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역사와 경험
성 베르나르도의 작품에 대한 어떤 서문에서도 분명히 밝혀야 할 첫째 포인트는 그의 성서 사용인데, 그 이유는 비판적, 과학적 주석에 익숙해있는 현대 사고에는 심각한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서에 대한 감각은 그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며 교회 교부들과 다른 중세 영적 작가들이 지닌 것과 같은 감각이다. 어떤 이들은 이 현대적 방법을 더 강요하는데 베르나르도의 성서 사용법은 아주 자유로우면서도 일정하며 겉으로 보기에 상상력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독자들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명백한 설명이 요구된다.
그의 성서에 대한 사고는 한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 그 말이 지니는 두 가지 의미에서 텍스트 이전의 텍스트(pre-text)라는 것이다. 첫째로, 자신의 경험과 사고에 앞서 날짜가 찍힌 텍스트 그리하여 이런 의미에서 “pre-text 텍스트 이전의 텍스트"이다. 자신의 경험은 그것이 교회 안에서 지속적인 원천을 지닐 때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지녔던 문제들에 대해 하느님의 성령이 가져다 준 해결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하느님께 대한 그의 이해와 관계가 개선되자 그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께 대해 말하기 위해 성서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자유로운 선포를 위한 “pre-text”로 봉사하였다.
사랑은 구원의 역사와 개인 경험의 역사 양쪽 모두를 상세히 이야기해주는 거룩한 텍스트의 유일한 목적이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사랑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구원 역사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 하느님과 그의 교회 사이, 하느님과 각 개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하느님이 원천이요 기원이며 성서의 영감이라는 이 믿음은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시는데 이는 영감을 받은 작가를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육화한 하느님 자신의 아들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성령은 자신이 성서 작가들과 함께 시작한 일을 우리 안에서 계속하고 계신다. 성서 작가 -가장 높은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는 사랑 때문에 말하고 쓰며, 자신이 경험한 그 사랑의 영향 아래서 말하고 쓴다.
사랑으로부터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가 당신 자신을 찾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그리워하시며, 자신에게로 우리를 끌어당기시고, 자신의 힘찬 말을 통해 그리고 당신의 아들인 말씀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은총을 통해 그분은, 우리가 사랑겨운 일치의 만남을 경험하도록 우리가 당신께로 가는 것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다.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실제적이고 효력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매력적으로 포장해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성서는 공동체로 또한 개인적으로 모든 인류를 위해 쓰여졌다. 우리는 그 껍질을 제거하고 그 안에 숨은 내용을 발견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편적이고 개관적이며 개인과 관계가 없는 외적인 거룩한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된다. 성서는 역사 상술 심지어는 거룩한 역사 혹은 진리의 모음을 제시하는 것조차 넘어선다. 성서의 사실과 생각들은 pre-text와 두 가지 사랑 즉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사이의 이 만남을 위한 pre-text로서 봉사한다.
우리는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받아들이는 육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형성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본성에 자신을 적응시키셨다. 인간 경험의 모든 차원으로부터 그분은 이제 우리가 해독해야만 하는 상징을 사용하신다. 상징의 의미는 성서 텍스트에 영감을 불어넣은 같은 성령의 도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서 작가들의 경험에 참여하게 되며 유비를 통해 하느님 신비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서로 도와준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가르침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성서 주석으로 보았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통해서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종 자신의 설교의 시작과 끝에 비추임을 위한 기도를 청하였다. 전통은 그를 주로 주석가로 간주하며 가장 초기 예술가들은 그를 성서를 잡고 그것을 열며 설명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다른 이름 “Doctor Mellifluous(부드럽고 아름다운 박사)”는 바로 그의 성서 주석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지 꿀의 달콤함이라는 특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 별명은 오리게네스로부터 시작하여 베르나르도 자신에 의해 발전된 전통적인 설명과 관련이 있다. 이론에 따르면 누가 성서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로부터 숨은 뜻을 끌어내는 것은 마치 꿀이 벌통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거나 모세가 바위로부터 물을 나오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우리는 전문화된 연구에서 잘 조합된 여러 예문들로 이 고찰들을 예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텍스트들은 이 책에서 충분히 예들로 제공될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는 언제나 12세기가 허용하는 방법으로 엄밀하고 정확하게 텍스트의 각 말들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현대 독자들이 우리시대의 과학적 주석들을 이용하도록 그가 초대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그는 친숙하다고 여겨지는 pre-text를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단서로 그리고 하느님이 영감받은 시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전례 안에서 사랑에서 나온 자유를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이 시적 언어가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각 개인의 경험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는 데 있어 그리고 그 역사와 경험 안에서 신비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데 가장 적합하다. 성서 구절들은 그의 생각과 기억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쳤다. 성서 구절들은 언제나 그의 혀 끝에 있었으나 그는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의 직관은 자신의 생각을 바로 그대로 요약해주는 기본 텍스트들을 제안하였지만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독자들을 온갖 종류의 참조들과 회상들로 준비시켰다. 그리하여 경험은 표현되었으며 주된 인용들이 주어졌고, 종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Denique”라는 부제를 앞세우는데 이는 추론이 끝이 났다는 것을 지시해준다.
