로 그는 일본인에 의해서 적국의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는 풀려나자마자 양가평(陽家坪) 위로의 성모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죽음의 행진과 기아로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으나 대단한 용기와 영웅적인 인내로 참아 견디었다. 신부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고국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그에게 청하기도 했다. 신부는 수도원장에게 순명하듯이 그들에게도 순종했다. 그는 성인처럼 살았고 순교자로 죽었다. 엘레드 신부만이 언제나 그날이 무슨 날이고 무슨 요일인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는 매일 매일 그날이 주일인지, 축일인지를 수도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일 신부는 마음으로 성무일도를 암송했다.
오딜론 장(Odilon 張) 신부는 만-주리(Mand-chourie)의 기린(Kirin)교구 사제였으며 1936년 40세로 본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가르페이(Garpais) 주교는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수도원으로 떠날 때 주교는 친히 그를 기차역까지 동반해주었고 대합실에서 무릎을 꿇고 신부의 강복을 청하였다. 오딜론 신부는 몇 번이나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평상시와 다름없이 침묵 중에 머물렀다. 결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극도로 쇠약해져서 사망했다.
다음날, 12월 8일, 보나벤뚜라 조(趙) 신부가 귀천하였다. 안토니오 신부와 마찬가지로 수갑을 찼던 손목에 생긴 상처는 곪아터졌고, 화농으로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지성을 갖춘, 신앙심 또한 돈독했던 보나벤뚜라 신부는 모든 것을 영혼의 고결함으로 참아냈으며 이것은 형제들에게 신념을 불어넣었다. 12월 13일은 미켈 원장이 그의 충실함과 고난의 보상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죽기 전에 신부는 모든 권한을 크리소스톰 신부에게 위임했다. 그의 자리를 위임받은 크리소스톰 신부가 그를 대신하여 원장이 되었다.
크리소스톰 장(張) 신부와 5명의 수도자들의 사형집행
크리소스톰 장 신부는 북경에서 태어났고, 만주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다수의 사제와 수도자들을 배출했다. 크리소스톰 신부의 백부 제라르드 장(張) 신부는 위로의 성모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오래하신 분이며 1941년에 귀천하였다. 크리소스톰 신부는 열성적이고 관대한 사람이었으며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그는 공동체 모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48년 1월 18일, 그가 금고형(禁固刑)에서 강제노동으로 바뀌었을 때 바실 유안 신부가 병환으로 그날 밤 사망했다. 크리소스톰 신부는 그에게 종부성사를 줄 수 있었다.
위로의 성모 수도원 수도자들의 공개재판이 끝나갈 때가 왔다. 이추사(李推事)가 사악한 일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고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에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몇 사람의 사형집행은 실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최고권위자는 그에게 대량학살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수도자 6명을 알지 못하는 행선지로 끌고 갔다. 크리소스톰 장(張) 신부, 세라핌 사(事) 신부, 알렉스 류(劉) 수사, 다미안 황(黃) 수사, 엘로이 후(候) 수사, 쟌 마리 모(毛) 수사였다. 크리소스톰 신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포로 동료에게 이별인사를 하였다. 특히 다른 포로들과 함께 돌아온 모르 부곤(Maur Bougon) 신부를 포옹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6명의 수도자들은 양가평(楊家坪) 근교에서 인민재판이 열리게 되자 동네사람들 앞에 세워졌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붉은 잉크로 적혀있었는데 이유는 사형판결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엘로이 수사와 쟌 마리 수사는 그 때 20세의 젊은 수사들이었다. 이 두 수도자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그들이 남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추사(李推事)는 북부출신이었고 남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인들 가운데 4명이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을 그는 더욱 잔인하게 대했다. 수도자들의 죽음을 위한 명단은 수도원 근교의 주민들과 접촉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형집행하기에 신빙성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했다. 6명의 수도자 전원은 수도원에 대한 어떤 고발이나 비난을 단호히 물리쳤다.
