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들어가는 말
이니의 구에릭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상 티에리의 빌헬름, 리보의 엘레도와 함께 ‘시토의 4복음사가’ 라고 불린다. 4명 모두 고착되지 않고 역동적이며 포괄적이고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은 가장 친밀한 공동체, 인간을 사랑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려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매료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하는 성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을 엄격하게 살기를 원하는 이들이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고 부르는데 비해 그 개념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토를 ‘새 수도원’ ‘사랑의 학교’라고 불렀다. 이 아빠스들 각자는 첫 시토회의 이상을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고유성으로 증명하고, 형성했으며 전통으로 남겨 전하였다. 이니의 구에릭에게 수도공동체는 사랑의 학교였는데 이는 수도원이 ‘말씀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교안은 ‘그리스도 철학’을 총망라한 것이고 그 고유 목적은 각 수도승과 수도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Ⅰ. 구에릭의 생활과 인품
‘깊은 신심과 위대한 지혜의 사람, 투르네의 교사였고, 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었으며 이니의 아빠스가 된 사람이다.’ 이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그가 쓴 비망록이 그에 대해 말해준 것이다. 그 자서전은 그의 유년시절 친구이며 후에 마르치네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후고가 쓴 것이다. 이것은 구에릭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제자가 1158년 초기에 기록한 것이므로 신빙성 있고 중요한 자료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 외의 것은 시토회 대창립사 셋째 권 8장과 9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저자 콘라도 에버바하는 1165년 클레르보에 입회하였고, 클레르보에서 15년간 구에릭과 함께 살았던 수도승이었으며, 20년간 이니의 아빠스로 그를 알고 있던 수도승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창립사는 역사가들로부터 중세의 기적 서적이나 교훈 서적이 좀 낮은 원천에서 끌어올린 것이라는 이유로 소홀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초기 수도원의 수도승생활의 실감나는 그림과 흥미 있는 부분들, 익살스런 신학은 그리스도 추종과 모방을 격려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베르나르도는 두 개의 서간 안에서 구에릭을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품에 관한 것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구에릭이라는 이름은 플란더른 지방 투르네의 교회 문서에 흔히 나오는 이름으로서 자주 언급된다. 예를 들면 Gueric, Gericus, Wericus, Werricho(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Georg-Jurg 혹은 Erik, Erich을 말하는 것인지?) 한 사람을 일컫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우리는 존 마르손과 힐라리 코스텔로의 라틴어-불어, 영어 저작의 서론과 비앙카 베토의 구에릭에 관한 것과 그의 설교에 관한 넉넉지 않은 원천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니의 아빠스였던 구에릭은 1070년-1080년 사이에 투르네(Tournai), 오늘날의 벨기에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는 그곳 대성당 소속 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그 학교의 교직에 있었다. 중세대학의 7학예(문법, 수사, 논리, 산수, 기하, 음악, 천문)는 철학과 신학을 위한 필수였고 예비교육에 속하였다. 그 때 당시 신학을 sacra pagina(거룩한 서적)라고 불렀으며 교육의 최고 영관(榮冠)으로 간주하였다. 구에릭의 강론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성서에 통달한 박식함과 플라톤 철학, 선별된 서체와 사회의 저명한 저술가들의 인용문들은 그의 학업의 높은 수준과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포괄적으로 공부한 것 같다. 또한 그는 대 그레고리오의 저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저서들은 그리스 교부들과도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신비신학의 초안이었으며 서방에 그들의 개념의 필요불가결한 도구로서 전달되었다. 구에릭이 그리스 교부들을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때 당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의 기본적인 지식은 평범한 학업에 속한 것이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가 그토록 탁월한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포괄적인 교육이 밑받침 되지 않았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1087년부터 투르네의 대성당 소속 학교는 후에 캄부레(Cambrai)의 주교가 된 유명한 오도에 의해서 운영되었고, 그가 수도승이 된 1092년까지 지속되었다. 구에릭이 그를 직접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더라도 문서상으로 1092년 신출내기 구에릭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영향을 충분히 받았을 것이고 성 알젤름의 초기 스콜라적인 학교와 연관을 맺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지적 교육은 영성생활의 기본과 실천적 입문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렇게 교사는 수업이 끝나면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에 관한 강의를 하기 위해서 교회회랑을 찾았다.
