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HELM VON SAINT-THIERRY
샹 티에르의 윌리엄
MEDITATIVE GEBETE
묵상 기도
두 번째 묵상 - 타는 듯한 열정과 고통스러운 하느님께 대한 갈망.
들어가는 말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기를 갈망한다. 그는 그분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하느님과 일치하지 못하는 고독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그에게 들어가지 않고 가끔 그냥 지나쳐 가신다. 영혼은 새로 힘을 얻어 일어나 그분을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죄의 짐과 무거움을 느낀다. 성령의 하시는 일에 귀는 어둡고, 잠에 취하여 비틀거리지만 다시 시작하려고 그의 눈을 하느님께로 향하나 눈이 부시어 뜰 수가 없다. 영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생각하고 삼위이신 하느님을 묵상하며,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열렬히 갈망한다. 그분에게 갈 수 없음을 영혼은 심히 괴로워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열심히 섬기지 못했다고 두려워 떤다.
1. “그분께로 가까이 가거라. 너희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니, 너희의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되리라.”
저는 부끄럽습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저는 곤혹스럽고 아연실색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뵈오려고 당신께 가까이 가면 제게는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마치 “분명히 들으시오(아멘),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마태 25,12)라는 이 두려운 말씀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당신으로부터 깨달음을 받고 싶으나 마음속에 고통만 심하고 완전히 암흑 속에서 감정의 혼란만을 느낍니다. 차라리 당신께 가까이 가지 않았더라면 저를 위해서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2. 당신이 저를 슬픔 속에 (무미건조함)두기를 원하시는데 누가 감히 저의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아닌 위로, 당신으로부터 오지 않는 위로는 모두 사라져버리기를!
솔로몬은 말합니다. “딱하다, 외톨이로 사는 사람!(전도 4,10) 당신이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혹은 제가 당신과 함께 있지 않으면 저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주님, 당신이 저와 함께 계심을 느낄 때 저는 행복합니다. 예, 행복에 넘칩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음을 느낄 때 저는 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제가 미워집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저는 또한 제 자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지 않는다면 저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를 존재하게 하는 당신의 힘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육신 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저의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제안에 현존하는 당신의 은총 덕분에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관대하심이 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저는 당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이 함께 하여주시기에 당신의 은총이 제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느낍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음은 제게 너무도 좋습니다. “제 영혼이 주님 안에서 기뻐할지어다.”(시편 33,3) 당신은 제게 가까이 계시온데, 저의 생각과 애정이 당신에게서 멀어진다면 당신 은총의 호의와 친절은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걱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3. 가끔 저는 당신이 지나쳐 가심을 느낍니다. 당신은 멈추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가십니다. 가나안의 여인처럼 당신을 향해 울부짖습니다(마태 15,21-28 마르 7, 24-30). 재촉하는 성가신 저의 울부짖음에 견딜 수 없으시면 당신은 죄책감으로 무겁게 짓눌린 양심에다 과거에 제가 저지른 개와 같은 추함과 현재의 파렴치를 더해 질책하십니다. 당신은 먹으려 하지도 않고, 굶주리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당신의 개를 식탁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렇게 당신은 그를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감히 다시 당신께 가까이 가려고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저의 주님! 주인한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난 강아지도 곧 다시 그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깨어 그들이 맡은 집 지키는 일을 해낼 때, 매일의 빵을 다시 얻습니다. 내쫓겼지만 저는 되돌아옵니다.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짖습니다, 울부짖습니다. 개들은 인간의 공동체로부터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더더욱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에게서 떠나서 저의 영혼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4. 그러하오니 주님, 제게 문을 열어주시어 들어갈 수 있게 하여주시고 당신 빛으로 채워주소서. 당신은 하늘에 좌정 하시는 분(시 122,1), 어둠을 가리개 삼아 당신 주위를 치시고 시커먼 비구름, 짙은 구름을 당신 덮개로 삼으셨나이다(시 17, 12). 예언자가 말하듯이 당신은 구름 속에 몸을 감추고 계셔서 우리의 기도도 당신께 다다르지 않습니다(애 3,44). 땅 속에서 저는 썩고 있습니다(출애 6,14). 제 마음을 지키려고 먼지를 온통 덮개로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별들마저 빛을 잃고,(루가 23,45 : 묵 9,2) 햇빛은 어두워졌고 달도 빛을 잃었습니다(마태 24,2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에페 5,19)는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고 있음을 저는 듣습니다.