인민재판에 이어 즉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3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원장 크리소스톰 신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신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증거했다. 다른 수도자들도 감탄할 만큼 묵묵히 고통을 참아견뎠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크리소스톰 신부처럼 자신의 용감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크리소스톰 신부는 죽기 직전에 자신과 운명을 같이한 5명의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바쳐드리고 우리의 전존재를 완전히 봉헌합시다.” 사형이 집행된 후 그들은 수도자들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므로 개들이 달려들어 그 피를 핥았다. 결국 이틀 뒤에 몇몇 신자들이 그들을 임시로 매장했다. 그 후 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북경으로 옮겨 장엄하게 장례 지냈다.
마지막 희생자 테오도르 신부와 신앙 고백자 모르 신부
1월 말, 14명의 수도자들이 또 석방되었다. 아직 수인으로 남아있는 수도자는 베노트-요셉 신부와 테오도르 신부, 로취와 아드리엔 수사 그리고 여기에 모르 부곤을 포함시켰다. 그 후 테오도르 신부는 결핵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서 격리되어 산 송장 취급을 당했다. 그가 1948년 4월에 귀천함으로써 이추사(李推事)의 33명 희생자 목록이 완결된 것이다.
베노트-요셉 신부와 로취 수사, 아드리엔 수사는 보호감시하에 베이징으로 옮겨졌고, 이어서 1948년 11월에 베이징에 있는 수도자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일시적이나마 공산주의자들 수중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 북경(北京)에서 박해는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몇몇 수도자들은 따로따로 흩어져서 란따오 기쁨의 성모 수도원(홍콩)에 도착했다. 기쁨의 성모 수도원 위임 원장 파울린 리(Paulin Lee)가 크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노력을 해준 덕분에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기쁨의 성모 수도원 형제들의 일부가 되어 포로수용소와 재교육 수용소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 수도자들은 모두 중국인이거나 외국인으로서 복음적 정신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을 지녔으므로 박해자들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증언하였듯이 마음의 단순함으로 용서 이외에 어떤 보복행위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 부곤 신부의 경우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모르 신부는 북경의 남쪽 페이몽(Peimong) 소교구의 주임사제였다. 이추사(李推事)가 그에게 체포명령을 내렸을 때 그는 충분히 도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가평(陽家坪)의 형제들을 생각하여 포로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긴 고통의 행진 후 그는 후앙-후아-고(Huang Hua Ko)에 도착했다. 이미 거기 있던 동료들은 신부가 도착한 것을 몰랐고, 신부도 그들이 거기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신부는 1948년 12월, 탈주를 시도했다. 이 시도는 실패하여 그에게 엄청난 징벌이 가해졌다. 그는 이 때문에 18시간을 팔이 뒤로 묶인 채로 천정 대들보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다. 그때부터 그는 등 뒤로 손이 묶여서 수갑이 채워진 채로 20일간을 재내야만 했다. 그는 옷을 입고 벗을 수조차 없었고 발은 동상에 걸렸다. 신부는 마담 마리 장(張)과 만났으며 그녀의 진술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석방될 수 있었다. 모르 신부는 다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
상부로부터 외국인은 살해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에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모르 신부를 군인병원으로 호송하였다. 공산주의자 가운데 한 상관은 시민 권력기관을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일본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을 유력하게 도와준 이 사람들을 이토록 쇠약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회복되자 신부는 경찰관들의 “손님”이 되어 그 사람들과 함께 숙박하고 식사도 같이 하게 되었다. 1949년 1월, 한 젊은 그리스도인 경비원은 신부에게 호스티아와 포도주를 조달해주었다.
1950년 8월 24일, 신부는 5년의 금고형을 언도받았고, 그 후 추방선고를 받았다. 그가 체포된 1947년 10월 24일부터 날짜를 기록해 보면 2년 2개월을 경과한다. 신부는 감옥에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어떤 때는 평범한 식사를 공급받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떤 의사가 수인에 불과한 그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싶다는 요청을 해온 것이다. 그 사람은 세례지원자였었는데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된 수인이었다. 그는 중병에 걸려있었다.
모르 신부는 1952년 3월 늑막염에 걸렸다. 의사들은 심장병이라고 진단을 내렸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가 감옥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추방시키면서 그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 너는 도중에 죽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신부는 북경과 천진(天津)을 경유하여 1952년 6월 16일 홍콩에 도착했다. 병원에 입원하여 1개월간 치료받은 후 비행기로 모국 프랑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