교사(Magister)
1108-1112년에 투르네의 문서에서는 구에릭을 성직자라고 부른다. 후고의 자서전에서는 그를 ‘투르네의 교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를 강사와 학교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주교좌 학교 전체를 관리하였음을 암시해준다. 그는 그 직위와 함께 교회참사위원회의 사무장, 도서관과 자료 보관실의 관장를 역임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얼마동안 거기에 있었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후고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그 직무를 맡고 있던 시기 아니면 그 후의 일인지 모르나 고독안에서 기도 생활을 하기 위해 물러났다고 썼다. 대성당 옆 작은 집을 은둔소 삼아 그곳에서 독서와 공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고, 아주 소수의 방문객만 맞이하였다고 한다. 은수자로 있을 때 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를 1122년에 플란더른 여행 중에 만나지 않았을까? 분명한 것은 구에릭 역시 이 웅변적이고 뛰어난 언변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았고 회개를 부르짖은 유명한 젊은 시토회 아빠스에 관해서 많은 것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친구들인 후고와 오제르는 베르나르도를 개인적으로 경험했고 분명히 구에릭에게 그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수도승
베르나르도가 1125년경 오제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수련자 구에릭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구에릭은 1123년이나 1124년에 클레르보 수도원에 입회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에릭, 그의 보속의 삶에 대한 확실한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당신에게, 보속의 열매로 그를 평가해본다면 그는 합당한 방법으로 하느님 앞에 그의 길을 가고 있음이 분명하니, 안심해도 됩니다. 그는 보속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일 당신이 우리의 형제 구에릭에 관해서 더 듣고 싶다면 아니 당신은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에 대해 확실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으며, 싸우는 사람으로서 허공만 가르는 헛손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은 인간의 의지나 용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가 그가 달리고 싸우는데 힘이 되어 또한 난관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는데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하는 것입니다.
구에릭은 유명한 아빠스를 방문하여 영적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훌륭한 수도승이 될 성향이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보고 머물기를 권했다. 어쩌면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클레르보의 사랑의 학교에 사는 것이 영적 생활의 향상을 위해 더 낫고, 공동체의 도움으로 고독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설득시켰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교사가 제자가 되었다. 그의 아빠스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제자가 된 것이다. 아마 그 때 구에릭의 나이는 50세쯤 되었을 것이다. 아직 그 때만 해도 베르나르도가 교회와 사회 안밖으로 지도자 역할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는 수도승들의 내적 양성과 공동체의 영적지도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 수도원의 훌륭한 아빠스나 저자들 어느 누구도 구에릭 만큼 수도승 양성기간 동안 직접 성 베르나르도의 양성 지도를 받은 사람은 없다. 이것만 보더라도 수도원의 성인전에서 구에릭을 애제자로 평가한 것은 가히 이해할 만하다.
그 때 당시 그는 어떤 지도를 받았을까? 특히 1123년경에 베르나르도는 ‘겸손과 교만의 단계’의 기본이 되는 논술을 작성하였다. 그는 분명히 집회에서 그의 수도승들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그는 동정 성모 마리아의 찬미에 관해서도 설교하였다.