당신의 복음 안에는 말씀과 행동이 빛납니다. 당신 종의 모범은 끊임없이 눈과 귀를 통해서 제 안으로 들어와 저를 놀라게 합니다. 성서 안에 약속된 계약과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당신의 진리는 항상 제 눈앞에 있으며 끊임없이 큰소리로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제 귀를 진동시킵니다. 그러나 저의 악습으로 영혼은 무감각하여졌고(사도 22,17) 고집불통이 되어버렸으며 제 눈앞에 있는 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별빛 찬란한 대낮에도 잠자는 습성에 젖어버렸습니다.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소리, 천둥소리도 듣지 않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저는 죽은 자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시 30,13).
5. “그런데도 주님, 당신께선 언제까지나?”(시편 6,4) 하느님이시여!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당신이 하늘을 열고 내려오실 때가 언제이옵니까, 저의 무감각함을 당신의 불태우는 열정으로 부수어 지금 이런 저로 존재하는 것을 끝장낼 수 있으시도록 저는 당신을 야곱의 지도자로 체험하고 싶습니다. 늦어도 저녁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굶주림에 지친 강아지처럼 성안을 여기저기 빙빙 돌며 헤매고 있습니다(시 58,7). 성안의 주민들 대부분은 아직도 지상의 순례자들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천국의 기쁨으로 충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핍진하여 죽을 지경이 되고, 머리 둘 곳조차 없을 때(마태 8,20) 저를 영접해 줄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6. 가끔 저는 당신 영의 소리를 듣습니다. ; 그것은 조용하고 여린 사람소리처럼 스쳐지나가면서(1열왕 19,11-12) 이렇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그분에게로 나아가거라, 깨닫게 되리라.”(시 33,6) 저는 듣습니다. 그것은 충격입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듯 벌떡 일어나 잠을 떨쳐버리려고 몸을 흔들어 간신히 정신을 차립니다.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 당신의 영을 열망하면서(시 118,131).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려고 제 영혼의 감관(感官)을 쭉 뻗칩니다. 제 양심의 밤과 같은 어둠을 벗어버리고 제 위를 비추는 정의의 태양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렇지만 잠으로 감긴 눈이 빛을 향해 떠보려고 애쓰지만 빛에 익숙지 못한 눈은 부시어 뜰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눈은 그래도 두리번거려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깜박거려보기도 합니다. 손으로 눈을 비벼서 (수련을 통해) 오랜 잠으로 굳을 대로 굳어진 경직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고맙게도 눈물의 샘(예레 9,1)을 발견하면, 이것은 항상 부서지고 낮추인 영혼의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나오는데, 저는 그 물로 섬김을 위해 손을 씻고, 봉헌을 위해 얼굴을 씻습니다. 마치 매가 남쪽으로 날아가려고 날개를 펴듯이(욥 39,26), 주님, 이렇게 당신을 향하여 저의 손을 뻗칩니다. 제 영혼은 당신 앞에 물 없이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시 142,6). 당신 성전 안에서 당신의 힘과 영광을 바라 뵙는 것이 저에게는 마치 물도 길도 없는 사막처럼 느껴집니다(시 62,3).
