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 우리를 위해 한 아기가 태어났다(Puer natus est nolois; 이사 9,5. 주님의 성탄 대축일 셋째 미사 입당송). 아기이면서 “태곳적부터 계신 분”(다니 7,9). 이분은 몸의 외모와 나이에 있어서는 아기요, 말씀의 파악할 수 없는 영원성에 있어서는 “태곳적부터 계신 분”이시다. 또한 이분은 아기가 되지 않고도 세월의 장구함 그 자체에 있어서 항상 새로운 분, 그것도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지혜 7,27), 그 새로움과 동일한 “새로운 분”이십니다.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쇠퇴해가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정도에 따라 다시 젊어지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분은 사람을 노화시키는 동시에 젊어지게 하는 분입니다. 그분의 영원성에는 탄생의 순간부터 노화도 없습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의 젊음인 동시에 항상 젊디젊은 옛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로 태어나신 그분의 역사적 탄생과 천사들을 지극히 복된 자로 삼기 위하여 일찍이 하느님으로서 영원으로부터 태어나신 탄생과의 사이에는 제각기 다른 새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다 영광스러운 탄생이요 또 하나는 보다 깊은 자비로 말미암은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탄생은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던 우리를 위해서만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재난, 그것도 “떨쳐버릴 수 없는 재난”(이사 47,11)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희에게 자비를 보여주소서.”(시 85,8). 저희는 아직 당신 영광을 우러러 볼 자격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기를 빕니다.”(티토 3,4)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위엄과 신성의 광채의 현현을 우러러 불 수 있고 또 그에 합당한자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 저희 비참함을 몸에 걸치고 자비의 새로운 방법으로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비참함 그 자체를 좋은 약으로 만드시는 당신의 자비를 저회에게 보여주소서. 이 목적을 위해서 자비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니 즉 하느님의 지복과 인간의 비참함을 유일한 중개자 안에 융합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일치의 신비와 부활의 능력(필리 3,10)에 의해 지복이 비참함을 흡수하고,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영광스러운 자가 된 인간성 전체가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과실 때문에 지게 된 육의 연약함을 과실 그 자체를 제외하고 전부 몸에 떠맡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기의 연약함을 거부하지 않고 인간 공통의 조건과 다른 수단을 취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 예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더러움이 없는 분에게서 더러움 없으신 분으로서 태어나, 우리 원죄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고 두 번째 탄생의 성사를 우리를 위해 제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이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영광의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무(無)로 하여 사람의 몸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나이로는 어리고 자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되신 것입니다. 아 얼마나 복됩니까, 그 어리심, 그 약함과 단순함은! 모든 사람보다도 강하고 또한 현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과 그 현명함은 인간적 현실을 초월하여 신적 업적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기의 약함은 이 세상의 머리를 이기고 무장한 강한 자를 묶고 잔학한 폭군을 붙들어 우리 사슬을 풀어주고 사로잡힌 몸인 우리를 해방시켜주십니다. 이 갓난아기의 단순함, 그것도 말 못하는 자와 무언의 상태이기는 하나 실은 “젖먹이에게도 똑똑히 말하게 하고”(지혜 10,21), “불같은 말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인간의 말과 천사의 말까지도 하게 하시는 분”(1코린 13,1)이십니다. 이 아이는 외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와 같지만 실은 예지의 하느님, 하느님의 지혜, 말씀으로서 “사람에게 지식을 주시는 분”(시 94,10)이십니다. 아아, 사람들에게 순진함을 회복시켜주시는 거룩하며 감미로운 아기의 상태여, 그 순진함으로 인해 온갖 세대의 사람들은 이 복된 아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부분이 작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겸허함과 생활의 성실함에 의해서만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자기 눈으로 보아 너무도 크게 성장하고, 교만함 때문에 거인의 유별나게 큰 키에 달할 만큼 자란 아담의 후예여, “마음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태 18,3-4) “나는 하늘나라의 문이다”(요한 10,9)라고 아기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키가 큰 자가 이 낮은 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몸을 굽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은 “머리인 많은 자들을 땅에 쳐 쓰러뜨리고”(시 110,6) 머리를 들고 가까이 가는 자는 이마를 부딪쳐서 물러나 벌렁 나자빠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째서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고 계시는데, 티끌과 재에 불과한 여러분이 지금도 여전히 잘난 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여러분의 눈으로 보아 아기가 되어 계시는데 여러분은 자기 눈으로 보아 너무 큰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생겨난 것 가운데 말씀에 의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요한 1,3), 그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마치 존재하지 않은듯이, “자신을 무(無)로 삼고”(필리 2,7) 계시는데, 실상 여러분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된 듯 생각하고, 한없이 부풀어 올라 발돋음 하고 있는 것이 실태가 아닙니까. 사도는 여러분을 향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갈라 6,3)라고 외칩니다. 왜냐하면 설사 여러분이 무엇이라 해도, 또 다소 쓸 만한 점이 여러분에게 있다 해도 여러분은 한층 겸손해져야 합니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여주신다.”(집회 3,18)고 현자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만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가장 겸손한 자, 가장 미소한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죽을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에게 “천사보다 조금 못한 자가 되는 것”(시 8,6)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기의 나이와 약함을 떠맡음으로써 한 인간보다 못한 자가 되기를 하느님은 스스로 원하셨습니다. 신심 깊고 겸손한 사람은 이 아기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악인과 교만한 자는 이 아기를 보고 창피함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기가 되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사람들이 경외해야할 이 젖먹이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는 바로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 신비, 경건한 사람들의 속량, 자기를 낮추는 자의 영광이요 악인에게의 심판, 교만한 자의 몰락인 것입니다.