구에릭의 건강이 양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이니의 첫 아빠스인 그의 동료 움베르트와 하인리히 물다하, 발두인 폰 피사, 로베르트 폰 브뤼게와 클레르보의 첫 창립지인 이니에 파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클레르보에서 어떤 직무를 맡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창립사에서는 이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도는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였다. 1138년 움베르트가 클레르보 수도원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이니 수도원의 아빠스직을 사임하자 베르나르도는 수도승들에게 구에릭을 새 아빠스로 선출하라고 권하였다고 후고의 자서전은 밝히고 있다. “구에릭의 마음을 수도승 생활에로 움직인 것은 베르나르도였고, 아빠스 선출도 그가 선언하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보다 더 거룩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후보자이다.”라고. 그렇지만 선거위원장이며 선거를 주관하고 새로 선출된 원장에게 직무를 맡기는 일을 맡은 모원장의 영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지극히 겸손한 구에릭 자신이 이에 대해서 수도공동체가 그를 자유로이 선출했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나를 백성의 지도자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그런데도 여러분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지도자로 세웠습니다.”라고.
이니 수도원은 클레르보가 창립한 네 번째 자원이다. 1128년 3월 12일이 창립일이다. 2년이 채 되기 전에 새 수도원의 첫 건물이 완공되었고 1130년에는 성당헌당식을 가졌다. 이미 5년 후에는 공동체가 너무 커져서 시니 수도원창립을 위해 아르덴너로 수도자들을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르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움베르트는 그의 아빠스직을 사임하였다. 나이가 60-70세가 된 구에릭은 일단 선출을 거부하였다. 그가 지극히 가슴 아파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미 공동생활을 함께 하기가 힘든 상태였다. 성실한 장상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자신이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혜의 부족이 내가 여러분 위에 서는 것을 금하고, 건강의 부족이 내가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할 수 있는 영혼의 깊이도 가지지 못했고 좋은 모범을 보여줄 만한 육체적인 힘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지도를 통해서 공동체에 봉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의 수도승들을 사랑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그들과 대화했고, 그들에게 건전하고 실질적인 영적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빈약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나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성탄 강론).
그는 이니 수도원의 아빠스이면서 1135년에 창립한 시니 자원의 책임도 겸임했다. 정기적인 방문을 통해 그는 샹 티에리의 윌리엄 -1135년 베네딕도회의 아빠스직을 사임하고 시니 수도원에 입회한 사람- 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나이인 두 사람의 열정적인 영적담화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믿음으로 하느님을 관조함에 도달할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한 인식과 수수께끼에서부터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관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마도 윌리엄에게 예전에 저술한 것을 정리, 교정하여 출판하도록 격려하고 ‘삼위일체의 신비’, ‘신앙의 수수께끼’를 출판하도록 권한 사람은 구에릭이었을 것이다.
구에릭의 성품
구에릭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에 대한 힌트를 그의 강론에서 얻기는 쉽지 않다. 많은 것이 특정의 목적을 지향하여 작성된 영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개인의 인품을 그 안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항상 큰 모험이 따른다. 그 밖에도 문학적인 형식과 저작상의 예의와 겸양의 형식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위한 네 번째 강론에서 구에릭은 그 시대의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를 들면 청년시절에 모든 대죄는 다 범했다는 말을 한다. 그가 이에 대해서 언급한 이유는 분명히 통회와 보속이 일종의 영적 세례로서 죄 사함을 가져다준다는 것과, 보다 큰 통찰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자신을 미약한 자로 간주하는 것은 구에릭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강론에서 우리는 그의 성격 몇 가지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예의 바르고 목표지향적인 내적 자세와 눈길을 하나의 목표, 즉 그의 삶의 중심을 이루는 곳에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나이가 점점 들면서 그는 개화되고 잘 다듬어진, 온유한 지혜, 인간적 약함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러면서도 풍자하여 진실을 꼬집을 줄도 아는, 자신을 참을성 있게 다듬어서 한 단계 한 단계 이끌어 갈 줄 아는 친절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을 건전하게 의심할 줄도 알았고, 어쩌면 그는 자신감이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큰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졌었고 그분의 은총의 힘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결코 변덕스러운 사랑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Ⅱ. 저서
구에릭의 저서
대창립사는 구에릭이 그의 임종 때, 형제들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설교를 총회의 승낙 없이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책들은 그의 눈앞에서 불태워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칸톨 한 사람이 이미 그것을 사본으로 만들어 둔 후였다. 그것이 실제로 그가 한 설교였는지 아니면 학술적인 픽션으로서 강론을 묶은 것이었는지, 혹은 구에릭이 집회실에서 한 영적생활에 관한 강화가 강론의 옷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텍스트 안에서 평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작품 배경을 동반할 것이다. 성서의 여러 책들을 인용한 것을 보아서 마르손은 적어도 발전단계를 파악할 수 있고 사고체계 안에 있는 내적 역동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 베토는 구에릭의 저서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각 단락은 비슷한 숫자의 강론을 담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구에릭 강론들의 첫째 권은 성탄대축일 범주에 속하는 강론으로 시작된다. 대림강론은 계약과 희망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첫 번째 강론에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들어 높임을 받은 사람들이며, 이들은 희망에 찬 수도승들을 가리킨다. 구에릭은 명쾌하며 빛으로 가득한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을 하는가 하면, 주님 봉헌 축일에는 정화의 동기를 부여하는 강론을 한다.