영혼의 눈을-저의 이성의 눈-정의의 태양이신 당신께로 들어 올릴 때 저는 잠들었다가 막 깨어난 사람 같거나 아니면 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저는 한 가지밖에 볼 수 없는데도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오류는 보고 있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육감의 사용이나 쾌락의 감각적인 것에 깨어 있는 영혼은 우선 육감적인 육욕을 먼저 드러냅니다. 영혼의 감관이 막혀버렸고 육감의 상상은 영혼을 어둡게 만듭니다. 육적인 것들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육감으로만 생각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7. 그리하여 태만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즉시 저는 눈길을 하느님께로, 그리고 저에게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의 하느님은 주님 한 분뿐이시다.”하는 계명을 가르쳐주시는 분께로 향합니다. 저를 깨우쳐주시고, 제가 경배들이고, 말씀드리는 하느님께로 온전히 저의 눈길을 돌린다면, 거기서 저는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끊임없이 당신이 반복하여 말씀하셨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영혼의 아둔한 상상력은 이 신앙의 진리를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합니다. 제 영혼은 3이라는 숫자를 그의 단순한 본질에서만, 유일하게 하느님 안에서만 봅니다. 하느님은 무게와 숫자와 척도에 질서 지워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지혜 11,21). 그리고 이렇게 제 상상력은 삼위의 각 위격에게 그들 고유의 자리를 드립니다. 그분들은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경배합니다. 마치 셋째 위격이신 성령을 통해서 서로간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이심에 현혹되고, 삼위이심 안에서 나누임을 통하여 제 영혼은 이 현상이 세 개의 서로 별개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구별되거나 서로 합쳐지는 듯이 느껴집니다.
8. 상상력, 말하자면 영혼이 상상을 하거나, 아니면 의지와는 달리 상상이 생기거나, 생겨난 상상을 억지로 참아 견디고 있는 동안 믿음이 찾아와 이런 상상을 쫓아버립니다. 이성은 믿음의 도움을 받고 판단하고, 가르침의 권위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면 제 안의 모든 생명력은(시편 102,1) 위에 언급한 말씀을 온 힘을 모아 외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신명 6,4)
믿음과 이성과 교회의 가르침은 나에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그리고 성령은 성령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 위격을 시간, 공간, 숫자 안에서 나누거나, 본질 안에서 나누거나 서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한편 세 위격이 하나라는 것은 결코 혼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한편 하나 안에서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의 존재를 여럿으로 나누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당신의 은총은 우리에게 모든 깨달음과 완덕, 공덕의 원천이 되어주며 제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자신과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전달해줍니다. 은총은 우리를 겸손 아래 두고, 겸손을 가르침의 권위 아래, 그리고 가르침의 권위를 믿음 아래 둡니다. 믿음은 이성을 지도하고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가르치거나 와해시키며 이성을 상상력에 복종시킵니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을 지도하여 앞장서지는 못하며, 오히려 믿음을 통한 이해력은 위로부터 즉 당신의 빛과 온갖 좋은 것과 완전한 선물을 베푸시는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력은 이성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귀결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영광스러운 당신 왕좌로부터 내려오고(지혜 9,10),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며 당신 지혜로써 형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원천과 비슷하며 원천은 신자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이성을 함께 그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생명과 빛으로 채워줍니다.
9. 이리하여 영혼은 하느님 앞으로 다가가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는 두려워 떨며 온통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영혼은 자신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자신과 함께 제물로 당신께 드리려 합니다(시 118,109). 그는 자신의 체험을 회상하며 두려워 떱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새로움 앞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당신을 찾아내기 위해 신앙의 인호를 간직하고 있으나 그를 구해줄 분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 얼굴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 모습을 (시편 26,8). 그러나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이 그려내는 당신의 모습의 환상들을 우상들보다 더 미워합니다.
영혼은 믿음을 통해서 알고 있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정신은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영혼은 당신의 얼굴을 뵙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고, 당신에게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정의, 제물과 봉헌물을 바치려 합니다(시편 50,21). 그렇지만 점점 더 당신을 바라봄이 연기되기 때문에 그의 혼란스러움은 커집니다. 그가 기대하고 믿고 신뢰했던 믿음의 깨달음을 즉시 얻지 못하고, 당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회의와 자기증오에 빠지고 맙니다. 그가 당신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는 것만 보더라도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당신을 너무 그리워하기에 모든 것을 경멸 할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도 버렸습니다.
10. “주님, 언제까지나 저를 계속 잊고 계시렵니까?”(시 12,1) 당신이 저의 등불을 밝혀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저의 어둠을 밝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도저히 이 시련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 안에서 제 하느님으로만 저는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시 17,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