베르나르도의 방법 안에 논리적이며 추상적인 사색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참된 추론의 과정이 들어있다. 그의 소책자 ‘은총과 자유의지에 대해 ’안에서 그는 추상적 사고와 사색적인 추론을 사용하는 그의 능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독자들이 자신의 사고를 공유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그는 성서가 자신의 한 부분이 될 정도로 그것에 동화되어 자신의 설명을 입증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하기 전에 그것을 참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성서를 기억으로부터 인용하였으며 종종 전례 안에서 노래하는 후렴들이나 화답송 안에 있는 대로 인용하였는데, 이것들은 텍스트와 멜로디가 서로 잘 부합하였다. 성서를 통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전통을 통해 그는 자신을 믿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 그 맛과 향을 나누기 위해 성서를 사용하였다. 메시지의 내용은 외적 감각을 통해 먼저 있는 그대로 알려지고 감지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동의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한 종류의 영적 인식력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은 사랑이며 이것 없이 성서는 죽은 문자가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혜 - 라틴어로 sapientia -인데 이것은 기쁨, 사랑, 감사, 찬미라는 축복과 함께 맛과 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파악할 때 그를 읽을 수 있으며, 우리가 그의 매력에 열려있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를 문학적으로 매혹하도록 허락한다면 그의 시들에 곤혹감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행마다 성서 인용 구절이 있는 그의 양식은 그 스스로 영적 찬가(carmen spiritus)라 이름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방법으로는 그의 글들은 라틴어로 그리고 큰 소리로 읽혀져야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산문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그 절들에 있어서는 각운, 유운, 세련된 리듬 감각을 지닌 시이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어떤 번역이든 불가피하게 이 조화의 어떤 것 그리고 성서적 향기를 잃게 할 수밖에 없다. 베르나르도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아가에 관한 설교에서 “Sola quae cantat audit단지 노래하는 목소리만이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 대로 그와 함께 노래해야 한다.
베르나르도의 작품에 있어서 성서가 너무 중요하다 보니 그의 다른 원천들은 무시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그는 자기 이전 시대 작가들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그가 신뢰를 두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다. 교회 교부들일지라도 그러하였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공동체 안에서나 성무일도의 독서로부터, 개인적인 독서로부터, 셍 티에리의 윌리엄과의 대화로부터 혹은 다른 영적, 학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살아있는 전통의 한 부분이다. 때로 그의 몇몇 문장들 뒤에 참고를 붙이는데 마치 다른 이들로부터 빌려오기라도 한 듯 굉장히 큰 노력을 들였다. 그는 특히 일반적 분위기와 풍부한 전통에 많이 의존하였다. 그는 분명히 성 안토니오, 성 아우구스티노, 대 성 그레고리오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아가서 주해 텍스트를 읽었다. 이 교부들로부터 그는 어떤 배아와도 같은 사고를 받았으며 이를 나중에 건설적인 자유로 발전시킨다.
그가 어떤 사고를 명확하게 빌려온 유일한 신학자는 또 다른 수도승, 아빠스이며, 동시대인이자 같은 연배이며 영적 작가요 형이상학자인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이다. 변증법의 힘의 문제가 대두될 때에는 언제나 그와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주요한 점에 있어서 그는 미묘하며 동시에 분명한 구별을 사용하여 설명하면서 성 안셀모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이것은 자유와 은총에 관련된 것이며 같은 제목의 그의 책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베르나르도는 그의 선조들이 기여하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그들을 넘어서며 그들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게 만들고 나서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초대한다.
사랑의 길 : 겸손에서 엑스타시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길에 있어서 출발점은 겸손이며 도착점은 사랑이다. 양쪽 모두 경험의 문제이며 고찰의 문제이고 마지막으로 실천에 옮기게 하는 원칙들에 동기를 부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