둘째 권은 두 개의 사순절 강론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서방 수도승의 사부인 성 베네딕도 축일(3월21일) 강론들이 이어진다. 이들은 전체 강론집의 중추를 이루는데 이것은 아마 베네딕도 성인을 특별히 눈에 띄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시토회원들은 자신들을 정말 베네딕도의 아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성탄 강론에서도 언급한 축일의 꽃장식이라는 테마는 성모 영보 축일 강론에서 다시 언급하고 심화시켰다. 그러나 색상은 성지주일의 수난 강론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 있어서 다소 어둡다. 항상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죄에 떨어지지만 그의 의지의 통회와 하느님 은총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속에 대한 생각들이 두드러지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구원의 사건 중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활신비이다. 그것은 승천과 성령강림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여기서는 삼위일체의 신비, 전교와 사목적인 파견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리하여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으로 시작되는 셋째 권이 준비되었다. 요한이 지닌 성성의 모범에 구에릭은 매료되었다. 지금은 공주생활이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만 사막에서 시작하는 서막은(예언자적인 파견) 수도승을 위해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두 강론은 신학에 기초를 둔 우리 수도회 모든 교회의 주보인 성모신심의 절정이며, 시토 영성의 핵심인 ‘관상’을 말해준다.
마리아 탄생 강론은 우리 안에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고 성탄을 암시하고 있다. 셋째 권의 마지막 두 개의 강론이 그 절정이다. 모든 성인의 대축일 강론에서 그는 산상수훈, 그 중에서도 가난을 칭송하는데 -전체 강론집을 관철하는 하나의 모티브- 이것이 핵심이다. ‘시편을 노래할 때 어떻게 깊은 신앙심을 일깨울 것인가’에 대한 후기 강론은 구에릭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다. 그의 수도승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구에릭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강론이다. 그들이 성서에서 기도를 배우기를 바랐다. 성서는 ‘말씀의 학교’ 자체이다. 신앙의 신비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구에릭은 수도승의 영적 삶을 깨우치고 양성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조산원으로 만들어서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놓여 진 기초가 수도서원 안에서 심화된 은총의 생활로 발전하고 완덕에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었고, 마침내 그들과 하느님과의 신비적인 하나됨이 성사될 때까지 이끌어주었다. 이 강론집의 세 부분을 깨달음의 길, 정화의 길, 합일의 길이라고 질서지울 수 있을까? 또 다른 과정에서는 한 때 상당히 단계적으로 틀에 박힌 구조로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그리스도와 내적으로 닮은 모습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영적 상승의 엄격한 틀에 집어넣으려는 의도는 물론 아니었다.
설교가인가 아니면 저술가인가?