오, 예배하올 신비여, 두려워해야 할 신비여! “하느님의 이름은 얼마나 경외해야할 거룩한 이름”(시 111,9)이신가. 또한 얼마나 깊은 자비의 샘, 심판의 심연인가! 이 샘에서 마시면서 사랑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이 심연을 생각하고도 공포감을 품지 않을 자 있겠는가. 만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악인이요 하느님께 반역하는 자입니다. 공포감을 품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요, 이성을 상실한 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당신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랑받기 원하시고, 노예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는 자녀의 마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처음으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냄에 있어서도 아기의 모습을 취하시고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올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을 “단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요한 3,17)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사람들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길을 택하셨고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은 뒤로 돌리신 것입니다.
- 우리는 하느님 영광의 옥좌에 대해 두려움 없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렇더라도 “신뢰하며 은총의 옥좌에 가까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히브 4,16). 거기에는 여러분이 염려하는 것과 같은 무서운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극심한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신뢰심을 품게 하는 관용과 친절이 있을 뿐입니다. “설사 하느님께서 두려운 지배력을 갖추고 계신 것”(욥 25,2)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고백하는 자를 받아들여 주실 때까지 그들을 감싸주시고 계십니다. 중한 죄를 범했다 해도 금방 달래서 기분을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이 마음 이상으로 달래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아기는 여러분의 평화와 보속의 신청에 앞서 죄인인 여러분이 화해에 동의하도록 먼저 평화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여러분으로서는 그저 바라는 것, 그것도 마음 깊은데서 열심히 바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아기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은총까지도 더해주실 것입니다. 거기다 헤매는 양을 찾아낸 것을 마치 큰 횡재라도 만난 것처럼 생각하시고 천사들과 함께 축하연을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의 관용과 아기의 더러움 없고 어리디 어린 나이 사이에는 조화가 보존되어 있는 듯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죄인들의 구원은 이 유년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죄의식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해 위로 받습니다.
- 오, 참으로 온유한 아기, 상냥한 예수님. “당신이 주시는 은총이 어이 이리 크옵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장만하시고 당신께 피신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십니다.”(시 31,20) 당신을 아직 모르는 자들에게마저 이토록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온유함은 비길 데 없고 그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집회 24,12). 그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창조된 아기가 되신 것입니다. 위엄에 빛나는 하느님께서 참 육신을 취하여 우리와 같은 신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약하고 비참한 자, 그것도 연령적 약함으로 인해 어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신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아기가 되신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구원, 저의 하느님”(시 42,6-7; 43,5). 당신은 상냥함 자체시요, 저의 바람 자체인 것이 사실이나, 당신은 몸의 지체의 어리심 때문에 제게 한결 상냥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은 아직 단단한 음식으로서는 당신을 파악할 수 없는 아기들의 마음과 감각에도 파악될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아기가 되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 또한 반추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기꺼운 일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의 마음에 분노가, 말과 가시 같은 행동의 거칠음이 남아있다면 그것들을 고치고 부드럽게 하는데 이 아기에 대한 생각 보다 효과적인 것은 달리 없습니다. 이 하느님의 상냥함에 대해 생각하고 반추한다면, 거기에는 분노나 슬픔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분노나 표독함, 악의와 같은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갓 태어난 젖먹이와 같아져서”(1베드 2,2), 갓 태어난 아기이신 주님을 합당하게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도와 소리의 일치 안에서 “아기, 젖먹이의 입을 통해”(시 8,3) 아기, 젖먹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찬미가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찬미와 환희의 노래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성자께 세세 대대로 바쳐지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