강론집은 중세기에 하나의 고유 문학 장르에 속한 것이다. 그들의 본질적 요소는 구두로 전하는 화법이며 청취자들을 상대로 상황이나 환경을 생생하게 묘사해 내는 것이었다. 구에릭과 베르나르도 그리고 다른 중세의 유명한 저자들의 강론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본래의 형식이 거의 보존되어 있지 않다. 베르나르도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강론, 서간 모음집은 출판되기 전에 교정을 본 것이다. 중세기 설교가들은 완전하게 작성된 텍스트를 들고 설교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강론 초안만 가지고 설교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것들은 필요에 따라서 아주 짧거나 아주 상세했을 것이다. 후에 가서 그것을 문학적 기술의 원칙에 따라 그 자신들이 직접 했거나 그들의 명령을 받고 비서 혹은 직원이나 제자들이 그 작업을 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의 사망 후에 그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편집이 가능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청취자가 속기로 강론을 받아썼거나 아니면 기억을 더듬어서 기록한 것은 예외이다. 일반적인 규범으로 보아 중세의 설교는 설교형식이 아니라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후대에는 ‘강론독서’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시토회 아빠스들과 마찬가지로 구에릭 또한 적어도 한 해에 15회 정도 전체 수도공동체를 위한 강론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공동체가 크면 전례력의 절정시기에는 조수도자들도 아빠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십자 회랑의 집회실 창문을 열어놓고 들었을 것이다.
구에릭은 어떤 언어로 설교했을까? 조수도자들은 성무일도, 성서 텍스트의 교회 라틴어는 이해했겠지만 과연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 작가들의 학습된 라틴어 강론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구에릭이 그의 형제들에게 모국어로 말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후차적으로 교정을 받은 강론이라는 개념을 밑받침 해주는 논증이다.
문체와 내용
(중략) 그는 논리의 정확성을 엄정하게 전개시키지 않는다. 그는 성서적인 주제를 다룰 때 무엇보다도 연합적 관념으로 전개시킨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승들이 그의 구원 의지의 고유한 관상에 참여하도록 하며 그들을 묵상기도에로 이끈다. 그는 그들에게 구세주의 업적, 하느님 아들의 육화를 생생하게 그려 보이며, 확실히 의식하도록 돕는다. 각자는 개인적으로 소명을 받은 이들인데, 이는 예수께서 지상에 살아계셨던 시대나 오늘이나 똑같다.
구에릭의 강론은 단순함, 투명함, 객관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하였다. 어떤 때 그의 언어나 문장은 너무 우아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는 역시 두운법(頭韻法)과 같은 수사학적 문체와 도치법(주어와 동사와의 위치전환)을 즐겨 사용하였다. 말장난을 좋아하였지만 지나친 장난에 빠지지는 않았다.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 그는 높은 극문학이나 부드러운 서정적 음률로 엮기도 하였다. 표현의 간결함은 그가 교사였음을 암시해주고, 가끔 신학적 지식을 인용하기도 했다. “짧고 간략한 언어적 의복은 가끔 완전하고 견고한 씨앗과 같고, 새로우면서도 깊은 사고를 감싸고 있다.”고 고테러(Gotterer)는 기록하였다.
성서적 언어
누가 처음으로 그의 강론을 읽는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성서텍스트를 인용하였는지 놀랄 것이다. 마치 성서적인 표현들이 구에릭의 본래의 언어가 되어버렸다는 인상을 받는다. 성서는 그가 투르네에서 교사로 있을 때 그를 동반했고 그 후 시토의 수도승으로 있을 때에도 그러했다. 수도승 생활의 입문은 수련기 동안 시편과 매일의 성무일도를 암기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수도자들처럼 각자가 성무일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몇 권의 대형서적이 있을 뿐이었다. 식당독서의 거의 대부분은 역시 정해진 성서를 지속적으로 읽는 것이었다. 그 외에 성 베네딕도의 규칙이 있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와 함께 성서 독서에 할애하였다.
수도승들은 어떻게 성서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았는가? 그의 성독은 오리게네스의 성서학과 해설에서 많은 지도를 받았고 카시아누스의 ‘사부들과의 대화’ 안에서 서방 수도승에게 전달한 것을 받아들였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화 이전에 이미 세상 안에 현존하셨음을 구약성서의 계약 안에서 보았다. 그는 첫 번째 인간이 되심 혹은 영원한 말씀의 육화라고 묘사했는데 그분은 아직 문자 속에 감추어져 계셨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머리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태초에 아버지의 품 안에서 잉태되셨고, 성서 안에 부어졌으며 예수님 안에서 육신을 받아들이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가 오기 이전에는 닫혀있던 성서를 열어주신 것이다. 이와 연관 지어 하느님의 교육방법이 얼마나 참을성 있는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분은 인간의 아둔함과 이해부족을 받아들이신다. “그러므로 듣기만 할 수 있었던 말씀이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말씀의 육화에 대한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두 성서의 일치를 말하려는 것이다: 첫 번째 육화는 하느님 말씀인 성서가 태어남이요, 두 번째는 그 뜻과 목적인 인간이 되심이다(육화).
성서의 삼중 의미
유럽에서는 예수 승천 전 3일을 기원의 날로 지낸다. 한국 전례력에는 없는 전례행사이다. 이 날을 위한 강론에서 구에릭은 성서의 문자적 혹은 역사적 의미, 비유적 의미 그리고 윤리적 의미를 구분한다. 성서의 세 가지 의미의 이론은 오리게네스로부터 암브로시우스를 거쳐서 서방에 들어왔고 중세후기까지 성서학을 지배하였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 혹은 문학적 의미는 일어난 사건들, 예를 들면 유다역사나 성서의 언어들과 연관되어 있다. 비유적 혹은 영적 의미의 텍스트는 그리스도교적 혹은 신학적 의미와 연관이 있으며, 자주 ‘신비적’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신비와 관련 있는 의미라고 불렀다. 윤리적 의미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실천적인 면을 말해준다. 몇몇 해석자들은 이에 덧붙여 성서의 신비의 상징적 해석으로서 신비적 혹은 종말론적인 완성을 가리키는 것을 구분한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다른 것에로 넘어가는 것이 꾸며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윤리적 의미는 ‘내면화’의 필요성을 묘사하고 있다. 구에릭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구원의 신비가 무엇인지? 그것은 우리가 모방해야 할 하나의 모델이다.” 그리스도교적 성사, 신앙생활과 신비생활은 시토 사부들에게 있어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Ⅲ. 신비신학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을 위한 성화에로의 길이다. 시토 사부들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구에릭은 이미 그 동기를 대림절 강론에서 다루지만 끝에서 두 번째 강론 즉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그 절정을 이룬다. “복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여러분은!”라고 그는 형제들에게 외친다. 그 안에서 수도승적인 가난의 높은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비움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성화의 역사를 성취시킬 수 있게 하고, 성서가 의미하는 대로 수도승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기본전제조건이다. 산상수훈은 그에게 복음적 완덕에 도달하는 8가지 단계이다.
강론의 주제를 보면 서로 상당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강론의 고유성과 내적 획일성의 중심에 ‘육화의 신학’인 이중 의미의 육화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믿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가 자리 잡고 있다. 구에릭은 세 가지 범주 안에서 이것을 집중적으로 전개 시킨다 : 그리스도, 마리아, 교회.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에게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그의 영적 삶의 어머니이시다. 그녀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도와주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어머니이다. 성사의 집행과 전례는 인간 안에 쇄신과 성화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일어나도록 하여준다.
그리스도의 성사 - 우리 구원의 성사
성서의 신비적 의미는 말 그대로 ‘신비’와 관련된다. 그것은 태고적부터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심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다. 이 신비의 핵심은 ‘성사’ 즉 구원의 표징을 의미하며 구에릭에게 이것은 ‘구약의 아하즈에게 약속된 표징’ 즉 동정녀 몸에서 잉태되신 하느님 아들의 육화이다. 그는 자주 신앙의 신비가 비록 인간에게 베일에 싸인 형태로 밖에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sakramentum이 단지 그리스어의 mysterion이라는 개념을 번역해 놓은 것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sakramentum이 아니라는 점이다.